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초팔(超八) (4)
준혁은 산들바람의 말을 흘려버렸다.
일반 캇닢이야 얼마든지 사줄 수 있지만, 오조화채로 만든 캇닢은 구하기가 어려운 것.
딱 보아도 일반 캇닢에 산들바람이 만족할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돌아가면 청명에게 구해오라 말해야겠구나.’
생각에 잠긴 사이, 다음 경매가 진행되었다.
마지막 남은 세 가지 경매 물품 중, 두 번째 물건은 매양촉(梅養燭)이라는 것이었다.
매양촉은 불을 밝히는 등잔처럼 생겼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목기(木氣)를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되는 물건.
공법을 운용할 때 머리 위에 올려 불을 밝히면 수행증진에 도움이 되는, 수도계에서 보기 드물다는 공법 보조 법기였다.
다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목기를 제외한 다른 기운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해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수행에 도움이 되는 법기의 가치는 낮지 않아, 가격은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편, 매양촉의 가격이 오르든 말든.
“수사, 제 얘길 듣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나오시지요.”
준혁은 손에 쥔 초팔을 발동시키려 애쓰고 있었지만,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질 않았다.
오히려 준혁의 혼잣말에 산들바람만 관심을 가진 듯 시선을 주었다.
준혁은 산들바람은 무시한 채 계속해서 영기를 집어넣으며 법기를 자극했다.
그렇게 한참을 씨름하다가 피식 웃고는 공간대에 초팔을 넣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면야.”
초팔은 자신의 영력을 이용해 외부와의 소통을 차단하고 있었다. 아마 계약자와 그러기로 약속한 것이 틀림없는 일.
준혁은 초팔을 갈무리한 후, 손을 가볍게 저어 분홍 꽃잎 하나를 날려 보냈고, 그 방향은 에이나르손이 자리한 VIP석이었다.
여전히 원영의 손에 안착해있던 식검이 욕망을 표출하며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 여긴 준혁은 식검을 향해 조용히 읊조리며 위로했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한 가지만 확인해볼 테니.’
그때 두 번째 최상급 경매품이 누군가에게 낙찰되며 마지막 남은 물건이 단상 위에 오르고 있었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미 파다하게 소문이 난 물건이니, 바로 입찰을 시작해도 되겠습니다만, 그래도 소문을 듣지 못한 분들이 있을 테니 잠깐 물건 소개하고 가겠습니다.”
말을 하던 유룡은 단상 위에 올려진 진법 깃발 뭉치를 손에 들며 말을 이었다.
“마지막 물품은 바로! 무상번(無狀幡)!! 현재까지 알려진 것 중 최고의 진법이며 고대에 만들어져 술식을 따라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바로 그 물건!”
유룡이 진법 깃발을 흔들자, 관람석에서 질문이 나왔다.
“그것들만 있다면 정말 전설의 무상진을 펼칠 수 있다는 말이오?”
“물론 아닙니다.”
질문에 바로 답한 유룡은 설명을 이었다.
“이 물건을 발동하기 위해선, 여기!”
그의 손엔 어느새 옥간 하나가 들려있었다.
“진법기를 발동시킬 무상진술(無狀陳術)을 따로 익혀야 합니다. 그럼 경매를 진행하도록 하겠….”
유룡이 설명을 끝마친 후, 경매 시작을 알리자 초팔이 나왔을 때처럼 가격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한편, 준혁은 자신의 공간대에서 아무런 기운도 흘러나오지 않는 깃발 뭉치를 꺼내 들고는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 무상번이었다니….”
준혁의 손에 쥐어진 진법 깃발은 오래전 마동탁의 처소에서 찾아낸 물건.
지금은 도마뱀으로 변한 알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가죽 부적 뭉치와 함께 있던 물건이었다.
일반적인 진법 깃발이라 하기엔 재질이 특이했고, 사용하려고 하면 아무 반응도 없었기에 지금껏 공간대 깊은 곳에 넣어두고 기억에서 지워버렸던 물건.
유룡의 설명대로라면, 지금껏 진법 깃발의 사용처를 알아내지 못한 건, 준혁의 능력 부족이 아니라 깃발을 발동시킬 술법을 익히지 못했기 때문.
“허어. 보물을 두고도 알아보지도 못했었다니.”
“무상번이 뭐야?”
그때 또 다른 캇닢을 꺼내 입 안에 넣은 산들바람이 물었다.
수행에 도움이 된다고는 하지만,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말하려던 준혁은 잠깐 산들바람과 눈을 맞추다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보니 말을 들을 그녀가 아니었다.
“무상번은 진법의 성능을 끌어올려 주는 진법 법기야.”
“그런 건 많지 않아?”
“그러긴 하지.”
산들바람의 말대로 다른 진법의 성능을 올려주는 보조 진법은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다만 무상번이 최고인 이유는, 그 한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
일반적으로 진법의 상승효과를 불러오는 진법은 수행이나 기운의 종류에 따라 명확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무상진은 모든 진법에 통용됐고, 그 끝이 무한했다.
“삼만칠천!”
“삼만칠천오백!”
“삼만구천!! 이번엔 제가 가져가야겠습니다!”
어느새 과열되었던 입찰은 몇 명만의 축제가 되어 있었다.
준혁 역시 무상번 및 그것을 발동시킬 무상진술이 필요했기에 조용히 경매에 끼어들었다.
“오만.”
***
처음과 달리 준혁이 가격을 한꺼번에 올려 불렀어도, 몇 명은 꾸준히 따라붙었다.
결국 6만 5천이라는 입찰가가 준혁의 입에서 나온 후에야, 마지막 경매의 끝이 선언되었다.
유룡은 이번 경매의 물품 가격이 만족스러운지, 경매가 시작할 때보다 밝아진 얼굴로 경매의 끝과 또 다른 경매의 시작을 알렸다.
“자! 주최 측에서 준비한 경매는 이것으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경매의 꽃이라는 개인 경매가 남았다는 걸 잊지 않으셨겠지요? 그럼 개인 경매를 진행하는 방법에 대해….”
개인 경매란 수사가 개별적으로 단상 위에 올라 자신의 물건을 경매에 부치는 걸 말했다.
준혁은 자신의 수행에 결단기 이하급에서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을 얻을 순 없었기에 관심을 거두고는 떠날 채비를 했다.
잠시 후, 기다렸다는 듯 푸근한 인상의 사내가 공간대 하나를 내밀며 준혁 곁으로 다가왔고.
“수사. 여기 경매 물품과 남은 영석입니다.”
물건을 건네받은 준혁은 그것들을 기감으로 훑은 후, 공간대에 집어넣고 걸음을 옮겼다.
그때, 등 뒤에서 준혁을 말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수사.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무슨 일입니까?”
준혁이 살짝 시선을 뒤로 돌리자, 사내는 황송하다는 듯 양손을 비비며, 처음 입장했던 곳의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이런 말씀 드리기 민망하나, 이대로 밖으로 나가신다면 몹쓸 일을 당하실 위험이 있습니다.”
“몹쓸 일이라면…. 아! 무엇을 말하는지 알겠군요.”
처음 경매장이 위치한 곳을 살펴보았을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했던 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와 황폐해진 주위를 보고는, 경매장 주위에서 사건 사고가 잦았음을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높은 확률로, 경매장을 나선 순간부터 수많은 도적놈들을 마주치게 되는 수순.
평소엔 입찰자가 조심성 없이 혼자 다니다 봉변을 당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을 주최 측이었겠지만, 아마 준혁이 꺼낸 화목단 때문에 생각을 달리했을 터였다.
그런 예상이 맞듯, 사내가 말을 이었다.
“손님처럼 중요한 고객분이 험한 일을 당하게 두고 보는 건 상거래를 책임지는 자가 할 짓이 아니지요. 안전하게 이곳을 벗어나게 안내하겠습니다. 대신….”
“화목단이 더 생기면 방문해 달라? 그 말입니까?”
“역시. 똑똑한 고객님과는 말을 나누기가 편합니다. 그렇습니다. 가격은 동일하게 쳐 드릴 테니 꼭 저희에게 판매를 부탁드립니다. 저희가 꽤 높은 가격을 제시했단 걸 알고 있으시겠지요?”
거래가 체결되기라도 한 듯 사내가 넙죽 허리를 숙이자, 준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지요.”
잠시 후, 안내인을 따라 구불구불한 통로를 이동한 준혁은 수많은 진법이 새겨진 바위를 마주하게 되었다.
바위 위엔 서너 명이 동시에 설 수 있을 만한 원진이 그려져 있었다.
“이 단거리 전송진을 통하시면 이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프라지오라는 곳의 창고로 이동되시게 될 겁니다. 그 후엔 알아서 벗어나신다면…. 아마 불필요한 일을 겪진 않으실 겁니다.”
아무리 결단기급 수사들의 위협이 아무것도 아니라지만, 굳이 귀찮은 일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던 준혁은 사내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진법 위로 올라갔다.
직후, 사내가 수결을 맺고 진법을 발동시킨 순간.
파앗-
준혁과 산들바람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큼지막한 상자들이 잔뜩 쌓여있는 창고.
창고 안쪽에 마련된 단거리 전송진을 통해 경매장을 벗어난 준혁은 곧장 마을을 벗어나 북쪽으로 이동했다.
울릉도로 바로 가기엔 초팔이 강제 소환당할 가능성이 있었기에 잠시 시간을 보내려는 것.
아니나 다를까, 준혁이 모스크바 북쪽 산맥에 자리를 잡은 후 계속 자극하자, 하루도 지나지 않아 초팔은 스르륵 허공에 녹아들 듯 사라져 버렸다.
“역시 소환이 가능했구나! 그나저나 성급하기도 하지.”
경매 물건을 인도받은 지 하루 만에 사라진다면 분명 문제 제기가 생길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도 에이나르손이 초팔을 바로 소환한 건, 준혁이 끊임없이 영력을 집어넣으며 괴롭혔고, 그 자신도 결단기 후기 끝자락이라는 수행에 자신이 있어서였을 터.
아마 누군가 초팔이 사라진 걸 문제 삼아 자신을 찾아온다면, 관리 못 한 책임을 왜 전가하냐며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갈 가능성이 컸다.
준혁은 그가 어떤 생각을 하며 기고만장해 있을지 가소롭게 생각하며 기감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동시에 미리 에이나르손에게 보내뒀던 자신의 기운을 확인했다.
“꽤 멀리 이동했나 보군. 산들아 가자.”
에이나르손은 이미 러시아 땅을 벗어났는지 기감엔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꽃잎으로 변해 그의 몸 어딘가에 붙어있을 기운이 희미하게 흔적을 알려주는 중.
잠시 후, 준혁은 아이슬란드가 위치한 방향으로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
“정말 못 찾았답니까?”
두 눈이 과하게 매몰되었다는 걸 제외하면 꽤 잘생긴 사내가 심각한 얼굴로 말을 꺼내자, 모여있던 자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대답한 자는, 초팔을 경매에 출품했던 에이나르손이었다.
“이미 주최 측에서 손을 쓴 것 같습니다. 다른 수사들의 도움까지 받았는데 그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으니.”
널찍한 로비에 모여있는 자들은 한 명을 제외하곤 전원 결단기 수도자들이었는데, 전부 경매장에 있던 이들이었다.
“하긴 나 같아도 그러겠습니다. 그 많은 화목단을 제공한 자이니, 앞으로도 친분을 유지하고 싶겠지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도대체 그자는 누굽니까? 그 정도 단약을 제공 받을 자라면…. 최소한 마선문의 각주나 그 위 인물들 아닙니까?”
설마 도주인 준혁이 경매를 직접 방문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이들은 각자 예상가는 인물들을 한 명씩 거론했다.
그러다 눈매가 날카로운 여인이 정답을 맞혀버렸다.
“설마? 그자가 최준혁 수사는 아니겠죠?”
“하하, 농담이라면 제법 그럴싸했습니다.”
“맞습니다. 원영기 수사들의 발이 얼마나 무거운데 이런 경매에 참석하겠습니까? 경매가 시작되기 전에 물품 목록이 전부 전해졌을 텐데, 필요한 게 있었다면 수하들을 보냈겠지 말입니다.”
충분히 타당한 얘기라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자가 마선문과 깊은 관계가 있는 자라면…. 그자를 찾는다고 해도 손쓰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만에 하나라도 잘못된다면, 울릉도주가 가만있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그자가 얼마나 잔인한지 소문이 파다하지 않습니까?”
검은 머리카락이 유난히 찰랑거리는 사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에이나르손이 손을 저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입구에 서 있던 놈한테서 들어보니, 그자를 전혀 모르던 눈치였습니다. 마선문의 주요 인물들과도 일치하지 않고 말입니다.”
“그럼 그 단약들은 어디서 구한 거란 말입니까?”
“흠…. 저도 그게 궁금하긴 합니다만…. 어느 정도 짐작 가는 바는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에이나르손을 향했다.
“큼흠. 뭐…. 특별한 건 아니고, 다들 알다시피 문도 중 손버릇이 나쁜 이들이 한둘입니까? 더군다나 마선문은 급격히 세를 확장하며 신분 검증만 간단히 마치고 수사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까?”
“아! 누군가 빼돌린 것이 흘러나온 것이다?”
“아마 그럴 겁니다. 많은 분들이 모르시나 본데, 마선문주는 일본의 비경에서 오랫동안 도적질을 했던 인물이니까요.”
“허! 문주가 도적 출신이라니!”
몇몇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몇은 화들짝 놀라 했다.
“만약 그렇다면 그자를 찾기만 하면 되는데….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알 수가 없으니 원 참….”
그때 모여있던 수사들 머리 위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전원이 경직되었다.
“저를 찾으시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