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주작 (2)
주작의 말에 준혁은 의문을 가졌다. 봉인결계를 유지하기 위해 주작은 살려주었다면서 청룡을 죽이다니?
그에 대한 의문은 이어지는 주작의 말에 해결됐다.
“청룡이 갇힌 봉인지엔 그 대신 그의 후인이 있을 겁니다.”
그 당시 청룡은 수도계에 환멸을 느끼고 모든 힘을 후인에게 전해준 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청룡 대신 그의 후인이 봉인되었다는 이야기.
‘그럼 백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 않은가. 애초에 그들이 가진 힘이 중요한 것이지, 존재 자체는 의미 없는 것이니.’
주작은 진실을 교묘히 왜곡하려 하고 있었기에 준혁은 백호와 현무에게서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적당히 감안해 받아들였다.
그 뒤로도 주작은 자신이 봉인되기 전 상황을 하나씩 나열하며 백호를 규탄했다.
“그는 욕심에 눈이 멀었어요. 그분께서 아셨다면 편히 눈감지도 못하셨을 게 분명합니다.”
모든 얘기가 끝나자 준혁은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 네 명의 사정이 어떻든, 사신들의 주인이었다던 ‘그’가 어쨌든, 중요한 건 따로 있었으니까.
“그럼 네 사신의 힘을 이용한다 해도 선계로 가는 게 불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그래요. 이미 계면에서 떨어져나와 독립된 세상을 이루었는데, 결계를 해제한다고 해도 선계로 가는 통로가 열리는 건 아니니까.”
순간 탈력감이 준혁을 감쌌다.
선계로 가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려왔거늘 그 방법이 거짓이었다니.
하지만 준혁이 한숨을 내쉬려 할 때, 주작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백호 그자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이지, 선계로 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
주작이 회심의 한 수를 준비했다는 듯, 싱긋 웃어 보이자 준혁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알려주시겠습니까?”
목소리에 간절함을 읽은 것일까? 주작은 잠시 주저하는 척하다가 대답했다.
“좋아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준혁의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인 주작이 말을 이었다. 또박또박하게.
“백호와 현무. 그 둘을 영원히 잠들게 해주세요.”
***
주작의 말에 준혁은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의식으로 대면하는 것조차 피해야 할 정도로 강대한 그들.
봉인 당해 의식체임에도 준혁을 농락할 정도였으니, 그들을 처리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런 얘기를 지나가는 개미를 밟아 죽이는 것처럼 쉽게 말하는 주작의 모습에 준혁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달랐는지, 준혁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여긴 듯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었다.
“그들이 봉인체의 힘을 끌어다 쓸 수 있다면 당신에겐 불가능한 일이 맞아요. 하지만 방법이 있습니다. 그들은 기나긴 세월 동안 의식을 온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힘을 완전히 분리했기에 당신에게도 승산이 있어요.”
‘승산이 있다고? 삼선의 경지를 넘어선 그들을 상대로?’
준혁은 이미 백호의 의식체를 만나고 왔던 일을 꺼낼까 하다가 진지한 주작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닫았다.
“의식체인 그들을 상대하려면 단 두 가지만 준비돼 있으면 됩니다.”
“그게 뭡니까?”
심드렁한 말투로 준혁이 되묻자, 주작은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바로 그들의 힘을 상쇄시킬 의식체와….”
그리고는 손가락의 방향을 틀어 준혁을 가리켰다.
“그 의식체를 견뎌낼 영혼.”
그녀가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
준혁의 영혼의 크기가 자신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할 테니, 자신의 힘을 빌려주겠다는 뜻.
그러니 자신의 의식체를 비수 삼아 두 사신을 죽이라는 것.
“설마, 선배님의 의식으로 그들의 의식을 제거하란 말입니까?”
“그래요.”
의식이란 곧 자아나 마찬가지였기에 의식만 제거한다면, 본체가 살아있다 한들 그들을 소멸시킨 것과 다를 것 없었으니까.
‘어느 부분이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가.’
백호와 대척점에 서 있다 선포한 주작.
백호 역시 믿을만한 인사는 아니었지만 주작 역시 믿기엔 신뢰 관계가 부족했다. 아니 전혀 없었다.
‘진짜 의도가 무엇이란 말인가?’
어차피 리암의 소통 능력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흡수진을 이용해 봉인 바깥에서 힘을 흡수할 계획이긴 했으나, 그것이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랬기에 주작이 말하는 바가 진실이라면 준혁에겐 손해 볼 것이 없는, 아니 크게 도움이 되는 일임은 분명했다.
다만 한번 백호에게 당한 적이 있었기에 주작을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그녀를 받아들인다는 건 예전 백호의 의식에 조종당했을 때보다 더 큰 후환이 생길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머릿속이라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고민이 없을 텐데. 후우….’
그때 준혁의 고민을 꿰뚫고 있다는 듯, 주작이 입을 열어 새빨간 구슬 하나를 뱉어냈다.
“보아하니 나를 믿지 못하는군요.”
“제가 감히 선배님을 의심하겠습니까? 다만 조심하는 것뿐이지요.”
“그런 자세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믿어도 괜찮아요. 이것으로 내 진심을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는 구슬을 준혁에게 내밀었다.
준혁은 구슬을 직접 받지 않고, 월광지력으로 감싸 받으며 입을 열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잔혼결. 들어는 봤나요?”
잔혼결이라는 말에 준혁이 움찔거리다가 곧바로 신색을 바로 했다.
“알고 있군요?”
“정확히는 모르나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
잔혼결(殘魂結)은 말 그대로 혼을 죽이는 술법. 다양한 방법이 있다고 전해졌으나, 가장 널리 사용되는 방법은 시전자의 혼을 비수처럼 연마해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걸 받아들인다면 내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설마, 선배님의 혼을….”
“그래요. 지금 남은 내 잔혼을 이용해 그것을 익히면, 봉인된 내 본체의 의식까지 다스릴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시겠죠?”
“...흐음.”
화악-
그 순간, 말을 끝마친 주작의 잔혼이 미세 입자가 되어 사방으로 폭사했다. 그러더니 따뜻한 온기를 품은 채 준혁에게 밀려들더니, 사라져버렸다.
피하려고 한다면 피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백호나 현무의 잔혼을 흡수했을 때의 반응과 비슷했기에 준혁은 가만히 있었다.
애초에 그걸 목적으로 방문했던 것이었으니까.
그때, 흡수돼 사라지던 기운 속에서 주작의 마지막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그대가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믿어요. 내 의식 깊은 곳에 그대가 원하는 바를 남겨두었어요. 약속을 지킨다면 그때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거….
“혼자 말하고 혼자 결정하는 걸 보니 그들과 크게 다르진 않구나.”
백호, 현무와 다르게 준혁에게 예의를 다하며 부탁하는 것처럼 행동하긴 했지만, 결국 그녀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우위에선 입장에서 명령을 내리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거래를 하는 것처럼 행동했으나, 결국 준혁에게 선택권은 없었던 것.
그렇다면 그건 결국 강요가 아니겠는가?
준혁은 그녀의 태도에 헛웃음이 나왔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것이 아니었으니 급하게 주작 잔혼의 기운을 한곳으로 모았다.
그리고는 백호, 현무 때와는 다르게 곧바로 흡수하지 않고 월광지력으로 봉인해버렸다.
“이게 정말 잔혼결이라면 그녀의 잔혼 속 기억을 확인할 수도 있겠지.”
그리고는 허공에 떠 있는 새빨간 구슬도 월광지력으로 봉인한 후 날름 삼켜버렸다.
잔혼결은 공격수단임과 동시에 혼을 다루는 방법이기도 했기에, 시간을 두고 그녀의 말이 진실인지 판가름하면 되는 일.
어쩌면 그녀가 잔혼결을 남긴 건 두 사신을 처리할 수단임과 동시에 자신의 진심을 증명하는 도구였을지도 몰랐다.
물론 모든 얘기가 진실이라는 가정하에 말이다.
단 거짓이라면 함정이 숨어있을 테니, 최대한 신중하게 살피고 운용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전부 진실이라면 사신들의 힘을 흡수하는 일이 훨씬 수월해지는 게 사실.
게다가 기존 방식의 효율 또한 올라가니 큰 도움이 되는 건 분명했다.
“청호를 보러 가야겠구나.”
그 순간 준혁의 머릿속엔 다음 목적지가 결정되어 버렸다.
원래대로라면 주작의 봉인지를 확인하고, 흑오족 수사를 들여보내 약속을 이행할 생각이었다. 그 후엔 청룡의 유적과 봉인지를 찾아야 했고.
하지만 이젠 더 중요한 일이 생긴 이상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주작이 남긴 것에 대한 사실 여부를 알아내려면 그녀가 건넨 것이 진짜 잔혼결인지, 그 기능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 것.
그리고 준혁의 기억 속에 그것을 알 수 있는 곳은 호왕족의 고서보관소였다.
***
에베레스트산 정상으로 날아가 영산(靈山)이 지닌 기운을 만끽한 준혁은 다른 곳엔 들르지 않고 바로 백두 비경으로 향했다.
챙겨야 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로 이동한 준혁은 곧장 비경 안으로 이동해 호왕족의 거주지까지 하늘을 갈랐다.
슈앙-
그런 준혁을 반겨준 건 호왕족의 연형기 수사인 매혹하는구름.
그녀는 거주지 근처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다가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준혁을 발견하고는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멈춰!”
하지만 호기롭게 앞을 막아선 것과는 달리 얼굴엔 놀라움이 담겨있었다.
“어? 너! 변했네? 설마?”
그녀는 알쏭달쏭한 눈빛으로 준혁의 전신을 훑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수사. 잘 지내셨습니까?”
“흐음…. 아닌가.”
“무엇이 말입니까?”
“아, 아니야.”
준혁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예전과 달라지지 않았는데, 미묘하게 분위기가 변했다는 걸 알아챈 그녀는 혹시나 준혁이 연형기에 올랐을까 하는 의심을 하다가 이내 지워버렸다.
생각해보면 계면의 압박에서 자유롭다는 게 수행이 오르지 않았다는 증거였으니까.
“다시 찾은 걸 보면 그분을 제외한 사신 분들의 힘을 얻어온 건가?”
“아직입니다. 허나 곧 기회가 닿을 것 같아 정보가 필요하기에 들른 것입니다.”
“정보?”
혹시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백호에게 소식이 전해질까 염려한 준혁은 거짓을 말했다.
잔혼결을 익히든, 흡수진으로 기운을 빼앗든, 그때까진 모든 이들의 방심을 유도해야 했으니까.
“인족들이 사는 곳에서 현무의 흔적을 발견했는데. 그곳을 특정하는 게 쉽지 않아 고서를 조사해보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준혁의 핑계에 매혹하는구름은 쉽게 수긍하더니 길을 터주었다.
“그럼 같이 가자. 그동안 바깥에서 보고 들은 것들도 알려주고.”
말을 마친 매혹하는구름이 빛 꼬리를 남기며 하늘을 가르자, 준혁 역시 바로 그 뒤를 쫓았다.
***
“실망이 크구나.”
호왕족의 거주지에 도착한 준혁이 청호를 보고 처음 뱉은 말이었다.
청호는 어느새 원영기 중기에 올라 준혁의 가슴 정도에 오는 귀여운 꼬마로 변해있었다.
하얀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기른 장난기 가득한 어린아이의 모습.
“죄송해요….”
“됐다. 앞으로 이곳을 떠나 나와 함께할 테니 그리 알 거라.”
준혁의 말에 청호는 시무룩한 얼굴을 할 뿐이었다.
“주, 혀, 형님. 그래도 매혹하는구름 님께서 저 정도면 빠르게 성장한 것이라고….”
준혁이 단호하게 상황을 정리하려 하자, 청호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준혁이 화가 난 이유는 청호의 수행 때문.
매혹하는구름의 말대로 청호의 수행이 200여 년이 조금 넘는 시간 만에 결단기에서 원영기 중기까지 오른 건 빠르다 칭찬할 만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수사에게 적용되는 일.
“빠르다? 정녕 그렇게 생각하느냐? 유적에서 얻은 단약과 보물을 다 너에게 주었다. 거기다 주기적으로 화목단까지 보내주었지. 헌데 빠르다?”
“...죄송해요.”
“두말할 필요 없다. 나와 떠난다고 이곳에서의 연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 그런 표정 짓지 말거라. 필요한 것을 얻고 나면 바로 떠날 터이니 그렇게 알고 준비해.”
청호가 자신했기에 어느 정도 그를 믿었던 준혁은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때 청호 옆에서 계속 울상짓고 있던 노랑머리를 한 호왕족 소녀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백호족의 전사시여! 저도 함께 데려가 주세요!”
갑작스러운 요구에 준혁은 시선을 돌려 청호를 바라보았다. 턱 끝을 살짝 올림으로써 무슨 일이냐는 뜻을 전했다.
그 모습에 청호가 눈을 떼구르 돌리더니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자(內子)로 지정된 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