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172화 (172/408)

172화. 열쇠 (2)

깊지 않은 토굴 한쪽에 푸른 장막이 가로막은 모습.

원영기 마족인 카람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원영기 영수들이 갇힌 감옥이었다.

감옥의 모습을 본 준혁은 절로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인족을 가두던 감옥과 다를 게 없구나.’

영수족의 수장급이었던 원영기 영수들은 그들이 인족을 잡아다 가둬두었던 감옥과 거의 흡사하게 생긴 곳에 갇힌 상태였다.

그 모습이 약육강식의 수도계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아 웃고 만 것이었다.

새로운 이의 등장 때문일까, 동공이 풀린 채 무기력하게 앉아 있던 영수들이 준혁에게 한 번씩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그런 관심도 잠시뿐, 다시 희망도 절망도 없는듯한 얼굴로 눈을 감아버렸다.

“잠시 바깥에서 대기하거라. 따로 알아볼 것이 있으니.”

준혁은 영수들을 천천히 살펴보다 카람에게 감옥 밖을 향해 눈짓했다.

“예.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카람이 밖으로 향하자, 마치 그가 들으라는 듯 준혁은 감옥 안쪽에 앉아 있던 영수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 중 한 녀석을 내 종속으로 삼으려 한다. 누가 할 테냐?”

준혁의 목소리가 퍼져나가자 영수들은 움찔했지만, 누구도 대꾸하진 않았다.

그 모습에 준혁은 바람꽃을 향해 전음을 날렸다.

-바람꽃 수사. 산들바람의 부탁으로 그댈 구하러 왔습니다. 내 말에 호응한다면 그댈 탈출시켜주겠습니다.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던 바람꽃은 준혁의 전음에 부르르 떨더니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그리고는 감옥 밖 준혁을 응시하는데, 그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냐고.

영력이 완벽하게 구속당해 전음을 사용할 수 없는 바람꽃의 처지를 알고 있었기에, 준혁은 그녀의 눈빛에 담긴 뜻을 읽어내고는 답해주었다.

-예전엔 그대와 산들바람에게 큰둥이라고 불렸었지요.

큰둥이라는 말에 바람꽃의 눈은 더할 나위 없이 크게 떠졌다.

그때 준혁에게서 한줄기 기운이 빠져나와 바람꽃의 이마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 바람꽃의 머릿속엔 듬직하게 생긴 하얀 호랑이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내 종속이 된다면 이곳에서 꺼내주고, 일정부분 자유를 줄 수도 있다. 이 안에서 죽는 것보다는 나을 테지. 정말 아무도 없느냐?”

준혁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감옥에 앉아 있는 영수들의 귓가를 파고들었지만, 이번에도 반응은 없었다.

그때. 바람꽃이 주변 눈치를 보다 천천히 일어나 준혁 앞으로 다가왔다.

“정말 이곳에서 꺼내주실 건가요?”

조금 전 준혁의 말이 아닌 전음으로 건넨 말에 대한 물음.

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내 종속이 되는 일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터. 네가 하겠느냐?”

“바람꽃! 무슨 생각입니까?! 마족의 종이 되겠다니!”

“수사는 자존심도 없는 것입니까?! 삼경 삼선에 이른 고위수사도 아니고, 겨우 저런 자의 종이 되겠다니요?!”

준혁과 바람꽃의 대화에 다른 영수들이 화를 내며 반응을 보였지만, 바람꽃은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당신의 종이 되겠습니다.”

바람꽃은 다른 영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바로 수락했다.

바람꽃에게서 허락이 떨어지자 준혁은 감옥의 입구를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카람. 밖에서 듣고 있는 것 알고 있다. 들어와 이자를 꺼내거라.”

준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입구 방향에서 카람이 쏜살같이 나타났다.

“죄송합니다. 이곳이 제 관리구역이다 보니….”

“됐다. 다른 말은 필요 없으니 저 영수를 꺼내기나 하거라.”

카람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감옥 앞으로 다가가 네모난 옥패를 꺼내 들었다.

“정말 부대장님과 상의를 한 일이시겠지요?”

“의심스러우면 찾아가 물어보거라.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준혁의 당당한 모습에 카람은 고갤 저으며 바로 옥패를 발동시켰다.

두 부대장을 만난 후 특별한 제지를 당하지 않은 걸 보면 그의 신분은 믿을 수 있다는 것.

별 쓸모도 없는 영수 한 마리 때문에 상대가 거짓을 말할 리 없다 판단했다.

잠시 후 푸른 장막으로 감싸있던 감옥에 출입구가 생겼고, 바람꽃은 눈치를 보며 감옥을 빠져나와 준혁 앞으로 다가왔다.

***

카람이 보는 앞에서 바람꽃의 구속을 풀어준 준혁은 곧장 그녀에게 종속의 인을 걸었다.

종속의 인이 걸리며 두 사람 사이에 끈이 생기자 바람꽃은 카람의 눈치를 살짝 보다가 준혁에게 전음을 날렸다.

-다른 이들도 구해주시면 안 되나요?

-그건 불가합니다. 그대에게 종속의 인을 펼친 것도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냥 구출했을 겁니다.

처음 마족의 거주지로 향할 때만 해도 적마도와 토율서를 이용해 바람꽃을 구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두 완영기를 상대하고 난 준혁은 응급처치로 어느 정도 회복을 했음에도 아직 정상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안전하게 바람꽃을 구하기 위해 행한 선택이 종속의 인이었다.

준혁은 바람꽃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한 채 다른 사안에 대한 얘길 꺼냈다.

그녀를 구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문제를.

-아홉 종족이 가지고 있던 열쇠로 문을 여는 방법에 대해선 알고 있으십니까?

-그건 왜요? 알고 있긴 한데….

-알고 있음 됐습니다. 자세한 얘긴 돌아가서 나눕시다.

혹시나 바람꽃이 열쇠의 사용 방법을 모르면 영수들의 수장 격이었던 사안족 수사도 구해야 했기에 확인했던 것.

그녀가 방법을 안다고 하자 준혁은 내심 다행이라 생각하며 카람을 향해 말했다.

“카람.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에서 확인해야 할 것이 있으니 밖으로 안내하거라.”

“예? 봉인지에 들리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나빌 부대장이 말하길 당분간 봉인지는 출입할 수 없다더군. 그리고 이젠 그곳에 갈 필요도 없어졌다.”

처음엔 봉인지에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는다고 했다가 갑자기 영수에게로 이동, 이번엔 다시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며 말을 바꾸자 카람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보다 신분과 수행이 높은 이에게 내색하진 못했다. 다만 참을 수 없는 궁금증까진 억누르진 못했다.

“혹시 무엇 때문인지….”

준혁은 기분 좋은 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나빌 부대장에게 들으니 이브람이란 자가 성광지력을 이용해 우리 부대원들을 치료할 수 있을 거라더군.”

“아….”

“지금 그자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나, 성광지력을 얻기 위해선 그곳에 올 수밖에 없다니 미리 가서 기다리려고 하는 것이다. 봉인지를 탐색하려던 것도 결국은 우리 부대원들을 치료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던 만큼, 굳이 다른 일에 시간을 낭비할 필욘 없겠지.”

준혁의 말이 이치에 맞자, 카람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한편에 생긴 의문이 사라진 건 당연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카람이 다시 길을 돌아 거주지의 입구 쪽으로 향했다. 준혁은 미련도 없이 그의 뒤를 쫓았고, 바람꽃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감옥 안 영수들에게 시선을 주다가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

버드나무가 듬성듬성 자라나 있는 들판.

마족의 거주지를 빠져나온 준혁은 신비경으로 향하던 길목에서 잠시 카람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는 그에게 작별을 고했다.

“우린 그만 헤어져야겠네.”

잠시 후 카람에게 영원한 안식을 선물한 준혁은 공간대를 회수하고는 그의 시체는 혈정단으로 만들어 버렸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바람꽃은 마족의 시체가 단약으로 변하는 모습에 오래전 준혁이 시체수거반을 도맡아 했던 걸 떠올리고는 잠시 몸을 떨었다.

그때 당시엔 그저 남들이 하기 싫은 일을 도맡아 함으로써 인지도를 올리는 거로 생각했는데, 실제론 영수족의 시체로 단약을 만들고 있었음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만 것.

영수족은 애초에 다른 영수를 잡아먹으며 수행을 올렸기에 준혁의 행동에 대한 혐오감 같은 건 없었지만, 공포감이 스멀스멀 올라옴을 느꼈다.

준혁은 그런 바람꽃의 심경 변화를 느끼고는 그녀를 향해 살짝 웃음 지어주었다.

“무얼 걱정하는지 알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땐 그 방법이 유일한 수련 방법이었을 뿐, 앞으로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준혁은 종속의 인을 감응시켜 바람꽃의 마음을 토닥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그녀가 안정됨을 느낀 준혁은 날아가던 방향을 바꿔 아홉 종족이 모여있는 연합지를 향해 움직였다.

그런 그의 뒤를 바람꽃은 조용히 따랐다.

***

사흘 후.

아홉 종족이 모인 연합지에 도착하자 산들바람이 나타나 바람꽃에게 달려들었다.

“언니!!”

“산들아!”

두 자매는 한참 동안 부둥켜안고 상봉을 만끽했고, 그사이 다른 종족의 원영기 수사들이 소식을 듣고 몰려와 놀라움에 눈을 껌뻑거렸다.

“도대체 언제….”

“혼자서 마족 놈들에게 잡혀있던 바람꽃 수사를 구했단 말인가….”

제각각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상황 속, 가장 먼저 준혁에게 무릎 꿇었던 황웅족 수사 거웅이 급하게 달려와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수사! 혹시 저희 황웅족의 대웅 수사는 보지 못하셨습니까?”

거웅이 행동을 취하자 다른 수사들 역시 준혁 곁으로 다가오더니 각자 예를 취했다.

“수사! 저희 사안족의….”

“혹시 우리 흑오족….”

준혁은 그들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는 바람꽃에게 전음을 날린 후 흐릿하게 변하며 모습을 감춰버렸다.

준혁이 아무 말 없이 사라지자, 원영기 영수들은 바람꽃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설명을 듣고 탄식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종속의 인이라니….”

“어찌 그런 방법으로….”

혼령패를 갖다 바치는 건 인질을 잡히는 것과 비슷했다. 심각한 피해를 볼 순 있지만 그렇다고 자유의지를 빼앗기진 않았다.

하지만 종속의 인이라면 영원히 종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

시전자의 마음에 따라 자유의지마저 사라져 버릴지 모르는 것이었기에, 급하게 모여들었던 영수들은 모두 고개를 젓고 말았다.

그런 방법을 통해야 한다면 아무리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라도 선뜻 손을 내밀기 어려웠다.

바람꽃이 무슨 생각인 줄은 모르나, 그녀를 제외하고 다른 이들이 호응하지 않은 건 이해가 가는 처사였다.

하지만 바람꽃의 반응에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이가 한 명 있었다.

“나는 안 된다고 하더니!!”

산들바람은 원영기 수사들에게 둘러싸인 언니를 내버려 둔 채 준혁이 사라진 적호족의 거처로 바람처럼 달려갔다.

***

거처에 들어온 준혁은 회복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성난 황소처럼 들이닥친 산들바람으로 인해 회복은 차후로 미뤄야만 했다.

“왜?! 언니는 되고 나는 안 되냐고!”

산들바람은 자신에게도 종속의 인을 걸라며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며 다가왔고, 준혁은 그녀를 말릴 수가 없었다.

바람꽃에 걸린 종속의 인은 최대한 빠르게 풀 것이라고 설명해도 산들바람은 막무가내였다.

“나도 해줘. 나도 연결되고 싶다고!”

결국 시간이 지나며 바람꽃이 등장해 삼자대면이 이뤄지고 나서야 산들바람은 조금 진정할 수 있었다.

그녀는 철없는 동생을 타이르듯 산들바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산들아, 종이 된다는 건 그리 간단하게 결정할 게 아니야.”

“언니는 했잖아!”

바람꽃은 준혁을 잠깐 응시하더니 말을 이었다.

“내게 걸린 종속의 인은 최 수사가 조만간 풀어주겠다고 했어. 지금은 힘들지만 말이야.”

바람꽃의 말에 준혁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래. 종속의 인은 다른 술법과 달리 바로 해제할 수가 없기에 유지하는 것뿐, 조만간 바람꽃에게 걸린 것을 회수할 거야.”

하지만 두 사람의 설득에도 불과하고 산들바람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럼 언니는 해제하더라도 나는 해줘! 나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거잖아!”

시간이 꽤 흘러도 산들바람의 마음이 변하는 것 같지 않자, 준혁은 고개를 젓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바람꽃에게 시선을 주었다.

나는 모르겠으니 네가 해결하라는 무언의 표시.

준혁의 눈짓에 바람꽃은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동생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준혁으로서는 심장이 철렁거릴 소리를 했다.

“산들아. 내 말 잘 들어. 최 수사는 네가 알고 있는 그런 이가 아니야. 우리와는 달라.”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와 같은 영수가 아니라 인족이라고. 넌 인족을 끔찍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인족과 종속의 인을 맺을 수 있겠어?”

바람꽃의 말에 산들바람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하지만 준혁은 더 놀라고 있었다.

‘내가 왜? 그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았단 말인가!’

산들바람이 처음 종속의 인을 맺고 싶다고 했을 때도 가장 크게 염려한 부분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바람꽃을 구하러 갔을 땐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왜?’

준혁은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았다.

‘이럴 수가…. 설마 열쇠 때문인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