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한 걸음 (3)
‘주작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백호를 도발해 대화를 이어가자, 대부분의 이야기가 그녀의 말과 일치했다.
잔혼결이나 선계로 가는 방법 등 몇 가지만이 달랐고, 네 사람의 관계와 과거의 일들은 거의 틀린 게 없었다.
게다가 주작이 모르는 사실까지 알 수 있었다.
현무와 백호는 한 배를 타긴 했으나, 동등한 관계가 아닌, 현무가 백호 아래로 숙이고 들어간 것이란 걸.
“청룡을 처리했다니요?! 그럼 선배님께서 제게 요구한 건 무엇이란 말입니까? 애초에 불가능하지 않았습니까?”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차 묻자, 백호는 친절히 알려주었다.
“그놈은 처리했지만 대신 그놈의 후인이 대신 봉인되어 있지. 그러니 내 말에 거짓은 없다.”
그 후로도 백호는 거리낌 없이 과거를 훌훌 뱉어냈다. 봉인된 청룡의 후인이 이미 백호에게 무의식중에 조종당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그리고 그 이율 준혁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곳에서 내 의식을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겠지.’
그리고 준혁의 예상이 맞다는 듯, 한참 동안 얘길 이어가던 백호가 다시 기세를 일으키며 기지개를 켜듯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럼 궁금한 것이 전부 풀렸느냐?”
“한 가지 더. 선배님께선 왜 이토록 귀찮게 일을 꾸미신 겁니까? 처음부터 모두 원하시는 바대로 이룰 수 있으셨을 텐데요.”
이미 청룡을 죽이고 그의 후인을 조정했으며, 현무도 굴복시켰다. 거기에 더해 주작까지 반쯤 무력화시켰으니 처음부터 봉인될 필요가 있었을까?
“그분이 귀천하시고, 살아남기 위해선 대륙 전체를 봉인해 분리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준혁이 원한 답변은 그것이 아닌, 그 이후.
“봉인을 펼친 주체는 결국 선배님인데, 대륙이 분리된 후에 왜 스스로 자유를 되찾지 못하신 겁니까?”
준혁의 질문에 백호가 쓰게 웃었다.
“그래 그 말이 맞다. 다만 내가 그놈들을 너무 얕잡아 보았었지.”
“??”
“대륙을 봉인한다는 게 쉬운 줄 아느냐? 결국 우리 네 사람의 기운이 균형을 이뤄야 했고, 그 와중에 주작과 청룡 그놈의 후인 놈이 수작을 부린 것이지.”
‘아! 그래서 나머지 사신의 기운을 모으라 한 것이구나! 어차피 결계의 중추는 자신이니 나머지 힘을 보조 삼아 스스로 봉인을 해결하기 위해.’
백호 스스로 봉인에서 풀려나기 위해선, 대륙을 보호하는 봉인 결계의 균형을 조종할 필요가 있었고, 그걸 위해선 나머지 사신들의 기운이 필요했던 것.
그제야 준혁은 백호의 의도를 명백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 이제 네놈의 유언이나 말해 보거라, 내 그것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뭐지?”
그때, 전투태세를 갖추며 으르렁거리던 백호의 쌍심지가 양 끝으로 치솟았다.
“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쿠르릉-
바깥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지, 내부가 영향을 받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백호의 질문에 이제 알아야 할 내용은 대부분 얻어냈다고 생각한 준혁은 전과 같은 태도로 돌아갔다.
“이제 눈치채셨습니까? 생각보다 둔하시군요.”
“설마? 분리된 내 본체를 소환해 내 힘을 얻어가려는 것이더냐?”
“맞습니다. 제 수하들이 수고를 하고 있지요.”
“놈!!”
그 순간, 백호의 몸이 바람처럼 사라지더니, 돌풍과 함께 준혁 앞에 나타났다.
나타남과 동시에 양발을 휘둘렀고, 그러자 준혁이 서 있던 공간 자체가 뜯겨나가듯 터져나갔다.
파앙-
“감히!”
하지만 준혁 역시 대비를 하고 있었기에, 쉽게 거리를 내주지 않았고, 공간이 터져나갔을 땐 이미 멀리 회피한 후였다.
“내 의식이 분리되어있다고는 하나, 그것이 가능이나 할 것 같으냐! ”
“물론입니다. 결계를 유지해야 하니 어느 정도 힘을 남겨두긴 해야겠지만. 잘 가져다 쓰겠습니다.”
준혁이 또다시 비아냥대듯 말하자, 백호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네놈이 살아있어야 가능한 일이겠지!!”
잠시 후 거대한 몸체를 더욱 키운 백호가 세상을 빨아들일 듯 숨을 흡입했다.
스으으읍-
그러자 한없이 넓던 붉은 공간이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마치 준혁이 도망칠 곳을 없애버리겠다는 듯이.
한편, 봉인지 바깥에서 상황을 진두지휘하고 있던 아마르곤은 그 어느 때보다 지쳐가고 있었다.
주작의 봉인지에서 진법을 사용했을 때와는 달리 무상번으로 증폭된 흡수진이 가져가는 영력이 상상을 불허할 정도.
이미 몇몇 원영기 호왕족은 기절한 지 오래였고, 나머지들도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같은 사신인데, 어찌 이리 다르단 말인가!”
그 이윤 주작과 백호가 봉인될 시기의 상태가 많이 달랐기 때문이지만, 자세한 이유를 알 수 없던 아마르곤은 당장이라도 진이 붕괴할 것 같은 느낌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파아앙-
그때, 진의 중심축인 백호의 봉인석 근처에서 엄청난 영력이 터져 나오며 진법을 안정시키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아마르곤이 주위를 확인하자, 그곳엔 어느새 준혁이 나타나 무언가를 떠받들고 서 있었다.
정확히는 준혁이 아닌 다른 무언가.
“최수사의 분신인가?”
하지만 연형기에 오른 준혁이라 할지라도 겨우 분신으로 이 정도의 파급력을 가진 영력을 움직일 수는 없는 법.
아마르곤은 기감으로 엄청난 영력을 발산하는 게 무엇인지 살폈고, 그 존재를 확인하자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아! 저것은 그때 그 수사의 원영이구나!”
준혁의 분신이 두 손으로 떠받든 채, 엄청난 영력을 발산하는 그것.
그건 바로 호왕족 연형기 수사였던 매혹하는구름의 원영이었다.
그 원영이 비누가 녹듯 녹아들며 상상도 할 수 없는 영력을 진법에 공급하는 중이었다.
***
어느새 좁아터진 원룸처럼 작아진 백호 의식공간.
그 좁아진 공간을 백호의 커다란 덩치가 가득 채우자, 준혁은 한발도 움직일 수 없는 처지가 되어있었다.
누가 보아도 절체절명(絕體絕命)의 순간.
하지만 준혁이 난처해진 만큼 백호도 정상은 아니었다.
흡수진으로 본체가 영향을 받자, 의식공간에 관여하는 힘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
아무리 본체와 분리된 채 봉인되어 있다 한들, 결국 정신체는 본체 안에 봉인된 것이었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호가 일그러진 얼굴로 준혁에게 바짝 다가서고 있었다.
“득의한 표정이군. 허나 이제 독 안에 든 쥐! 네놈이 주작의 명령으로 이곳에 왔다면 필히 네놈이 중추가 되어 내 힘을 빼앗으려고 할 터! 그 계획은 실패다!”
백호는 준혁의 의식만 잡아먹는다면, 바깥의 상황이 전부 해결될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틀린 판단이 아니었다.
청호에게 몇 개 남지 않은 명혼단 중 두 알을 먹이고 목족의 공법과 귀원패를 이용해 신체를 강화한 후 백호의 힘을 나눠 저장하게 하고 있지만, 결국 그 중추가 되는 것은 준혁의 신체.
만약 준혁의 의식이 백호에게 잡아먹힌다면 결국 신체의 소유권이 넘어가게 될 것이고, 그건 백호 본체의 힘이 준혁에게 흡수된 후 백호에게 되돌아오는 것으로 귀결될 터였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백호는 봉인 외부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말을 가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그에겐 의도치 않은 최고의 상황이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가 준혁의 의식을 온전하게 잡아먹을 수 있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그럼 얌전히 받아들이거라! 내 안에서 세상을 볼 수 있게 아주 작은 의식 조각 정도는 남겨두마!”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준혁을 향해 백호가 거대한 입을 벌렸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준혁이 바라던 상황이자, 유도한 일.
“이 정도 거리가 되길 기다렸습니다.”
“??”
백호의 입이 준혁을 씹어먹으려던 그 순간.
화악-
어느새 준혁의 몸 위로 붉은 기운이 흐르는가 싶더니, 봉황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모습에 백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백호가 일이 잘못됐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뒤로 물러나려 하자, 이번엔 준혁이 앞으로 튀어나오며 백호의 입안으로 머릴 들이밀었다.
그리고 동시에.
화르르륵- 퍼엉-
준혁의 몸 위로 드리워졌던 주작의 그림자가 불꽃처럼 타오르더니 어느새 타오르는 붉은 장검, 세이버(saber)와 레이피어(Rapier)의 중간쯤 되는 형태로 변하더니 빛살처럼 백호의 입속을 파고들었다.
푸학-
그리고는 정확히 백호의 뇌를 뚫고 머리 밖으로 나오더니, 경직된 듯 움직이지 못하는 백호의 머리를 한 번 더 파고들어, 그대로 심장에 박혔다.
지이잉-
그 순간 백호의 몸 위로 붉은 아지랑이와 함께 주작의 환영이 나타났는데, 그건 마치 거대한 호랑이가 붉은 봉황의 품에 안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으헉…. 이 빌어먹ㅇ… 녀… 이 무슨 말… 도 안 되는 일. 을. 저지른단 말이냐…. 영원불멸한 자…. 신의 영혼을 무기로…. 삼다니….”
잠시 후, 백호의 거대한 몸이 사그라드는 거품처럼 줄어들더니, 봉황에게 잡아먹히며 완전히 조그맣게 줄어 버렸다.
백호의 처절한 목소리에 준혁 역시 동조했다.
‘나도 그것이 이상하단 말이지. 아무리 복수심에 불탄다 한들, 자신의 존재를 희생하면서까지 복수를 하려 하다니.’
만약 준혁이 주작이었다면, 자신을 설득해 봉인에서 벗어나게 도와주라고 지시했을 것이다.
그런 후에 백호를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만약 준혁이 실패한다 해도, 그녀에게 시간이란 무한한 것.
조급하게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며 복수를 한다는 게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랬기에 주작의 부탁 안에 모종의 함정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끊임없이 의심한 이유이기도 했다.
‘흠, 알 수가 없구나.’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던 준혁은 백호의 의식이 심대한 충격을 받아 약해지자, 상념을 날려버리고는 재빨리 수결을 맺어 수백 개의 금빛 실을 쏘아 보냈다.
촤르르륵-
그러자 금빛 실이 특식을 맞이하는 뱀처럼 백호를 꽁꽁 감싸더니, 어느 순간부터 백호의 몸을 파고들었고, 그때부터 백호의 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남을 이용하려들 땐 자신이 당할 가능성도 항상 고려해야지 않겠습니까? 가시는 길 배웅하진 않겠습니다.”
잠시 후. 백호의 정신체가 준혁에게 흡수되어 사라지자, 의식공간이 완전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
밖으로 나온 준혁의 눈앞에 펼쳐진 건 주작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상황.
자신의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두 쪽으로 조각난 백호의 봉인석을 중심으로, 수 킬로가 텅 빈 공간이 되어있었다.
지하 깊은 곳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주변은 텅텅 비어있었고, 심지어 귀기들이 만들어지던 공간들까지 흡수진에 휘말려 전부 사라진 후였다.
“이게….”
준혁은 서둘러 아마르곤과 나머지 일행들을 찾았다.
공간 전체가 붕괴할 정도라면 결계를 유지하는 자들도 정상일 리는 없는 일.
혹시나 해서 분광소를 이용해 매혹하는구름의 원영까지 준비했거늘, 자신이 염려한 것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준혁은 만에 하나라도 불의의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기를 바라며 기감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휴우…. 다행이구나.”
찰나의 긴장감이 몸을 지배하려던 순간, 준혁은 바닥 곳곳에 널브러진 일행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행히 내상이 심한 이들은 있었지만, 목숨이 위험한 이는 없었다.
그중 자신과 함께 백호의 힘을 나눠 저장한 청호를 자세히 살핀 준혁은 가벼운 손짓으로 그를 끌어와 품에 안았다.
“허어…. 기절한 줄 알았더니 잠을 자는 것이냐?”
준혁은 혹시나 하는 걱정에 청호의 몸속에 영기를 불어넣고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다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는 영기를 세밀하게 만들어 청호의 몸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잠든 것처럼 새근거리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상태와는 많이 다른 현상.
굳이 비교하자면, 성인봉 인근 영천수에 몸을 담근 채 잠들어있는 도마뱀 두 마리와 비슷한 상태였다.
‘크게 성장하려나 보구나.’
생각해보니 당연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주작의 힘을 받아들인 세 영수와 다르게, 청호는 백호 혈맥의 정통 계승자.
그런 청호에게 백호의 힘이 온전하게 주입됐으니 변화가 생기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흐뭇하게 웃던 준혁은 심장에서 느껴지는 충격에 인상을 찌푸려야 했다.
“윽.”
먼저 들어와 있던 주작의 기운이 물과 불이 만난 것처럼 백호의 기운에 대항하기 시작한 것.
아직 격렬한 반응은 없었지만, 가만히 둔다면 반드시 엄청난 부작용을 불러올 게 분명한 현상이었다.
‘서둘러 기운을 체화시켜야겠구나.’
그 순간, 준혁의 몸에서 엄청난 영기파동이 퍼져나가 주변을 휩쓸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