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191화 (191/408)
  • 191화. 100년

    거처에 들어온 준혁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아이슬란드에서 상대한 수사들의 공간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역시 있군.”

    누구 것인지는 모를 공간대에서 등잔 모양의 법기를 꺼낸 준혁은 나머지 물건들은 전부 한쪽에 치워둔 채, 법기에 영기를 주입했다.

    영기가 주입되자 법기는 위로 떠오르더니 일정 높이에서 멈춰 서며 불을 밝혔다.

    화르륵-

    등잔에 불이 켜지자 준혁은 화신목영을 운용해 보고는 작게 미소 지었다.

    “효과가 제법 괜찮구나.”

    등잔 모양의 법기는 목기에 관련된 공법수련을 돕는다며 경매에 올라왔던 매양촉이란 이름의 물건이었다.

    왠지 그들 무리 중 낙찰자가 있을 것 같았는데, 예상대로 들어맞았다.

    “사쿠라나 아마르곤이 사용하기 적당하겠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당장 아마르곤에게 전해줄 순 없으니, 매양촉을 사용할 사람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

    준혁은 전음부 한 장을 꺼내 매양촉 위에 붙이고는 하얀 기운으로 감싼 후 거처 밖으로 날려 보냈다.

    다음으로 준혁이 꺼내 든 것은, 현무 일족의 일원으로 의심되는 꼬마의 원영.

    검은 쇠사슬에 감겨 축 늘어져 있는 원영을 허공에 띄운 준혁은 혈단법으로 원영의 기운을 약하게 만드는 작업을 진행했다.

    시간이 흘러, 원영이 완벽하게 기력을 잃자 수결을 맺어 원영의 이마를 콕 찍었다.

    “음….”

    그 자세로 한참을 집중하던 준혁은 며칠이 지나서야 손가락을 거두며 한숨을 쉬었다.

    “후우…. 이런 걸 보고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고 하나….”

    준혁의 예상대로 꼬마는 현무 일족이 맞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구지대륙을 보호하기 위해 사신들이 스스로를 봉인할 때, 남겨진 현무 일족의 후예.

    청호와 마찬가지로 특수한 유적에 잠들어있던 현무의 후예는 지구가 격변에 휩싸이며 영기가 충만해지던 시기에 잠에서 깨어나 어떠한 방해 없이 스스로를 자각하게 된다.

    그 후 유적에 남겨진 단약을 이용해 급격하게 수행을 올린 그는 원영기에 이르며 바깥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특이한 건 다른 유적과 달리 현무 일족의 유적은 지구 내에 있었는데, 정확한 위치는 인도의 자이살메르라는 사막의 중심.

    그곳 지하 깊은 곳 유적에서 빠져나온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 자신과 같은 것이 없다는 걸 알고는 실의에 빠졌다.

    그리고 모든 생명체가 툭 하고 건드리면 죽어버릴 정도로 나약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긴…. 100년도 되지 않아 원영기에 올랐다면…. 그때 지구의 수도자들은 결단기도 드물었을 테니.”

    바깥세상으로 나온 현무 일족 꼬마는 인간들 사이에 스며들어 그들이 발굴한 술법과 지식을 익혀 나가며 그것들이 자신과 맞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또한 수행 차이가 심하니, 인간들이 대단한 것이라 부르짖는 것도 자신에겐 하찮거나 도움이 안 되는 것들뿐.

    하지만 배울 게 없어 지지부진한 술법 능력과 반대로, 수행은 가만히 있어도 쭉쭉 상승했다.

    인간들은 수행을 올리기 위해 비경이란 곳으로 가 목숨 걸고 약초를 구하는 동안, 꼬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원영기 중기, 후기에 도달했고, 심지어 완영기의 벽까지 뚫어버렸다.

    그 후로도 수행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올랐고, 결국 연형기까지 육박하고 말았다.

    문제는 거기서 시작되었다.

    자신도 의도하지 않는 사이 연형기에 올라버린 현무 일족 꼬마는 계면의 압박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악했고,

    살기 위해 선택한 것이 지금 원영의 몸을 감고 있는 쇠사슬이었다.

    “얼마나 무지하단 말인가.”

    꼬마가 사용한 술법은 현무진식 안에 들어 있던, 상대가 영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술법이었는데, 그것을 조금 개량해 자신의 몸에 사용했던 것이었다.

    그 결과 연형기에 막 올랐던 수행은 완영기로 떨어지게 되었지만, 문제는 영력을 사용하는 데 제한이 생겨버린 것.

    그 때문에 술법을 사용하는 게 어색하고 불안정해 보인 것이었다.

    더 큰 문제는 수행이 떨어지면서 자신이 건 쇠사슬을 풀 수 없게 돼버린 것.

    그때부터 꼬마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수족과 관련된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갔고, 몰래 그들의 비술을 훔치거나, 아니면 전부 죽이고 빼앗는 방법으로 살아갔다.

    “그때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니.”

    상대의 기억을 읽은 준혁은 자신이 윈드라스 가주를 처리할 당시, 멀리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꼬마의 기억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가 무상번을 구하려고 했던 이유도 수행과 관련이 있었다.

    경매에 나온 무상번은 반쪽짜리에 불과했지만, 무상번을 발동시키는 무상진식을 이용해 자신의 술법 능력을 증폭시키고, 자신이 가한 원영의 구속을 풀려고 했던 것.

    모든 기억을 되뇌며 상념에 잠겨있던 준혁은 몇 가지 의문에 턱을 쓰다듬었다.

    “헌데 완영기, 연형기에 오를 때 왜 영기 현상이 나타나질 않은 거지?”

    기억 속의 꼬마는 아무런 벽이 없는 듯 수행이 상승했다.

    “설마 유적의 단약 때문인가?”

    한동안 고민을 거듭하던 준혁은 생각이 단약에 미치자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시선이 인도 쪽으로 향했다.

    “언젠가 그곳에 다녀와야겠구나.”

    꼬마는 유난히 외로운 걸 싫어해서인지, 유적을 벗어난 뒤 다시는 그곳을 찾지 않았지만, 준혁이 생각하기에 그곳엔 분명 숨겨진 것이 있다고 여겨졌다.

    왜냐하면 그는 그곳에서 수행을 상승시키는 단약과 현무진식이라는 공법 하나만을 얻었는데, 청호가 잠들어있던 백호 유적과 비교하면 미래를 위한 안배라고 하기엔 너무 준비가 부족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우선 수행을 올리고, 유적에 들렀다가 현무의 봉인지와 청룡의 봉인지까지 들르면 되겠지.”

    또 하나 희소식은 지금껏 알지 못했던 현무와 청룡의 소식을 알게 된 것.

    다만 꼬마의 기억 속에서 얻은 건 현무가 봉인된 지역이 어디에 자리 잡고 있는지 정도였고, 청룡이 봉인된 곳은 그마저도 정확하지 않았다.

    그래도 작은 단서라도 가지고 움직이는 것과 아닌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으니 준혁으로선 이번 행차에 얻은 것이 가히 적지 않다고 할 만했다.

    “현무진식도 얻을 수 있었다면 완벽했을 텐데…. 그것은 아쉽구나.”

    현무진식에 대한 꼬마의 방어기제가 극심해, 작은 것조차도 얻질 못한 상태였다.

    ***

    아직까지 두 완영기 마족의 기운도 완벽하게 흡수하지 못한 준혁은 꼬마의 원영을 흡수하는 건 시기상조라 여기고, 혈단법과 진법을 겹겹이 쌓아 재봉인해버렸다.

    그리고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무상번과 설악산에서 얻은 깃발을 꺼내놓고는, 무상진식이 적힌 옥간을 확인했다.

    잠시 후 탄식을 내뱉은 준혁은 수결을 맺어 깃발을 움직였고, 두 진법 깃발은 한데 섞여 온전한 서른여섯 개의 깃발이 되어 준혁 주위를 회전하기 시작했다.

    준혁이 손가락을 번갈아 가며 수결을 맺는 동안 끊임없이 회전하던 깃발들은 어느새 거대한 흐름을 만들고 있었다.

    그 흐름에 따라 처음엔 거처가 흔들리더니, 조금 후엔 거처 밖 영기가 요동쳤고, 그 범위는 점점 넓어졌다.

    하지만 계속해서 확장되던 이상 흐름은 갑자기 뚝 끊기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쉽지 않구나.”

    어느새 무상진식 운용을 멈춘 준혁은 가볍게 익히는 것으론 무상진을 발동하기조차 어렵다는 걸 깨닫고 쓰게 웃었다.

    그리고는 깃발과 옥간을 공간대에 집어넣고 명혼단과 1품 화목단을 꺼냈다.

    “그래, 우선은 수행을 올리자.”

    선계로 가기 위한 전제조건이 사신의 힘을 얻는 것이라면, 안전하게 그것을 얻기 위해선 최소한 봉인지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준혁이 생각하는 그 힘의 최소치는 연형기에 오르는 것이었다.

    봉인 안에 들어가 사신을 직접 대면할 생각은 없었으나, 최소한 봉인을 지키고 있는 자들은 제압할 수 있어야 했으니까.

    그렇게 준혁은 목표를 확고히 세운 후 기나긴 수련에 돌입했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

    “내놔.”

    “안 됩니다.”

    “내놔.”

    “허락이 있기 전엔 절대 안 된다 하셨습니다.”

    청명이 자신의 공간대를 꼭 쥔 채 당장이라도 둔술을 사용하려 준비하자, 마주 보고 서 있던 산들바람이 눈을 고양이처럼 매섭게 치켜떴다.

    “얼마 전부턴 거처에 나도 못 오게 한다고! 그런데 어떻게 허락을 받아?! 지금 못 먹은 지 얼마나 된 줄 알아? 나 화나면 무서워.”

    어느새 산들바람 주위 영기가 요동치며 날카로운 기파가 퍼져나갔다.

    그것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는데 준혁이 봤다면 산들바람의 영기 운용이 크게 성장했다고 기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청명이 누군가?

    준혁의 말이라면 당장 목숨을 바칠 수 있을 만큼 충신이었다.

    준혁이 명령 내리길, 자신의 허락이 있기 전엔 일정량 이상의 캇닢을 절대 제공하지 말라고 했었다.

    그랬기에 기파로 위협을 하는 것 따위엔 절대 동요하지 않았다.

    “절대 안 됩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어르신께서 기별을 주실 겁니다.”

    “기별 같은 소리 하네! 벌써 100년째 거처 밖으로 나오질 않잖아!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도 20년 전이라고!”

    거처에서 준혁과 함께 지내던 산들바람은 수련에 방해가 된다며 쫓겨난 지 20년이 되었다.

    그 당시 산들바람은 아쉽기는커녕 너무 좋아 춤을 추기까지 했었다.

    덩실덩실 춤을 춘 이유는 재미없는 수련을 그만해도 된다는 것도 있었지만, 캇닢을 보관하고 있는 청명에게서 1년에 한 번 개미 똥만큼 제공되는 것보다 더 많은 캇닢을 얻어내려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산들바람이 생각하지 못한 건, 청명이 지독하게 고지식하다는 것이었다.

    “알았어! 그럼 이렇게 하자. 내년에 받을 걸 미리 줘! 그럼 되잖아?”

    “그럼 내년엔 내후년 걸 미리 받으시려구요?”

    “어? 너 똑똑한데? 그걸 어떻게 알았어?”

    준혁의 지도와 화목단의 도움으로 안정적인 원영기 중기에 오른 그녀였지만, 여전히 생각은 애였다.

    그때 산들바람을 구원해줄 이가 나타났다.

    “청명 아저씨. 산들 언니가 저렇게 부탁하는데 조금만 주세요.”

    “아, 아가씨!”

    큰 눈망울에, 어느새 성숙한 모습으로 자란 최나연의 등장에 청명이 어쩔 줄 몰라 시선을 피했다.

    고지식한 청명이 준혁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어려워하는 게 준혁의 핏줄인 최나연이었다.

    그녀의 부탁이라면 아닌 걸 알면서도 허락하게 되는 청명이었다.

    “하아…. 알겠습니다.”

    “야! 너! 내가 부탁할 땐 듣는 척도 안 하더니!”

    산들바람이 씩씩거리며 어깨를 들썩이자 청명은 재빨리 공간대에서 그녀가 원하던 걸 꺼내주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산들바람은 신이 난 얼굴로 캇닢을 받아들고는 그중 일부를 입으로 가져갔다.

    “언니, 그게 그렇게 맛있어요?”

    “응. 너도 먹어볼래?”

    “아뇨, 괜찮아요.”

    이미 한 번 맛본 적이 있던 최나연은 콧등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쿠우웅-

    그때 섬 전체가 진동하듯 강한 울림이 모든 이들을 강타하며 퍼져나갔다.

    파동이 지나가자 지금까지 장난스러운 태도로 말싸움을 하던 청명의 눈빛이 변하더니 번쩍하며 집무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파밧-

    그 모습에 최나연과 산들바람 역시 눈을 마주치고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밖으로 향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섬 곳곳에서 솟구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고, 그중 가장 강한 기운을 가진 사람에게 날아갔다.

    “사쿠라 언니!”

    최나연과 산들바람이 사쿠라 곁에 도착하자, 그곳엔 그녀뿐 아니라 도율과 리암, 도천까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상황이 평범하지 않다는 걸 깨달은 최나연이 말을 아끼자, 리암이 하늘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역시! 맞습니다! 도주께서 더 높은 곳으로 가려 준비 중이신 겁니다!”

    리암이 가리키는 곳.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맑은 하늘이었던 곳이 어느새 어둑해지며 먹구름이 뭉치고 있었다.

    먹구름은 오색 빛을 띠며 노란 뇌전을 줄기줄기 뿌리고 있었는데, 리암이 가리킨 지 몇 초 되지도 않아 수십 배 커지며 빠르게 확장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주군께서 완영기에 오르시다니…. 난 영원히 따라갈 수 없겠구나.”

    영기구름이 확장되는 걸 보며 도천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때, 캇닢을 우물거리고 있던 산들바람이 입 안의 남아있던 것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멍청이. 이번에 올라가면 완영기가 아니라 연형기거든?”

    산들바람의 폭탄 발언에 모여있던 전원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 순간, 빠르게 퍼져나가던 영기구름이 불안하게 출렁거렸지만, 그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거처 안, 좌정한 채 하늘을 두드리던 준혁만이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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