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또다시 100년
“산들 수사!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연형기라니?!”
도천의 얼굴엔 경악이 담겨있었다.
“응? 말 그대론데? 큰, 최 수사는 이미 완영기인데 당연히 다음은 연형기지.”
사람들 앞에선 큰둥이라고 편하게 부르는 걸 자제할 줄 알게 된 산들바람.
그녀가 자신의 언행에 만족하고 있을 때, 주변 인물들을 살펴본 도천은 또 한 번 충격에 빠졌다.
“설마…. 사쿠라 수사는 알고 계셨습니까? 도율 수사도?”
심지어 리암마저 어느 정도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설마 완영기일 줄 몰랐지. 다만 평범한 원영기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도주께서 저를 구해 주실 때 그곳 영수들의 수행을 생각한다면…. 완영기라는 말에 의문이 풀리는 느낌입니다.”
사쿠라와 도율은 자신들이 구해질 때를 떠올리며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도천만이 꿈에도 몰랐던 듯, 하늘을 잠식하듯 퍼져가는 영기 구름을 보며 탄식을 뱉어냈다.
“주군께서…. 완영기…. 이젠 연형기라니….”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준혁의 수행증진진법은 원영기 수사들에게도 큰 효과가 있었다. 같은 원영기임에도 그런 효과를 보였다는 것보다는 완영기 수사가 아래 수사들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게 상식적으로 더 맞았다.
그때 수 킬로가 넘게 커지던 영기 구름이 크게 출렁하며 기이한 파동을 퍼트렸다.
기이한 파동에 비행을 유지하고 있던 수사들은 비틀하더니 균형을 잃었고, 섬을 벗어나고 있던 저급 수사들 몇몇은 바닥에 쓰러지기도 했다.
“원래 연형기에 오르면 이러는 걸까요? 뭔가 이상하네요.”
누군가의 혼잣말에 사쿠라가 심각한 표정을 했다.
“아니. 이상하네. 마치 뭉치지 못하고 영기가 충돌하는 느낌이야.”
사쿠라의 말대로 하늘 한쪽을 가득 채워가던 영기 구름은, 평소 원영기에 오를 때처럼 점점 넓어지며 안쪽으로 뭉쳐가던 것과 달랐다.
영기들이 일정량 뭉쳐 보랏빛 광채를 내뿜으며 서로 충돌했고, 뇌전을 뿜어댔다.
“설마….”
그때, 누군가의 안타까운 목소리에 반응을 보이기라도 하듯, 하늘에 모여들던 영기 구름이 빠르게 소멸하기 시작했다.
***
“아직은 무리구나.”
100년간 수십 개의 명혼단을 체화시킨 준혁은 그보다 수십 배 많은 1품 화목단을 섭취했고, 어느덧 완영기 후기에 다다른 상태였다.
사실 그가 완영기 후기에 오르게 된 건, 화목단의 역할보다는 완영기 마족 두 명의 원영을 흡수한 게 더 주요하게 작용했다.
원영을 흡수한 준혁은 완영기 후기에 오르고 나서도 조금 더 성장할 가능성을 느꼈고, 욕심을 내고는 바로 연형기에 오르는 것에 도전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
하늘은 아직 준혁의 성장을 원하지 않는지, 제대로 된 영기 구름을 불러오기도 전에 뭉쳐 들던 영기들이 서로를 배척하며 충돌했다.
사람들은 영기 구름이 모여들 때 생겨나는 오색구름 현상이 영기 구름의 자체 효과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수행을 올리는 수사에게 맞는 다섯 가지 기운이 모여들어 한데 어우러지는 현상이었다.
아쉽게도 준혁은 그 기운들을 조화롭게 이끌지 못했고, 서로 충돌하고 소멸해 버린 것이었다.
“어쩔 수 없지. 이번엔 내 욕심이 앞섰다.”
상공에 모여들던 영기 구름이 소멸하는 걸 느끼며, 준혁은 자신이 실패한 원인과 앞으로 준비해야 할 것들을 따져보며 묵상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1년 후, 사람들은 준혁이 수행 상승에 실패한 충격으로 칩거에 들어갔다고 생각할 무렵.
그는 울릉도를 떠나고 있었다.
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비경들과 지구의 명승지를 둘러볼 계획을 세우고, 다른 이들과 ‘함께’가 아닌 온전히 혼자만의 사색의 시간으로.
***
10년 후.
여행을 마치고 조용히 섬으로 돌아온 준혁은 10년간의 배움을 조용히 정리했다.
예전처럼 엄청난 공법이나 술법, 진법을 익히게 된 것도 아니고, 지구촌 곳곳의 아름다움 풍경과 비경의 절경을 구경한 것뿐이었지만, 혼자만의 사색은 생각지도 못한 공부가 되었다.
그동안 성장하기 위해 앞다퉈 달려가던 걸 내려놓자,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고 느낄 수 있었던 것.
어느 정도 생각의 정리를 끝낸 준혁의 다음 행보는 침묵을 깨고 수사들을 한 명씩 부르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준혁의 부름을 받은 자는 리암이었다.
술법으로 가로막힌 상태에서도 상대방과 소통이 가능했던 리암의 능력.
처음엔 타고난 그의 능력이 신기해서 곁에 두었지만, 사신들의 힘을 봉인 밖에서 빼내려고 계획한 준혁에겐 필수로 알아내야 하는 능력 중 하나가 되었다.
두 번째로 준혁의 부름을 받은 자는 의외로 가심악이었다.
한때 진법의 대가라 불렸지만, 뒷담화(?)를 들킨 후 준혁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그.
하지만 독도 지하의 광맥 전체에 진법을 설치하고 울릉도 내에서도 수많은 진법으로 사람들의 편의를 도운 능력만큼은 진짜였다.
그런 가심악은 준혁과 함께 무상번을 연구할 기회를 얻자, 이번엔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광신도처럼 진법 연구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세 번째로 거처에 불려온 건 나설헌이었다.
나한을 이어 연단각의 각주가 된 그녀는 준혁에게 명혼단 한 알을 건네받고 연구를 시작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100년, 그전까지 합치면 150년 가까운, 결코 짧다고 말할 수 없는 기간 동안 겨우 60개의 명혼단만을 체화시킨 준혁.
그는 명혼단을 복용하는 횟수가 증가할 때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체화 시간을 해결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나설헌과 연단각을 통해 명혼단을 연구하는 것.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시간을 단축할 수 있길 바랐다.
네 번째로 준혁을 만난 이는 도율이었다.
그동안 울릉도에 머물며 손님도, 그렇다고 인질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머물던 그.
호왕족과 거래를 시작하던 때엔 도움을 주었으나 그 뒤론 딱히 할 일을 배정받지 못한 상태였다.
준혁은 그에게 제자와 함께 울릉도를 떠나 강원도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강원도는 여전히 산수들의 땅이었기에 도율에게 다시 그들을 한데 모아 세력을 일으키라 명했다.
그 뒤로도 어느 정도 인지도를 가진 수사들은 한 명씩 준혁에게 불려갔고, 어떤 이는 물건을 찾아오라는 명령을 받고 울릉도를 떠났고, 또 어떤 이는 공법을 연구하라는 명령도 받았다.
어느샌가 섬에서 100년의 침묵을 깬 도주에게 불려간 자들은 도위사(島尉士)라 불렸고, 그들은 마선문의 공헌 순위와 상관없이 모든 이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준혁을 찾은 산들바람.
그녀는 준혁과 오랜 협상을 거친 후, 만족한 얼굴로 거처를 벗어나 청명에게 향했다.
그녀의 손엔 캇닢을 지급하라는 목소리가 담긴 부적이 들려있었다.
***
인간이 막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시간이라고 했던가?
준혁이 수많은 수사와 대면을 마친 후 또다시 칩거에 들어간 지도 50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사이 지구엔 새로운 원영기 수사들이 여럿 등장했고, 경쟁하듯 대규모의 원영응결식을 치러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도 했다.
결단기 수사들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났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연기기 혹은 축기기 때 울릉도를 방문해 수행증진진법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수행증진진법이 수행을 올리는 당시뿐 아니라, 그 후로도 지속적인 영향을 준다고 믿게 되었지만.
아주 오랫동안 다시 경험할 수가 없었기에 증명할 방법은 없었다.
지구의 변화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청명의 주도 아래 마선문이 영수족과의 거래에서 큰 이득을 취하자, 수많은 세력이 지구 곳곳에 흩어져있던 비경 내 타 종족들과 거래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부터 거래가 성공한 건 아니었다.
타 종족은 인간들을 배척했기에 수많은 날 동안 죽고 죽이는 과정이 반복됐고, 그 와중에 탄압에 성공하거나, 혹은 협박에 가까운 대화를 통해 물물교환의 물꼬를 튼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어쨌든 간에 타 종족과의 거래는 인간들을 한층 발전하게 했다.
지금껏 힘들게 구하던 수도 자원을 손쉽게 구하기도 했으며, 공법과 술법도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타 종족 역시 인간들의 연기술과 연단술을 통해 한층 더 힘을 키웠으니 누구에게 더 도움이 되었다고 말할 일은 아니었다.
다만, 모든 세력이 마선문만큼 유리한 거래를 끌어내진 못했기에 발전 속도는 날이 갈수록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세상이 변해가던 시기.
50년간 마족의 원영을 완벽하게 흡수한 준혁은 완영기 후기 끝자락에 도달해있었다.
한때는 아득하게 느껴지던 아마르곤의 수행을 넘어선 지 오래.
거처 중심에 좌정한 채 눈을 감고 있는 준혁은 세상의 변화엔 관심도 없다는 듯, 오직 내면세계로 침잠해 들어갈 뿐이었다.
***
울릉도 나리분지.
분지 내 위치한 마선문 본청 건물. 그곳의 상층부엔 청명이 창가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주기적으로 날아오는 부적들을 확인하고, 다시 새로운 부적을 날려 보낸 청명은 성인봉이 위치한 봉우리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어르신께선 언제 모습을 보이실는지….”
연형기에 오르는 데 실패한 준혁이 거처에 칩거한 지도 벌써 100년.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고, 울릉도도 그만큼 바뀌었지만, 성인봉만큼은 200년 전 모습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쿠르릉-
그때, 청명의 혼잣말에 대답해주겠다는 듯, 섬이 잔잔한 진동으로 흔들렸다.
“설마!”
이미 100년 전 경험한 적이 있었기에, 청명은 만사 제쳐두고 창문 밖으로 튀어 나갔다.
건물 밖으로 나온 청명은 조금 떨어진 봉우리에 서 있는 사쿠라를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날아갔다.
“수사! 설마 이것은?”
사쿠라는 청명을 본체만체 슬쩍 흘기다가 시선을 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문주. 당장 사람들을 섬 밖으로 피신시켜.”
질문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답이었지만, 청명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역시! 어르신께서 다시 연형기에 도전하시는 거군요?!”
하지만 기쁜 청명과 달리 사쿠라는 웃질 않았다.
“시간이 없어. 예전과 달라. 영기가 모여드는 속도와 기세가 심상치 않아. 최우선으로 일반인과 연기기 수다들을 대피시켜야 해.”
말을 마친 사쿠라는 공간대에서 전음부 뭉치를 꺼내 들더니, 수결과 동시에 빠르게 입을 중얼거리고는 부적을 날렸다.
그리고는 청명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빨리! 그저 기절하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빨리 일반인들부터 피신시키라고!”
청명이 나타나기 전부터 기의 흐름이 요동치는 걸 느꼈었기에, 사쿠라는 이번 현상이 100년 전과 사뭇 다름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에 청명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대답도 없이 둔광을 일으키며 본청으로 돌아갔다.
쿠르르릉-
잠시 후. 성인봉 상공에서 시작해 거대한 먹구름이 주변을 덮어가려 할 때, 수백 명의 수사가 사방으로 날아다니며 일반인들을 배에 태우기 시작했다.
어느샌가 결단기 수사들도 피신행렬을 돕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사쿠라의 협박에 움직이는 중이었다.
한참 후 일반인과 연기기 수사들을 태운 배들이 전속력으로 섬을 벗어났고, 축기기, 결단기 수사들도 덩달아 섬에서 멀어져갈 때.
하늘의 영기 구름을 예의주시하던 사쿠라 곁으로 리암이 날아왔다.
“사쿠라 수사. 저희도 물러나야 합니다. 점점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지는군요.”
리암은 미세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그 모습에 사쿠라 역시 한껏 구기고 있던 이마를 억지로 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도 벗어나야겠어.”
“나연이와 이화는 사유리 수사가 데려갔으니 저쪽으로 가시면 될 거 같습니다.”
리암이 말을 하며 서쪽을 향해 날아가자, 사쿠라 역시 그 뒤를 따라 하늘을 갈랐다.
“지금 모이는 영기의 양만으로…. 나 따위는 압사해버릴지도 모르겠어…. 아직 제대로 된 시작조차 아닐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