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열쇠 (1)
준혁은 곰 같은 사내를 상대하면서 반전의 한수로 분광소와 식검을 미리 발출해 놓았었다.
원래 계획은 천천히 상대방을 요리하다가 분광소를 이용한 기습공격으로 단숨에 처리하는 것.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두 명의 완영기 수사의 합공을 받게 되면, 제아무리 전영술로 전투력을 끌어올리고 비술로 신체를 강화했다고는 하나 막을 도리가 없으리라 판단했다.
하지만 반전의 수를 써먹기도 전, 이유 모를 마족에 대한 분노에 휩싸여 무리하게 용천무의 법기를 사용해버렸다.
그 결과, 원래 계획보단 손쉽게 완영기 한 명을 처리했긴 했으나, 이미 전신이 탈력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기혈이 들끓으며 당장이라도 모든 행동을 멈추고 몸을 회복해야 할 판이었다.
거기다 분광소마저 막대한 영력을 끌어갔기에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그런 상태가 정점에 이를 때쯤, 하나 남은 완영기 마족이 전투 의사를 내려놓았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신분을 알려주십시오.”
상황이 자신을 돕는 것 같자, 준혁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상대를 쳐다보았다.
“왜? 머릿속을 열어 확인한다고 하지 않았나?”
“제가 알고 있는 이이 공격대를 사칭하지 않았다면 절대 이런 일을 벌이진 않았을 겁니다.”
준혁은 사내의 말에 생각에 빠진 척하며, 곰 같은 사내의 배속에 머물고 있던 손 위로 원영을 이동시켰다.
잠시 후, 마족 원영 앞에 나타난 준혁의 원영이 수결을 맺자, 원영 앞에 조막만 한 진법이 만들어졌다.
진법이 만들어지자 마족의 원영을 감싸고 있던 금빛 실들이 반응했다. 금빛 실은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여 마족 원영의 피부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금빛 실이 피부를 파고들자 마족 원영은 움찔거리며 생선처럼 파닥거렸지만, 이미 구속당한 듯 별다른 반항을 하진 못했다.
준혁은 원영에게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에 집중하며 기운이 퍼져나가지 못하게 막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숙이고 들어오면 내가 이놈을 살려줄 거라고 생각하나?”
준혁이 히죽 웃자, 나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약육강식의 문화가 발달한 마족답게, 그들은 서로 간에 죽고 죽이는 경쟁을 권장하는 사회에서 살아왔다.
거기다 더해 상대를 먼저 핍박하고 공격한 건 두 부대장이 먼저였으니, 상대방이 무슨 행동을 하든 정당방위.
나빌은 심각한 표정으로 이를 아득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를 죽인다면 대장께서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본인이 말해놓고 잊어버렸을 리는 없고 말이야.”
준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빌은 벽돌 모양의 법기를 띄우더니 손가락으로 그것의 양 모서리를 툭툭 건드렸다.
직후 수인을 맺으며 법기를 발동시키려 하자, 그게 무엇인지 짐작한 준혁이 소릴 질렀다.
“분광소!”
준혁의 말이 터져 나오기가 무섭게, 이미 적마도를 이양받아 공명시키고 있던 분광소의 몸이 번쩍하며 사라졌다가 나빌 옆에 나타났다.
파앗-
분광소가 순식간에 이동해 공격해오자, 나빌은 법기 발동을 멈추며 황급히 자리를 이탈했다.
휙-
하지만 이탈한 순간 등 뒤의 공간이 갈라지며 분광소가 다시 나타나 기운을 쏘아 보냈다.
나빌은 상대방의 힘이 조금 전보다 약해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반격을 하려다, 준혁의 눈치를 보고는 다시 뒤로 물러났다.
그때 곰 같은 사내의 배속에 손을 집어넣은 채 가만히 있던 준혁이 공간대에서 족자 두 개를 꺼내 던지며 한 손으로 수결을 맺은 후 입김을 후우 내 불었다.
족자는 영기 파동을 퍼트리며 허공에서 흔들렸고, 잠시 후 흉포하게 생긴 백호 한 마리가 족자에서 튀어나오며 사자후를 터트렸다.
“크아아앙!!”
그 순간, 토굴 전체에 거대한 영기 파동이 휩쓸고 지나갔고, 준혁은 조금 전보다 안색이 나아졌다.
분광소 역시 움직임이 조금 더 경쾌해져 사자후로 인한 도움을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빌은 반대로 가슴이 답답해지며 기력이 떨어지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백호가 사라진 직후, 나머지 족자에선 인자하게 생긴 노인이 튀어나왔다.
목족의 봉인지에서 익힌 환시화.
백호족의 환시화보다 공격에 특화된 목족의 비법은 일회용이라는 단점만 제외한다면 그 효능이 매우 뛰어난 편.
족자에서 튀어나온 노인은 순식간에 반투명하게 변하며 나빌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쇄애액-
사자후에 휘청거리다 자신을 뒤쫓던 분광소에게 일격을 허용할 뻔한 나빌은 간신히 공격을 피해내고는 거리를 두었다.
“이익!”
하지만 빛살처럼 다가오는 노인의 공격까진 피하지 못하고 서둘러 은구슬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 던졌다.
콰앙!
은구슬은 빛으로 변해가던 노인과 부딪히더니 거대한 폭발음을 일으켰고, 충격파가 사라지고 나자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바닥에 툭 떨어졌다.
‘저건 처음 보는 것이군. 법기는 아니고…. 영충인가?’
바닥에 떨어진 은구슬은 어느새 장수풍뎅이 같은 모습으로 변해있었는데, 환시화 공격을 막고는 기절했는지 미동도 없이 뒤집혀 있었다.
그 모습에 나빌이 이를 갈며 한쪽을 향해 미친 듯이 질주했다.
“도망가려는 건가? 어림없지.”
나빌이 향하는 방향이 곰 같은 사내가 등장했던 통로가 위치한 곳이란 걸 파악한 준혁은 분광소를 조종해 앞을 막았다.
그때에 맞춰 곰 같은 사내의 원영을 완전하게 구속한 준혁은 원영을 불러들이며 손을 회수했다.
털썩-
준혁의 손엔 금빛 고치에 둘러싸인 마족의 원영이 들려있었고, 원영의 본체인 마족 사내는 실 끊어진 연처럼 바닥에 철퍼덕 쓰러졌다.
직후, 준혁은 금빛 실에 둘러싸인 원영을 한입에 집어삼켰다.
안전하게 봉인하는 게 우선이었으나, 당장은 나머지 완영기 수사를 처리하는 게 먼저였기에 행한 임시방편.
원영을 삼킨 준혁은 흐릿하게 변하더니 바람을 남기고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나타났을 땐 이미 극한의 냉기를 머금은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고, 주먹은 나빌의 가슴 앞까지 다다른 후였다.
퍽- 쩌저정-
***
나빌의 반항은 심상치 않았으나, 두 완영기 수사의 합공을 막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나빌은 완영기 초기 수행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봉인됐었기에, 준혁과 일대일로 비교해도 수준이 떨어졌었다.
털썩-
나빌의 원영마저 금빛 실로 감싼 준혁은 월광지력을 이용해 원영을 완벽하게 구속했다.
그리고는 목함을 꺼내 그 안에 영기가 통하지 않게 진법을 설치한 후, 원영을 담아 밀봉했다.
밀봉 후에는 부적을 덕지덕지 붙여 틈새가 없게 만들었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월광지력으로 감쌌다.
일련의 과정을 거친 후 곰 같은 사내의 원영도 꺼내 똑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이 정도면 되겠지.”
그리고는 두 원영을 봉인한 목함을 공간대에 넣고는, 두 완영기 수사의 시체를 혈단법을 이용해 혈정단으로 만들었다.
한참 후, 두 수사가 변한 혈정단을 각각의 자기병에 담아 밀봉한 준혁은 혈정단을 만들고 남은 법기와 공간대를 수거했다.
네모난 벽돌 모양의 법기는 이미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영기를 흘려보내 기능을 파악했다.
징벌의 방이라 부른 벽돌 법기는 일정 공간에 변화를 줄 수 있는 법기였는데, 공간대와 같은 공간 법기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아마 고위 수사가 수련을 위해 만들어놓은 법기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준혁의 착각.
사실 벽돌 모양의 법기는 특수한 감옥이었던 것을 육구 공격대장이 임무를 부여받으며 잠시 대여해온 물건이었다.
“특이하긴 하군.”
준혁은 벽돌 법기를 수납하고는 두 수사에게서 얻은 공간대 안을 살폈다.
그 안엔 마족들의 영석이라 불리는 마정석이 한 무더기씩 있었고, 각종 법기와 옥간들이 여럿 존재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마족이 아닌 준혁의 관심을 끌 만한 것들이 아니었다.
“……이것은!”
단 하나. 나빌의 공간대에서 나온 모양이 똑같이 생긴 다섯 개의 법기를 제외하고 말이다.
“봉인지 안에 숨겨두었다더니 어찌 이자가….”
아홉 종족이 보유하고 있던 열쇠를 얻게 된 준혁은 기쁨을 맘껏 표출했다.
사실 나빌이 말한 봉인지 작업은 준혁을 유인하기 위한 거짓이 아니었다.
실제로 봉인지 안에 또 다른 결계를 만들어 열쇠들을 영원히 묻어버릴 작정을 하고 있던 나빌은 그전에 열쇠를 수거해 잠깐 가지고 있었던 것.
그러던 차에 준혁을 만나 여기까지 진행된 것이었다.
그것을 알 수 없던 준혁은 횡재한 기분에 들뜬 표정을 짓다가, 시간이 지나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럼 바람꽃만 구해 떠나면 되겠군.’
이제 산들바람과의 약속을 이행하고, 밖으로 나가 잠들어 있던 주작을 깨우기만 하면 되는 일.
‘그리고 주작의 힘을 얻어 다시 호왕족을 찾아가면 술법을 익힐 수 있겠지. 청룡과 현무를 찾는 일은 그다음이다.’
준혁은 얼마 전 주작을 깨우는 일은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에 하리라 다짐했던 것을 다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이곳을 벗어난 후 주작을 만날 일에 기대감이 가득한 상태였다.
***
두 완영기 수사를 처리하긴 했으나 몸 상태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준혁은 아끼던 1품 화목단을 복용하고 꼬박 하루를 좌정한 채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회복은 요원했고, 심지어 탁기마저 완전히 소멸해 마족인 척 연출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곳에 무한정 머무를 수 없기에, 고민을 거듭한 준혁은 이브람의 시체로 만들었던 혈정단을 삼키고야 말았다.
이제 이곳의 대장인 연형기 수사를 제외하곤 막무가내로 다녀도 들킬 일은 없을 터였지만, 만에 하나 연형기 수사가 나타나면 지금 준혁으로서는 공천령을 발동시키는 것 말고는 도망갈 방법이 없었으니 조심해야만 했다.
“그럴 순 없지.”
하지만 힘들게 모은 공간석을 그렇게 낭비할 순 없었기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입속으로 들어간 혈정단은 스르륵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온몸에 퍼져있던 정혈에 반응하며 기운을 드러냈다.
잠시 후 준혁의 피부가 종전보다 조금 더 보라색으로 변했고, 탁기를 이용했을 때처럼 전신에서 마기가 풀풀 풍기기 시작했다.
다시 마족인 척 연기하려는 준비를 끝낸 준혁은 공간대에서 벽돌 모양의 법기를 꺼내 영력을 불어넣었다.
자신이 징벌의 방을 이루고 있는 법기를 가지고 나가버리면, 혹시나 이곳에서의 흔적을 연형기 수사가 느낄 수도 있었기에, 한동안은 이 상태를 유지하게 하려는 것.
법기가 발동되며 기이한 파동이 퍼져나가자 준혁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법기를 공간대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처음 들어왔던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
토굴 밖으로 나온 준혁은 자신을 안내했던 원영기 수사를 마주할 수 있었다.
초조한 얼굴로 대기하고 있던 그는 준혁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나오셨군요? 한참을 기다려도 두 분이 나오지 않자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났다면 징계를 받더라도 대장께 아뢰려고 했는데…. 이렇게 나오셨군요.”
카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원영기 마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준혁이 나온 입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길 한참.
의구심 가득한 목소리로 준혁에게 물었다.
“헌데…. 왜 혼자 나오신 것입니까? 부대장께서는…?”
준혁은 피식 웃고는 별일 아니란 듯 대꾸했다.
“그자는 내 궁금증을 풀어주다 맞은편 통로에서 나타난 곰처럼 우락부락한 다른 부대장을 따라 먼저 나갔다.”
“아!”
카람은 나머지 부대장을 본 것처럼 말하는 준혁의 태도에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했다.
만일 안에서 싸움이라도 일어났던 것이라면 눈앞의 타 부족의 수사가 이렇게 정상일 리는 없을 터.
정말로 긴 시간 동안 대화만 나눈 것이 분명해 보였다.
“급한 일이 있다고 사라지며 나머진 아무에게나 안내를 받으라고 하더군. 네가 안내해줄 테냐?”
“물론입니다. 제 선망과도 같던 이이 공격대의 부대장님이신데. 영광입니다.”
상대방이 몸을 살짝 낮추며 명령만 내려주라는 듯 행동하자, 준혁은 고개를 끄덕여 준 후 말했다.
“그럼 너희들이 잡았다던 영수들을 보러 가자꾸나. 그놈들을 통해 알아야 할 것이 있으니. 그리고 한 놈 정도는 내 종으로 써먹어야겠다. 심부름시키기엔 영수만 한 것이 없지.”
“예? 그것들을 거둬가신단 말입니까? 그건 제 선에서 처리할 일이 아닌데….”
“쯧, 내가 미리 양해를 구하지 않았겠느냐? 이미 너희 두 부대장과 말이 끝났으니 만나서 물어보면 될 것 아니냐.”
“아….”
“잔말 말고 안내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