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청룡의 후인 (2)
엄청난 기세로 밀려나던 바닷물은 준혁을 중심으로 거대한 원구 형태의 텅 빈 공간을 만들어 내더니 멈춰 섰다.
그와 동시에 그 공간을 경계로 푸른빛을 띠던 바닷물이 점차 진한 남색으로 변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기이한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건 마치, 바닷물이 압축하고 또 압축해 영기구름처럼 변한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갑작스레 준혁을 중심으로 엄청난 양의 영기들이 밀려들자, 아마르곤은 당황하면서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어떤 연유로, 무슨 깨달음을 얻고 있는지는 모르나 지금 준혁은 무방비나 다름없는 상태.
다 죽어가는 청룡의 후인 하나를 제외하곤 위험할 요소가 없긴 했으나, 그렇다고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그 순간, 아마르곤의 손끝에서 나무줄기가 나타나 땅을 파고들었고, 땅속으로 파고든 나무줄기가 준혁에게로 이동해 그를 둘러싸기 위해 움직였다.
“윽!”
하지만 아마르곤의 배려는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준혁을 보호하기 위해 발출한 나무줄기들이 바닷물이 밀려나 텅 빈 공간에 근접한 순간, 기를 강탈당하며 시들어 버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 모습에 흥미로운 감정을 담은 눈으로 준혁을 보고 있던 청룡의 후인이 입을 열었다.
“지금 저자는 돈오점수에 진입하고 있으니, 저자를 도우려는 행동도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후인의 말에 급하게 기운을 모조리 회수한 아마르곤은 그와 준혁 사이로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돈오점수가 무엇입니까?”
청룡 후인의 시선이 아마르곤을 쓰윽 훑더니 준혁에게 고정되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깨달음을 얻은 후, 번뇌를 지워가는 것을 일컫습니다.”
“번뇌를 지워간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살아오며 겪었던 수많은 경험, 희로애락이 가득한 삶들의 기억에서 감정들을 지워나가는 것입니다.”
얼핏 들으면 대단한 경지로 진입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아마르곤은 후인의 말에서 걱정부터 앞섰다.
“감정을 지워간다니…. 설마 감정을 느끼지 않게 된단 말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든 준혁을 멈춰 세워야겠다고 아마르곤이 생각을 굳히려고 할 때.
“그것과는 다릅니다. 점수의 과정이 끝난다면 감정에 휘둘리지 않게 되는 것뿐이지요.”
“아!”
“그대의 걱정이 느껴집니다. 저자가 인간성을 상실할까 염려되는 것입니까?”
후인의 목소리에 아마르곤은 고개를 끄덕이며 준혁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텅 빈 구체에 둘러싸인 모습으로 변한 준혁의 몸에서 하얀 구슬, 붉은 구슬, 그리고 남색 구슬이 나와 그를 중심으로 세차게 회전하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후엔 검은 구슬과 금빛 구슬까지 나타나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며 준혁을 휘감았다.
“대단하군요. 돈오에 들며 동시에 오행신기를 만들어 내다니….”
또 한 번, 뜻 모를 소리가 나오자 아마르곤은 재차 질문하기 위해 시선을 옮겼다.
그런 그의 의문을 이해한다는 듯 청룡 후인은 아마르곤이 말을 꺼내기 전에 자신이 아는 바를 설명했다.
“오행신기(五行神氣)란 몸 안에 떠도는 수많은 기운 중 자신의 신체에 가장 적합한 다섯 가지 기운을 하나로 다스리는 것을 뜻합니다. 저자를 보아하니…. 현무, 백호, 주작, 세 혈맥의 힘과 거기에 더해 마기까지…. 를 다스리고 있군요.”
“방금 다섯 가지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기 보이는 금빛 구슬의 정체는 저도 알 수가 없습니다. 마치…. 그분의 기운과 흡사, 아!”
“뭔가 알아차리신 겁니까?”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갑작스레 말문을 닫아버리는 후인의 모습에 아마르곤이 재차 질문을 던지려는데, 후인의 거체가 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부르르-
“무슨 짓입니까? 설마 최 수사를 방해하려 하는 것이라면!”
동시에 아마르곤의 몸에서 꽃잎이 피어나 당장이라도 청룡의 후인을 공격하려는 듯 기세를 내뿜었다.
하지만 아마르곤이 무언가 해보기도 전, 그를 감싸고 있던 바닷물이 견디기 힘들 정도의 압력을 동반하며 그를 짓눌렀다.
그 순간, 청룡 후인의 몸이 먼지처럼 부서지며 준혁을 향해 파도치듯 움직였다.
“걱정 마십시오. 저자를 방해하려는 게 아니라 도우려는 것이니.”
“그게 무슨!”
“오행신기란 다섯 기운이 상호작용하며 수도자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끄는 것이 분명하지만, 오행신기를 다루는 자는 그 기운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 오행의 자리에 마기 따위가 자리하게 둘 순 없는 법이지요.”
“멈추십시오! 당장 멈추지 않…!”
어떻게든 후인을 막아보려던 아마르곤은 가해지던 압력이 한층 더 강해지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아마르곤을 안정시키겠다는 듯 한줄기 따뜻한 기운이 그를 휘감았고,
“백호, 그자를 처리해준 것에 대한 보답, 아니, 약속을 지키려는 것이니 안심하십시오”
잠시 후, 청룡의 후인이 똬리를 틀고 있던 자리엔 바다색과 구분이 가지 않는 푸른 기운만이 맴돌았고, 그의 거대한 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동시에 준혁 주위를 회전하고 있던 구슬이 다섯 개에서 여섯 개로 늘어나 있었다.
***
수심을 확인해본 이가 없을 정도로 깊고 깊은 바닷속.
버뮤다 삼각지 중심에서 준혁은 우두커니 선 채 주위로 휘몰아치는 기운을 한데 섞었다가 다시 분해하길 반복하고 있었다.
어느새 준혁의 주위엔 총 일곱 개의 구슬이 떠돌고 있었는데, 청, 백, 홍, 남, 흑색을 지닌 다섯 구슬이 행성 주위를 맴도는 위성처럼 그를 맴돌았고, 그 위아래로 지지대 역할을 하듯 금빛 구슬 두 개가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준혁은 증폭되던 기운이 어느 정도 자리 잡자, 구슬을 전부 회수해 원영이 삼키게 했다.
그리고는 깊은 숨을 내쉬어 끝없을 것 같았던 수련 과정의 마무리를 알렸다.
“저를 도와주신 겁니까?”
오행신기를 거두긴 했지만, 아직 무영기로 만들어진 구체 안에 있었기에 아마르곤은 들을 수 없었던 준혁의 목소리.
그 소리에 준혁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어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기를 대신해 청룡께서 남기신 정기로 오행신기를 완성하려 했거늘. 크게 도움을 드리진 못한 거 같습니다.
준혁은 자신이 흡수한 기운 중 푸른빛을 띠던 구슬을 떠올리다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선배님의 도움으로 이 미지의 힘을 쉽게 안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오행신기를 완성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오행신기라…. 제가 깨달음을 통해 얻은 이것을 그리 부르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삼경을 지나 삼선에 발을 들일 때 완성할 수 있다 했거늘…. 아마 수사는 네 사신의 힘을 가졌기에 이토록 일찍 오행을 다스릴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헌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무엇이든 물어보시지요. 선배님께 얻은 것이 적지 않은데. 어찌 말을 아끼겠습니까?”
준혁이 기운을 완전히 갈무리하자, 그의 미간에서 푸른 기운이 흘러나오더니 주먹만 한 새끼 청룡의 모습으로 변했다.
새끼 청룡은 준혁의 허락이 떨어지자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수사는 어째서 점수를 멈추신 겁니까?
돈오를 겪은 후 번뇌를 지워가는 점수 과정.
준혁은 그 과정이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 오행신기가 만들어지자, 과감히 점수 과정을 생략해 버렸다.
청룡 후인의 관점에서 그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행신기란 수행이 올라가면 언제든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라면, 돈오의 과정은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한, 말 그대로 천운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만약 준혁이 돈오점수를 온전하게 끝마쳤다면, 비록 수백, 수천 년은 넘는 시간이 걸릴지는 몰라도 단번에 지금의 수행을 뛰어넘어 화신기는 물론 삼경에 발을 디딜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 삼경을 넘어 삼선경에 가까이 다가간 사신들의 힘을 전부 가지고 있으니, 천운이 닿는다면 삼경마저도 손쉽게 지나칠 수도 있었을지 몰랐다.
그리고 그런 행운은 지구와 계면이 닿아있는 선계뿐 아니라 무한한 우주의 수많은 선계에서도 극소수,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극소수만이 얻을 수 있는 행운이었다.
그렇기에 청룡 후인은 준혁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입니까?
재차 들려오는 후인의 질문에 준혁은 전혀 아쉽지 않은 듯 살짝 입가를 당겨 미소를 지었다.
돈오점수 과정을 진행하던 중엔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경로로 발을 내딛는 행위인지 몰랐지만, 그 끝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분명해지는 것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삼선에 이르러 진선이 되든 규선이 되든…. 혹은 신선경에 이른다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무슨 의미라니요? 모든 이들이 바라고 바라는 바가 아닙니까?
준혁이 미약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나를 잃고 그 자리에 오른다면 그게 정녕 나인 것입니까? 아니면 우주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까?”
대답이 이어지자, 새끼 청룡의 모습을 한 푸른 기운이 맹렬하게 요동쳤다.
-아!!
점수 과정을 겪으며 준혁은 자신의 감정이 점점 희석되어 가는 걸 느꼈다. 그와 동시에 사신들이 왜 삼선이 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는지도 명확하게 깨달았다.
누군가는 욕심을, 누군가는 사랑을, 또 누군가는 권력을.
모두가 끝끝내 놓지 못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걸 느꼈기에 준혁은 본능적으로 점수 과정을 멈춰버렸다.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고 해도, 아무 감정 없이 물인 듯 바람인 듯 자연의 일부가 된 것처럼 살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자신에겐 사랑하는 여동생도, 제자도 있었고, 진심을 다하는 수하들과 동료들.
그리고 종속으로 이어져 감정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산들바람과 아마르곤, 청호도 있었으니까.
그들에 대한 감정이 돈오로 빠져들게 한 원인이 되었다면, 그 깨달음을 멈춘 것도 그들에 대한 마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삼선에 이른다고 전부 감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랬다면 자신이 알게 된 몇몇 사건들은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았어야 할 일들이어야 했다.
더 강력한 법기를 얻기 위해서나, 혈맥의 힘을 얻기 위한 전쟁들이 애초에 일어나서도 안 되었던 것.
아마 깨달음을 통하는 방법이 아니어도 수행을 점진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면 감정의 마모 없이 삼선에 이르는 방법이 분명 존재할 터였다.
물론 깨달음을 통해 초월적인 존재가 되는 것과 인간의 오욕칠정을 전부 가진 채 신선이 되는 것.
둘 중 무엇이 바른 방법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원하시는 대답이 되었습니까?”
준혁이 편안한 얼굴로 되묻자, 요동치던 푸른 기운이 다시 안정되며 선명한 새끼 청룡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수사는 이미 깨달음을 얻으셨군요…. 하면 이제 그분을 만나러 가시는 겁니까?
“그분이라니요? 선계에 가기 위한 조건 중 사신을 제외한 또 무언가가 필요하단 말입니까?”
청룡의 힘까지 온전하게 흡수해 구슬로 만든 준혁은 울릉도로 돌아가 그 힘을 다스릴 청룡결을 만들 생각이었다.
그 후엔 천제단으로 이동해 선계로 가는 문만 열면 기나긴 행보의 마침표를 찍게 되는 것.
물론 선계에서 여서령의 흔적을 찾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 일이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우선은 하나의 벽을 넘는 건 분명했다.
그런 상황에서 청룡의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발언이었다.
-수사께선 그저 선계로 가기 위해 사신의 힘을 모은 것이란 말입니까?
준혁보다 더 당황한 듯한 청룡의 후인.
“그럼 사신의 힘을 모은다는 것에 다른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까?”
-허어…. 정녕 백호 그자가 무슨 이유로 다른 분들을 해한 후 힘을 모으려고 한 건지 모른단 말입니까?
후인의 질문에 준혁은 말문이 막혔다.
‘설마…. 구지대륙의 새로운 주인이 되기 위해?’
한번 생각해 본 적은 있었지만, 선계에서 떨어져 나왔고, 심지어 갈가리 찢긴 대륙에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싶었다.
‘내가 모르는 진실이 있단 말인가?’
준혁은 고개를 젓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