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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180화 (180/408)
  • 180화. 수련 시작 (2)

    “그리고 나한 각주에게 연공 서열에 따라 수련용 단약을 전부 배포하라 전하거라.”

    흔히 연공 서열이란 근속 연수나 나이에 따라 지위를 나누는 방식이었지만, 울릉도에선 오직 마선문에 기여한 바 한 가지로만 서열을 정했다.

    “나설헌 각주에게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요.”

    “나설헌? 그녀도 연단각에 소속되었나?”

    나설헌이 나한 각주의 손녀이긴 했지만, 딱히 마선문 내에서 지위가 있진 않았다.

    준혁의 입장에서 나설헌은 목숨을 걸고 여서령을 도왔고, 그 후엔 자신에게 의탁했기에 특별한 감정이 드는 여인.

    그 재능도 특출났고, 성품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다만 그동안 신경 쓸 일이 많다 보니 큰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함이 드는 인물이었다.

    준혁의 질문에 청명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나한 각주는 12년 전 귀천하였습니다요. 그 후 연단각 소속원들의 지지를 받아 그녀가 연단각주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요.”

    “허어…. 보이지 않길래 연단 중인 줄 알았거늘….”

    다른 이들이 준혁의 영기파동을 느끼고 모여들 때 나한이 보이지 않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원래 연단각 특성상, 단약을 제조 중일 땐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이유가 아닌 노화로 인한 죽음이라니.

    준혁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는 턱을 살짝 들며 눈을 감았다.

    ‘처음인가….’

    그동안 수많은 죽음을 보아왔고 지나왔지만, 준혁이 아는 인물 중 수행이 오르지 못해 천명을 다하고 죽은 이는 처음이었다.

    비록 통유대문이라는 가문의 존속을 위해 준혁에게 투신했고, 다른 이들과 달리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고는 하나, 수하의 죽음이란 의미가 퇴색되진 않았다.

    “장례는 성대하게 치렀느냐?”

    청명이 고개를 저었다.

    “어르신께서 행방불명된 상황에서 호화로운 장례는 안 될 말이지요. 나설헌 소저가, 아니, 연단각주가 반대하고 나섰습니다요.”

    “흠….”

    청명에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보이던 준혁은 전음부 한 장을 꺼내 날려 보냈다.

    그리고는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청명에게 의문을 드러냈다.

    “헌데 나 수사가 연단사였던가?”

    “그건 아니지만…. 연단각 소속원들의 추대를 받았기에….”

    청명이 마선문주이긴 하지만, 실제 주인은 준혁.

    준혁이 나설헌이 각주 자리에 앉은 것에 의문을 드러내자 청명은 진땀을 흘렸다.

    “나무라려는 게 아니다. 허나 연단각은 섬 전체에 단약을 공급해야 하니 그 중함이 작지 않은 것. 그녀가 자리에 어울리는지 물어보는 것이다.”

    “그런 것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요. 본격적으로 연단의 길을 걷지 않았을 뿐, 나한 각주의 피가 어디 가겠습니까요?”

    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능만 있다면 나한의 손녀인 나설헌이 연단각을 이끄는 게 가장 합리적이긴 했다.

    나설헌의 수행도 낮지 않았고, 더 큰 이유는 연단각 소속원들 대부분이 나한의 통유대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설헌이 각주를 맡는 게 여러모로 잡음 없이 잘 굴러갈 상황이긴 했다.

    그때 봉우리 끝에 둔광이 어리더니 나설헌이 매혹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부르셨어요?”

    ***

    비각 대원들이 발에 땀이 나도록 소식을 퍼트린 결과, 전 세계 곳곳, 수도자들이 모여있는 곳이라면 울릉도의 소식으로 들썩거렸다.

    이미 수배 혹은 수십 배의 수행증진 효과를 보았다는 사람들의 증언이 넘쳐났기에, 이번에 또 한 번 그것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하니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것.

    하지만 수사 대부분은 울릉도로 향할 수가 없었다.

    자신들이 속해있는 곳에서 허락해주지 않았던 것.

    이미 한차례 울릉도의 뽕맛을 본 수사들이 그곳에 눌러앉는 걸 본 각 세력의 수장들은 철저히 사람 단속을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연기기 축기기급 수사들은 움직이질 못하고, 오히려 결단기 이상 수사들만 울릉도로 향하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한편 나한 각주의 장례를 성대히 치르겠다는 준혁의 말에 울릉도는 섬 봉쇄와 더불어 행사 준비로 바빠졌다.

    그리고 준혁이 나한 각주를 챙겨주는 모습에 마선문도들의 사기도 덩달아 올라갔다.

    하늘 같은 수행의 도주가 아랫사람을 챙기는 모습에 감탄한 것. 장례 준비와 함께 수많은 수사가 연단각에서 배포하는 단약을 제공받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

    나설헌과 청명을 돌려보낸 후, 일련의 일 처리를 마친 준혁은 섬 전체에 지목족 혈맥의 힘을 이용해 진법을 설치했다.

    섬의 중심으로 갈수록, 준혁과 가까이 있을수록 효과가 높은 건 예전과 같았다.

    섬 봉쇄를 위해 정신없이 움직이는 마선문도들과 달리, 준혁은 진법 설치를 마치고 여유롭게 섬을 둘러보다 지유목을 심어둔 봉우리로 이동했다.

    울릉도 내에서 금지로 지정된 곳이었기에, 지유목 숲은 개미 하나 보이질 않았다.

    금지에 설치된 진법을 통과한 준혁은 영천수에 담아두었던 천균 및 지목족의 뿌리를 살펴본 후 살짝 실망을 내비쳤다.

    뿌리들이 발화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았던 것.

    다른 뿌리들과 달리 혈맥의 힘을 살짝 주입한 천균의 뿌리도 아무 반응이 없었기에 입맛을 다실뿐이었다.

    “정말 천년을 기다려야 하는가….”

    천균이 ‘천년쯤~’이라고 말했을 때, 그저 긴 시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거라 생각한 준혁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젓고 말았다.

    잠시 후, 뿌리들을 제자리에 둔 준혁은 지유목을 적당량 벌목했다.

    그동안 1품, 2품 화목단을 전부 소비해 다시 단약 제조를 해야 할 때가 된 것.

    적당량의 지유목으로 공간대를 채운 준혁은 거처로 돌아와 연단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단약 제조를 시작하려는 찰나.

    거처밖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운에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의외의 인물이 준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주!”

    “리암 수사 아닙니까? 원영기에 올랐단 말은 청명을 통해 들었습니다. 독일로 돌아간 줄 알았더니 아니셨습니까?”

    원영기에 올랐기에 준혁의 어투가 예전 인질로 잡고 있을 때와는 달라져 있었다, 그에 화들짝 놀란 리암이 손사래 쳤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독일 정부에 볼일이 있어 잠시 다녀온 것뿐입니다. 수사께 받은 은혜를 갚지도 못했는데 떠나다니요. 게다가 제가 가진 능력에 관해 연구해 보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전처럼 대해주십시오.”

    “그러겠네, 그럼.”

    리암의 태도가 마음에 든 준혁이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원영기에 올랐음에도 계속 내 곁에 머물 텐가?”

    “당연합니다. 예전 약속은 지켜야지요.”

    “좋네. 내 거처 옆에 자리를 마련해 줄 테니, 수사는 그곳에 머물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도주!”

    수련 증진 효과가 준혁과 가까워질수록 높아졌기에 리암의 표정은 사탕을 손에든 아이처럼 환하게 변했다.

    “저도 함께 할 수 있을까요?”

    그때 노랑머리에 여전사처럼 생긴 여인이 성인봉 봉우리에 내려섰다.

    이미 기감으로 다가오고 있던 상대를 파악한 준혁은 빙긋 웃어 주었다.

    “안될 게 무어 있겠습니까? 제이엘 수사라면 이미 명예 울릉도인이 아니겠습니까?”

    명예 울릉도인이라는 말에 제이엘이 입가를 끌어올리며 한쪽을 가리켰다.

    “허락해주셨으니 저는 저쪽에 거처를 마련하겠습니다.”

    그녀 역시 준혁과 가까이 있을수록 좋다는 정보를 얻었기에 준혁이 다른 거처를 정해주기 전 자리를 선점하고 나섰다.

    “편한 대로 하시지요. 그럼 나머지 분들도 이곳에서 저와 함께하시길 원하는 것입니까?”

    제이엘이 자리를 선점한 후, 준혁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말을 꺼내며 은밀하게 영기파동을 퍼트렸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던 허공에서 한 쌍의 남녀가 당황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알고 계셨군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무례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밴쿠버에서 온 제이콥, 이쪽은 제 아내인 올리비아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수사를 오랫동안 동경해 왔었어요. 이렇게 뵙게 되니 영광이네요.”

    “도둑놈처럼 숨어있다가 할 말은 아니군.”

    준혁이 사라졌던 동안 등장한 원영기 수사, 부부 원영기이자 캐나다의 국력을 신장시킨 두 사람의 등장에 제이엘이 불만인 듯 이죽거렸다.

    리암도 두 사람이 못마땅한 듯 인상을 구겼지만, 딱히 입을 열진 않았다.

    준혁은 제이엘과 리암이 나타나기 전부터 법기를 이용해 몸을 숨기고 있던 두 사람을 인지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기에 딱히 제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제이엘과 리암이 불만스럽다는 듯 바라보자, 준혁은 의문을 가졌다.

    특히 평소답지 않은 제이엘의 모습이 낯설었다.

    -제이엘 수사. 저 두 사람을 반기지 않은 것 같은데. 무슨 이유라도 있으신 겁니까?

    준혁의 전음에 제이엘이 허공에 뜬 두 사람을 지긋이 노려보다가 전음을 보냈다.

    -저들 부부는 수행을 올리기 위해 인간으로서는 해선 안 되는 일을 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흠….

    준혁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못한 제이엘이 한참을 망설이다 얘기를 이어갔다.

    -소문으로만 들리는 것이니 그 점 참고하고 들어주셨으면 해요.

    -물론입니다.

    -저들 부부가 수장으로 있던 세력이 하루아침에 사라졌습니다. 소문에 그들을 제물로 바치고 수행을 올린 것이라고 하더군요.

    ‘한두 명도 아닌 수백 명을’이라며 강조하는 제이엘의 말에 준혁은 침음을 삼켰다.

    제물을 통해 수행을 올리는 것이 찾기 어려운 방법은 아니었으나, 그 부작용과 폐해가 심해 쉽사리 사용하는 자가 없었던 일.

    -그런 식으로 경지를 돌파하면 반서가 심하다고 하던데…. 정말입니까?

    -그러니 소문이라 한 것입니다. 불길한 자들이니 섬에 들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소문이라 말했지만, 제이엘은 어느 정도 심증을 굳힌 듯 보였다.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설명을 들어보니, 두 사람이 합공하면 원영기 초기 두 명의 능력이 아니라, 그보다 상급 수준의 위력을 보여주기에 기세가 등등해 모든 이들을 발아래로 여기고 안하무인 할 때가 많다고 했다.

    “조용한 것 보니, 두 수사가 도주께 저희 험담이라도 하고 있나 봅니다. 하하.”

    주변 공기가 어색해지자 제이콥이 어색하게 웃으며 제이엘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준혁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제이엘이 ‘흥’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수사, 떠도는 소문들은 저희 두 사람을 질투해 음해하는 것이니 심각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떤 의심을 사고 있든 상대방이 정중하게 요청한다면 준혁 입장에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

    모든 이들을 오라고 해놓고, 누군 받아들이고 누군 쫓아낼 수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올리비아라는 여인이 자신들의 방문 목적을 밝혔다.

    “수사께서 수련을 원하는 자 모두 오라고 하셨지요? 저희도 이곳에서 수사의 능력을 체험하고 싶은데…. 허락해주실 테지요?”

    허락해주라고 부탁하는 것도 아닌, 허락하라는 듯 말하는 어투가 심기를 거슬렸다.

    하지만 준혁은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얼마든지요. 다만 마선문도가 아니면 섬 외곽에만 머물러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저 두 사람은 이곳에 머물게 허락했으면서, 저희 둘은 외곽이라고요?”

    여인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여인이 기세를 피우자, 준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제이엘 수사는 제가 없는 수십 년간 울릉도를 지켜주신 분입니다, 여기 리암 수사는 마선문도는 아니지만 제 일을 돕고자 섬에 머물고 있고 말입니다. 손님으로 오신 두 분과는 다른 처지지요.”

    “흥. 그럼 저와 이 사람도 오늘부로 마선문에 입문하겠어요.”

    “흠….”

    “대신 저희 수행보다 떨어지는 자의 명령은 들을 수 없으니,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해주시면 좋겠네요.”

    청명이 들었다면 바로 욕부터 튀어나왔을 말에 준혁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원영기 수사분들이라면 그런 요구 조건을 말할 자격이 되지요. 두 분께 장로 자리를 주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해드리지요. 다만, 두 가지는 지켜주셔야 합니다.”

    준혁이 이렇게 쉽게 허락할 거라고 생각은 못 했는지, 두 사람은 잠시 당황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다가 급하게 물었다.

    “두 가지요? 무엇인가요?”

    “첫째. 마선문도로서 절대 섬 내의 수사들과 일반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네요.”

    “둘째.”

    준혁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는 중요한 비밀이란 듯 목소리를 살짝 낮추었다.

    “금지로 지정된 저쪽 봉우리엔 절대 다가가지 않는다. 물론 이 조건은 두 수사뿐 아니라 마선문도 전원이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금지라는 말에 여인의 눈이 찰나지간 반짝였다.

    “어려울 것도 없네요. 그럼 저흰 어디에 자리하면 될까요? 이 봉우리엔 다른 분들이 있으니 좀 더 조용한 곳으로 고르고 싶은데….”

    여인의 요청에 준혁이 씨익 웃었다.

    “원하는 곳을 정하시면 문주를 불러다 자리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환영합니다. 두 분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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