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195화 (195/408)

195화. 연형기 (3)

청명을 비롯한 전원이 물러간 후.

유일하게 성인봉에 남아있던 산들바람이 머뭇거리며 서 있자, 준혁이 그녀 곁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준혁이 다가서자, 산들바람이 깜짝 놀라며 뒤로 크게 물러섰다.

“잠깐! 크, 큰둥이 너! 정말 큰둥이 맞아?”

“그게 무슨 말이지?”

“그 뿔 말이야. 거기서 그놈들의 기운이 느껴졌어.”

준혁은 산들바람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닫고는 손을 가볍게 저어 마족의 뿔을 소환해 한 손에 쥐었다.

“그래! 그거! 분명 그 악랄한 그놈들 것과 똑같아!”

눈을 치켜뜨며 자신을 경계하는 산들바람을 보며 준혁은 피식 웃었다.

생각해보니, 산들바람이 속한 적호족을 비롯한 내경에 살아가던 영수족은 마족과의 전투에서 수많은 족인들이 죽임당하고 중경까지 밀려난 경험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산들바람 역시 언니가 행방불명되고 가깝던 족인들을 잃었으니 마족의 기운을 느끼고 몸서리치는 게 이해가 갔다.

산들바람이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깨달은 준혁은 마족의 뿔에 영기를 주입해 기운을 바꿔버렸다.

“염려하는 게 이런 거야? 내가 마족에게 조종당하는 걸까 봐?”

진득한 마기를 흘리던 마족의 뿔이 청량한 푸른 기운을 내뿜기 시작하자, 산들바람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기운이 변했어? 그런 게 가능해?”

마족의 뿔이 완영기 마족의 찌꺼기로 만들어져 순수한 마기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준혁에게 완벽하게 체화되었기에 그의 의지하에 어떤 식으로든 변형이 가능한 상태였다.

“물론. 바람꽃을 구할 때 우연히 마족의 능력 중 일부를 얻었어. 이 뿔은 그 힘을 이용해 만든 것이고.”

원영을 흡수할 수 있다고 한다면 또 다른 오해 소지가 있었기에 조금의 거짓을 섞었다.

“그럼 그놈들로 갑자기 변하거나 그러진 않는 거지?”

준혁은 산들바람의 걱정에 가볍게 고개를 저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그녀 곁으로 이동해, 움찔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 마. 그리고 조만간 비경으로 돌아가자. 이제 네가 싫어하는 그놈들을 전부 제자리로 돌려보내야지.”

제자리가 어디인지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

“어르신,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요.”

연형기에 오른 걸 축하하기 위해 모여든 수사들을 전부 돌려보낸 준혁은 그 후로 내면을 천천히 돌아보며 앞으로의 일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인기척과 함께 청명이 나타나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미 기감을 통해 울릉도로 속속들이 모여드는 이들을 전부 파악하고 있었기에, 청명이 나타나지 않아도 움직일 요량이었다.

“그래. 가자꾸나.”

잠시 후, 청명을 따라 마선문이 위치한 나리분지로 이동한 준혁은 분지를 가득 메운 사람들을 마주했다.

웅성웅성-

도떼기시장처럼 시끄럽던 분지 안, 준혁의 등장과 함께 적막이 찾아왔다.

그리고는 마치 미리 입을 맞춘 것처럼 모든 이들의 입에서 같은 말이 터져 나왔다.

“연형을 완성하신 것을 감축드리옵니다!”

마선문 본청 건물 앞. 단상에 내려선 준혁은 수많은 수사들을 천천히 살펴보고는 한 손을 들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파앙-

메아리처럼 퍼져나가던 수사들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늘 나는 이 자리에서 그동안 내가 얻은 깨달음을 전해주려고 한다.”

준혁의 목소리는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릴 만큼 작았는데, 신기하게도 분지 전체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귓가에 또렷하게 박혀 들어갔다.

“앞에 자리한 자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빨리 시작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군.”

준혁이 설법을 시작하려 하자, 가장 가까운 자리에 대기하고 있던 제이엘을 포함한 원영기 수사들은 눈을 빛내다가 준혁의 말에 움찔하고는 어색해진 표정으로 시선을 살짝 피했다.

그들은 준혁이 완영기를 넘어 연형기에 이르렀다는 것에 놀랄 틈도 없이, 깨달음을 전파한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빨리 울릉도로 날아와 지금껏 대기한 상태.

원래 섭식을 하지 않으니 식음을 전폐한다는 표현은 웃겼지만, 그들은 그 정도로 간절하게 준혁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이 얼마나 반짝였으면 준혁이 농담으로 분위기를 살짝 환기하려 했겠는가?

눈앞 원영기 수사들이 살짝 뻘쭘한 표정을 짓자, 준혁은 피식 웃어 보인 후, 시선을 멀리 두며 말을 시작했다.

“그럼 각론을 논하기 전 영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내가 느낀 바를 말하겠다. 무릇 영기란 세상 모든 물질에 균일하게 포함되어있다. 나는 그것을 가리켜….”

준혁이 ‘영기란 무엇인가?’로 말문을 열자, 시선을 피했던 원영기 수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며 준혁을 바라보았다.

마치 준혁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씹어먹기라도 할 듯 굶주린 표정이었다.

결단기 수사들도 평생 만나볼까 말까 한 기연을 얻었단 표정으로 준혁의 말을 경청했고, 몇몇은 술법을 이용해 준혁의 말을 옥간에 옮겨 담기도 했다.

축기기 수사들은 준혁의 설명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었고, 연기기 수사들은 이해하진 못했지만, 분위기에 취해 마치 득도한 도인 같은 표정을 했다.

하지만 몇몇은 연기기, 축기기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깨달은 얼굴로 연신 감탄을 뱉어내고는 서둘러 명상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렇게 준혁의 말이 이어질수록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을 돌아보는 계기를 얻었고, 그런 시간은 열흘이 넘게 이어져 갔다.

열흘 후.

“이상으로…. 모두에게 선도의 길이 비치길 바란다.”

준혁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수 있는 설법을 마치며, 자신의 의지와 뜻을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발휘하고 있던, 수련에 도움이 되는 지목족 혈맥의 힘을 갈무리했다.

“......”

어느새 분지 안엔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누구 하나 감사를 표하지도 않았고,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산들바람을 제외한 원영기 수사들은 각자 깨달은 바를 되새기기 위해 눈을 감은 채 명상에 빠져있었고,

결단기 수사들도 제각각 얻은 것을 다시 한번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그런 고위 수사들의 영향과 알 수 없는 기운이 몸을 내리누르고 있었기에, 축기기와 연기기 수사들은 눈치를 보며 설법이 끝난 후에도 움직이질 못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의도한 바였기에, 준혁은 그런 수사들을 만족한 듯 바라보고는 산들바람에게 손짓했다.

-이들은 내버려 두고 돌아가자.

혈맥의 힘으로 고위 수사들을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 깊은 사색에 빠지게 만든 준혁은 혹시라도 산들바람으로 인해 그것이 깨어질까 봐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산들바람도 전혀 눈치가 없는 건 아닌지, 그런 준혁의 부름에 말없이 다가왔고, 잠시 후 둘은 궤적을 남기며 성인봉으로 날아갔다.

그로부터 꽤 시일이 지난 후.

제이엘을 비롯한 울릉도의 원영기 수사들, 그리고 새롭게 원영기에 오른 자들이 준혁을 찾아왔지만, 준혁은 이미 섬을 떠났는지 찾을 수 없었다.

연형기에 오른 후 자신이 할 도리를 했다고 여긴 그는, 이제 자신에게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길을 떠난 것.

선계로의 문, 그것을 열어야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건 미뤄두었던 사신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걸 뜻했다.

***

한편, 사람들이 준혁을 만나러 성인봉에 온 그때.

준혁은 산들바람과 함께 버뮤다 삼각비경 안 목족의 대지에 근접해 있었다.

“누굴 만나러 가는 거야?”

산들바람은 처음 보는 삼각 비경의 모습에 쉴 새 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너처럼 나와 종속의 인으로 연결된 수사.”

“친구야?”

친구냐는 질문에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산들바람이 평소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쉽게 알 수가 있었다.

‘역시, 종속을 그저 마음이 연결되는 거라고 여기고 있군.’

바람꽃과 함께 열심히 설명해주었지만, 애초에 산들바람은 준혁과 함께하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에 종속의 인을 요구한 거지, 종속이라는 게 얼마나 무겁고 무서운 것인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싶었다.

“친구라…. 친구라면 친구일 수 있고. 아니라면 아닐 수 있는 존재지.”

“그 수사도 나처럼 영수족?”

“아니. 목족.”

목족이란 말에 산들바람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목족 수사는 처음이야! 궁금해!”

“내가 이곳에 온 걸 느꼈으니 조만간 나타날 거야.”

아니나 다를까.

준혁이 말을 끝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앞에 꽃잎이 흩날린다 싶더니, 땅에서 나무줄기가 급격하게 자라 올라와 두 사람을 막아섰다.

“윽! 이게 뭐야!”

산들바람의 놀람을 뒤로한 채, 나무줄기는 천천히 사람의 형상으로 변하더니 어느새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수사. 돌아가십시오. 예전 일로 그녀가 많이 노해있습니다. 이번엔 정말 큰일이 날 수도 있습니다.”

아마르곤의 등장에 산들바람이 한껏 경계심이 키우는 사이, 준혁은 그에게 다가가 반가움을 표했다.

“오랜만입니다. 수사. 잘 지내셨습니까?”

“흐음…. 수사. 무슨 연유로 또 방문하신 겁니까?”

“아마르곤 수사는 제가 반갑지 않으신가 봅니다.”

장난기 가득한, 그러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기뻐하는 준혁의 눈빛에 아마르곤은 곤란하다는 듯 혀를 찼다.

“수사. 그녀는 수사가 또 나타날 거라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고요. 아마 이번엔 절대 도망가실 수 없을 겁니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아마르곤의 모습에 준혁은 태도를 고치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이곳에 온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마르곤 수사.”

“예. 말씀하시지요.”

“저와 함께 이곳을 나가시는 건 어떠십니까?”

갑작스러운 제안에 아마르곤의 가늘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예전 그대의 여왕에게 했던 말이 거짓은 아닙니다. 실제로 선계로 문을 열 방법이 있습니다. 허나 그러기 위해선 수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떠십니까? 저를 도와주신다면 그대와 함께 선계로 가는 것은 물론이고, 훗날 이곳으로 통로를 열어, 그녀에게 했던 약속을 이행하겠습니다.”

준혁이 말을 끝내자 아마르곤은 고심하는 듯 턱을 매만지다가 말문을 열었다.

“수사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건 충분히 느껴집니다. 정녕 다른 목적이 아닌 저를 데려가기 위해 오신 거란 말입니까?”

기쁨과 망설임, 그리고 걱정이 뒤섞인 아마르곤의 표정에 준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흐음…. 진심이시군요. 혹 저를 왜 데려가려는지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종속의 인이 걸려 있었기에 예전부터 준혁과 함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또 그로 말미암아 좁은 비경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아마르곤.

하지만 한편으론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 타 종족으로, 특히 온전한 한 명의 수사가 아닌, 누군가에게 종속된 상태로 방문한다는 것이 매우 꺼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여실히 느낀 준혁은 공간대에서 옥간 하나를 꺼내 이마에 댄 후, 그것을 아마르곤에게 넘겨주었다.

“선계로 가기 위해선 네 사신의 힘을 얻어야 하는데, 제가 그들에게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선 그들의 힘을 우회해서 얻어내야만 합니다.”

백호의 의식으로 자아가 변해가던 걸 떠올린 준혁은 이맛살을 구긴 채 말을 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몇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다만 그 방법을 사용하기 위해선 믿을 만한, 최소한 완영기 이상의 수행을 지닌 수사의 도움이 필요하더군요. 그리고 제가 가장 믿을 수 있는 건…. 바로 수사이고요.”

준혁의 설명에 옥간 속 내용을 확인해본 아마르곤은 침음을 흘렸다.

“흐음….”

준혁의 말대로 둘은 평범한 종속 관계가 아니었다.

아마르곤의 썩어가던 원영을 준혁이 정화하면서 둘은 종속의 인으로 연결된 것 그 이상의 친밀감을 가지게 된 것.

준혁의 말, 그리고 준혁과 연결된 끈.

아마르곤은 준혁의 진심이 느껴졌기에 당장이라도 긍정적인 답변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허락해주지 않을 겁니다.”

“허락이요? 이곳을 벗어나는 데 그녀의 허락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준혁이 의문을 드러내자, 아마르곤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우리 족인들은 적유목을 통해 그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끊어내지 못한다면…. 온전하게 제 의지로 그녀를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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