217화. 독고제 (1)
준혁의 정중한 어투에 새끼 청룡의 모습을 한 후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대는 혹 독고제란 이름을 아십니까?
사신들을 만나고 그들의 힘을 흡수하며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 이름.
구지대륙의 왕이자 사신들의 주인이었던 독고제.
“물론입니다. 사신들의 주인이 아닙니까?”
-그럼 그분이 어떤 존재였는지도 아십니까?
‘존재?’
준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청룡 후인은 생각을 정리하는 듯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분은 유일하게 남은 천혈족이셨습니다.
“혹, 거인족과 함께 거론되는 그 천혈족 말입니까?”
각종 정보가 담긴 옥간이나 호왕족의 고서를 통해, 준혁은 수도자의 탄생과 밀접하게 관련된 전설 속 그 두 종족을 접한 적이 있었다.
-그렇습니다. 그 천혈족이지요.
“그들에 대한 것을 고서를 통해 접하긴 했지만, 지식이 부족합니다.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어설픈 정보로 대충 넘어가고 싶지 않았던 준혁은 다시 한번 정중하게 요청했다.
그러자 청룡 후인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거인족과 천혈족, 그들 두 종족이 모든 수도 공법의 시초인 것은 아실 겁니다. 정확히는 그들이 벌인 전쟁의 여파로 수많은 능력이 세상에 퍼진 거지만 말입니다.
선계라 불리는 세상. 그곳에서 권능에 가까운 능력을 갖추고 태어난 종족은 단 둘, 거인족과 천혈족뿐이었다.
두 종족은 우위를 가릴 수 없을 만큼 서로 가진 힘이 비등했는데, 그건 필연적으로 두 종족의 전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로 비교우위에 설 수 없었기 때문인지, 두 종족의 전쟁이 길어질수록, 그들은 서로 경쟁하듯 약해져 갔다.
-그때 거인족의 수장이 자신들과 가장 비슷한 외형을 가진 인족들을 전쟁에 끌어들입니다. 자신들의 권능을 인족들이 익힐 수 있게 근원을 나눠주면서.
그 근원이 바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의 씨앗이 되는 영근이었다.
거인족이 자신들을 대신해 전쟁을 치를 인족 병사들을 키우기 시작하자, 천혈족도 맞불을 놓기에 이른다.
-그렇게 천혈족은 짐승에 불과했던 영수들에게 천혈족의 권능인 혈맥의 힘, 그 씨앗을 심어주게 된 겁니다.
소상히 알진 못했지만, 몇몇 정보들은 들은 바가 있었기에 준혁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후인은 쉬지 않고 설명을 이어갔다.
-전쟁은 더 장기화되었고, 전 대륙을 물들였으며, 점점 더 많은 종족들이 그들의 대체재가 되어 죽어 나갔습니다.
그 와중에 인족과 영수족을 포함한 수많은 종족들은 지능이 발달하고 공법을 익혔으며, 술법을 사용하며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느 누구도 우위에 서지 못했습니다. 결국…. 거인족들은 또 한 번 발 빠르게 움직여 그들이 살고 있던 계면과 맞닿은 곳들에도 손을 뻗게 되었지요.
그렇게 거인족이 하계에 손을 뻗자, 마음이 급해진 천혈족은 혈맥의 힘과 더불어 그들의 가장 강력한 권능이었던 마선기를 이용해 이지를 가진 전투 병기를 만들어내게 된다.
-거인족이 이끄는 인족과 하계의 수사들, 천혈족이 이끄는 영수족과 전투 병기…. 그렇게 전쟁은 끝도 없이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마선기를 이용해 만들어 낸 전투 병기라….’
굳이 설명을 추가하지 않아도, 그들이 식검을 비롯한 마선임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자연적으로 태어난 게 아닌…. 만들어진 존재들이었다는 말인가.’
현재 선계에서 마선들이 가진 위치를 생각한다면, 그들을 만들었다던 천혈족이 얼마나 대단한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정도였다.
-하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인족들에게 근원을 나누어준 거인족이나, 영수족에게 혈맥의 힘을 전해준 천혈족이나…. 세력은 커져갔지만 정작 그들 종족의 권능은 점차 약해져 갔습니다. 당연하게도 그 힘들은 무한히 생성되는 게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다 결국….
뒷말을 듣지 않아도 결말을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거인족과 천혈족이 없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아주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자신들이 힘을 나눠준 이들에게 반대로 잡아먹히고 말았군요.”
준혁이 핵심을 바로 짚자, 청룡 후인이 씁쓸한 얼굴로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거인족은 그들이 가축처럼 키우던 인족들에게 봉인 당해 가진 힘을 전부 척출당했고, 천혈족도 영수족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에게 가진 능력을 전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백호의 숨은 의도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독고제의 정체로 이어졌고, 그 이야기가 고대 전설처럼 전해지던 두 종족의 권능이 세상에 퍼진 것으로 귀결되자, 준혁은 청룡 후인이 뒤이어 할 얘기가 무엇인지 유추할 수 있었다.
“설마…. 백호가 네 사신의 힘을 모으려던 것이 독고제가 남긴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입니까?”
-눈치채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이 섬기던 주인이 죽자, 주인의 힘을 얻어 세상에 나서려고 한 것입니다.
거인족과 천혈족이 상잔하다가 자신들이 부리던 종족들에게 힘을 빼앗기고 사라진 지 가늠할 수도 없는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독고제란 강자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나타나 세상을 휘젓기 시작했다.
그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권능을 지니고 있었는데, 본인의 능력뿐 아니라 영수들을 성장시키고 다루는 데도 천부적인 능력을 보유한 자였다.
하지만 역사가 그러했듯 누구든 무한한 성장만을 할 수는 없는 법.
언젠가부터 독고제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천혈족의 후인이란 소문이 퍼지게 되고, 더는 세상에 남아있지 않을 거라 여겼던 천혈족의 권능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에 선계 전체가 들끓게 된다.
그 후로의 일들은 끊이지 않는 전쟁과 침공이었고, 결국 독고제의 죽음으로 사신들이 선계로부터 구지대륙을 봉인하면서 마무리되고 만다.
‘백호의 궁극적인 목표가 독고제의 권능이었다니. 허면 어째서 다른 이들은 이에 대해 언급이 없었단 말인가?’
백호나 현무라면 몰라도 주작이면 사실을 말해줬을 법도 했으나, 준혁은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혹, 독고제의 권능에 관한 건 백호만이 알던 것입니까?”
의문을 넘길 수 없던 준혁이 입을 열자, 청룡 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청룡께서만 아시던 겁니다. 독고제, 그분께서 생을 마감하실 때 청룡께 유언을 남기셨으니까요. 그 유언을 전해 들은 백호가 청룡 그분을 기습했고 말입니다.
“그 유언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까?”
준혁의 물음에 청룡 후인은 기억에만 남아있던 독고제와 청룡이 떠오르는지 시선을 멀리 두었다가 혀를 차고는 말을 이었다.
-그분께서 청룡께 말씀하시길….
살짝 호흡을 멈춘 후인이 준혁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훗날 너희 넷의 혈맥을 한 몸에 담는 이가 나타나면 내게 인도하거라. 그를 위해 내 권능을 이곳에 묻어두겠다’라고 하셨다 들었습니다.
‘아! 그래서 백호가….’
그제야 준혁은 백호의 행동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과 달리 순수하게 강해지고자 하는 열정이 가득한 이라면 전설처럼 내려오는 천혈족의 권능을 향한 욕심을 떨쳐낼 수가 없었을 터.
‘그는 주인의 힘을 물려받아 새로운 절대자가 되고 싶어 한 것이구나.’
주인이 죽었으니, 주인의 힘이 다른 이에게 가기 전에 차지하고 싶어졌고, 그것 때문에 평생을 함께해온 친우이자 동료의 등에 칼을 꽂아 넣게 되었던 게 분명했다.
그리고 준혁의 그런 예측은 정확했다.
청룡에게 독고제의 유언을 들은 백호는 그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청룡을 기습하고, 그걸 계기로 현무를 협박하고 주작을 공격하게 만들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독고제에 대한 비밀은 오직 백호만이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만 백호에게 그 사실을 말하기 전, 주인의 죽음을 계기로 수도계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청룡이 자신의 후인에게 힘을 넘겨주며 독고제에 대한 비밀까지 알려주었던 걸 몰랐을 뿐.
***
일련의 대화가 끝나자 청룡 후인은 ‘이제 어쩔 거야?’라는 눈빛으로 준혁을 주시했다.
그 모습에 준혁은 그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독고제란 천혈족 후인의 권능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더 궁금한 건 바로 마선기로 만든 전투 병기에 대한 정보.
독고제가 잠든 곳을 찾아가면 왠지 그것에 대한 것들을 자세히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모든 걸 알려주셨으니, 그분이 잠든 곳도 가르쳐 주시겠지요?”
-물론입니다. 청룡께선 누구보다 진심으로 그분을 모셔왔었으니 그분이 남긴 유언을 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음에 이어질 말에 준혁이 대답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이자, 새끼 청룡의 모습을 하고 있던 푸른 기운이 절반으로 나뉘더니 그중 일부가 준혁의 이마로 스며들었다.
-그곳으로 찾아가시면 될 겁니다.
청룡 후인이 전해준 정보는 주작이 전해준 천제단의 위치처럼 주변의 모습이 이미지화되어 기록된 기억.
특색 없이 넓은 평원에 언덕이 조금씩 보이는 모습에 준혁은 침음을 흘려야 했다.
“꼭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이걸 찾기 위해선 또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구나.’
***
자신의 할 일을 끝마쳤다는 듯 후련한 표정의 청룡 후인이 준혁의 허리춤으로 다가오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사, 익숙한 향이 느껴지는데…. 이 영수대 안엔 누가 있는 것입니까?
그의 질문에 준혁은 잊고 있던 두 마리 도마뱀을 꺼냈다. 원래는 흡수진을 간소화해 발동한 후, 청룡 후인의 힘을 흡수할 때 기운을 나눠 가질 목적으로 데려왔지만, 이젠 딱히 쓰임새가 없어져 버린 영수들.
“오래전 어느 유적에서 얻은 알에서 부화한 아이들입니다. 혹?”
청룡의 피를 이은 아이들이 아닌가 해서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지만, 청룡 후인은 피식 웃더니 도마뱀들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우리 종족은 아닙니다. 용족도 한두 종족이 아니니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용각족의 모습에 가깝군요.
용천무가 남긴 기운을 흡수한 후 영면에 든 것처럼 잠만 자는 도마뱀들의 상태가 궁금했던 준혁은 마침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지자 질문을 던졌다.
“이 모습으로 잠든 지 수백 년이 넘었습니다.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대답은 즉각 나왔다.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기운을 받아들여 그것을 효율적으로 소화하기 위해 이런 모습이 된 것입니다.
겉모습은 도마뱀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실상은 농축된 영기에 둘러싸인 누에고치나 다름없다는 말.
-그대가 무슨 방법을 사용한 건지는 모르나. 이 아이들은 아마도 원영을 가진 채 잠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예상대로구나.’
그때, 준혁이 도마뱀들이 익힐 수 있는 술법이나 공법에 대해 질문을 하려는데, 청룡 후인이 선수를 쳤다.
-그대가 허락해준다면, 이 아이들에게 내 남은 것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청룡의 정기를 비롯한 대부분의 힘을 준혁이 흡수한 상태, 원래대로라면 나머지 기운도 그래야만 했지만, 청룡 후인은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준혁으로서는 딱히 거부할 필요가 없었기에 쉽게 허락했다.
“물론입니다. 원하시는 대로 하시지요.”
자신의 대를 이를 존재를 찾았다는 기쁨 때문인지 청룡 후인은 한껏 기쁜 표정을 짓다가 문득 시선을 외부로 옮겨 준혁이 만든 구체의 바깥을 가리켰다.
-그럼 이제 우리 만남을 마무리해야겠습니다. 그전에 이것들은 언제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준혁도 청룡 후인의 손짓에 따라 시선을 옮겼다.
자신이 깨달음을 얻어 오행신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무영기.
그리고 그 무영기가 감싼 구체 밖에 남색을 넘어 검은색을 띨 정도로 압축되어서 모여 있는 영기.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방해받지 않게 무의식중에 자신을 세상과 차단해 버렸기에, 지금 무영기로 만들어진 구체 밖에선 준혁에게 몰려든 영기들이 무서울 정도로 압축된 상태였다.
그리고 그 말인즉.
무영기를 제거하는 순간, 영기가 폭풍처럼 흡수되기 시작할 거란 말과 같았다.
어느새 준혁의 입가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시선은 청룡 후인을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수행이 올라가는 걸 강제로 막고 있었습니다만 이제 더는 미룰 수 없겠습니다.”
자세히 보니 무영기로 이루어진 막에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