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도주 (2)
수천 개의 봉우리가 모여있는 천장(天場).
이곳엔 선계 최강 세력 중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세력을 암중에서 움직이는 절대자의 거처가.
천장의 중심엔 끝을 알 수 없는 칼 같은 봉우리가 하나 있었는데, 그 봉우리 중간엔 검은 구름이 상시 머물고 있어 흑운천(黑雲川)이라 불렸고, 흑운천을 건너 계속 위로 올라가면 공간 전체가 균열 진 것처럼 비틀린 괴이한 장소가 나타났다.
그 괴이한 장소엔 나무와 돌로 만든 오두막 한 채가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모든 이들이 우러러보는 절대자가 머무는 곳이었다.
항상 고요함만이 가득했던 그곳에 오랜만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천의 주인이시여….”
말을 하는 자는 평범하게 생긴 중년이었는데 두 눈이 마치 거울을 집어넣은 것처럼 바깥의 모습을 그대로 내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가부좌를 한 채 가만히 앉아있는 자는 회색 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사내였는데, 얼굴은 그 어떤 여인보다 아름다웠고 몸에선 기품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공천귀를 찾아냈사옵니다.”
여느 때와 달리 이번엔 상대가 반응을 할 줄 알았던 백팔마선경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을 이었다.
“오래전 하계에 뿌려둔 제 소식통 중 하나에 걸렸사온데…. 무슨 생각인지 스스로를 망치면서까지 제가 찾지 못하게 수를 써버려 정확히 어느 하계로 숨어든 건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사옵니다.”
적막감이 표범처럼 등 뒤를 할퀴자 백팔마선경은 움찔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허나, 단편적인 정보는 얻어냈으니, 조만간 그가 있는 곳을 특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그동안 궁금해하던 소식을 전했음에도, 상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눈조차 뜨질 않았고, 마치 죽은 것처럼 기의 파동도 느껴지질 않았다.
“그럼 그의 행방을 알아내는 대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백팔마선경은 상대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는지 예를 올린 후 조용히 사라졌다.
잠시 후, 조용하던 거처에 미약한 숨소리와 함께 읊조리는 듯한 소리만이 작게 울려 퍼질 뿐이었다.
“공천귀…. 그대가 그립구나…. 혹 그 아이를 보호하고 있는 건가….”
회색 머리 사내는 또다시 침묵하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더 작은 목소리를 내었다.
“그렇다면…. 언젠간 다시 나를 찾아오겠지….”
***
나무가 우거진 숲속.
높게 자란 나무 덕분에 빛이 들어오지 않아 낮임에도 어두컴컴한 숲길.
그곳을 눈처럼 하얀 토끼 한 마리가 깡충깡충 뛰어가고 있었다.
잠시 후 맛있는 고기의 향을 맡은 것인지, 멧돼지와 소를 합성시켜놓은 것처럼 생긴 괴수 하나가 침을 흘리며 다가왔다.
“크르르르.”
괴수는 보통 토끼보다는 훨씬 큰 흰 토끼를 향해 입을 벌리며 단숨에 덮쳐갔다.
하지만 토끼도 평범한 토끼는 아닌지, 달려오던 괴수를 보고는 흥! 하는 콧소리를 내더니 깡충 뛰어 공격을 피해버렸다.
신기한 일은 바로 그다음에 벌어졌다.
토끼를 한입에 삼키지 못한 괴수가 분한 듯 몸을 돌린 순간.
쩌저정-
괴수의 몸이 얼음덩어리로 변하더니 잠시 후 퍼걱 하며 터져나가 버렸다.
“별것들이 다 덤벼드는구나.”
괴수를 단숨에 처치해버린 토끼.
그는 목족의 여왕 스퀘타의 시선을 피해 도망 중인 준혁이었다.
식검과 분광소를 공명시켜 분신체로 여왕을 유인한 준혁은 최대한 시간을 끌라고 명령을 내린 뒤, 모든 기척과 기운을 감추고는 설토족으로 변신해 이동 중이었다.
처음부터 분광소가 그리 오랜 시간을 끌 수 없을 거라 여겼기에 잠시 시선을 돌린다 해도 안전하게 목족의 대지를 빠져나가긴 어렵다고 생각한 것.
그랬기에 모든 술법을 배제한 채 목족의 대지에 원래 살고 있던 동물인 척 두 발로 천천히 도망가는 중이었다.
다행이라면, 예전에 곳곳에 심어둔 기운 덕분에 자신의 흔적에 교란을 줄 수 있었고, 이런 방법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기운을 회수하지 못한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아마르곤의 말에 따르면 목족의 대지 전체가 여왕의 감시하에 놓여 있으니, 비경의 중심지를 벗어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 방법이 최선이라 판단했다.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노릿한 짐승의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그놈들이군.’
목족의 대지 안엔 조금 전처럼 이성이 없는 괴수들도 많았지만, 수행을 가진 영수들도 존재했다.
문제는, 영수들을 상대로 술법을 사용하다가는 그것이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 하더라도 여왕의 시선에 잡힐 수 있다는 것.
잠시 고민하던 준혁은 걸어오던 방향을 바꿔 반대로 뛰기 시작했다.
깡충깡충-
겨우 축기기에도 미치지 못하는 영수들을 피해 달아나는 준혁이었다.
***
석 달 후.
목족의 대지를 두 발로 걸어 이동한 준혁은 여왕의 시선이 닿는 곳의 경계를 지난 순간 풍둔술을 사용해 하늘을 갈랐다.
목적지는 아마르곤을 만나기 전에 활성화해놓았던 북쪽의 출구.
다만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 준혁은 여전히 토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며칠 후.
목적지 근처에 도착한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바로 비경의 출구가 숨겨진 장소에 모여있던 목족의 원영기 수사들 때문.
멀리서 그들을 기감으로 확인한 준혁은 토율서를 이용해 땅속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다.
‘흠. 나갈 방법이 없구나.’
땅속 깊은 곳에 자리를 마련한 준혁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원영기 수사들을 단숨에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여왕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고 있는 중.
목족 수사들을 상대하는 사이 여왕이 공간을 가로질러 나타날 가능성이 다분했다.
거기다 아마르곤이 준혁을 걱정하는 것처럼 준혁도 그의 동족들을 마구잡이로 해쳐 그와의 관계가 서먹해지길 원하지 않았다.
여왕에게 피해를 준 것이야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하나, 하급 수사들을 무참히 썰어버리는 것까지 이해해줄 리는 없었으니까.
게다가 준혁으로서는 아마르곤과의 관계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해야 할 필요도 있었다.
처음 백호를 만나고 왔을 때, 대책 없이 당했던 것을 대비해 계획을 세웠었고, 그 계획엔 아마르곤도 포함돼있던 것.
준혁은 사신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선계로 갈 수는 있을지언정 그들에게 휘둘리게 될 게 분명하다 여겼다. 혹은 조종 당하거나.
그래서 그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을 방법을 모색했고, 그렇게 계획한 것이 사신의 의지를 제외한 힘만을 뺏어오는 일이었다.
다만 네 사신의 힘을 혼자 감당할 수는 없으니, 자신의 영수를 그릇 삼아 그 힘을 적당히 분배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그 영수의 후보 중엔 아마르곤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 사신으로부터 힘을 빼앗아올 방법은 찾지 못했으나, 바람꽃과 산들바람이 의도치 않게 영수로 편입되면서 그릇의 준비는 끝난 것과 마찬가지.
이젠 자신의 성장과 더불어 그릇의 크기를 키우고, 동시에 힘을 빼앗을 방법만 찾아내면 만사 오케이가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마르곤과의 유대감이 나락으로 떨어진다면 그건 곤란했다.
‘어찌해야 하나…. 다른 출구들도 전부 감시하고 있을 테고, 그렇다고 무작위로 생겨나는 출구를 찾아 돌아다니긴…. 흠.’
한참 동안 고민하던 준혁은 자신의 고민이 별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고는 쓰게 웃고 말았다.
어차피 비경에서 나간 후엔 주작을 만나러 갈 생각 따윈 전혀 없는 상태.
제대로 된 준비가 되기 전까진 다른 일들은 모두 제쳐둔 채 수련만 진행할 생각이었으니 바쁘게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거기다 분광소의 도움으로 억제하고 있지만, 아직 몸 안에 남아있는 백호의 의식도 처리해야 하는 것.
준혁은 토율서를 이용해 더 깊은 곳으로 이동해 내려갔다.
그리고는 혈단법으로 흡기를 일으켜 일정 공간을 허물었고, 진법으로 기운이 새어 나가지 못하게 막아 완벽한 거처로 만들었다.
“우선은 백호의 의식을 처리하는 것이 먼저, 다음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
삼청조를 발동해 청명이나 사쿠라와 연락을 해 보려던 준혁은 마선들을 만나고 온 뒤 삼청조의 분신들이 전부 초기화되었다는 걸 알게 됐다.
세 개로 나뉘었던 삼청조가 다시 하나가 돼 버린 것.
“알아서 잘들 하겠지.”
연락이 되질 않아 조금 걱정이 생기긴 했지만, 수십 년간 자리를 비웠던 경험이 있기에 청명과 사쿠라를 믿고 수련을 시작하기로 했다.
다만 변화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팔목에 차고 있던 공천령이 다시 문신으로 변해 있었고, 예전과 비교해 기운이 더욱 약해져 있었다.
팔찌 안에 가득 쌓아두었던 영석뿐만 아니라, 본인의 원기까지 전부 사용해 버린 그.
“공천귀….”
준혁은 분광소의 말을 되뇌며, 자신을 구하기 위해 희생한 인자하게 생긴 노인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문신이 자리한 팔목을 몇 번이고 어루만지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용각족의 유적 같은 곳이 그곳 하나만 있을 리는 없지. 공간석을 찾아 부활시키면 된다.”
그리고 공천귀와 헤어지기 직전 그가 했던 말도 떠올렸다.
자신이 봉인되었던 장소를 찾으라는 말과 자신이 천신라의 창고지기였다는 말.
그 두 가지가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식검과 함께 봉인돼 있던 공천령을 처음 발견했을 때, 그의 내부가 텅텅 빈 상태였다는 걸 고려한다면,
그가 처음 봉인 당했던 곳에 가게 된다면, 천신라의 창고지기를 하며 보관하고 있었던 보물들을 전부 얻을 수 있다는 말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이치에 맞았다.
어쩌면 준혁이 다시 공간석을 찾아 헤맬 걸 알고 미리 말해준 것일지도….
“그리고 천혈이란 것도 찾아내야지.”
준혁은 공천귀가 강조하던 것을 떠올리며 공간대에서 명혼단 한 알을 꺼내 삼켰다.
아무리 작은 조각이라고는 하나, 백호의 의식 조각은 아직 준혁의 수준에서 해결할 수 없는 것.
우선은 혼을 강화해 그에 걸맞는 수준을 갖추는 게 먼저였으니까.
***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 준혁이 목족의 여왕에게서 도망친 지도 50년.
그사이, 지구엔 세 명의 원영기 수사가 새로 나타났고, 영국의 제이엘 수사는 원영기 후기에 오르며 지구 최고 수행자라 불리게 되었다.
다만 최강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등급을 무시하는 강자라 소문난 한국의 최준혁 수사 때문이었다.
탁-
한가로운 공원 한켠.
새와 꽃무늬가 가득 새겨진 찻잔을 들어 홍차를 마시고 있던 제이엘은 멀리 보이는 건물들 너머 어딘가를 향해 시선을 두며 입을 열었다.
“예전에도 그랬어.”
“무엇이 말입니까?”
어느새 제이엘의 곁에는 중년으로 보이는 사내가 나타나 있었다.
그는 안토니오와 함께 준혁을 기습하는 데 동참했다가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결단기 후기 수사.
지금은 원영기에 올라 독일을 대표하는 수도자가 된 리암 슈스터였다.
“그때도 이렇게 오랫동안 자릴 비운 후…. 말도 안 되는 괴물이 되어 나타났거든.”
리암은 제이엘이 말하는 괴물이 누군지 알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괴물이라니요. 그분을 그런 수식어로 표현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젠 충신이 다 되었네.”
충신이란 표현에 리암이 양손을 들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분이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로 도움을 드리기로 했는데. 전 한 것도 없이 받기만 했으니까요.”
준혁에게 잡혀갔던 리암은 그를 도와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능력의 비밀을 밝히기로 했었다.
하지만 그 일은 차일피일 미뤄졌고, 결국 준혁에게 수련에 도움이 되는 화목단을 받아 크게 성장하기만 했다.
거기다 더해 인질이라는 신분 덕분에 준혁 가까이에 머물 수 있었고, 그 덕에 엄청난 수련 증진 효과를 경험하고 얼마 전에 원영기에 오르는 쾌거를 이룬 것.
리암에게 있어 준혁은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자, 원영기에 오른 은혜를 갚아야 할 은인이었다.
“언제까지 그곳에 머물 거지? 이젠 널 구속할 수 있는 자도 없을 텐데.”
“그분이 돌아오시고 은혜를 갚을 때까진 계속 울릉도에 있을 겁니다. 그리고 왜 없습니까? 사쿠라 수사가 있는데.”
“사쿠라라….”
제이엘은 사쿠라를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준혁 앞에선 천생 여자같이 굴다가, 준혁만 없으면 깡패같이 돌변하는 사람.
제이엘이 사쿠라를 떠올리며 생각에 빠진 듯 보이자, 리암은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작별을 고했다.
“그럼 안부 전했으니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빨리도 가네.”
그때 공원 밖이 소란스러워지며 결단기 중기 수사 하나가 빠르게 나타나 제이엘 앞에 반 무릎 자세로 몸을 낮추었다.
“한국에서 온 소식입니다!”
한국이란 말에 제이엘과 리암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그동안 모습을 감췄던 한국의 최준혁 수사가 나타나 대대적인 공고를 붙였다 합니다.”
“공고?”
제이엘이 빨리 말하라는 듯 말끝을 올리자, 결단기 수사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수련하고자 하는 자, 신분을 가리지 않고 오라. 삼 일 후 섬을 봉쇄한다…. 라고.”
팟-
그 순간. 리암이 땅을 박차더니 하늘을 가르며 사라져 버렸다.
-섬에서 뵙겠습니다.
그가 떠난 뒤 그의 목소리만이 제이엘의 귓가에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