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실력 (2)
준혁의 발언에 아마르곤은 침묵으로 그의 말에 동조했다.
스퀘타와 준혁이 맞붙기 시작할 때만 해도, 누군가 다치거나 잘못될 줄 알고 조급해졌었다.
하지만 여유롭게 실력을 발휘하는 준혁 때문에 마음의 평정을 찾았기에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저는 수사의 의견을 따를 테지만, 이 친구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아마르곤이 얼음 속 여인을 바라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짓자, 준혁이 그녀의 얼굴이 위치한 자리에 손을 얹으며 입을 열었다.
“그것 역시 방법이 있습니다. 수사는 지켜보시면 됩니다.”
준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손끝에서 금빛 실이 방출되며 스퀘타를 꽁꽁 싸매버렸다.
직후 얼음이 천천히 녹아들더니, 녹아든 얼음이 사라지지 않고, 그녀의 팔과 다리로 이동해 영기를 구속하는 팔찌, 발찌가 되었다.
이 방법은 월광지력에 디버프 효과를 지닌 백호 혈맥의 힘을 접목한 것으로, 연형기에 오르며 얻은 성과 중 처음으로 선보이는 것이었다.
얼음이 사라지자, 스퀘타는 곧장 정신을 차리고는 영력을 움직이려다 움찔 몸을 떨었다.
“감히 나에게!”
“수사, 잠시 진정하시고 제 말을 들어보시지요.”
“어떤 방법으로 이렇게 빨리 수행을 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아하긴 일러. 여기가 어딘지 까먹은 건 아니지?”
스퀘타는 준혁과 전투를 진행하는 사이, 목족의 경계를 살짝 지나쳐있었다. 그것이 다행이라 여긴 준혁은,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발밑으로 토율서를 내려보냈다.
“스퀘타. 흥분하지 말고 얘길 들어봐. 여기 최준혁 수사는 예전 너와 한 약속을 지키겠다고 이곳에 온 거야.”
“흥! 아마르곤. 너는 배신자야! 인족과 짜고 날 이렇게 만들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아.”
여인의 말에 아마르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어. 널 부른 적도 없고, 최 수사를 돕지도 않았으니까. 너도 알고 있잖아? 우리가 정체되어 있는 동안 그가 우리를 뛰어넘어 버렸단 걸.”
“... 인정 못 해! 인족 따위가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어! 겨우 이백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완영기를 넘어 연형기에 도달했다고?! 거기다 저 녀석….”
분에 받친 듯 소릴 지르던 스퀘타는 자신을 보고 생글거리는 준혁을 노려보다가, 충격에 빠진 모습으로 말을 잃었다.
그리고는 처음으로 분노나 공격적인 태도가 아닌, 의문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너….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지?”
그녀의 물음에 준혁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무엇이 말입니까?”
“너….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는 거지? 왜 계면이…. 그러고 보니 나는 왜?”
당황해하는 스퀘타의 모습에 준혁이 가볍게 수결을 맺으며 그녀를 가리켰다.
쿠르릉-
그 순간. 허공에 영기가 뭉쳐 들더니 뇌전이 작렬했다.
“계면을 조종한다고?”
세상에 배신당했다는 듯 망연자실한 스퀘타에게 떨어지는 뇌전을 가볍게 처리한 준혁은 서둘러 다시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영기 뭉침이 흩어졌다.
사실 준혁이 스퀘타의 영력을 완벽히 구속한 건 그녀를 제어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아직 무영기를 자유자재로 늘릴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택한 방법이었다.
스퀘타를 보호하기 위해 월광지력으로 그녀를 얼릴 때, 극도로 얇은 무영기를 방출했는데, 만약 그녀가 영력을 사용한다면 계면의 압박이 급상승해, 자신의 무영기로는 그녀를 보호할 수 없었던 것.
준혁은 아마르곤에게 말했던 것처럼 목족과의 연계도 끌어낼 생각이었고, 그러기 위해선 목족의 여왕을 설득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녀를 설득하기 위한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계면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방법, 바로 무영기였다.
“어때 이제 제 이야기를 들어볼 준비가 되셨습니까?”
“......”
“수사께서 저와 대화를 나눌 생각이 있으시다면, 그리고 우리가 좋은 방향으로 함께 나아갈 수 있다면. 계면의 압박을 피할 방법을 알려드리지요.”
***
긴 설득의 시간도 필요 없었다.
연형기에 오른 후 평생을 죄수처럼 땅속 깊은 곳에서 벗어나지 못한 스퀘타는 준혁의 제안을 곧바로 받아들였다.
아마르곤에게 걸려 있는 모든 제약을 풀어주는 것뿐만 아니라, 준혁이 속한 세력에 한에서는 인족과 거래의 물꼬를 트겠다는 약속까지.
거기다 더해, 목족에게 잡혀 있는 인족들도 풀어주기로 했다.
다만, 예전 준혁이 방문했을 때 잡혀 있던 인족들은 대부분 죽어 땅의 영기로 돌아간 지 오래였고, 지금은 새로 잡힌 수사들만 소수 살아있을 뿐이었다.
원영기 수사인 리차드도 땅으로 돌아간 건 마찬가지였고, 중국의 왕웅과 남궁명만이 겨우 목숨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둘이 리차드보다 목족의 영지에서 오래 살아남은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그저 늦게 원영기에 올라 수명이 그만큼 긴 것뿐이었다.
“그럼 제 제안을 전부 받아들인다고 하셨으니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이행하시면 됩니다.”
마지막이란 말에 스퀘타가 눈을 빛냈다.
“말해봐. 대신 네가 전해준 방법이 나에게 효과가 없…. 아니, 우선 말해봐. 마지막으로 내가 해줄 건 뭐지?”
준혁은 곧바로 요구 조건을 말하지 않고, 아마르곤과 잠시 눈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무언가 고민을 하는 것 같던 아마르곤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마지막 요구 조건을 말했다.
동시에 준혁 앞엔 어느새 정혈 한 방울이 요사스럽게 떠 있었다.
“제 정혈로 수사에게 금제를 걸어야겠습니다. 받아주시겠습니까?”
“너!! 이게 목적이었어!!”
영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몸이 터져나갔을 정도로 그녀는 분노했다.
“스퀘타. 내 말 들어봐.”
“듣긴 뭘 들어!! 인족 따위가 여왕인 나에게 금제를 걸겠다고?!”
“대신 나도 그에게 금제를 걸 거야.”
“뭐?!”
스퀘타가 ‘뭔 개소리지?’라는 듯 얼굴을 구기자, 아마르곤이 빠르게 설명을 이었다.
“최수사가 너에게 금제를 걸려고 하는 건, 우리 목족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을 고려한 최후의 수단 같은 거야. 대신 나도 그에게 금제를 걸어 그가 너를 마음대로 휘두르지 못하게 할게.”
“맞습니다. 제가 왜 수사께 금제를 가하려 하겠습니까? 계면의 압박을 풀고 나서 수사께서 저와의 약속을 깨버리면 저는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아마르곤의 말에 준혁까지 거들고 나서자, 스퀘타는 무작정 화를 내지 않고 숙고의 시간을 가졌다.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인족 따위에게….”
“스퀘타. 기억 안 나? 바깥을 마음껏 활보할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겠다고 했던걸?”
“...젠장!”
욕설을 내뱉은 스퀘타는 한참 동안 준혁을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라는 그다지 와닿지 않는 협박과 함께 준혁의 정혈을 삼켰다.
그녀가 정혈을 삼키자, 이번엔 아마르곤이 초록빛을 띠는 구슬을 뱉어냈고, 준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몸 안에 받아들였다.
그 모습에 스퀘타가 조금 안심한 표정을 지었지만, 사실 그녀는 두 사람에게 속고 있는 것이었다.
조금만 깊게 따져 보았으면 알 수 있는 일이었지만, 당장 계면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에 생각이 짧아지고 만 것.
애초에 종속의 인으로 연결되어 있고, 특히 시전자인 준혁의 수행이 피시전자인 아마르곤의 수행을 앞지른 이상.
아마르곤은 준혁에게 어떠한 피해도 줄 수 없고, 해가 되는 행동 자체를 할 수 없는 입장이었으니 말이다.
***
“더는 봉인 결계를 연구할 필요 없습니다. 저와 함께 돌아가시지요.”
“최수사!!”
벽에서 자라난 나무줄기에 꿰여있던 왕웅과 남궁명은 준혁의 재등장에 다 죽어가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수백 년 전 잠깐 얼굴을 비추다 사라졌기에 그마저 목족에게 당했다고 생각했던 두 사람은 준혁을 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수사. 부탁드립니다.”
준혁이 그런 두 사람에게 가볍게 목인사를 건넨 후 아마르곤을 바라보자, 아마르곤의 손끝에서 녹색 이파리들이 날아가 두 사람에게 스며들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의 몸통을 꿰뚫고 있던 나무줄기가 스르륵 작아지며 자취를 감추었다.
“정말…. 정말 저희를 구해주시기 위해 오신 겁니까?”
왕웅이 황송하다는 듯 바라보자, 준혁은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얄팍하게 생긴, 피부가 새파란 목족인 한 명이 나타나 대기했다.
준혁은 수행이 낮은 목족인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후, 왕웅과 남궁명을 불렀다.
“이분을 따라가시면 이곳을 벗어날 수 있으실 겁니다. 앞으로 이곳 수사들과 친선을 다지기로 했으나, 두 분이 이곳에 머무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니 빠르게 비경을 벗어나길 바랍니다.”
왕웅과 남궁명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다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삼각비경이 나가고 싶다고 마음대로 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두 사람의 심리를 꿰뚫어 본 준혁은 왕웅에게 옥간 하나를 건네주었다.
“북쪽 끝에 가면 밖으로 나갈 출구가 있습니다.”
“정말입니까?! 최수사!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말로만 듣던 선배님을 이렇게 뵙게 된 것도 영광인데…. 도움까지 받다니. 제 목숨을 살려주신 은혜, 꼭 갚겠습니다. 남궁가의 남궁명! 가문의 이름을 걸고 수사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잠시 후, 몇 마디 주의사항을 전해 들은 두 사람이 원영기 목족을 따라 거주지를 벗어나자 준혁은 아마르곤, 산들바람과 함께 여왕의 거처로 이동했다.
이제 그녀가 무영기를 터득할 수 있게 돕고 나면 이곳에서 할 일은 끝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
목족의 여왕이 무영기를 터득할 수 있게 도운 준혁은 계면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그녀에게 막대한 선물을 받은 후 목족의 대지를 벗어나고 있었다.
계면의 압박에서 벗어난 여왕은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들에겐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인간들에겐 연단에 핵심이 되는 수많은 재료를 잔뜩 넘겨주었고, 재료 중엔 오조화채까지 가득해, 산들바람마저 덩달아 어깨를 들썩거리게 했다.
“수사,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우리 사이에 부탁이란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준혁의 비행법기에 올라 날아가던 중. 아마르곤이 망설이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곳을 벗어나면 인도라는 곳으로 간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흠. 그렇다면, 그곳에 가기 전…. 다른 곳들을 둘러볼 수 있겠습니까?”
“다른 곳 어딜 말입니까?”
준혁이 고개를 갸웃하자 아마르곤은 수학여행을 떠나는 어린아이처럼 기대감에 부푼 표정을 했다. 가늘던 그의 눈이 더욱더 길게 늘어졌다.
“장소를 정해두진 않았으나 이곳을 떠나 다른 곳들을 구경하고 싶습니다. 인도라는 곳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 급한 게 아니라면. 조금만 세상을 둘러보고 싶습니다.”
아마르곤이 시선을 멀리 옮기자, 준혁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목족의 여왕만큼은 아니었지만, 기나긴 삶을 비경 안에서만 살아왔으니 오죽했으랴.
특히나 그들은 비경 전체가 아닌 목족의 대지라는 비좁은 땅에 뿌리를 두고 살아갔기에 그 마음이 더욱더 이해가 갔다.
“물론입니다. 그럼 지구라고 불리는, 제가 사는 세상을 한번 둘러보고, 이곳처럼 비경이라 불리는 곳을 차례대로 방문해 보지요.”
“부끄러운 부탁을 드렸는데 수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사.”
아마르곤은 준혁이 허락해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당장 이행할지는 몰랐다는 듯 크게 웃어 보였다.
다른 세상을 구경할 수 있다는 생각에 두근거림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법기가 날아가는 방향을 계산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그런데. 지금 밖으로 가는 것 아니었습니까? 이 방향은….”
아마르곤의 의문에 준혁은 별일 아니란 듯 피식 웃어 보인 후, 비행법기에 영기를 더 강하게 집어넣었다.
“아, 이곳을 떠나기 전에 들를 곳이 있어서 말입니다. 수사는 기억하십니까? 오래전 제가 호하 수사를 얼려버렸던 호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