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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184화 (184/408)
  • 184화. 초팔(超八) (1)

    ‘여긴 어디지? 나는 원영을 응결 중이던 게 아니었던가?’

    도천은 자신이 머물던 성인봉의 최상층 동굴이 아닌, 회색으로 뿌옇게 흐려진 세상을 바라보며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원영을 응결하기 위한 수십 년간의 노력 끝에 하늘과 맞닿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천지 영기가 뭉쳐 드는 것까지 확인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니 알 수 없는 곳에 도착해 있었던 것.

    그때 한쪽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며 말을 걸었다.

    “평생 검을 갈고 닦을 것처럼 하더니, 이젠 종노릇이나 하고 있군.”

    “!!!”

    말을 걸어온 자는, 축기기 시절 자신의 호적수라 생각했던 가장 가까운 친우.

    결단기에 오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비운의 사내였다.

    “좌호민! 자네!”

    “내 이름은 부르지도 말게. 힘에 굴복해 고개 숙인 자네에게 친근한 척 불리기 싫으니!”

    가장 가까웠던 친우의 냉혹함에 도천은 가슴이 베이는 것 같았다.

    아니 진실로 베어졌다.

    스걱- 푸욱-

    차갑게 말을 내뱉던 친우는 어느새 눈앞에 다가와 있었고, 도천의 심장을 가르더니 칼을 쑤셔 넣은 후였다.

    “우욱!”

    그 순간 도천은 세상이 새빨갛게 변하는 걸 느꼈다.

    ***

    성인봉 최상층 거처의 중심.

    울컥-

    도천은 가부좌를 한 채 정신을 집중하다 새빨간 피를 한 움큼 뱉어냈다.

    도천의 옷자락이 빨갛게 물들어감과 동시에, 그의 흐릿하던 눈동자가 원래대로 돌아오더니, 다시 회색으로 물들어갔다.

    눈동자가 회색으로 변하자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던 영기 회오리가 안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누가 보아도 심마에 빠져든 모습.

    그때 영기 폭풍에 휩싸여 누구도 접근하지 못할 것 같은 거처 안으로 한줄기 한기가 스며들었다.

    한기(寒氣)는 처음부터 목표가 있었다는 듯 움직이더니 회색 눈을 희번덕거리고 있던 도천의 단(丹)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 순간, 도천의 온몸에 서리가 내려앉았고, 동시에 정신을 차린 그의 눈이 선명하게 되돌아왔다.

    ‘주군!’

    도천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감지하고는 어딘가에서 도움을 준 준혁을 향해 감사 인사를 보냈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찰나의 순간일 뿐, 정신을 차린 도천의 정수리를 향해 영기구름이 회오리쳐오자 그는 마음을 다잡으며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서리가 온몸에 내려앉아 그를 지켜주듯 머물고 있었다.

    ***

    며칠 후, 하늘을 뒤덮던 영기 현상도 사라지고 모두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자, 준혁은 산들바람과 함께 자신의 거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휴식을 취하기도 전, 득달같이 달려드는 세 여인을 맞이해야 했다.

    “최 수사!”

    “오빠!”

    “스승님!”

    그녀들은 나타나기가 무섭게 준혁 곁에 있던 산들바람을 쏘아보며, 입을 털어댔다.

    한참 동안 산들바람의 사정과 그녀가 앞으로 함께할 거란 얘길 전한 후에야 그녀들을 돌려보낸 준혁은 전투를 치른 것처럼 진땀을 흘렸다.

    ‘더 따져 물으면 핑계가 궁핍할 뻔했어.’

    자신들을 감옥에 가두고 험한 말을 내뱉었던 영수가 앞으로 동료가 된다는 말을 바로 이해할 순 없었지만, 세 사람은 준혁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조용히 물러났다.

    오히려 산들바람만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의문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것들 도둑이 아니었어?”

    자신이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적호족을 방문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산들바람이 얼마나 실망할지 알았기에 준혁은 대충 핑계를 대며 말을 돌렸다.

    그리고 그때부터 본격적인 수련이 시작되었다.

    수행증진 효과를 만끽하며 산들바람이 공법 운용을 시작하자, 준혁은 곧장 지유목을 심어둔 봉우리로 이동했다.

    천균 및 지목족의 뿌리를 보관해둔 결계 옆에 새로운 결계를 만든 다음, 그 안에 잠든 채 영기를 응축하고 있는 도마뱀 두 마리를 넣어둔 후, 여러 겹의 보호막으로 둘러쌌다.

    그 후 지유목과 영천수를 공간대 가득 담고 거처로 돌아와 화목단 제조를 시작했다.

    화르륵-

    준혁의 거처 안은 뜨겁게 달아오른 솥과 그것을 식혀주는 한기가 공존했고, 두 기운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거처 한쪽엔 자기병들이 수북이 쌓여갔다.

    산들바람은 수행을 올리다 진전이 느려지는 것 같으면 자기병을 몰래 가져와 화목단을 섭취했고, 준혁은 그 모습을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애초에 1품과 2품 화목단은 제조 성공과 동시에 공간대에 보관했기에, 3품 이하 단약을 산들바람이 먹는 건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또다시 덧없이 흘러갔고, 새로운 봄과 겨울이 와도 울릉도엔 아무도 방문하지도방문하지 않고, 방문할 수도 없는 나날이 지속됐다.

    유일하게 울릉도에서 사람의 향기가 느껴지는 곳은 독도 아래 영석 광산뿐이었고, 그마저도 관리 감독을 하는 청명과 휘하 몇 명의 수사들 말고는 전부 일반인만이 존재, 그들의 곡괭이질 소리가 울려 퍼질 뿐이었다.

    ***

    5년 후.

    충분한 양의 화목단을 준비했다고 판단한 준혁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식혈만복 기본서와 제이콥 부부에게서 얻은 심화편을 연구해, 보다 안정적인 진(眞) 식혈만복을 창안했다.

    사실 창안이라 하기엔 거창했고, 기본편과 심화편을 합친 후 불필요한 부분을 떼어내고 안정성을 높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걸 처음 익힌 자는 준혁이 아닌 산들바람이었다.

    ***

    10년 후.

    도천이 경지를 완전히 다졌다고 여긴 준혁은 그에게 삼청조를 건네주고 도율, 그리고 그의 제자와 함께 호왕족으로 보냈다.

    주목적은 청호의 상태를 확인하고 그에게 화목단을 비롯한 수련에 도움이 될 물건들을 전해주는 것,

    부 목적은 수련성취가 낮을 경우, 준혁이 방문할 것임을 시사해 청호의 정신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가적으로 호왕족과 소규모 물물교환을 진행해 인족과의 첫 거래를 트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준혁이 백호족이라 알고 있던 호왕족은 도천 역시 도율처럼 준혁에게 잡혀 강제로 수하가 된 인족이라 생각해 하찮게 여길 뿐 불필요한 의심을 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리고 청호의 상태를 확인하고, 성공적으로 호왕족과의 거래를 마치고 온 도천은 청명을 만나 본격적인 상거래에 대해 의논했다.

    ***

    15년 후.

    준혁은 그동안 모은 법기들 중 보조용으로 사용할 몇 가지를 제외하곤 대부분 흡수했고, 성능이 뛰어나 흡수하기 아까운 것들은 청명, 사쿠라를 비롯한 수하들에게 하나씩 선물로 보내주었다.

    당연히 최나연과 천이화에겐 가장 좋은 물건들이 전달됐고, 그 와중에 인족들이 사용하는 법기는 저급하다며 무시하던 산들바람도 준혁의 선물이라는 명목하에 푸른빛이 맴도는 보석이 박힌 목걸이 법기를 챙겼다.

    도천은 준혁에게 받은 것이 너무 많다고 한사코 선물을 거절하다가, 결국 은, 금 한 쌍으로 된 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그것을 받아 갔다.

    어느 정도 공간대를 비운 준혁은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명혼단과 1품 화목단을 쉬지 않고 복용했고, 시간이 나면 진 식혈만복을 혈단법에 적용하기 위해 연구를 진행했다.

    ***

    20년 후.

    화목단으로 쉬지 않고 수행을 올리던 준혁은 공간대 안에서 전해오는 감각에 모든 걸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마족 완영기 수사들의 원영이 봉인을 스스로 깨고 나오려고 한 것.

    어쩔 수 없이 준혁은 수련을 멈추고 완영기 수사의 원영을 소멸시키기 위한 작업을 개시했다.

    하지만 금강과도 같은 원영은 쉽게 처리할 수가 없었다.

    결국 방법을 바꾼 준혁은 금빛 실로 원영 주위에 진법을 만들어낸 후 혈단법을 이용해 흡수를 시도했다.

    그리고 그 방법은 기가 막힌 한 수가 되어 준혁의 수행을 쭉쭉 올리기 시작했다.

    다만 수행이 올라간 것만큼이나 탁기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예전처럼 소비 방법을 몰랐다면 모를까. 준혁은 딱히 걱정하지 않고 원영 흡수에만 몰두했다.

    ***

    25년 후.

    마족 완영기 수사의 원영을 흡수한 것은, 그것을 흡수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로 인한 후유증을 치료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원영을 흡수하는 것이 의식에 심대한 영향을 미쳐 성정이 조금씩 난폭해지기 시작한 것.

    다행이라면 명혼단으로 혼이 단련된 상태였고, 백호의 의식 조각을 소멸시킨 경험도 있었기에 겨우 정상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심각한 고비를 넘긴 준혁은 원영이 가진 근본적인 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은 전화위복이 되어 극도로 느려졌던 명혼단 흡수 시간을 단축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

    30년 후.

    울릉도가 80년간 축적한 영석을 전부 소비하고 수행증진진법의 끝을 알리자, 사람들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섬의 봉쇄가 풀리자 본격적인 호왕족과의 거래가 물꼬를 텄고, 백두 비경이 위치한 백두산, 그런 백두산 자락에 자리한 마선문 지부는 급격히 규모를 키워갔다.

    백두산 지부의 총책임자는 도율의 제자가 맡게 되었는데, 의외의 인선에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할 정도였다.

    하지만 도율의 제자는 준혁 덕분에 귀기의 잠식에서 살아날 수 있었기에, 스승만큼이나 준혁을 하늘처럼 대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태도와 성실함이 청명의 눈에 띄어 백두산 지부를 맡게 된 것이었다.

    울릉도가 제자리를 찾자, 수많은 이들이 방문하기 시작했는데, 그중 첫 번째 세력이 청룡가였다.

    청룡가 대리 가주였던 대공자 여동현은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정식 가주가 되었고, 마선문과 정식 친교를 맺었다.

    청룡가를 제외한 다른 세력 중 가장 눈에 띄는 자들은 일본의 야마기 수사가 소속돼있던 대금당이었는데, 그들은 일본을 떠나 울릉도에 편입되길 원했고, 청명은 자신의 권한으로 그들을 받아들였다.

    그로 인해 마선문은 연단뿐 아니라 법기 제작 및 유통에까지 남부럽지 않은 세력을 갖출 수 있었다.

    한편, 그러한 일련의 일들이 진행되는 동안 제이엘을 비롯한 수많은 수사들은 자신의 거점으로 돌아갔다.

    모두 다 얼굴색이 좋은 걸 보면, 수련 증진 효과를 톡톡히 보고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한 것이 틀림없었다.

    다만 안하무인 하기로 소문난 캐나다 부부가 보이지 않았는데, 섬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준혁에게 겁먹고 야반도주했다는 소문이 그 뒤를 따랐다.

    ***

    수련 증진 효과가 끝났지만, 준혁은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애초에 그 자신은 지목족 혈맥의 힘의 효과를 받지 않았기에 딱히 의미가 없었던 것.

    오히려 신경 써야 할 것이 하나 줄어들어 더욱더 수련에만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산들바람은 달랐다.

    준혁과 함께 있는 것이 행복하긴 했지만, 30년간 동굴 안에서 수련만 하는 일은 평소 놀기 좋아하는 그녀에겐 고역이나 다름없는 일.

    그나마도 준혁이 원했기에 꾸역꾸역 참고 버틴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인내심도 한계에 도달하고 말았다.

    “큰둥아!! 나 나갈래!”

    “안 돼. 나랑 약속했지? 중기에 오르기 전까진 절대 딴짓하지 않기로.”

    30년간 산들바람은 엄청난 진보를 보였다. 그럼에도 기초가 너무 형편없었던지, 아직도 원영기 초기에 머무는 중이었다.

    3품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단약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단약을 밥 먹듯이 먹은 것치고는 크게 성장하지 못한 건 분명했다.

    “죽을 것 같단 말이야! 한 달만! 아니 일주일만! 이 넓은 세상 밖으로 나왔는데 동굴에만 갇혀있으라니! 너무한 거 아냐?”

    산들바람은 애원하며 매달렸다.

    그러나 준혁은 단호했다.

    “안 돼! 그럴 거면 돌아가!”

    “이익! 나빠!”

    하지만 간절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잠시 후 거처 밖으로 청명이 나타나 산들바람을 구원해 주었다.

    “어르신, 드릴 말이 있습니다요.”

    “들어오거라.”

    허락이 떨어지자 청명은 잽싸게 거처 안으로 들어오더니 바닥에 부복했다.

    “무슨 일이더냐?”

    수련을 방해하지 말라는 명을 내려놓은 상태였기에 청명의 등장은 궁금증을 자아냈다.

    “예전에 환영이 나타나는 법기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요?”

    “그래. 설마 행방을 알아낸 것이라도 있느냐?”

    준혁이 관심을 보이자, 청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예, 러시아에서 3년에 한 번 열리는 경매가 있사온데, 이번에 출품되는 법기 중 그런 것이 있다 합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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