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내경으로 (2)
준혁은 순간 벙찐 표정을 감추지 못하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산들바람과 눈을 맞췄다.
“종속의 인이 무슨 뜻인 줄 알아?”
산들바람이 나이에 비해 치기 어리긴 했으니 준혁은 그녀의 생각을 바로잡아주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과 생각을 공유한 채 영원히 복속한다는 거잖아! 나도 그쯤은 알아!”
준혁은 그녀가 생각하는 복속의 뜻이 잘못된 줄 알고 바로잡으려 했으나, 산들바람은 종속의 인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산들….’
그렇다고 그녀의 요구를 들어줄 순 없었다.
“언니를 구하겠다는 마음은 이해하는데, 그럴 필요까지 없어. 내가 최선을 다할 테니까 염려하지 마.”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
“예전에 큰둥이 네가 떠나고 나서 느낀 감정….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아. 그래서…. 너와 연결되어 있고 싶어.”
연결이라는 말에 준혁은 무언가가 쿵 하고 와닿는 것을 느꼈다.
‘연결….’
준혁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를 더 생각했구나.’
오래전 그녀가 몸을 던져 자신을 구했을 땐, 우정과 미안함이 주된 감정일 거라 여겼었다.
하지만 지금 행동을 보면 어쩌면 더 깊은 감정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내 영수가 되는 걸 허락할 순 없는 일.’
관계를 떠나 원영기 영수에게 종속의 인을 걸 수 있다면 준혁에겐 큰 이득이었다.
게다가 백호를 만나고 온 후, 세운 계획에 크게 도움이 될 것도 분명했다.
하지만 준혁의 처지에서 산들바람과 종속의 인을 맺는다는 건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종속의 인을 맺는 순간, 자신이 영수가 아닌 인족인 것이 탄로 나는 건 당연했고, 그동안 해왔던 거짓말들로 인해 종속의 인으로 유대감이 생기기도 전에 어떤 문제를 초래할지 예측할 수가 없는 것.
준혁은 자신의 예측 범위를 벗어나는 일을 만들 생각이 없었다.
“난 후회하지 않아!”
굳은 의지가 담긴 산들바람의 목소리에 준혁은 한참 후에야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리고는 살짝 걸음을 옮기며 발끝으로 금빛 실과 함께 꽃잎 몇 장을 쏘아 보냈다.
금빛 실과 꽃잎은 금세 산들바람의 발밑으로 이동하더니 성인 손목만 한 나무줄기로 변하며 산들바람의 하체를 꽁꽁 감싸버렸다.
“어? 이게 뭐야?”
“바람꽃을 구해올 테니까. 자세한 얘기는 그때 하자.”
준혁은 확고한 의지를 지닌 산들바람을 설득하는 데 힘을 빼기보다는, 바람꽃과 대면시키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아마 술법을 풀고 쫓아오려고 한다면, 준혁은 이미 내경 깊은 곳으로 사라진 후일 테니 쫓아오고 싶어도 할 수 없을 터였다.
“같이 갈 거라니까!!”
하체가 구속되자 산들바람이 급하게 입김을 내뱉으며 영력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준혁이 펼친 술법은 그저 구속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잠시 후. 털썩- 소리가 나며 산들바람은 나뭇가지에 묶인 채 잠이 든 것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그런 산들바람의 모습을 잠시간 내려보던 준혁은 문뜩 쓸쓸함을 느끼며 거처를 빠져나갔다.
“이 와중에도 이해득실을 따지고 있다니…. 우습구나! 우스워.”
갑작스런 산들바람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게 선계로 가는 데 도움이 되진 않을까? 사신들을 해방하는 데 필요할까? 하는 마음이 들었기에, 자신을 향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
산들바람의 거처를 빠져나온 준혁은 적마도를 이용해 영수들이 만들어놓은 결계를 간단히 빠져나왔다.
결계를 지나친 후엔 내경과 중경을 가르는 산맥을 가볍게 넘어 안쪽으로 움직였다.
안쪽으로 들어서자, 짙은 마기와 영기가 섞여 기분 나쁜 느낌을 전해주었고, 시야마저 방해할 정도.
준혁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후, 바람꽃의 명원패를 눈앞에 띄우고, 수결을 맺었다.
순간, 명원패에서 전보다 조금 더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북서쪽을 향해 빛무리가 조금 길게 늘어졌다.
“저쪽이군.”
정확한 위치는 특정할 수 없었지만, 명원패에 담긴 티끌 같은 바람꽃의 혼이 자신의 주혼(主魂)을 감지하며 미약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잠시 후, 준혁의 모습이 흐릿하게 변하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바람만이 휘잉 하고 불어, 누군가 움직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
대부분 마족은 절대적인 수행 자체를 올리는 데엔 다른 종족보다 떨어진다 알려져 있었다. 다만 해당 등급에서는 우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강체술로 강해진 신체뿐만 아니라, 기감도 인간이나 영수들보다는 훨씬 발달해 있다는 것.
그랬기에 준혁은 비행법기를 사용하지 않고, 은둔술의 묘리가 담겨있는 풍둔술을 사용해 바람꽃이 있다고 의심되는 곳을 향해 날아가는 중이었다.
날아가는 도중 마족들이 보이면, 보이는 족족 잡아다가 머릿속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외경에서 만났던 놈들처럼 별다른 정보를 얻을 순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이동했을까?
준혁은 거대한 구덩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주위에 세워진 간이 시설물과 함께.
‘방향이 같아 혹시나 했더니, 설마 봉인지 안에 갇혀있는 것인가?’
준혁이 몸을 숨긴 채 보고 있는 구덩이.
그곳은 아홉 종족이 열쇠를 이용해 열었다던 ‘문’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봉인지 안이라면 여기서 돌아가는 게 맞다.’
산들바람이 슬퍼하는 모습을 봐야겠지만, 당장은 능력이 되지 않기에 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사신이 잠들어 있다고 의심되는 곳에 왔으니, 최소한 그 예측이 사실인지 정도는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그냥 돌아가는 건 손해라는 생각이 자리했다.
‘흠…. 몰래 숨어 들어가는 건 위험하다. 다른 방법이….’
그때, 구덩이 근처의 시설물에서 원영기 중기로 보이는 마족 하나가 빠져나와 어딘가로 쏘아져 가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 모습에 준혁은 ‘아!’ 하며 작은 탄성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입가를 끌어올리며 사늘하게 웃고는 마족이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움직였다.
***
마족의 뒤를 은밀히 뒤쫓기를 사흘.
준혁은 목적지로 추정되는 곳에 도착하자 잠시 눈빛이 흔들렸다.
‘이곳은….’
산들바람이 치명상을 입으며 자신을 살려주었던 곳. 바로 삼청조를 얻게 된 신비경 근처였다.
아니나 다를까, 마족은 무언가를 확인하듯 주변을 살펴보더니, 예전엔 가려져 있었지만 이젠 훤히 드러난 신비경 입구를 찾아내 그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주저 없이 입구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미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을 텐데….”
마족이 사라진 후, 준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마찬가지로 신비경 입구를 향해 몸을 날렸다.
***
길고 긴 통로를 지나 신비경 안을 살핀 준혁의 눈에 원영기 마족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것이 포착되었다.
마족은 품에서 꺼낸 네모난 물건을 마선이 봉인되어있던 진법 중심에 올려놓았다.
직후, 기이한 수인을 맺은 마족은 진법 깃발로 추정되는 나무 막대기를 주변으로 던졌고, 잠시 후엔 어두운 기운이 몰려들더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준혁은 다음에 벌어지는 일에 놀란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저건!’
원영기 마족이 진법 설치를 끝내자, 천장에서 떨어져 내리던 별빛들이 진법 중앙에 놓인 물건을 향해 쏟아졌다.
그리고는 마치 경지를 올릴 때 영기구름이 수사에게 흡수되듯, 작게 소용돌이치며 빨려 사라지기 시작했다.
‘별빛을 모으고 있다!’
오래전 적마도와의 대화를 통해, 천장에서 떨어지는 별빛이 마선들을 억제하는 힘. 성광지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준혁은 그 힘을 채취하는 것처럼 보이는 마족의 행사에 깊은 관심이 생겨났다.
원래는 혼자된 마족을 바로 사로잡으려 했으나. 숨을 죽인 채 그저 다음 행동을 관찰하기 바빴다.
그렇게 하루가 꼬박 지나자, 천장에서 떨어지던 별빛이 희미해지며, 신비경 전체가 예전보다 어둑하게 변했다.
그제야 마족은 만족한 듯 진법 중앙에 놓았던 물건을 회수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준혁이 움직였다.
***
구지대륙을 침공하는 데 한 축을 담당했던 전마족(戰魔族)의 일원 이브람.
그는 봉인에서 풀려난 뒤, 이성을 되찾은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이브람을 포함한 몇 명의 원영기 수사와 완영기 수사, 그리고 부대를 진두지휘했던 대장만이 이지를 회복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전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짐승처럼 간단한 명령에 움직이는 게 전부였다.
얼마나 긴 세월 동안 봉인에 묶여있었는지는 모르나 세상의 기운도 변해있었고, 심지어 대장은 계면의 압박을 받아 힘을 쓰지도 못하는 상황.
아마 봉인과 동시에 하위계면으로 방출되거나 대륙 전체가 공간의 틈으로 떨어져 나간 것이 틀림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현 상황이 어떻든 간에, 이브람은 부대원들의 치료를 담당하고 있었기에, 수하들의 의식을 치료할 방법을 연구했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이브람은 성광지력이 흐르는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고, 그 힘을 이용해 한두 명씩 치료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다만 이브람이 발견한 장소의 성광지력은 한 번 소비하고 나면 다시 생성되는 데 꽤 긴 시간이 필요했기에 그 속도가 엄청나게 느렸다.
“이번엔 이 정도뿐인가?”
이브람은 진법 중앙에 놓인 네모난 법기를 집어 들었다.
만족할 만한 양은 아니었으나, 법기 안에 뭉친 성광지력의 양이면, 두 명 정도의 의식을 깨울 순 있을 듯싶었다.
법기를 소중하게 품 안에 집어넣은 이브람은 진법목(木)을 수거한 후, 손목에 차고 있던 공간대에 물건들을 전부 수납했다.
그리고는 거주지로 이동하기 위해 발을 돌렸다.
“!!!”
그때 발끝에서 영기파동이 퍼지는 걸 느끼며 재빠르게 땅을 박차며 위로 솟구쳤다.
하지만 공중으로 뜨기도 전, 수많은 나무줄기가 뻗쳐 나오더니 발목을 감쌌고, 잠시 후엔 발목에서 타고 올라온 줄기가 전신을 휘감아 버렸다.
“윽! 누구냐!”
그동안 상대해 보았던 영수족과는 궤를 달리하는 술법.
목족들이 사용하는 술법과 비슷한 현상에 이브람은 재빠르게 전신에 영력을 불어넣었다.
그 순간 살짝 보라색이던 이브람의 피부가 진보라색으로 변하며 이마에 나 있던 조그마한 뿔이 길게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강렬한 기파가 전신을 휘감으며 이브람의 피부 위로 흑색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흑색 기운에 닿자 나무줄기들은 메말라버린 식물처럼 쪼그라들기 시작했고, 완전히 힘을 잃으며 팡팡 터져 가루로 흩날렸다.
하지만 사라진 양만큼 또 다른 나무줄기가 그의 몸을 덮어갔다.
그 모습에 누군지 모를 상대방을 향해 비웃음을 날린 이브람은 수인을 맺었고, 그 순간 그의 등 뒤로 칠흑 같은 보라색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환영이 나타났다.
환영은 이브람의 모습과 흡사하게 생겼는데, 등치는 두 배가량 컸고, 이마엔 세 개의 뿔이 길게 자라나 있었다.
눈은 시뻘겋게 빛났고, 어깨에도 손가락만 한 뿔들이 비늘처럼 돋아나 있었다.
“감히! 이런 조잡한 방법으로 나를 기습해? 숨어 있는 걸 보니 실력에 자신이 없나 보구나! 당장 찾아 찢어주마!”
이브람이 말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환영은 두 손을 뻗어 그를 감싼 나무줄기를 뚝뚝 떼어냈다.
투두둑-
환영의 손에 닿은 나무줄기는 흑색 아지랑이에 닿았던 때처럼 푸석하게 말라가며 힘없이 뜯겨나갔다.
아무리 치료 담당이라고는 하나, 수많은 마(魔) 종족 중에서도 전투에 특화된 전마족의 일원인 이브람.
그는 기습을 감행한 자에게 자신이 당할 것이라고는 단 일의 가능성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애초에 하계로 의심되는 이곳으로 통로가 생겨나며 봉인이 풀렸을 때, 원영기 영수들을 대거 잡아들였었고, 그들을 통해 이곳 수사들의 수준은 대충 파악이 끝난 상태였다.
원영기! 겨우 원영기 수준이 이곳의 최고 수준이라는 것을 보고 얼마나 웃었던가.
그러니 상대방이 같은 원영기라면 등급 최강이라 불리는 전마족의 일원으로서 전투력으로 밀릴 일은 없었다.
아니, 솔직한 평가로는 이곳 수준을 고려했을 때 완영기라 해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평가가 너무 오만방자한 것이었을까?
나무줄기가 떨어져 나가기 무섭게 이브람은 여태껏 경험하지 못했던 한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느낌뿐이 아니었는지, 어느새 하체 일부에 감각이 사라지며 천천히 얼어가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