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청소 (2)
웅성웅성-
적호족 부락의 중심.
바람꽃 거처 앞엔 수많은 수사들로 붐비고 있었다.
황웅족의 거웅을 비롯한 원영기 수사들은 전원 참석해 있었고, 각 부족의 원영기 수사들을 따라온 결단기 수사들도 부지기수였다.
하나같이 얼굴은 상기돼 있었고, 작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정말 저희 어르신을 구해주신단 말입니까?!”
수사들이 너무 모여들어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그 온도를 이기지 못한 누군가가 전방을 향해 외쳤다.
“아직 몇 분 덜 오신 것 같은데, 전부 모이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준혁은 그런 수사를 향해 침착하라는 듯 손짓했다. 하지만 상대는 침착할 수 없는지 또 한 번 목소릴 높였다.
“예전 바람꽃 수사를 구할 땐 종속의 인을 걸어야만 가능하다고 하셨었는데! 이젠 다른 방법이 생기신 겁니까?”
웅성웅성-
분위기를 주도하려고 했던 준혁은 각 부족의 영수들이 너무 흥분했다고 여기고는 살짝 영력을 방출했다.
파앙-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주변이 침묵 속에 잠겼다.
“다들 많이 조급해지신 것 같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설토족과 사안족 수사분들껜 다른 분들이 전해주시길 바랍니다.”
“좋소이다!”
중요한 얘길 꺼내겠다는 듯 준혁은 한 호흡 쉬고는 말을 이었다.
“조금 전 수사의 질문부터 답변하자면, 그렇습니다. 이제 종속의 인을 걸지 않고도 그들을 구출해낼 방법이 생겼습니다.”
“오오오!”
“정말이십니까?!”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인족들도 본인 세력의 선배나 웃어른이 괴한에게 잡혀있다는 사실을 알고 지낸다면 마음이 편하질 못할 것이다.
하물며 피로 이어진 혈족인 아홉 영수족은 어떤 마음으로 200여 년을 보내왔을지 가히 짐작하기도 힘든 일.
“단! 그러기 위해선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저희가 무얼 해야 합니까?!”
“명령만 내려주세요!”
준혁의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호기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만약 준혁이 당장 쳐들어갑시다! 하고 말만 한다면 우르르 따라 움직일 것처럼 격동적이었다.
“우선 영석이 필요합니다. 최대한 많이. 그리고….”
하나하나 조건들이 준혁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호기롭던 영수들도 침음을 삼키는 자들이 속출했다.
준혁이 말한 것들은 영석부터 시작해, 영수들이 아끼는 영기가 함유된 보석들. 거기다 연단과 연기에 사용되는 각종 재료까지. 그 수와 양이 가히 국가가 들썩일만한 양이었다.
“그렇게나 많이….”
무리 중 누군가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자, 동요가 주위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동요가 모여있던 수사들을 잡아먹기 전.
“모두 수사들의 가족, 형제…. 나아가 부모를 구하는 일입니다. 다들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준혁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
“정말 그 많은 게 필요하신가요?”
거처로 돌아온 바람꽃의 첫마디였다.
“물론. 마족을 처리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곳을 원래대로 돌려놓아야 하니깐.”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다른 이들에겐 그렇게 말했지만, 실상은 그 후를 대비하기 위한 준비물들.
주작의 봉인지를 연 후, 유적을 찾고, 그 후엔 현무 일족 꼬마의 기억을 바탕으로 청룡의 유적까지 방문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네 유적의 힘을 전부 흡수하고 나면 백호부터 시작해 사신들의 힘을 하나씩 빼앗을 생각.
준비물은 그것까지 생각한 양이었다.
유일하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흑오족 수사만이 준혁과의 은밀한 거래를 통해 입을 다문 상태였다.
“정 의문이 들면 흑오족으로 찾아가 그에게 물어보시면 됩니다. 결계에 관해선 그가 전담하고 있으니.”
“아니에요. 그저…. 저희가 가진 걸 다 모아도 불가능한 양을 구해 오란 말에 너무 당황해서….”
준혁의 요구가 무리이긴 했다. 인간들만큼은 아니었지만, 영수들도 영석 및 수도자원으로 수행을 올리는바, 한동안은 수련을 포기하라는 말과도 같았으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눈꽃 비경의 영수들이 그나마 인간들과 비슷한 물건들을 취급했고, 그 규모도 가장 컸으니깐 말이다.
흔히 말하는 저속한 말로 표현하자면….
준혁은 이곳에서 뽕을 뽑을 생각이었다.
***
석 달 후.
아마르곤과 아르나프, 거기에 도천과 사쿠라까지. 청명을 제외한 일행은 중경의 산맥을 넘어 내경에 진입하는 중이었다.
청명은 딱히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울릉도로 돌아간 지 오래였고, 대신 흑오족의 원영기 수사가 결단기 수사 세 명과 함께 합류한 상태였다.
“성공 확률은 얼마로 생각하십니까?”
내경에 막 진입했을 때, 준혁이 흑오족 무리로 다가오며 물었다.
“결계 자체는 완벽합니다. 영석도 충분하니 유지도 문제없을 테고요. 다만…. 충격에 약하니 수사께서….”
“걱정 마십시오. 수사의 부족원들을 최우선으로 보호할 테니.”
“믿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약속이란 말에 준혁은 피식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끝난 후, 주작의 봉인지로 그대를 안내할 테니 염려 놓으십시오.
준혁과 흑오족 수사와의 뒷거래.
마족에게 잡힌 자들을 구하기 위한 결계에 들어갈 재료를 부풀려 준다면, 주작의 봉인지로 그를 안내하겠다는 것이었다,
정확히 어떤 의도로 주작을 만나고 싶어하는지는 준혁도 몰랐다. 다만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는 일.
단일 혈족으로 구성된 다른 이들과 달리, 주작을 숭배하던 자들은 여러 종족이 존재했으니, 아마 그들 중 대표가 되고 싶은 게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었다.
그렇게 내경 안쪽으로 이동하길 며칠이 지나자, 어두운 구덩이가 준혁과 일행을 반겨 주었다.
구덩이는 예전 준혁이 방문했을 때와 달라진 게 없었는데, 단 하나, 마족이라곤 눈 씻고 찾아도 볼 수 없다는 게 달랐다.
“자, 그럼.”
어느새 구덩이 위로 날아간 준혁이 손짓하자, 흑오족 원영기 수사는 자신이 데려온 족인들에게 신호를 보내더니 각자 흩어졌고.
도천과 사쿠라도 조금 떨어진 곳으로 날아가 몸을 숨겼다.
“두 분도 준비되셨습니까?”
준혁의 물음에 아마르곤과 아르나프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신호는 보냈다.
하지만 둘 다 표정은 좋지 않았다. 마치 다시 경험하기 싫은 걸 해야 한다는 듯이.
“짧게 끝날 테니, 저번처럼 영기 고갈을 심하게 경험하진 않을 겁니다.”
준혁과 달리 전함이 한번 발동되면 멈출 수 없었던 두 사람은 그 말에 자존심이 상한 듯 시선이 흔들렸다.
그 모습에 준혁은 피식 웃고는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
“그럼 어디 어떤 자인지 한번 불러보겠습니다.”
***
검은 마기로 완벽하게 차단된 칠흑 같은 공간.
그 안에서 사람은 할 수 없을 것 같은 괴상한 자세로 몸을 비틀고 다리와 팔이 꺾인 것처럼 앉아있던 룬다람.
그는 69 공격대의 대장이자 무리에서 유일하게 연형기에 오른 강자였다.
무심한 듯 차가운 인상의 그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속은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다시는 찾아오질 않는구나. 으득.”
자신과 특수한 술법으로 연결돼 있던 두 수하가 죽임을 당한 걸 알게 된 후 곧바로 움직였지만, 범인을 잡지 못했었다.
마음 같아서는 주변을 뒤집어엎어서라도 상대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분노해 수행을 드러내는 만큼 계면의 압박이 심해졌고, 룬다람은 복수는 꿈도 꾸지 못한 채 다시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심마까지 찾아올 뻔했었다.
마족에게 심마란 다른 종족보다 더 무서운 것.
수십 년의 시간을 보낸 후에야 겨우 마음을 다스린 룬다람은 결국 마지막 수단을 사용하기에 이르렀고, 지금 그 끝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스윽-
룬다람의 손짓에 따라 공간이 파도치더니, 눈이 뒤집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수하 세 명이 안으로 끌려들어 왔다.
끌려들어 온 세 마족은 룬다람의 검은 마기에 닿더니 부르르 몸을 떨었고, 잠시 후엔 빠각- 바사삭- 거리는 소리와 함께 압축되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핏물마저 증발해 하나의 덩어리로 변해버린 마족들은 룬다람의 손짓에 따라 얇게 퍼지더니 그의 몸 위로 달라붙었다.
차르륵-
그리고는 물이 솜에 흡수당하듯 그의 피부 위로 스며들어 갔다.
모든 과정이 끝나자 룬다람은 인상을 쓰며 무언가를 느끼다가 불만 가득한 소리를 내었다.
“빌어먹을 제한만 없었다면 진작 끝났을 것을.”
수하들을 녹여 계면의 압박을 이겨낼 재료로 사용하는 일.
그건 역천의 술법이었기에, 단번에 처리할 수가 없었다.
아기가 걸음을 걷듯 한 발씩 조심히 이행하지 않으면 반서를 맞아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대여섯 번만 하면 끝나겠군. 다행히 부족하진 않겠어.”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살육을 저지르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수하들을 전부 불러 모았던 룬다람은 자신이 재료로 사용하고 남은 수를 세어보다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쿠우우웅-
그때, 멀리서 엄청난 파동이 사방을 흔들며 지나갔다.
흠칫-
“이건?”
파동엔 완영기 후기 수준의 농밀한 영기가 녹아있었다.
이미 수하들을 통해 이 지역엔 원영기 수사들뿐이란 걸 알고 있던 룬다람은 단번에 누군가를 유추해 낼 수 있었다.
“그놈이구나!”
바로 거주지까지 찾아와 수하들을 살해하고 도망친 그놈.
콰앙-
그 순간, 주변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던 검은 마기가 그의 몸으로 밀려들어 왔고, 동시에 모든 걸 소멸시켜버릴 것 같은 파괴력을 뿜으며 상공으로 치솟아 올라갔다.
놀랍게도 지하 깊은 곳에서 지면까지, 검은 마기에 닿은 모든 것들이 녹아버린 채 기다란 통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
영기 파동을 퍼트리던 준혁은 지하에서부터 엄청난 거력이 솟아오르는 걸 느끼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안쪽 깊이 꼭꼭 숨어있었구나.”
상대는 계면의 압박이 무섭지도 않은지 연형기 수행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는데, 완벽하게 수행을 읽을 수 없는 걸 보면 자신보다는 높은 수행을 가진 자는 분명했다.
다만 압도적인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연형기 후기에 올라 화신기를 앞둔 수사로는 보이질 않았다.
최악의 수까지 내다보고 준비를 했던 준혁은 한결 마음이 편해져 멀리 떨어진 아마르곤과 아르나프에게 신호를 보냈다.
당장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라는 신호였다.
푸학-
“놈!!!”
마치 땅이 녹아 푸딩이라도 되는 것처럼 터져나감과 동시에 어느새 준혁의 눈앞엔 진한 보라색 피부를 지니고 머리에 30cm 정도의 뿔이 자라난 미남자가 나타나 있었다.
미남자는 차갑고 지적으로 생긴 모습이었는데, 그 눈빛만은 최상위 계층의 흉포한 짐승 같았다.
“네놈이 맞겠지?”
활화산처럼 터질 것 같은 기운을 내뿜으면서도 바로 공격해오지 않고 말을 꺼내는 상대를 보며, 준혁은 전신의 영력을 끌어올렸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허공에 영기가 뭉쳤고, 연형기 마족을 향해 뇌전을 뿜어댔다.
번쩍- 콰쾅-
계면의 압박이 만들어낸 뇌전은 모든 걸 녹여버릴 것처럼 연형기 마족에게 떨어져 내렸다.
“허?”
하지만 준혁이 생각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계면의 압박. 그것이 만들어낸 뇌전은 연형기 마족에게 떨어져 내리더니, 그를 직격하나 싶은 순간, 무언가와 상쇄하듯 스르륵 흔적이 사라져 버렸다.
상대는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또다시 떨어져 내리는 뇌전은 무시한 채 준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네놈. 묻는 말에 대답하거라. 내 수하들을 죽인 게 네놈이더냐?”
목소리에 고조는 없었지만, 그의 분노는 여실히 느껴졌다.
그 모습에 준혁은 계면의 압박이 왜 사그라지는지에 대한 의문은 잠시 접어둔 채, 그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스윽-
“혹시 이걸 말하시는 겁니까?”
어느새 손바닥을 통해 진한 마기를 뿜어대는 검은 뿔이 나타났고. 그걸 본 연형기 마족은 폭발하듯 준혁을 향해 쇄도했다.
“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