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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175화 (175/408)

175화. 만통방 (3)

160㎝ 정도 키에 눈매가 매섭게 올라간 사내.

허리까지 내려온 적발과 붉은 눈썹이 유난히 기억에 남아있던 자.

붉은 요기를 머금은 입술을 이죽거리며 거친 말을 쏟아내는 사내는 적마도가 식검에게 잡아먹히기 전 적마의 모습이 분명했다.

멱살을 잡아 올리는 적마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자들 역시 몇몇은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나무로 만든 인형처럼 보이는 성인만 한 크기의 인지괴, 그 옆엔 처음 보지만 새하얀 아우라를 퍼트리며 인자하게 서 있는 백염의 노인.

노인의 어깨에 앉아있는 수다스럽게 생긴 분홍색 새 한 마리.

그리고 노인의 옆엔 굉장한 미남자가 팔짱을 낀 채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준혁을 보고 있었고, 노인과 미남자 사이엔 왠지 익숙한 느낌의 바가지 머리를 한 꼬마 아이가 헤헤거리며 웃고 있었다.

다른 한쪽엔 불만 가득한 거북이가 짜증 난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가 준혁과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훽하고 돌려버렸다.

그들을 살핀 준혁은 절로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만통방을 발동하기 직전에 소환한 토율서를 제외하곤 모두 다 살아있는 사람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인지괴, 공천귀, 분광소…. 설마? 식아?”

멱살을 잡은 적마의 손아귀엔 악의가 없었지만, 점점 힘이 들어가자 준혁은 숨이 막혀와 적마의 손을 ‘탁’ 소리가 나게 쳐냈다.

준혁의 행동에 손이 풀리며 한걸음 물러난 적마가 ‘어쭈?’라는 말을 내뱉으며 다시 다가왔지만, 이내 행동이 막히고 말았다.

인지하지도 못할 찰나의 순간, 공천귀가 거리를 생략하듯 두 사람 사이에 나타나 중재를 한 것.

“적마, 시간이 없다는 걸 모르나? 물러나게.”

“쳇.”

한마디에 적마가 말없이 물러나자, 공천귀는 준혁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공자, 처음 뵙겠소. 예상하겠지만 나는 공천귀라 하오.”

준혁이 아직 얼떨떨한 기분을 숨기지 못하고 있자, 공천귀는 적색 공간 어딘가를 힐끔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공자, 갑자기 이렇게 만나게 되어 당황스러울 것이오. 허나 시간이 많지 않으니 우선 해야 할 말만 전하겠소.”

“무슨 말을 말입니까? 아니, 그전에…. 다들 식검, 그러니까 식아에게 잡아먹혔던 것 아니었습니까? 설마 흡수당한 채 본체는 따로 존재했던 겁니까?”

준혁의 물음에 공천귀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식아에게 흡수된 건 맞습니다. 평소엔 식아를 통해 세상을 볼 수 있고 말입니다.”

“그래! 그러니깐 나 좀 그만 부려 먹어 이 미친놈아! 빌어먹을 개만도 못한 능력으로 욕심을 내니깐 내가 얼마나 뭣 같은지 알아?!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

“심영근이라 행운을 잡은 줄 알았더니! 완전 함정이었다니! 이 사기꾼 같은 놈!”

공천귀의 대답에 적마도와 삼청조가 덧붙여 투덜거렸다.

하지만 공천귀가 뒤를 돌아보며 조용히 하란 듯 눈을 내리깔자, 둘은 다시 합죽이가 되었다.

둘을 조용히 시킨 노인은 다시 준혁에게 시선을 맞췄다.

“공자, 최근에 스스로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습니까?”

마선들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넘쳐났던 준혁은 질문을 쏟아내려다가 공천귀의 말에 입을 닫았다.

최근? 이상? 준혁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지고 있던 의문들을 다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공자께서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인다 생각하냐 그 말입니다.”

갑자기 만난 공천귀의 뜬금없는 말에 준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스스로의 의지라니. 당연히 제 의지로 움직이지…. 무슨 뜻으로 말씀하시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준혁의 대답에 ‘흠’하며 생각에 잠긴 듯하던 공천귀는 뒤에 팔짱을 끼고 서 있던 분광소로 의심되는 사내를 불렀다.

“자네가 나서줘야겠네.”

“내가 왜?”

사내는 공천귀의 말에 관심 없다는 듯 외면했다.

“그럼 이대로 둘 텐가? 결국 우리는 이자와 운명공동체가 된 것과 다름없네.”

“썅, 그럼 네가 하던가. 왜 나한테 그래?”

“지금 이 상태에서 그런 말을 하는가? 나는 여길 벗어나게 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네.”

공천귀의 사정조에 사내는 썩은 표정을 하다가 팔짱을 풀고 준혁을 직시했다.

‘이자들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한단 말인가.’

준혁은 두 사람의 대화뿐 아니라 만통방이 발동된 후 마선들을 만난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고 있던 상황.

그때 팔짱을 푼 사내의 모습이 흐릿하게 흩어지는가 싶더니, 하얀 빛덩이로 변했다.

‘역시 저자가 분광소구나!’

하얀 빛덩이는 분광소가 식검과 공명했을 때의 모습과 같았다.

‘이건?’

분광소는 하얀 빛덩이로 변해 허공을 배회했는데, 마치 공격을 앞둔 것 같은 기세를 내뿜었다.

그 모습에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영력을 끌어올렸다.

세상일에 관심 없어 보이는 귀원패마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분광소와 준혁을 번갈아 바라보는 중.

그 순간, 허공을 배회하던 분광소가 섬광처럼 쏘아져 날아왔는데, 그 목표는 정확히 준혁의 머리였다.

‘나를 왜?’

갑자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분광소를 보며 준혁은 그동안 이들을 부려 먹은 일 때문에 이들이 화가 난 건가 하는 뜬금없는 생각을 하고는 월광지력을 움직여 분광소에 맞서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기운을 활성화하기도 전.

어느새 새하얀 그림자가 발밑에 드리우더니 양쪽 발목을 잡아챘고, 동시에 양 손목도 허공에 구속돼 버렸다.

양발과 양손뿐만 아니라, 영력도 무언가에 구속된 듯 움직이질 않았다.

‘이게 무슨!’

“공자, 가만히 있으시오.”

하얀 그림자가 시작된 곳이 공천귀라는 걸 알아챈 준혁은 다급하게 그를 부르며 소리쳤다.

아니, 소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하얀 빛덩이로 변한 분광소는 이미 준혁의 이마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온 후였다.

그때 준혁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크아아앙!!”

하얀 빛덩이로 변한 분광소와 부딪치기 직전.

심장과 머리에서 하얀 털 뭉치 같은 기운이 빠져나오더니 이내 하얀 호랑이의 모습으로 변한 것.

“백호?”

준혁의 입에서 의문 가득한 한마디가 나온 순간, 봉인지에서 만났던 백호의 모습과 똑같은, 하지만 크기가 작은 호랑이가 입을 크게 벌리며 분광소를 막아섰다.

그 순간, 공천귀가 손을 크게 올리며 수결을 맺자, 주변 공간이 흰빛으로 가득 찼고,

화악-

동시에 분광소와 부딪친 백호는 하얀 빛무리에 감싸이더니 조그맣게 변해버렸다.

그리고는 철퇴에 맞아 힘을 잃은 것처럼 비틀거리다가 도망치듯 준혁의 심장 속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그 순간. 준혁은 머릿속이 깨끗하게 개는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일들의 모순이 머릿속에 박히기 시작했다.

“이건….”

“공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하시오?”

일련의 일들이 지나고 주변을 감쌌던 흰빛이 사그라들자, 공천귀가 손자를 보는 할아버지처럼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준혁은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그동안 별일 아닌 듯 지나갔던 자신의 행동을 빠르게 답습하고 있었다.

눈꽃 비경에 들어선 순간부터 이상해진 자신의 행동.

처음 본 마족에 대한 분노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마족이 아무리 약탈을 거듭하며 번영하는 종족이라고는 하나, 준혁 입장에선 영수족이나 목족처럼 타 종족 중 하나일 뿐.

자신에게 해를 끼친 것도 없고, 끼칠 일도 없으니 분노나 짜증이 생길 이유도 없었다.

‘아아…. 내 의지로 움직이냐고 물었던 게 이 말이었구나.’

마족에 대한 분노는 약과였다.

더 문제는 위험이 뻔한 상황에서도 안전을 도모하지 않고 그저 선계로 가겠다는 목적 하나만으로 움직인 일들.

특히 연형기 수사가 있는 마족의 거주지를 활보하고, 이번엔 목족의 여왕을 만나러 온 것까지.

연형기 수사가 아무리 계면의 압박으로 행동에 제한이 생겼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고 손을 쓴다면 준혁으로서는 어찌할 방법도 없이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정말 무모하게 움직였구나.’

거기다 바람꽃과 산들바람을 자신의 영수로 받아들인 것도 마찬가지였다.

심상과 감정을 공유하는 존재를 그렇게 쉽게 받아들여서는 안 됐었다.

특히 청호와 두 도마뱀처럼 순수한 새끼 상태일 때와는 달리, 이미 정신적으로 성장이 끝난 두 영수는 종속의 인으로 인한 유대감이나 충성이 충분하지 못할지도 모를 일.

아마르곤처럼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해서는 안 되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실수도 크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건 백호를 비롯한 사신에 대한 적의와 반감, 그리고 경계심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이었던 것.

자신의 기억을 들여다보고 마음을 읽어버린 백호의 능력에 치를 떨며,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고서는 움직이지 않으려고 했던 마음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오히려 백호에 대한 호감이 급상승해 있었고, 하루라도 빨리 사신의 힘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

“하아. 내가 운이 좋았구나.”

다행히 일이 더 진행되기 전 마선들을 만나 이 모든 걸 깨달았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준혁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공천귀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호를 만났을 당시, 그가 나에게 금제를 걸어두었었습니다. 혹여 그것 때문 아닙니까?”

분광소는 ‘멍청이는 아니네?’라는 얼굴을 했고, 공천귀는 연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렇소. 정확히 말하자면 공자가 당한 건 금제가 아니오. 금제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의식 한 조각을 공자의 몸속에 심어둔 것이오. 그 의식 조각이 백호의 의지를 반영해 공자의 무의식을 지배하려 했던 것이오.”

“아….”

“다행이라면 공자가 복용한 명혼단 덕분에 백호의 의지가 깊이 파고들지 못했단 것이오.”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공천귀가 설명을 이었다.

“그렇다고 안심하긴 이르오. 분광소가 자신의 마선기를 이용해 그자의 의식 조각이 활동하지 못하게 막긴 했으나, 임시방편일 뿐. 공자는 이곳을 나간 직후 스스로 그것을 몰아내야 하오.”

“감사드립니다. 평소에도 크게 도움을 받았거늘, 이렇게 또 도움을 받게 되다니. 뭐라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지….”

공천귀의 설명이 끝나자, 준혁은 허리를 깊게 숙이며 공천귀를 포함한 분광소와 그 뒤 마선들에게까지 감사를 표했다.

그 모습에 마선들은 제각각 다른 반응을 보이며 각자의 성격을 드러냈다.

그중 적마의 반응이 가장 격했다.

번쩍-

준혁이 허리를 펴기도 전, 공간이동 해온 적마는 준혁의 멱살을 재차 잡아당기며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고마운 줄 알았으면 앞으론 나 좀 그만 부려 먹어? 알겠어? 네놈이 그 봉인인지 뭔지를 뚫는다고 지랄을 한 덕분에 내가 얼마나 앓아누웠는지 알아? 어? 정말 뒈질 뻔했다고. 능력이 안 되면 내 힘을 끌어다 쓰지 좀 마. 알겠어?”

준혁이 뭐라 대답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이번에도 공천귀가 중재하며 끼어들었다.

“공자가 이해하시오. 공자가 영력을 회복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마선기를 무한정 쓸 수는 없으니…. 그리고 우리의 능력은 공자의 수행에 비례하는바, 자격이 안 됨에도 힘을 억지로 끌어쓴다면 우린 오랜 시간 잠들 수밖에 없소이다.”

공천귀가 말을 하며 준혁의 손목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예전에 청룡가에서 도망칠 때 공천령의 힘을 사용해 한동안 문신으로 변해있었던 것을 지적하는 눈빛이었다.

준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 아껴두었던 말을 꺼냈다.

“알겠습니다. 헌데, 이곳은 정확히 어떤 곳입니까? 만통방이라는 법기를 발동했는데 그대들을 만나게 되다니, 설마 만통방이 마선과 대화를 할 수 있는 물건인 것입니까?”

준혁의 말에 멀리서 날개를 퍼득거리던 삼청조가 혼잣말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소릴 내었다.

“멍청한 놈, 멍청해!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도 못 하는 머저리! 뭔지도 모르고 사용하니깐 이 사달이 나지!”

삼청조의 반응에 공천귀는 쓰게 웃더니 입을 열었다.

“아니오. 이곳은 백팔마선경의 영역 안. 그대는 지금 절대 들어오지 말아야 할 곳에 발을 내디딘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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