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다시 찾은 유적 (2)
전영술로 만들어낸 마족의 전영(戰影).
준혁의 예상대로 상대는 눈이 돌아가 괴성과 함께 의지를 움직였다.
“감히! 마족 따위가! 이 신성한 곳에 발을 들여?!! 절대 살려두지 않겠다!”
어찌 됐든 수련을 도우려고 남겨진 잔혼이기에 그가 죽음을 입에 담았다는 건, 준혁의 정체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무조건 마족으로 확정 지었다는 것과 같았다.
마족이 백호 혈맥의 힘을 흡수한 것이든 자신의 후인이 마족의 힘을 받아들였든 상관없이 말이다.
“능력이 되면 해보시지요.”
“이익!”
잔혼이 입을 악다물며 으르렁 소리를 내자, 준혁의 머리 위로 거대한 호랑이 발이 나타나 세상을 반쪽 내버릴 듯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흰색 꼬리로 의심되는 것이 생겨나더니 준혁을 휘감을 듯 달려들었다.
겉으로는 방심한 듯 상대를 잔뜩 도발했던 준혁은 실상은 만반의 준비를 끝낸 후였기에 급하지 않게 한 손은 위로 뻗었고, 나머지 손은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준혁의 머리 위로 육각 타일이 만들어져 우산처럼 그를 보호했고, 허공에서 나무줄기가 나타나 흰색 꼬리를 휘감아 버렸다.
“흥! 겨우 그런 식으로 나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하지만 준혁의 대응이 가소롭단 듯 백호는 코웃음 쳤고, 그 순간 떨어져 내리던 앞발이 수십 개로 늘어났다.
동시에 흰색 꼬리가 나무줄기를 피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더니, 준혁의 등 뒤에서 나타나 뱀이 나무를 휘감듯 준혁을 덮쳤다.
“어렵진 않을 것 같군요.”
허나 준혁 역시 어느 정도는 예상하던 일.
어느새 준혁의 손엔 두 개의 뿔이 놓여 있었고, 눈 깜짝할 순간 이미 입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화악-
그 순간 준혁의 등 뒤에 있던 전영이 오른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흰색 꼬리는 전영의 손에 잡혀 고통스러워하는 뱀처럼 발버둥 치더니 퍼엉 하고 터져버렸다.
직후, 육각 타일 위로 백호의 앞발이 쏟아지는 사이.
휘릭- 콰르릉-
바람처럼 변한 준혁이 뇌성과 함께 몸을 움직였고, 준혁의 행동에 따라 전영이 따라붙으며 손에 뿔처럼 생긴 창을 만들어냈다.
그러더니 상대와 거리가 가까워지자 창을 번개같이 날려 보냈다.
슈아악-
웬만한 강체술은 가볍게 뛰어넘는 전영이 초월적인 근력으로 날려 보낸 뿔 창, 거기에 준혁의 영력과 의지력이 더해지자, 창엔 하늘도 뚫어버릴 것 같은 괴력이 담겼다.
“감히!!”
그 모습에 잔혼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며 양발을 앞으로 모았다.
준혁의 이번 수는 백호의 힘을 적극 이용해 마기와 함께 운용한 것.
마족을 혐오하는 백호에겐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텅-
양발을 교차해 털 뭉치처럼 생긴 방어막을 만들어낸 잔혼은 뿔 창을 막아낸 직후 입김을 내뱉음과 동시에 스르륵 흩어져 모습을 감추었다.
“풍둔술로 제 눈을 피하실 수 있다 여기신 겁니까!”
그 순간 준혁이 빠르게 수결을 맺자 모래바람이 일어나며 주위를 휩쓸었다.
동시에 허공에 완벽하게 스며들어 준혁을 기습하려고 했던 잔혼이 경악이 담긴 소리를 내뱉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현무진식!”
백호 혈맥과 현무 혈맥, 거기다 목족의 공법과 함께 마족의 전영술까지 사용하는 준혁.
준혁이 마족 떨거지 중 하나라고 여기던 잔혼은 떨떠름한 눈빛을 보냈다.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냐?!”
기세를 낮추며 묻는 백호의 잔혼.
준혁은 그런 그를 응시하다가 피식 웃으며 그를 가리켰다.
그러자 그의 손끝에서 분홍 꽃잎이 폭죽처럼 생성되며 잔혼의 팔다리에 들러붙기 위해 흩날렸다.
“그것을 안다고 달라질 게 있겠습니까?”
그 순간 호랑이로 변한 잔혼의 등 뒤로 거대한 존재감이 나타나더니 그대로 달빛보다 차가운 기운을 쏟아냈다.
“이 비겁한!”
그것은 현무의 힘과 백호의 힘을 결합해, 모래바람을 일으킬 때 준혁이 몰래 소환한 분광소로 만들어진 분신이었다.
잔혼은 준혁이 모래바람을 만든 이유가 자신의 은신을 찾아내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의 눈을 현혹해 분신을 만들려던 한 수.
분광소의 손길에 따라 함께 보낸 월광지력이 맹렬하게 쇄도했다.
“이제 그만 무(無)로 돌아가시지요.”
그에 맞춰 준혁은 의지력을 더해 분광소가 방출한 월광지력의 효과를 배가시켰다.
쩡- 쩌저정-
하지만 갑작스러운 기습에도 불구하고 백호의 잔혼은 치명상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따위 한기!”
다만 호기로운 말과는 다르게 월광지력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하고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
백호의 잔혼은 현무의 잔혼과 달랐다.
어느 정도 준혁의 능력을 인정한 다음 자신을 내려놓았던 그와 달리, 백호의 잔혼은 말 그대로 모든 걸 불사르며 달려들었다.
‘상대해 보길 잘했구나.’
만약 처음부터 굽히고 연기했다면 수월하게 일이 처리되었을지도 몰랐다.
백호의 잔혼이 의식의 조각을 남겨 또 한 번 수작을 부리려 한다고 해도, 이미 준혁에겐 그걸 해결할 능력이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그를 도발해 전력을 끌어낸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간접적으로나마 본체의 힘을 느껴보았으니 말이다.
“그만 끝내겠습니다!”
하지만 잔혼은 말 그대로 미세하게 겨우 남아있는 영혼의 조각.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그 한계가 명확했다.
퍼석-
결국 계속되던 공방 속에서 준혁과 분광소의 합격에 천천히 약해지다 사그라들고 말았다.
***
파앗-
백호의 잔혼을 흡수한 준혁은 유적을 빠져나와 옛 적호족의 마을 근처에 있던 호수에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이곳으로 나왔군.”
즉시 기감으로 주변을 살펴 어슬렁거리는 마족이 있나 확인한 준혁은 자신의 예상과 달리 광기에 젖은 마족이 하나도 보이지 않자 의아해하며 주변을 살폈다.
“어찌 하나도 보이질 않…. 아!”
그러다 마족이 보이지 않는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연형기 마족은 두문불출할 테고 완영기 마족은 자신이 처리했으니, 나머지 그 이하의 마족들은 영수들이 나서서 처리했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제법 지났으니 아마 마족이 자리 잡은 거주지 근처가 아니면 대부분 지역은 정리가 끝났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건 준혁의 예상이 맞았다.
준혁이 가장 큰 문젯거리를 해결해주었기에, 아홉 영수족은 방어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합심해 마족을 정리해버렸다.
그때 준혁의 기감에 빠르게 다가오는 두 명이 느껴졌다.
그중 한 명은 술법의 반응이 느껴지는 걸 보니 준혁과 가깝다면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수사.
“수사!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최수사! 어떻게 여기에?”
어느새 허공을 갈라 준혁 앞에 모습을 내보인 두 명은 적호족의 바람꽃과 황웅족의 거웅이었다.
“오랜만입니다. 그러는 두 분은 이곳에 무슨 일입니까?”
잠시 후 거웅이 나서서 설명하자, 준혁은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원영기 영수들은 주기적으로 내경으로 들어와 마족을 사냥했는데, 이번 주기가 두 사람의 차례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제 동생은 어디에….”
마족이 보이지 않는 이유에 대한 얘길 나누는 사이, 바람꽃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내가 너무 빨리 유적에서 나와, 그들보다 먼저 도착했구나.’
“아! 산들 수사는 지금 부락으로 가는 중입니다. 혼자 움직일 일이 있다 보니, 저만 이렇게 따로 떨어졌군요.”
“아!”
준혁의 말에 바람꽃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게 있다는 듯 손뼉을 마주쳤다.
짝-
“아! 최수사! 예전에 흑오족 수사에게 말한 것 기억하시나요?”
흑오족이라면 영수족 중 결계나 진법에 관해 가장 해박한 지식을 가진 부족이었다.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마족들을 재봉인 하고 열쇠를 정상적으로 작동시킬 방법을 찾았다고 했습니다. 수사께서 기다리던 소식이 맞지요?”
‘허,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준혁은 얼굴에 화색을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꽃이 말하지 않았어도 그를 만나려고 했었는데 마치 준비되었다는 듯 소식을 접하게 되자 신기한 느낌마저 들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한시바삐 만나보고 싶으신가 보군요. 그럼 같이 돌아가시죠. 저희도 슬슬 돌아가려 생각했으니까요.”
반가운 제안에 준혁은 그러자고 했고, 잠시 후 세 사람은 곧장 하늘을 갈랐다.
***
눈꽃 비경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중경의 연합지.
언젠가부터 부족의 경계가 조금씩 허물어지며 왕래가 활발해졌고, 영수족은 마족이 나타나기 전보다 더 융성해지고 있었다.
이제 마족을 처리하는 것은 용기를 증명하는 하나의 업적처럼 여겨졌기에 결단기에 오른 영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마족을 만나길 기대했다.
하지만 이미 마족의 거주지라 불리는 내경의 특정 지역을 제외하고는 마족은 씨가 말라가고 있었기에, 쉽게 만날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최준혁 수사.
한땐 공포의 대상이었던 마족을 사냥감으로 전락시킨 그가 오랜 방황을 끝내고 돌아오자, 영수족 부락은 시끌시끌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적호족 부락, 바람꽃 거처 앞.
준혁 앞엔 각 부족의 원영기 수사들이 전부 모여있었다.
개중 몇은 새롭게 원영기에 오른 자들이었는데, 얼굴엔 기대감과 호승심이 가득했다.
반대로 기존의 원영기 수사들은 목숨줄이 저당 잡혀 있기 때문인지, 정중한 모습으로 준혁을 맞이하고 있었다.
준혁은 한 명 한 명 안부를 물으며 인사를 나눈 뒤, 혹오족 수사만을 가까이 오게 했다.
그리고는 주변으로 기파가 흘러나가지 않게 영기로 막을 만들어 막아버렸다.
“방법을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준혁의 행동에 움찔하던 흑오족 수사는 앞뒤가 전부 생략된 말에 그 의도를 깨닫고는 마음을 편히 가졌다.
“그렇습니다. 우연히 고서를 찾게 되어 거기서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여기 확인해보시지요.”
흑오족 수사는 말과 동시에 입을 벌려 조그마한 옥돌 하나를 꺼내 건넸다.
옥돌을 받아든 준혁은 상대방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기감으로 그것을 살핀 후 이마에 가져갔다.
“흠…. 정말 이 방법이 통하리라 확신하십니까?”
옥돌 속 내용을 살핀 준혁이 살짝 이맛살을 구기자, 흑오족 수사는 어깨를 펴며 자신 있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그곳에 적힌 소멸진을 사용한다면 봉인지를 차지한 마족의 흔적을 지워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 후엔 열쇠만 모인다면 자연스럽게 원하는 대로 되실 겁니다.”
“쉽지 않군요.”
‘쉽지 않다.’ 상대가 건네준 내용을 확인한 준혁이 가장 먼저 한 생각이었다.
소멸진을 사용하면 모든 게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처럼 말했지만, 문제는 소멸진을 발동하기 위한 전제 조건.
그건 진을 발동시킬 지역에 생명체가 없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말을 달리하면 연형기 마족을 밖으로 끄집어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만약 상대가 연형기 초기라면 크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중기만 넘어가도, 분광소와 함께 상대한다 해도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가 없는 일.
준혁은 앞으로의 계획을 떠올리며 장고에 빠져들었다.
쿠웅-
그때 주위가 소란스러워지며 상공에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강렬한 기파가 상공에서부터 퍼져나가자, 원영기 영수들뿐 아니라 기파를 느낀 전원이 고개를 올려 위를 바라보았다.
“저게 무엇이란 말입니까?!”
“허어억! 저렇게 거대한 물건은 처음 봅니다!”
어느새 상공엔 100여 미터는 될법한 거대한 전함이 구름을 뚫고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두가 놀라는 사이 준혁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요란하게도 나타나는군.”
아마르곤이 조종하는 비행 법기의 출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