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잔혼결(殘魂結) (1)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준혁은 청호의 말에 매혹하는구름을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긴. 두 아이가 서로 혼약하기로 한 거지.”
“제 의견도 묻지 않고 말입니까?”
준혁이 살짝 노한 듯 기세를 일으키자, 청호가 몸을 움츠렸다. 반대로 매혹하는구름은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 아이도 성인인데 누구 허락을 맡아? 스스로 선택하는 거지.”
매혹하는구름의 말은 상식이었지만, 준혁에겐 아니었다.
그녀에겐 청호가 원영기에 오른 한 명의 수사로 보이겠지만, 준혁에겐 종속의 인으로 맺어진 종.
종속이란 그저 주와 종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엄연히 심상이 연결돼 있기에 종의 판단은 주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
당연히 준혁이 이런 상황을 원하지 않으리란 건 누구보다 청호가 잘 알고 있을 테니 애초에 이런 상황은 연출돼선 안 되는 것이었다.
어느새 준혁의 기파가 유형화되며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설마 장난을 치신 건 아니겠지요?”
“무슨 소리야? 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비웃듯 웃는 매혹하는구름.
준혁은 자신이 염려했던 일이 벌어졌단 걸 직감했다. 이곳에 청호를 남겨둘 때 혹시나 했던 걱정. 하지만 동맹이나 다름없는 관계로 인해 마음에서 지웠던 걱정.
“청호. 이리 오거라.”
말을 함과 동시에 준혁의 손끝에서 살랑이는 바람이 일어 청호에게 흘러갔다.
잠시 후 청호의 심장을 파고든 바람이 아무렇지 않게 다시 준혁에게 돌아왔다.
“지금 내가 저 아이에게 무슨 짓을 했다고 여기는 거야? 이거 실망인데? 우리 사이가 이렇게 믿음이 없다니? 이러면서 나에게 천봉족의 술법을 알려달라고 해?”
천봉족의 술법이란 매혹하는구름이 익힌 수행을 낮추는 방법.
청호의 몸 상태를 점검한 준혁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금제가 걸려있다고 확신했다.
매혹하는구름의 표정이 말하고 있었다. ‘네 수행에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아?’
“후…. 수사.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힘을 거두시지요.”
어느새 준혁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하지만 매혹하는구름은 여전히 헤실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설마 내가 저 아이를 조종해 이곳에 영원히 머물게 하려는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거였군.’
청호는 준혁을 제외하곤 유일한 백호족. 호왕족 중 백호의 피를 이어받은 이들이 상급 전사로 분류되어 백호족 영역으로 떠났다는 걸 보면, 호왕족에게 백호의 씨앗은 중요한 것이 분명했다.
즉, 청호를 종마로 사용하겠다는 뜻.
준혁은 매혹하는구름이 실수로 말을 꺼냈다고 여기지 않았다. 명백히 조롱과 비웃음이었다.
‘네가 뭘 어쩔 건데?’라는 뜻이 담긴.
“수사. 지금이라도 힘을 거두시지요.”
“나 화나려고 하는데? 네가 우릴 도와준 공은 나도 인정해. 하지만 너무 무례하다 여기진 않아?”
“수사!!”
그 순간 준혁의 몸에서 유형화된 기운이 퍼져나가며 영기가 형체를 띠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매혹하는구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여전히 준혁이 자신보다 아래라 여긴 듯 그녀도 기세를 피우며 맞대응했다.
파앙-
“귀 아파. 왜 소릴 지르고 그래?”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힘을 거두시지요.”
그때 기다렸다는 듯 매혹하는구름이 입을 열었다.
“설마 혼약을 깨고 싶은 거야? 근데 이걸 어쩌나. 나도 자존심이 있지, 우리 부족의 아이가 소박맞는 걸 보고 싶진 않은데? 그래도 그대가 원한다면 고려는 해보지. 뭐…. 그분께서 주신 그 힘을 넘겨준다면 말이지.”
그녀의 말에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겨우 그거였습니까? 귀기를 해소할 수 있는 그 힘을 얻고자 저 아이에게 금제를 가한 겁니까?”
“자꾸 금제 금제하는데. 나 진짜 화나려고 해?”
준혁이 백호 봉인지의 귀기를 해결한 건 임시방편. 완벽하다 할 수 없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그러니 매혹하는 구름의 입장에선 매번 준혁의 손을 빌리기보단 직접 힘을 보유해야겠다고 여긴 것.
“하하! 더는 못 들어주겠구나!!”
화를 내던 준혁이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고함과 함께 몸을 감싸고 있던 무영기를 제거해버렸다.
그 순간.
쿠르릉-
허공 곳곳에 영기구름이 뭉치기 시작하더니.
번쩍- 콰쾅!
준혁을 향해 내리치기 시작했다.
“너!!”
매혹하는구름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지든 말든 준혁은 떨어지는 뇌전을 가볍게 쳐내더니 청호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준혁의 손끝에서 연분홍 꽃잎이 피어나더니 흐드러지게 날아가 청호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순간.
파지직-
청호의 몸 곳곳에서 푸른 불꽃과 함께 꽃잎이 파사삭 타들어 가며 검게 변해버렸다.
“으아아악! 주인님! 괴로워요!!”
청호는 머리를 쥐어 잡고는 바닥을 굴렀다.
“주인?”
매혹하는구름은 청호가 준혁을 부르는 호칭에 시선을 돌리다가, 흠칫하더니 공중으로 치솟아 올라갔다.
그녀가 자리를 피한 순간, 땅에서 녹색 줄기들이 미친 듯이 솟구치다가 목표를 잃고는 순식간에 시들해지며 땅속으로 사라졌다.
파지직- 번쩍-
동시에 또 다른 영기 뭉침이 발생하며 그녀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수행을 숨기고 있었구나!”
그녀 역시 술법을 해제하고 연형기 수행을 되찾은 것.
상공으로 떠오른 매혹하는구름은 팔을 휘둘러 바람을 만들어냈고, 바람은 거대한 회오리 송곳으로 변해 걸리는 건 모조리 작살 낼 것처럼 회전했다.
하지만 그녀가 준혁의 공격을 피해 폭풍 송곳을 생성해낼 때, 준혁은 이미 등 뒤로 전영을 불러낸 뒤였다.
“귀기를 그리도 없애고 싶었더냐! 내 오늘 귀기뿐 아니라 호왕족을 세상에서 지워주마!!”
***
사실 준혁은 수행을 드러내 청호에게 걸린 금제를 파악한 후 매혹하는구름의 사과를 받아내려 했다.
그녀와 척져봐야 앞으로 백호를 처리하기 위해 이곳에 들를 때 좋은 것이 없었기 때문.
게다가 청호의 수행이 올라갔다는 건 분명 수련환경을 만들어주고 물심양면 도왔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은 청호의 상태를 파악한 순간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청호를 호왕족에 붙잡아두기 위해 간단한 금제를 걸었다고 여겼으나, 실상은 완벽한 꼭두각시로 제련하는 중이었다.
호왕족을 방문해 얘길 나누었던 청호는 청호이면서 한편으론 청호가 아니었던 것.
종속의 인이 보호기제가 되어 의식 깊은 곳까지 침투하진 못했기에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 된 건 아니었지만, 스스로 판단하지도 못하는 사이 이미 다른 의도로 행동하고 있었다.
마치 준혁이 백호에게 당해 무의식중에 조종당했던 것처럼 말이다. 아니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직접적이고 심하게.
‘이런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니 미안하구나.’
혼자선 비경을 탈출할 수도 없었으니, 얼마나 무서웠을까? 어쩌면 그 무서움이란 감정조차 가지지 못한 사이 매혹하는구름에게 조종당하기 시작했을지도 몰랐다.
아니 필히 그랬을 것이다.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준혁은 탁기를 단 한 방울도 남김없이 끌어다 쓰며 뿔을 삼켰다.
그리고는 수결을 맺자, 전영의 양쪽 어깨로 잔인한 빛깔의 뿔이 생겨나며 전영의 전신에서 끈적거리는 마기가 넘실거렸다.
쾅!
그 순간 준혁이 땅을 박참과 동시에 매혹하는구름의 전면에 나타났다.
동시에 준혁의 손짓에 따라 전영이 모든 걸 파괴해버리겠다는 듯 주먹을 휘둘렀다.
슈아아악-
매혹하는구름은 계면의 압박을 처리함과 동시에 폭풍 송곳을 날려 보내고, 거대한 발톱까지 소환하더니 전영의 공격을 막아섰다.
스르륵-
“말도 안 돼!”
하지만 폭풍 송곳은 전영의 주먹에 닿는 순간 봄바람처럼 흩어져버렸고, 그녀의 발톱은 진마기 앞에서 활활 타는 촛농처럼 녹아내렸다.
매혹하는구름은 준혁의 등 뒤에 있는 환영의 강함에 겁을 먹고 급하게 입김을 내뱉는 동시에 양손으로 허공을 할퀴었다.
그러자 그녀의 등 뒤 상공에서 거대한 호랑이 환영이 나타나더니 준혁을 찢어발길 것처럼 앞발을 휘둘렀다.
“흥!”
준혁은 수준 낮은 그녀의 공격에 코웃음을 치고는 전영을 이용해 환영을 날려버렸다.
그리고는 수결을 맺은 후, 움직이는 그녀를 잡아채겠다는 듯 허공을 움켜잡았다.
그러자 매혹하는구름의 주변 온도가 급하강하더니, 공기가 얼어붙었다. 동시에 그녀의 행동을 구속하듯 영기가 안쪽으로 밀집하더니, 주변이 완벽하게 얼음으로 뒤덮였다.
쩌정- 콰앙!
하지만 매혹하는구름도 도박으로 연형기에 오른 게 아니었기에 자신 주위의 영기를 유형화시켜 보호막을 만들더니, 한기가 본인을 침식하기 직전 보호막을 터트리며 그곳을 벗어났다.
파앙-
“나도 봐주지 않는다! 바람의 울림!”
월광지력으로 만들어진 한기를 벗어난 그녀는 토하듯 노란 털뭉치를 뱉어냈고, 털뭉치는 곡선으로 휘어진 창으로 변했다.
바람의 울림이라 불린 창을 쥔 매혹하는구름이 창끝으로 준혁을 가리키자, 그 방향으로 수십 미터에 이르는 노란 구름이 모여들더니 창으로 변해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쿠우웅-
노란 구름창이 가진 거력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창이 떨어져 내리며 풍절음이 아닌 영기의 진동음이 울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 엄청나게 위력적인 모습에도 준혁은 눈썹 하나 꿈적하지 않았다.
“형편없구나.”
그리고는 짧은 감상평을 내뱉음과 동시에 구름창의 압력을 간단히 해소해버리고는 붉은 장검을 꺼내 살짝 흔들린다 싶은 순간 사라져버렸다.
파앗-
“이렇게 쉽게 피한다고?!”
준혁이 너무나 쉽게 구름창을 피해내자, 매혹하는구름은 넋이 나간 듯 소리치다가 급하게 기감을 퍼트려 준혁을 찾았다.
“어딜 찾으시는 겁니까?”
그 순간 적마도를 이용해 순간이동 해온 준혁이 그녀 머리 위에 나타나더니, 양손을 좌우로 활짝 펼쳤다.
촤아악-
그러자 얼음알갱이를 품은 꽃잎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다 한순간 뭉쳐 들며 뱀처럼 움직여 매혹하는구름의 팔다리를 파고들었고.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팔다리를 감싸 움직이지 못하게 구속해버렸다.
그리고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탁-
어느새 매혹하는 구름의 등 뒤에 나타난 준혁의 전영이 그녀의 두 팔을 붙잡아 강렬한 마기를 뿜어냈다.
“이익!”
한순간에 제압당한 매혹하는구름은 전신에서 영기파동과 함께 엄청난 바람을 일으켰다. 동시에 마치 공기끼리 부딪혀 폭발하듯 충격파를 만들어냈다.
콰쾅! 쾅!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
하지만 전영은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듯 그 자리에서 그대로 그녀의 양손을 부여잡은 채 거만한 눈빛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
“으아아악!”
전영의 손끝에서 나온 끈적한 마기가 그녀의 손을 타고넘어 몸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고, 그녀의 팔이 불에 지져지는 것처럼 녹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더욱이 처참한 것은, 평범한 화상 같은 상처가 아니라, 신체를 구성하는 성분이 분해되듯 녹아내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녀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커져가던 순간.
촤르르륵-
어느새 그녀의 명치 앞까지 다가온 준혁의 손끝에서 검은 사슬이 뿜어져 나오더니, 매혹하는구름의 전신을 파고들었다.
“으어억….”
잠시 후, 검은 사슬에 칭칭 감긴 호랑이 영수 형태의 원영이 어둑해진 모습으로 그녀의 몸 밖으로 끌려 나왔다.
원영이 강제로 끌려 나오자 더는 도리가 없다고 여긴 듯 매혹하는구름의 입에서 애원하는 목소리가 흘렀다.
“수사. 저 혼자 잘되자고 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 백호족과 호왕족의 번영을 위해서였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그 순간.
푸욱-
금빛 실이 튀어나와 그녀의 이마를 꿰뚫었다.
“어디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봅시다.”
주둥이에서 흘러나오는 변명보다는 머릿속에 새겨진 기억을 읽는 게 더 빠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