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현무 (2)
현무를 처리하는 건 너무나 쉽게 끝나버렸다.
봉인 바깥에서 흡수진을 발동하며 준혁의 세 전영이 압박하자, 흔한 말로 한 끼 식사 거리도 되지 않는다 표현해야 할 정도였다.
“설마…. 백호가 시킨 것이냐? 내 분명…. 그의 뜻을 따르겠다고 약속했거늘.”
현무는 소멸되어 가면서도 준혁의 말을 믿지 않았다.
자신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는 건 오직 백호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잠시 후, 그가 먼지처럼 흩어져 흡수되자 준혁은 몸 안에 들어선 기운을 구슬처럼 뭉쳐 검은 사슬로 감싸버렸다.
“흐읍.”
눈을 감고 내면에 집중하자 단(丹) 안에서 뒹굴거리고 있던 원영이 바른 자세로 고쳐 앉았고, 원영의 주위를 맴돌던 하얀 구슬, 붉은 구슬 옆으로 검은색이 섞인 남색 구슬이 나타났다.
원영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남색 구슬을 잡아 입 안으로 가져가더니, 한참 동안 우물우물 씹다가 뱉었다.
그리고는 좌정한 자세로 합장을 하자, 세 구슬 위로 검은 사슬이 재차 형성되며 기운이 움직이지 못하게 꽁꽁 묶어버렸다.
두 가지 기운의 충돌 여파를 경험한 후, 기운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크게 깨달은 준혁은 현무의 기운을 무식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원영을 시켜 아주 천천히 흡수할 의도였다.
“처음엔 조금 더디겠지만, 또다시 10년을 보내는 것보단 낫겠지.”
현무의 봉인지에 오기 전 잠시 들렀던 울릉도에서 마주친 동생의 잔소리가 떠올라 준혁은 의식하지 못한 사이 피식 웃고 말았다.
잠시 후, 현무의 구슬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으며 극히 미세한 기운만이 흘러나와 원영에게 흡수되는 걸 느끼며 준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이 정도면 충부….”
그때였다.
스르륵- 팟-
원영 곁을 맴돌던 붉은 구슬에서 의식의 잔재가 흘러나와 여인의 환영으로 변하더니, 준혁을 향해 깊게 허릴 숙였다.
그리고는 막대한 정보를 건네준 후, 한 줌 영기로 변해 흩어져버렸다.
“이것이 그녀가 말한 약속이구나.”
준혁이 필요로 했던 선계로 가는 방법과 청룡에 관한 정보.
피식-
잠시 후, 주작이 건넨 정보를 확인한 준혁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속았군.”
그녀가 말한 선계로 가는 방법.
그건 백호가 아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백호가 사신의 힘으로 봉인 결계를 약화하고 천제단을 만들어 선계로 갈 수 있다고 했던 것과 달리, 주작이 알고 있는 정보엔 이미 만들어진 천제단의 정보가 포함돼 있다는 것만 다를 뿐이었다.
준혁이 그녀의 앙큼한 행동에 웃고 만 이유는 결국 선계로 가기 위해선 네 사신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 때문이었다.
백호가 말했던 것과 달리 네 사신의 기운으로 도움만 받으면 되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백호의 말에 틀린 부분은 없었다.
그녀는 준혁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기 위해 백호가 거짓을 말한 것처럼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그래, 악의적인 의도가 아니었으니…. 내 괘념치 않습니다. 다만 그댄 왜 본인을 소멸시켜가며 두 사신에게 복수하려고 했습니까?”
대답이 들려 올 리 없었지만, 준혁은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했다.
백호에게 당해 약화된 청룡의 후인만 남아있으니, 이제 그의 힘을 거둬 선계로 가는 길을 여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던 준혁은 이 일련의 일들에 무언가 의도가 숨어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지금까진 자신에게 이득이 되었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한 걸음마다 조심히 걸을 수밖에.”
***
의식공간에서 벗어나자 봉인지 중심에 기절해 있는 아마르곤과 청명이 눈에 띄었다.
그를 비롯해 전원이 기절한 상태였고, 유일하게 아르나프만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오셨군요…. 그럼 저도….”
쿵-
아르나프는 아마르곤 곁에서 힘겹게 그를 지키고 있다가, 준혁이 움직이자 곧바로 자리에 쓰러졌다.
“다들 고생이 많았다.”
아마 아마르곤에 비해 아르나프의 수행과 기를 운용하는 능력이 부족해 이런 사태가 일어난 게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준혁은 아르나프가 대견스러웠다.
잠시 후, 웃음 짓던 준혁이 손을 지휘하듯 휘젓자, 아마르곤 이하 모든 수사가 허공을 격해 날아오더니, 준혁이 꺼낸 비행법기 위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래도 잠은 집에 가서 자야지.”
***
청룡의 힘을 흡수하는 일을 남겨둔 준혁은 바로 움직이지 않고, 울릉도에서 칩거에 들어갔다.
당장 수하들이 지쳐있기도 했고, 주작이 건네준 정보들을 정리할 필요성도 느낀 것.
거기에 더해 그녀가 전해준 정보 중 천제단의 위치가 특정되지 않았다는 것이 준혁을 멈추게 만들었다.
구지대륙 어딘가에 있지만, 분리된 구지대륙이 아닌, 온전할 때의 기억을 바탕으로 이미지화되어 준혁에게 전해졌기에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준혁은 청명에게 기억을 넘겨주고 그곳을 찾으라 한 뒤,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들을 처리하고, 휴식을 취하며 시간을 보냈다.
지유목을 벌목해 화목단을 만들었고, 천균을 포함한 지목족의 뿌리들을 돌봤다.
그리고는 틈틈이 원영기에 오른 수사들을 지도해주고, 아마르곤과 아르나프를 위해 혈맥의 힘으로 수행 속도를 빠르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렇게 하루가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일 년이 되길 여러 차례 지난 어느 날.
아무도 찾질 못하던 천제단의 위치를 도율이 하루 만에 찾아내 버렸다.
정확히는 청명에게서 천제단의 위치가 기록된 옥간을 받아 확인한 순간 즉시.
“도율 그대가 천제단의 위칠 찾았다고?”
준혁에게 불려온 도율은 바닥에 부복한 채 고갤 바짝 숙였다.
“그렇습니다. 제가 그 호랑이 놈들에게 잡히기 전 평생을 살았던 곳인데, 어찌 모르겠습니까? 제가 본 옥간 속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곳은 태백산을 가리키는 것일 겁니다.”
태백산이란 말에 준혁 역시 떠오르는 내용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인간의 안녕을 기원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장소가 태백산맥 어딘가에 있었다는 얘기.
‘그곳이 선계로 통하는 문이었다니.’
준혁뿐 아니라 수많은, 아니 대다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장소.
하지만 그중 누구도 그 장소와 선계로 이어진 천제단을 연관 지어 생각하지 못했다.
준혁은 물론이고 청명의 명령으로 천제단을 찾아 떠난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제 기억이 맞다면 분명합니다. 혹시 그곳을 확인할 방법을 알려주신다면 당장 확인하러 떠나겠습니다.”
“아니다. 직접 확인해보지.”
고개를 살짝 든 도율이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아이 같은 표정을 짓자 준혁은 공간대에서 2품 화목단 한 병을 꺼내 그에게 날려 보냈다.
“감사합니다! 도주!”
바닥에 부복한 채 기쁨에 젖어있는 도율을 지나친 준혁은 바로 거처를 나선 후 하늘을 갈랐다.
잠시 후, 태백산이 내려다보이는 상공에서 유형화된 기감을 쏘아 보낸 준혁은 도율의 말대로 태백산의 민간인들이 제사를 지내던 천제단이 주작이 전해준 정보와 일치함을 확인했다.
“이렇게 가까이 두고도 몰랐다니.”
준혁은 기감으로 재차 확인 절차를 거친 후, 백호, 현무, 주작의 기운을 슬쩍 흘려보냈다.
쿠르르릉-
그러자 천제단이 미동하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잠잠해졌다.
그런 반응에 준혁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이제 청룡을 찾아가야 할 때가 되었구나.”
사신의 기운에 반응하는 제단.
비록 네 가지 기운이 모이지 않아 작동하진 않았지만, 그곳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파동에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살짝 떨고 있었다.
***
목족의 여왕과 거래를 진행한 후, 수사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비경 중 하나가 된 버뮤다 삼각비경.
예전과 다르게 비경의 끝자락에 위치한 출구마저 개방되어 더욱 많은 수사들이 찾는 명소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삼각비경의 경계선에서 조금 떨어진 곳엔 비행 법기 한 척이 유유히 떠 있었고, 그 위에는 두 사내가 나란히 서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를 눈에 담고 있었다.
“정말입니까? 이곳에 청룡이 있다는 게.”
두 사내 중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사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묻자, 반듯하게 생긴 사내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렇습니다. 다만 비경 내부가 아니라 바깥인 게 문제지요.”
대화를 나누는 두 사내.
그들은 청룡을 만나기 위해 한달음에 달려온 준혁과 아마르곤이었다.
주작과 백호의 정보에 의하면 이곳 봉인지에 갇힌 청룡의 후인은 다른 이들과 달랐다.
본체와 정신체가 따로 분리된 상태가 아니었고, 특수한 봉인이 가해진 상태였다.
그랬기에 준혁은 아마르곤만을 대동한 채 이곳을 찾은 것이었다.
“가능하실 것 같습니까?”
아마르곤의 걱정 섞인 목소리에 준혁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시도해 보면 알겠지요. 실패해도 비경으로 이동되는 것뿐 아니겠습니까?”
주작이 말한 청룡의 후인이 머무는 곳.
그곳은 바로 버뮤다 삼각비경이 자리한 곳과 같았다.
하지만 위치만 같을 뿐, 비경 내부는 아니었다.
즉, 구지대륙이 갈라지고 공간의 틈이 생겨나며 비경과 신비경이 무작위로 겹쳐지기 전, 청룡의 후인은 버뮤다 삼각지라 불리는 곳의 중심 부근에 봉인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말인즉, 청룡의 후인을 만나기 위해선, 무작위로 전송돼버리는 버뮤다 삼각비경의 경계선을 지나쳐야 한다는 것과 같았다.
얼핏 보면 결계를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는 적마를 사용하는 준혁에겐 큰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삼각비경의 경계가 말 그대로 경계인지 아니면 하나의 거대한 반구 형태의 전송진인지가 핵심이었다.
만약 단면으로 만들어진 경계라면 무시하고 지나가는 것만으로 무작위 전송을 막을 수가 있지만, 반구 형태의 전송진이라면 적마의 힘으로도 버뮤다 삼각지의 중심에 도달하기는 힘든 일이었으니까.
“바로 들어가실 겁니까?”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는 준비가 끝났으니 수사만 괜찮으시다면 바로 가시지요.”
말을 마친 준혁은 기감을 유형화해 삼각비경의 경계가 눈에 보이게 만들었다.
그 모습에 아마르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퍼엉 터져 원영과 꽃잎 뭉치로 변했다.
잠시 후 꽃잎 뭉치는 준혁의 피부 위로 달라붙었고, 원영은 준혁의 입속으로 들어가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종속의 인을 맺은 아마르곤이 영수대로 들어가면 간단한 일이었지만, 이번에도 영수대엔 이미 주인이 있었다.
일련의 행동에 오래전 아마르곤과 함께 봉인지를 탐색하던 때를 떠올린 준혁은 피식 웃고는 적마도와 식검을 불러내며 비행법기를 작게 만들어 공간대에 수납했다.
‘삼각지를 두르고 있는 결계가 종잇장처럼 얇진 않을 것이다. 만약 그랬으면 우연히라도 비경이 아닌 삼각지 안으로 들어가 본 이가 있었을 터.’
적마도와 식검이 공명해 붉은 말로 변하자, 준혁은 무영기를 제거해 연형기 수행을 드러내며 그 위에 올라탔다.
쿠르릉- 번쩍-
그리고는 영기가 뭉치며 계면의 압박이 만들어지려는 찰나, 흐릿하게 변하며 삼각비경을 감싼 결계를 뛰어넘었다.
‘우선은 내가 갈 수 있는 만큼 최대한 깊게 들어간다.’
그 순간, 흐릿하게 변한 적마가 엄청난 양의 영기를 주입받더니 핏빛 붉은 기운을 줄기줄기 흘려댔고,
수아아앙-
공간이 통째로 찢어지는 소리가 나며 준혁을 싣고 사라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