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현무 유적 (1)
“그곳으로 안내하는 건 문제가 되질 않지만…. 들어가실 순 없을 겁니다.”
준혁의 요구에 아르나프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했다.
“유적은 그분이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고…. 봉인지는 그분께서도 들어갈 수가 없으니까요. 일단 유적에 들어가기 위해선….”
준혁의 눈치를 살핀 아르나프는 자신이 아는 바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설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준혁은 손을 내밀어 멈추란 행동을 취하며 반문했다.
“잠깐. 방금 말한 걸 가지고 있나?”
“유적지의 열쇠 말입니까? 그건 말씀드렸다시피 일족의 피를 이은 자만이….”
“아니 그것 말고. 현무의 봉인 결계에 관련된 옥패.”
준혁의 말에 아르나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마지막 남은 조각을 찾지 못하면 아무 반응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랬기에 그분께서도 봉인지에서 아무것도 얻질 못하셨지요.”
“꺼내게.”
설명을 잇던 아르나프는 차가운 준혁의 명령에 황급히 공간대에서 옥패 두 개를 꺼냈다.
사각 옥패엔 각각 패도(悖道), 지중(地重)이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 모양이 매우 익숙했고 친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자세히 보면 법기도 아닌, 그저 고품질의 옥 같은 느낌의 물건.
“청명….”
준혁의 입에서 ‘청명’이라는 말이 흘러나오자 아르나프가 화들짝 놀랐다.
“어찌? 어찌 그것을 아신 겁니까? 나머지 옥패에 적혀 있을 말을.”
아르나프의 놀람에 잠시 그와 시선을 마주하던 준혁은 곧장 삼청조를 소환했다.
“당장 인도의 타르사막으로 오거라.”
“지금 누구에게 말씀하시는 건지….”
아르나프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준혁은 삼청조를 소환 해제시키며 말을 이었다.
“설명을 마저 하지.”
준혁이 고개를 슬쩍 올리자, 아르나프는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로 눈치를 살피다 설명을 시작했다.
“제가 어디까지…. 그러니까 세 개의 옥패를 공명시키면 봉인지의 결계를 조종할 수 있게 되는데, 봉인지에 간다고 하여도 일족의 후예가 아니라면 봉인지 안으로 들어가는 건 불가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번엔 준혁이 방해하지 않고 가만히 듣기만 하자, 아르나프는 봇물이 터진 듯 빠르게 아는 것들을 털어놓았다.
그렇게 한나절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동쪽에서 둔광이 번뜩이며 지친 표정이 역력한 청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명의 뒤엔 도천과 사쿠라까지 함께하고 있었다.
“어르신! 무슨 일로!”
얼마나 급하게 날아왔는지, 결단기인 청명은 안색이 새파래져 있었다.
그 모습에 준혁이 영기를 흘려보내 그를 안정시키자, 그제야 헐떡거리던 숨이 정상으로 돌아오며 얼굴색이 조금은 편해졌다.
“청명. 네가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던 옥패. 지금도 가지고 있느냐?”
“물론입니다요.”
청명과 준혁이 처음 만났을 당시, 청명이 자신의 과거에 비밀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면서 우스갯소리를 하며 보여준 옥패.
고아로 버려질 당시부터 가지고 있던 ‘청명’이라 적힌 옥패 때문에 이름이 청명이라 말했던 것을 준혁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꺼내 보거라.”
뜬금없는 옥패 타령이었지만, 청명은 의문도 표하지 않고 바로 공간대에서 사각 옥패를 꺼내 준혁에게 건넸다.
그 모습에 아르나프의 얼굴에 경악이 비칠 때, 준혁은 세 옥패를 한 손에 잡고 나머지 손으로 수결을 맺으며 영기를 주입했다.
트특-트드득-
그 순간 세 사각 옥패가 기이한 소리를 내더니 톱니바퀴가 맞춰지듯 조금씩 벌어지다 결합하기를 반복했고, 잠시 후엔 기다란 하나의 피리 같은 것으로 변했다.
화악-
피리를 손에 쥔 준혁은 잠시 눈을 감고 그것의 기능을 파악하다 입가에 미소를 띠며 눈을 떴다.
“어, 어르신!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요?!”
피리로부터 퍼져나온 기이한 영기파동에 아르나프는 물론이고 아마르곤마저 눈을 반짝거렸고, 혹시나 준혁에게 일이 생긴 건 아닌가 하고 청명을 따라 한나절을 날아온 사쿠라와 도천도 호기심에 눈을 빛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놀란 건 청명이었다.
“어, 어르신?”
평소 절대 되묻는 일이 없던 청명이 말을 더듬으며 재촉하는 걸 보며 준혁은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유지했다.
그리고는 청명을 향해 한걸음 크게 움직였다.
“오래전 나에게 말했었지. 네 신분에 비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우스갯소리로 한 것이었지만, 아주 어릴 땐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었기에 청명은 얼떨떨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습니다요.”
“어쩌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도 있을 것 같구나.”
“예에?!”
어느새 청명 바로 앞까지 접근한 준혁은 손을 들어 당황한 그의 이마를 콕 찍었다.
그러자 청명이 감전된 사람처럼 경직됐다.
“으….”
모두의 호기심이 집중된 사이. 준혁은 청명에게 유형화된 영기를 흘려보내 그의 모든 걸 낱낱이 파악하고는, 단(丹) 안으로 기를 흘려보내는 위험천만한 일까지 시행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구나.”
잠시 후. 준혁이 손을 거두자, 몸의 통제권을 되찾은 청명이 차마 그를 닦달하지는 못하고, 눈으로 맹렬한 신호를 보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준혁이 입을 열었다.
“너는 이 대륙을 대표하던 네 종족에 대해 들어보았느냐?”
어느덧 하나씩 흘러나오는 구지대륙과 그에 관한 이야기들.
준혁의 설명이 끝나자 청명의 얼굴엔 아리송한 표정이 머물렀다.
자신의 신분을 알게 된 것에 대한 기쁨과 동시에 불신, 그리고 당황이 뒤섞여 있었다.
“그러니까…. 제가 현무 일족을 모시던 제사장의 후예란 말입니까요?”
현무 꼬마가 만든 가짜 제사장이 아르나프라면, 청명은 너무나 미약하지만, 현무 일족의 피가 흐르는 진짜 후예.
다만 그 피가 너무나 옅어 혈맥의 힘이 발현하지도 못한 상태였고, 준혁이 어느 정도 확신하고 검사했기에 알아낸 사실이었다.
만약 그전에 현무 일족의 원영을 흡수하지 못했다면 절대 알아차리지 못했을 일.
“그래.”
준혁은 청명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 준 후, 그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는 구속돼있던 아르나프에게 다가갔다.
“이제 유적으로 안내하거라.”
***
타르 사막의 중심부를 벗어나, 왕궁에서 북쪽으로 날아가자, 모래가 지하로 끊임없이 흘러 들어가는 유사가 나타났다.
유사를 통해 지하로 내려가자, 어두컴컴한 공동이 존재했고, 모래는 공동을 지나쳐 더 깊은 바닥으로 쏟아지듯 들어가고 있었다.
“이곳입니다.”
모래를 따라 더 깊은 곳으로 이동하지 않고 공동 한쪽으로 이동한 아르나프는 준혁이 따라오는지 곁눈질하더니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이동하자, 두 사람 앞엔 무너지기 직전인 듯 여기저기 금이 나 있는 석굴이 나타났고, 그 끝에 자리한 석문을 마주할 수 있었다.
“말씀드린 대로 이곳부턴 일족의 후예만이….”
준혁은 아르나프의 설명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석문을 살폈다. 그리고는 다가가 손을 대자, 석문이 진동과 함께 너무 쉽게 열렸다.
쿠르릉-
“어찌 이것이!”
준혁이 원영을 흡수해 혈맥의 힘을 얻었단 걸 모르는 아르나프는 일족의 피를 지닌 자만 통과할 수 있는 문이 너무 쉽게 열리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걸 받게.”
석문이 열리며 전송진처럼 보이는 푸른 막이 나타나자, 준혁은 아르나프를 향해 정혈 한 방울을 날려 보냈다.
“이건….”
“살고자 한다면 받아들이시게.”
피리를 통해 봉인지에 대한 정보를 알아낸 준혁은 아르나프에 대한 처우를 조금 변경했다.
처음부터 자신에게 피해를 준 것도 없었기에, 얻을 것만 얻고 방관하려던 계획에서 조금 적극적으로 포섭하려는 것.
금제를 통한 포섭도 포섭으로 친다면 말이다.
그리고 준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린 아르나프.
“...설마, 또 이곳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까?”
이곳이란 유적과 봉인지가 위치한 타르사막 전체를 의미했다.
준혁은 고갤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겠나? 자네가 짐을 벗어 던지고 홀가분해 하는 걸 봤는데 말이지. 봉인지에 방문할 때 도움을 받을 것이 있으니, 그것만 해결하면 그 후엔 원하는 대로 살면 되네. 다만 이 관계를 유지하면서.”
준혁의 말이 끝나자, 아르나프는 고민도 없이 정혈을 받아들였다.
완영기에 올라 준혁을 제외하곤 인세 최강자라 하지만, 이미 압도적인 차이를 느꼈기에 어리숙하게 도망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의 담대한 행동과 남다른 눈치에 준혁은 만족한 듯 웃어 보이고는 석문으로 발을 옮겼다.
“밖에서 다른 이들과 기다리도록 하게. 청명에게 자네가 알고 있는 현무 일족에 관한 걸 전부 알려주고.”
“알겠습니…. 뭐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이번에도 금세 싹싹하게 태도를 바꾸는 아르나프의 모습에 준혁은 눈을 흘겼다.
“알아서 하게.”
***
사방으로 50여 미터는 넘을 것 같은 공동, 공동 한가운데 위치한 높다란 석탑. 그리고 바위와 흙을 표현한 듯한 문양이 새겨진 비석까지.
세상이 반전되는 느낌과 함께 이동된 준혁은 낯설지만 익숙한 풍경에 자신이 제대로 찾아왔다고 느꼈다.
“백호 유적과 흡사하구나.”
그리고 전송진을 통과하며 느낀 감각의 여운을 느끼며, 오래전 백호 유적에 들어간 것은 행운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땐 진법을 건드린 결과 우연히 백호 유적으로 이동됐고, 그 와중에 자비에가 끌려온 것이라 여겼었다.
하지만 전송진이 발동되며 정상적으로 이동하며 느낀 바에 의하면, 아르나프의 말대로 일족의 후예가 아니면 우연히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 바로 이곳.
그때 백호 유적으로 전송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자비에가 마지막에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아마도 진법이 발동되며 이상한 곳으로 무작위로 이동됐을 가능성이 컸다.
“아마 그자의 몸속에 청명처럼 백호와 관련된 기운이 있었던 것이겠지.”
자비에의 가문이 백호를 숭배하던 영수 가문이었단 걸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준혁은 잠시 백호 유적을 탈출하지 못했던 자비에를 떠올리다, 기감을 유형화시켜 사방으로 퍼트렸다.
수행이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기에, 유적에서 위험할 일은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습관처럼 행동한 것.
파앙-
잠시 후, 특별한 이상을 찾지 못한 준혁은 본인의 행동에 피식 웃고는 석탑의 거대한 문을 열었다.
***
저벅저벅-
거대한 문 뒤 통로를 지나자, 백호 유적과 마찬가지로 중앙 석실과 사방으로 뚫린 통로가 나타났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땐 모든 것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면, 지금은 텅텅 빈 석실만이 존재한다는 사실.
준혁은 기감을 통해 모든 석실이 텅 비었다는 걸 확인했지만, 다시 한번 석실을 눈으로 확인했다.
“흠. 혹시나 했는데…. 예상이 틀렸나?”
준혁이 유적에 들어온 이유는 온전한 현무진식과 봉인지에 관련된 정보를 조금이라도 얻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남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작은 허탈감마저 느껴졌다.
좌우 석실을 확인한 준혁은 중앙 석실을 지나쳐 마지막 석실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현무 형태의 진묘수가 사방을 점하고 있는 텅 빈 단을 마주할 수 있었다.
현무 일족의 꼬마가 잠들어있던 곳으로 예측되는 곳을 지나친 준혁은 곧장 돌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역시.”
2층 역시 백호 유적과 동일하게 한쪽엔 수련을 돕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고, 반대편엔 각종 단약과 청혈 같은 것들이 있었을 것으로 의심되는 텅 빈 단상이 놓여있었다.
“괜한 걸음을 했군. 당연한 결과인 것을.”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현무 일족의 꼬마도 유적의 물건들을 전부 거둬간 것 같았다.
다만 준혁이 일말의 기대라도 했던 이유는 현무 꼬마를 처리하고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아르나프도 옥패를 제외하곤 가진 게 없었기 때문.
그랬기에 단약을 비롯한 것들은 전부 먹어 치웠지만, 공법이나 술법이 적힌 옥석과 법기류는 그대로 이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그때 실망에 가득 차 있던 준혁의 고개가 홱 하고 빠르게 들렸다.
“이건!”
백호 유적처럼 2층이 끝일 거라 생각했던 유적.
준혁의 유형화된 기감이 2층 위, 또 다른 공간이 있음을 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