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연형기 (2)
조용하게 어둠이 내려앉은 성인봉 정상.
준혁은 눈을 내리깔고 석상처럼 미동도 없이 좌정한 채, 내면으로 침잠해 있었다.
쩌적-
잠시 후 알에서 깨어나듯 주위 영기가 유형화되었다가 산산이 조각나며 준혁이 두 눈을 번쩍 떴다.
흐으으읍-
세상을 마실 것처럼 숨을 들이켠 준혁이 날숨을 내뱉으며 입가를 올렸다.
“이것이 연형기….”
한동안 고양된 세상을 만끽한 준혁은 기쁨을 천천히 가라앉히며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허공을 쥐었다.
그러자 그의 손짓에 따라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실재하는 무언가처럼 응축되더니 파앙- 하고 터져나갔다.
명혼단을 흡수하며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영기의 유형화.
준혁은 세상에 균일하게 퍼져있는 영기를 직접적으로 체감하며 손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난 건지 가볍게 한숨 쉬며 손을 홱 돌렸고, 어느새 그의 손엔 거무튀튀한 뿔이 들려있었다.
“위험했어.”
영기구름으로 뭉친 막대한 영기를 빨아들이며 수행을 점진적으로 올리던 그때, 준혁은 생각지도 못한 경험을 하게 되었었다.
몸속에 녹아들어 있던 백호 혈맥과 용각족 혈맥의 힘 외에도 마족의 마기가 발현되기 시작했고, 그것이 몸을 변질시키려고 했던 것.
마족의 마기는 두 명의 완영기 마족의 원영을 흡수하고 남은 찌꺼기 같은 것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혈단법으로 기를 흡수했을 때 몸에 쌓이게 된 탁기와도 같았다.
찌꺼기는 다른 의미로는 의식의 잔재 같은 것이었는데, 그것을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준혁은 백호의 의식 조각을 처리했을 때처럼 소멸시켜버리려 했다.
하지만 수행을 올리는 행위 자체가 그것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만약 강제로 마족 원영 찌꺼기를 처리한다면 그 과정에서 하늘과 닿아있던 연결이 끊어져 버릴 수도 있었던 것.
그렇게 된다면 수행 상승은 또 한 번 좌절되고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릴 소지가 다분했다.
결국 준혁은 마족 원영의 찌꺼기를 처리할 방법을 모색하다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수법으로 현무 일족 원영을 흡수하기에 이르렀다.
몸속에 들어와 준혁에게 강제 흡수당하던 현무 일족의 원영은 다행히도 준혁의 뜻대로 움직였고, 마족 원영의 찌꺼기와 서로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그때 백호, 용각족의 혈맥의 힘을 움직였다.
그러자 일련의 사태가 전화위복이 되어 준혁은 마족 원영 찌꺼기를 처리함과 동시에 현무 일족의 원영까지 안전하게 흡수할 수 있게 되었다.
평온한 겉모습과는 달리 위험천만한 과정이 지나자, 그 과정에서 크나큰 이득도 생겨났다.
그게 바로 준혁이 손에 들고 있는 마족 원영 찌꺼기가 유형화된 마족의 뿔.
준혁에게 완전히 체화된 마족의 뿔은 마족 특수 공법인 전영술을 한층 더 강하게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예전에 가끔 사용했던, 형태를 변환시키는 흑몽환처럼 형태를 바꾸는 공격 법기로 활용할 수도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득이 있었지.”
거기다 더해, 현무 일족의 원영을 흡수하며 꼬마가 유일하게 익혔지만, 방어기제가 심해 알아낼 수 없었던 현무진식.
온전한 형태의 현무진식은 아니었지만, 공법의 운용 원리와 그것이 적용되는 방법을 알게 되어, 어설프지만 현무 일족의 능력을 사용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제 토율서의 도움 없이도 토둔술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고, 토율서와 같이 공법을 운용한다면 땅속을 지상보다 편하게 이동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현무 꼬마의 원영이 두 완영기 마족보다 강대했기에 10할 흡수에 성공하진 못했고, 여전히 기운 일부가 몸속을 배회하며 섞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 준혁은 수행을 안정시키기 위해 다시 눈을 감고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
그로부터 몇 달 후.
수행을 공고히 다진 준혁은 가볍게 땅을 박차며 수백 미터 상공으로 솟아 올라간 후 멈춰 섰다.
“이제 확인을 해봐야겠지.”
연형기에 오르며 생긴 계면의 압박.
준혁은 오래전 호왕족 연형기 수사가 술법으로 계면의 압박을 피한 게, 실은 술법이 아닌 특수한 방법으로 계면을 속이는 행위였단 걸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때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연형기로의 진입과 동시에 무영기(無靈氣)라는 걸 만들어낸 준혁은, 무영기로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감싸, 계면이 자신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무영기란 말 그대로 영기가 존재하지 않는 일정 공간.
자연에선 존재할 수 없는 진공(眞空) 상태였다.
예전엔 그저 기감으로 확인할 수 없고, 기척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게 준혁이었다면, 이젠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
계면의 압박을 피하고자 고심한 결과가 준혁을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이끌어 버렸다.
다만 준혁의 능력으론 겨우 얇은 진공 막으로 자신의 몸을 감싸는 정도가 한계라는 게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었다.
허공에 멈춰선 준혁은 살짝 긴장한 얼굴로 수결을 맺은 후 자신의 심장과 단전을 짚었다.
그러자 눈에 보이지 않던 무영기 보호막이 사라지며 계면이 준혁에게 반응을 보였다.
우우웅-
잠시 후, 허공에 떠 있는 준혁 주위로 농밀한 영기가 뭉치기 시작했고, 눈 깜짝할 사이 그곳에서 뇌전이 만들어져 쏟아지기 시작했다.
번쩍-
콰과쾅!
계면의 압박으로 인한 뇌전이 쏟아지자, 준혁은 전면으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뇌전이 다가오던 방향으로 육각 타일의 보호막이 생성되며 그것과 맞부딪쳤다.
쾅!
본격적으로 연형기 수행을 드러내자, 목족의 여왕이 조심스럽게 능력을 사용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뇌전이 연달아 쏟아졌다.
콰쾅!
준혁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수결을 맺어 전면에 벽돌 두께의 육각 타일을 연달아 배치했고, 온몸에 반투명한 비늘을 돋구었다.
콰쾅! 콰과쾅!
하지만 귀원패의 방어 능력만으론 역부족이었을까?
계면의 압박이 만들어낸 뇌전은 횟수가 거듭될수록 강해지더니, 귀원패로 만들어낸 육각 타일을 전부 박살 내며 준혁에게 곧장 다가왔다.
그 모습에 준혁이 재차 수결을 맺었다. 꽃잎이 주위를 어지럽힌다 느낀 순간, 그의 발끝에서 시작된 금빛 실이 꽃잎과 만나더니 거대한 연꽃잎으로 변했다.
직후, 연꽃잎이 준혁을 보호하듯 감싸자, 뇌전은 그것을 뚫지 못하고 바스러졌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듯, 준혁 주위로 생성된 영기 뭉침은 더욱더 짙어졌고, 그 안에서 만들어진 뇌전은 세상을 녹여버릴 정도로 두꺼워지고 강렬해졌다.
콰쾅!!
잠시 후, 강해진 뇌전에 목족의 술법과 귀원패의 방어가 동시에 파괴되며 무력화돼버렸다.
그러자 준혁은 재빨리 수결을 맺은 후 입김을 불었고. 그 순간, 준혁의 등 뒤로 거대한 보라색 피부를 가진 환영이 나타나며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흠…. 전영술만으론 부족하겠어.’
보랏빛 환영이 나타나자 준혁은 거무튀튀한 뿔 두 개를 소환해내 연달아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두웅-
그러자 환영의 양어깨에 검은 뿔이 자라나더니 전영술이 한층 강화되며, 환영에게서 강렬한 마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곧이어,
콰과쾅!
또 한 번의 뇌전이 작렬했고.
마족의 전영술과 목족의 보호술, 거기다 귀원패의 능력과 월광지력까지 끌어올린 준혁은 간신히 뇌전을 막아내고는 한숨과 함께 양손을 합장했다.
“여기까지가 한계인가.”
허공 한점에서 또다시 뇌전이 만들어지려는 찰나.
준혁은 빠르게 합장했고, 그 행동과 동시에 무영기가 생성되며 준혁을 덮어버렸다. 직후 거짓말처럼 뇌전과 영기 뭉침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후우.”
준혁은 자신이 가진 수단 전부를 사용해도 점점 강화되는 계면의 압박을 스무 번 남짓 막아내는 게 한계라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것 한가지.
아마 목족의 여왕이나, 호왕족의 매혹하는구름이 이 광경을 봤다면, 준혁의 강함에 몸서리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들은 연형기에 오른 후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온전한 경지를 드러냈을 때 쏟아지는 계면의 압박을 열 번도 채 막아내지 못했으니까.
***
한편 준혁이 계면의 압박을 체험하며 실험하고 있는 사이.
섬 곳곳에선 수사들이 튀어나와 그 광경을 보며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설마 저 하늘에 떠 있는…. 도주님이신가?”
“그러네! 정말 도주께서 무언가를 막아내고 계셔! 세상에나!”
수행이 낮은 수사들은 수백 미터 상공에서 격렬하게 이루어지는 실험이 정확히 무언지도 파악하지 못한 채, 뇌전이 터져 나갈 때마다 퍼져나가는 영기파동에 몸서리를 칠 뿐이었다.
한쪽에선 사쿠라를 비롯한 산들바람과 최나연, 천이화도 그 광경을 지켜보며 자신들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깨닫는 중이었다.
“세상에…. 저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섬 따위는 재로 만들어버릴 것 같은 힘이 담겨있는데…. 최 수사는….”
그러다 마지막 뇌전이 터져나갈 때, 고개 들어 준혁을 주시하고 있던 이들이 전원 영기파동에 휩쓸리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으악!”
“엄마야!”
쿵! 철퍼덕-
유일하게 꼴불견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은 원영기 수사들만이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일련의 실험을 끝마친 준혁이 천천히 성인봉으로 내려서자, 원영기 수사들, 그리고 평소 준혁과 친분이 있던 이들이 앞다투어 그곳으로 날아갔다.
가장 먼저 도착한 건 사쿠라였다.
“수사! 아, 아니, 선배님! 연형기에 오르신 걸 정말 축하드려요!”
“사쿠라 수사. 듣기 민망합니다. 선배라니…. 평소대로 편하게 대해주시오.”
“아. 그, 그럴게요! 최수사 너무 축하드려요! 그런데 조금 전 그건 무엇이었나요?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사쿠라의 궁금증에 준혁이 입을 열려는 찰나, 또 다른 이들이 물밀듯이 속속 도착했다.
“주군! 감축드리옵니다!”
“도주께서 연형기에 오르시다니! 이 사실을 세상이 알게 된다면 감히 누구도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도천과 리암이 목소리를 높이는 사이, 다른 원영기 수사들도 도착해 준혁을 향해 몸을 숙였다.
‘완영기가 아니라 연형기라 정확히 알고 있구나…. 아! 산들 저 녀석이 말했나 보군’
준혁의 시야에 헤죽헤죽 웃고 있는 산들바람이 잡혔다.
그 후엔 청명을 비롯한 결단기 수사들이 조금 늦게 도착해 하늘을 우러러보는 사람들처럼 준혁을 경배했다.
준혁은 모든 이들의 인사를 가벼운 웃음으로 받아준 후, 무언가 기대감에 가득 찬 그들의 면면을 확인하고는 피식 웃음으로 화답하였다.
“그래, 다들 긴 시간 동안 고생 많았다. 내 오랜 시간 나를 돌이켜보며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지. 청명.”
덕담을 하는 건가? 하고 지켜보던 청명은 준혁이 갑자기 자신을 호명하자 벌떡 일어나며 대답했다.
“예!”
준혁은 빠릿빠릿한 청명의 모습에 웃음을 보이다가 바로 말을 꺼내지 않고 주변 인물들을 다시 한번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걸 무어라 해야 할까? 연형완성식? 이름이야 뭐라 부른들 상관있을까.”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준혁이 본론을 꺼냈다.
“이제 막 수행이 오르며 깨달음이 깊이가 가장 깊어진 이때, 너희들에게 가르침을 내리겠다. 섬 내에 수사 중 시간이 되는 자들은 전부 참석하고, 외부에 이 소식을 알려 다른 이들도 원한다면 배움을 얻어가라 전하거라.”
준혁의 말에 모두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완영기에 오른 수사의 가르침만 해도 원영기 이하 수사들에겐 금과옥조와 같은 것.
하물며 연형기 수사의 가르침이라면 그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말을 꺼내면 입이 아플 정도였다.
“다른 세력까지…. 말씀이십니까요?”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배움을 원하는 자가 있다면…. 단! 섬 내 수사들은 누구라도 상관없으나, 바깥에서 오는 이라면 결단기 아래 수사들은 받지 말거라. 어차피 얻어갈 것도 없을 테니.”
솔직히 섬 내의 연기기 축기기 수사들도 준혁의 가르침에서 얻어갈 건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다만 마선문에 입문한 후에 꽤나 빡빡한 일정과 임무로 수행을 올릴 시간이 부족한 이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주 작은 가능성이긴 하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계기로 엄청난 성장을 할 수도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