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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211화 (211/408)
  • 211화. 한 걸음 (2)

    의식 세계에서 빠져나온 준혁의 눈에 들어온 풍경은 파괴의 참상. 말 그대로 거인들이 나타나 전쟁을 치른 것처럼 파괴된 흔적들이었다.

    “생각보다 심한가 보군.”

    리암의 소통 능력을 바탕으로 혈단법과 식혈만복의 흡수능력, 거기에 더해 알고 있는 모든 진법 지식을 바탕으로 만들긴 했지만, 한 번도 실행에 옮겨 본 적은 없던 진법.

    이론적으론 봉인지에 갇힌 존재를 소환해 힘을 흡수하는 것이었지만, 정확히 진법이 발동되며 일어날 현상에 대해선 완벽하게 예측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안전하게 힘을 흡수할 수 있는 주작의 봉인지에서 첫선을 보인 것이었다.

    실패하거나 만든 의도와 달라진다 해도 영향이 없었으니까.

    “어떻습니까?”

    어느새 다가온 아마르곤과 아르나프를 보며 준혁이 물었다.

    두 사람은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고, 정제되지 않은 기운이 사방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마치 전쟁을 치른 전사처럼.

    “이런 괴물 같은 진법을 만들다니…. 수사의 끝은 알 수가 없군요.”

    “제법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마음에 들다니요. 끔찍합니다.”

    아르나프가 질색한다는 얼굴로 몸서리를 치자 준혁은 피식 웃어주었다.

    그리고는 뒤에 있는 아마르곤에게 눈짓하자, 그가 말없이 손을 저었고, 그의 손짓에 따라 세 명의 수사가 시체처럼 둥둥 떠서 날아왔다.

    “수사가 원하는 대로 되었나 확인해 보시지요.”

    아마르곤의 손짓에 날아온 자들은 흑오족의 원영기 수사와 산들바람, 그리고 바람꽃.

    준혁은 혀를 차고는 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잠시 후, 그들을 확인한 준혁은 기분 좋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절한 이유도 갑작스레 강력한 기운을 받아들여서이지 몸이 상한 것도 아니었다.

    “성공적인 것 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죽은 듯 시체처럼 축 늘어진 세 명의 수사.

    아마르곤이 흡수진의 중추를 맡았다면, 그들의 역할은 주작의 힘을 모으는 빈 병의 역할이었다.

    준혁이 연형기에 올랐다고는 하나, 사신의 힘을 혼자서 받아낸다면 몸이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버릴 수도 있었기에, 주작의 힘을 나눠 받을 저장소로 사용한 것.

    ‘셋 다 크게 성장하겠구나.’

    그들이 가져간 힘을 다시 회수할 테지만, 어느 정도는 그들 안에 머물며 그들을 강하게 만들어줄 게 분명했다.

    당장이라도 수행이 오를 것처럼 기운이 범람하는 흑오족 수사가 준혁의 눈에 들어왔다.

    원래는 종속으로 이어진 산들바람과 바람꽃만 함께할 예정이었으나,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해 그에게도 주작의 힘 일부를 나눠준 것.

    처음엔 그와의 약속대로 주작을 대면시켜주려 했으나, 검은 속내를 가진 그녀를 만나게 하는 게 어떤 변수를 불러올지 예측할 수 없어서 대신 기운을 나눠준 것이었다.

    “헌데 상태가 말이 아니군요…. 수사는 괜찮겠습니까?”

    준혁의 질문에 아마르곤이 순간 답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얼굴을 하다가 한참 만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대신 진의 중추를 맡을 자가 생긴다면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작의 힘을 흡수하는 데엔 세 명의 원영기가 보조했지만, 현무의 힘을 흡수할 땐 아마르곤만이 보조할 계획.

    준혁이 묻는 건 혼자서 힘을 나눠 받을 자신이 있냐는 것이었다.

    “다행이군요. 그리고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차하면 다른 대안이 마련돼 있으니.”

    대안이란 말이 나옴과 동시에 아마르곤의 시선이 눈꽃 비경의 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울릉도에 있을, 현무의 피가 미약하게 섞인 청명에게로.

    흡수진으로 흡수할 사신의 힘을 받아내기 위한 기본조건은 그들의 기운이 미약하게나마 섞여 있는지가 핵심.

    아마르곤은 현무의 힘을 가지진 못했지만, 목족 특유의 땅과의 친화력과 종속의 인으로 인해 겨우 조건에 부합한 경우였다.

    잠시 후, 기절해있던 원영기 수사들을 강제로 깨운 준혁은 주작의 봉인지 열쇠인 아홉 개의 법기를 회수해 각각 부족에게 나눠주었다.

    구지대륙의 봉인 결계를 유지해야 하므로 모든 힘을 빼내오진 못했지만, 이젠 주작이란 존재는 유명무실해진 상태.

    봉인지를 소환할 수 있는 열쇠인 아홉 법기는 상징적인 의미 외엔 준혁에게 쓸모가 없었기에 그들에게 돌려준다 한들 크게 상관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수사.”

    “우리의 보물을!”

    몸을 추스르기도 전, 준혁이 전해준 열쇠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영수족들.

    준혁은 그런 그들에게 앞으로 경거망동하다 마족을 불러들이지 말라 충고한 후, 비행 법기를 꺼내 일행들을 태웠다.

    “자 그럼 조만간 또 보지.”

    그리고는 짧은 작별의 인사를 남긴 후, 다음 목적지인 백호가 잠든 백두 비경을 향해 법기를 움직였다.

    파앙-

    잠시 후, 준혁이 일행과 함께 하늘을 가르고 사라지자, 흑오족 수사가 바람꽃에게 다가오며 은밀하게 말을 꺼냈다.

    “바람꽃 수사. 선배님께서 앞으로 이곳의 일은 저와 수사가 의논해 결정하라 하셨습니다. 조용한 곳으로 가서 얘길 나누시지요.”

    준혁의 명에 의해 이제 눈꽃 비경은 아홉 종족의 연합 형태가 아닌, 흑오족과 적호족이 대표로 움직이는 양분체제가 될 예정이었다.

    ***

    눈꽃 비경을 빠져나온 준혁은 바로 백두 비경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왕족 부락에 도착한 그는 원영기 이상 수사들을 전부 끌어모아 백호의 봉인지로 이동했다.

    준혁이 귀기를 정화해준 후, 많은 수사들이 빠져나갔던 봉인지는 그 어느 때보다 붐비기 시작했다.

    “수사 저희가 해야 할 일이란 게….”

    부족의 가장 큰 어른인 매혹하는구름이 처참하게 당하는 걸 목격했기 때문일까?

    호왕족 수사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머뭇거리며 애처로운 눈빛을 했다.

    마치 지하 깊은 곳에 마련된 봉인지가 무덤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렵지 않은 일이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겁먹은 호왕족 수사들을 달래준 준혁은 아마르곤과 아르나프를 시켜 무상번을 나눠주고 진법에 영기를 주입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어차피 진을 유지하고 조종하는 건 아마르곤과 아르나프의 역할이었기에 그들은 그저 영기 충전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럼 모두 정해진 자리로 이동하면 되겠습니다.”

    한참 후 교육을 끝낸 아마르곤이 주작의 힘을 체화시키고 있던 준혁에게 다가왔다.

    “수사, 준비가 끝나긴 했으나, 과연 진이 제대로 작동하겠습니까?”

    “흐음…. 문제없을 겁니다. 애초에 이 진법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게 설계되었으니까요.”

    준혁은 아마르곤이 무얼 걱정하는지 눈치채고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준혁과 달리 외부에서 직접 진을 진두지휘했던 아마르곤은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넓은 초원 형태였던 주작의 봉인지와 달리, 백호가 봉인된 곳은 지하 깊은 심처.

    그것도 봉인석이 위치한 곳은 가장 깊은 곳에 있었기에, 주작을 흡수할 때처럼 수사들이 정확한 방위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 수사의 말도 일리는 있으나, 가장 중요한 네 방위는 꼭 정해진 자리를 지켜야 하지 않습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마르곤의 걱정에 준혁이 살짝 손을 젓자 어느새 토율서가 나타나 아마르곤의 품으로 날아왔다.

    “이건….”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그걸 이용한다면 두 명 정도는 자유자재로 방위를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어차피 아마르곤과 아르나프는 지둔술에 능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일.

    토율서로 2명만 땅속에서 자유자재 힘을 발휘한다면 진법을 구동하는 데는 아무런 제약이 없을 터였다.

    오히려 준혁은 아마르곤과 다른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 혹시 모르니 미리 대비를 해야지.’

    ***

    “생각보다 빨리 왔군. 어디 보자 네 녀석…. 흐음?”

    오직 의지와 의식이 힘의 크기를 판가름하는 의식 세계.

    모든 준비가 끝난 준혁은 백호의 봉인에 접촉해 그를 대면하고 있었다.

    준혁이 마기를 이용해 의식을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백호는 반갑게 다가오다 떨떠름한 얼굴로 멈춰 섰다.

    “네놈…. 내 금제를 스스로 지워버렸구나.”

    대놓고 금제에 대해 말하는 백호의 태도에 준혁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의식 조각으로 저를 조종하려 하시던 것 말입니까?”

    “... 그것까지 알아냈단 말이냐?”

    살짝 놀란 듯 두 눈이 커진 호랑이.

    준혁은 상대를 도발하겠다는 듯 비아냥거리듯이 입을 열었다.

    “겨우 정신체에 불과한 선배님에게 조종당할 줄 알았습니까?”

    “뭣이?”

    “이빨 빠진 호랑이에게 당할 만큼 제 수행이 부족하진 않습니다.”

    “겁을 상실했구나!!”

    그 순간, 준혁과 비교해 조금 커다랬던 백호의 덩치가 수십 배 불어나더니 5t 트럭을 3대 정도 겹친 크기로 커졌다.

    “크아아앙!”

    동시에 사자후를 내뱉더니 눈 깜작할 사이에 준혁 앞에 나타나 앞발을 휘둘렀다.

    쉐엑-

    자신의 도발에 상대가 너무나 쉽게 흥분하자, 준혁은 피식 웃으며 반대편으로 도약했다.

    “이곳은 선배님이 주인이나 다름없는데, 생각보다 힘을 못 쓰시는군요.”

    명혼단으로 혼을 단련한 것에 더해, 주작의 정신체를 흡수한 준혁의 영혼은 이미 평범한 연형기라 부를 수 없는 상태.

    아니 화신기도 아득히 넘어선 정도.

    백호가 만든 의식 세계에서 예전과 달리 물고기가 물속을 유영하듯 자유자재 힘을 발휘했다.

    그러자 재차 분노를 표출할 거 같이 움직이던 백호가 우뚝 멈춰서더니, 천천히 준혁을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무언가 짐작 가는 바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놈…. 주작을 만나고 왔군. 그녀가 내 금제를 해결해 주었나 보지?”

    상대가 기세를 가라앉히자, 준혁도 처음의 자리로 돌아와 평온한 자세를 취했다.

    “그렇습니다. 그분께서 당신을 처리해준다면 현무, 청룡님과 함께 힘을 합쳐 저를 선계로 보내준다고 하셨습니다.”

    원래는 상대를 도발해, 외부의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게 목적이었던 준혁은 백호가 오해하는 듯 보이자 바로 맞장구를 치며 말을 이어갔다.

    “더불어 천봉족의 비술과 혈맥의 힘까지 나눠주신다고 하시더군요.”

    준혁의 말에 백호가 비웃음을 던졌다.

    “네놈은 그년의 말을 믿는단 말이냐?”

    “저를 조종하려 하셨던 누구보다는 믿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그분께선 저를 금제에서 구해주시기까지 하셨으니까요.”

    자신이 숨겨둔 의식 조각을 삼경(三境)은커녕 화신기에도 이르지 못한 애송이가 발견하고 해결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백호는 준혁의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흥. 어리석은 놈. 네놈은 그년한테 속은 것이다.”

    “네. 뭐 그렇게 말씀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준혁이 살짝 비꼬는 듯 대답하자, 백호가 명백한 비웃음을 날렸다.

    그리고는 비밀을 알려준다는 듯 기고만장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현무, 청룡과 힘을 합친다고? 크흑. 네놈은 그 녀석들이 그 여우 같은 것과 힘을 합칠 수 있다고 여기느냐?”

    “안 될 것 무어 있겠습니까? 원래 네 분은 독고제님을 모시던 영수들. 굳이 따지자면 서로 동고동락하던 형제들 아닙니까?”

    “뭐? 크하하, 그분까지 언급한 걸 보니 그년이 급하긴 급했나 보군.”

    백호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자 준혁은 슬슬 그의 입이 열릴 거라 생각해 침묵을 지켰다.

    사실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 중 하나가, 주작이 말했던 바가 어디까지 진실인지 알고 싶었던 것.

    “잘 들어라, 이 어리석은 애송아. 주작 고것은 일찌감치 현무에게 당해 기식이 엄엄한 상태에서 봉인을 당했었다.”

    “제가 그것을 믿을 것 같습니까? 현무께서 무슨 이유로 그분을 기습했단 말입니까?”

    준혁의 질문에 백호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크흐흑, 내가 현무에게 시켰느니라.”

    “네 분이 동등한 관계인 것을 아는데 거짓이 심하십니다.”

    “동등? 그래. 한땐 그랬지. 내가 청룡을 처리하고 그놈의 근원을 억압하기 전까진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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