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내경으로 (1)
아홉 종족 연합은 둥그렇게 모여 연합지역을 이룬 것이 아닌, 내경으로 통하는 산맥을 마주 보는 형태로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그중 적호족과 설토족은 가장 바깥 자리였기에, 마기를 막고 있는 결계를 따라 움직이며 대부분 지역을 차례대로 훑어볼 수 있었다.
준혁은 기감을 극대화해 결계 속에 드문드문 갇힌 인족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산들바람과 함께 이동했다.
“우리 부족에도 인족들 몇 놈 있는데, 굳이 다른 부족의 제물까지 가져다 써야 해?”
“물론. 각 종족의 특성에 맞게 비술을 고쳐줘야 하니까. 그에 적합한 인족들이 필요하지.”
이미 각 부족 내에 준혁에 대한 소문이 퍼졌는지, 산들바람과 함께 하얀 호랑이가 나타나자, 각 부족의 저급 수사들은 예를 취하며 곁눈질로 준혁을 구경했다.
원영기급 족장들이 나타나기 전 빠르게 결계 전체를 스치듯 이동한 준혁은 황웅족이 맡은 결계 인근에서 익숙한 기운을 찾아냈다.
‘도천! 쯧. 상태가 좋질 않구나.’
영기가 빨리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됐는지는 모르나, 도천은 예전 사쿠라보다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그때, 강렬한 기운과 함께 황웅족 원영기 수사인 거웅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웅은 준혁을 보자마자 박력 있게 예를 갖추더니 화색을 띠며 다가왔다.
“수사! 벌써 오셨소이까?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이리 빨리 오시다니!”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는 거웅을 보며 준혁이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실망하게 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아직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하면…. 무슨 일로?”
거웅이 사탕을 빼앗긴 아이처럼 침울하게 변하자, 준혁은 산들바람에게 했던 설명을 다시 해 주었다.
“내가 가진 비술은 고대 영수족의 공법을 인족들이 익힐 수 있게 개량해 놓은 것입니다. 나야 인족의 순도 높은 정혈을 가지고 있기에 익히는 게 어렵지는 않았으나. 효과가 그리 뛰어나다고 할 순 없지요. 그래서 수사에게 전해주기 전에 다시 개량을 거치려고 합니다.”
“아….”
“허나 인족들이 익힐 수 있게 해놓은 것이라. 연구 과정에서 인족들을 재료로 사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여…. 그에 적합한 인족을 찾기 위해 결계를 둘러보는 중이었습니다.”
준혁의 설명이 끝나자 거웅은 다시 화색이 돌며 눈을 빛냈다.
“오오! 얼마든지! 얼마든지 데려가십시오! 아직 제물로 사용하지 않은 건강한 인족들도 있는데, 그놈들을 데려다 드리리까?”
거웅의 말에 준혁은 입이 썼지만, 내색하지 않고 결계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저놈이 적합하겠습니다. 그리고 저기 멀리 떨어진 저것도.”
도천에게서 떨어진 곳엔 사유리도 죽은 듯 누워있었다.
둘은 사이좋게 빠짝 말라가는 중이었다.
***
도천과 사유리를 수거해 온 준혁은 산들바람에게 요청해 새로운 움막을 배정받았다.
그리고는 각종 진법으로 주변을 막고는 연구라는 핑계로 두 사람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한 달 후.
도천과 사유리는 기력을 회복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고, 자신들을 구한 이가 준혁임을 알고는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특히 도천은 목숨을 구했다는 것보다 다른 이유로 준혁 앞에 무릎 꿇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를 벌해주십시오! 주군께서 하사하신 인지경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희대의 보물인 인지경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도천의 말엔 어떤 각오가 서려 있었다.
그 말에 준혁이 피식 웃으며 인지경을 소환하자, 도천이 화들짝 놀라며 상황판단을 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주, 주군! 어찌 인지경을…!”
직후, 준혁에게 인지경의 기능을 설명 듣고서야 도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그것으로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도천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아 보였다.
준혁은 그런 도천에게 후일 다시 인지경을 빌려주겠다는 말을 한 후, 토율서를 이용해 두 사람을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결계로 가, 도천에게서 인상착의를 전해 들은 무위각 대원들을 찾기 시작했다.
***
6개월 후.
무위각 대원들을 차례대로 구한 준혁은 도천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치료한 후에 전부 돌아갈 수 있게 조처했다.
그 후로 다른 인족 수사들도 구할까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마기를 막는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차적으로 해결해야 했던 일들을 마무리한 준혁은 곧바로 영수족의 수장들에게 전해줄 비술을 조합하기 시작했다.
처음 거웅이 제안할 당시, 준혁은 영수 공법에서 개량된 식혈만복을 전수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식혈만복의 성능은 꽤 좋은 편이었기에 조금 망설여졌다.
특히나 상대의 심장과 영기가 뭉친 특수부위를 섭취함으로써 수행을 올리는 영수들.
그들이 식혈만복으로 사체에 남겨진 기운까지 전부 흡수해 발전한다면 인족보다 과도하게 강해질 가능성도 있었기에 그 계획을 실행할 수가 없었다.
‘균형은 깨지 않지만, 충분히 납득이 갈만한 비술…. 거기다 실질적으로 나에게 도움도 되어야만 한다.’
준혁이 영수족 원영기 수사들의 요청을 받아들인 또 다른 이유는 바로 마경 때문이었다.
그것을 준혁이 처리해줄 순 없는 것이었으니, 영수족들이 실력을 키워 직접 지켜내는 게 최선.
특히나 준혁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선,
지금처럼 결계로 겨우 안전을 유지하는 것이 아닌, 어느 정도는 공방을 주고받으며 마족의 힘을 뺄 수 있어야만 했다.
‘그러려면 평균 무력을 어느 정도는 올려놓아야 하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준혁은 식혈만복에서 흡수에 관한 부분은 배제하고 혈피갑을 만드는 방법만을 따로 분리했다.
본인은 혈단법으로 기운을 흡수한 후 생기는 탁기를 이용해 혈피갑을 펼쳤지만, 영수들에겐 정혈을 이용해 술법을 펼칠 수 있게 할 생각이었다.
귀원패의 방어 능력 덕분에 준혁에게 혈피갑은 계륵 같은 것이었지만, 영수들에겐 신체 강도를 올려 주는 희대의 비술인 것.
특히나 혈피갑을 극성으로 발휘하면 혈옥수를 펼친 것처럼 몸이 반투명하게 변할 테니, 강체공의 최고 수법이 혈옥수라고 알고 있는 영수들 처지에선 어마어마한 보물로 여길 것이 분명했다.
다만 정혈을 사용해야 했기에, 당장은 폭발적인 능력을 발휘할지 모르나, 장기적으로 보자면 수행증진이 느려지는 게 함정이었다.
***
원영기 영수들에게 혈피갑 술법을 전해준 준혁은 다시 거처에 틀어박혔다.
어느새 준혁 주위엔 영수들에게 받은 옥돌들이 널브러져 있었는데, 그것들 안에 든 내용은 이미 준혁의 머릿속에 주입된 지 오래였다.
그렇게 아홉 종족의 단편적인 정보들이 한데 모이자, 산들바람으로부터 아홉 종족의 열쇠에 대해 자세한 얘기를 듣고 난 후에 생긴 의문에 어느 정도 확신이 생겨나고 있었다.
‘정확히 명시되어 있진 않지만, 모든 정보가 가리키는 건 하나다. 절대적인 존재, 그리고 그 존재가 가진 힘.’
오래전 아홉 종족은 무언가를 차지하기 위해 길고 긴 전쟁을 시작했다.
전쟁으로 비경 곳곳이 뒤집히고 파괴되기가 수십 번. 결국 상처만 남은 아홉 종족은 무기한 휴전에 돌입하게 된다.
하지만 휴전은 이미 때늦은 선택.
이미 각 종족을 대표하던 최강자들은 대부분이 죽고, 흑오족과 사안족, 두 부족만이 그나마 전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부족의 최강자들이 전쟁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전해지는 바가 없었다.
다만 언젠가부터 흑오족은 각종 결계를 다루는 데 능숙해졌고, 사안족은 문을 열어야 한다는 명제가 전부인 양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런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7개의 옥돌, 그리고 산들바람에게 전해 들은 단편적인 지식을 억지로라도 엮어보자면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그들이 전쟁한 이유는 간단하다. 아홉 종족을 휘하에 삼고 있던 어떤 존재가 사라진 것이 분명해.’
왕이나 다름없는 누군가가 사라지거나 봉인 당했다면, 그 휘하의 존재들로서는 다음 대 왕을 욕심낼 수도 있는 법.
아마 전쟁의 시작은 그런 이유일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아홉 종족에게 동일한 열쇠가 주어졌다는 건, 같은 지위를 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아홉 종족이 균형을 이뤄 하나를 지키라는 의미이기도 할 터.’
그렇다면 아홉 종족을 다스리던 자는 사라진 것이 아닌 봉인된 것일 가능성이 컸다.
‘아홉 종족이 하나 된다면 새로운 문을 열 수도 있다는 구전이 전해온 걸 보면, 문 너머엔 선계로 가고 싶다는 염원을 이뤄줄 수 있는 존재가 봉인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지.’
타 계면, 특히 상위 계면으로 직통할 수 있는 연결통로를 만드는 건 불가능했기에, 구전 그대로 진짜 통로가 있을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니 ‘새로운 문’이라는 말은 통로를 만들 수 있는 존재를 암시하는 것.
‘그리고 구지대륙에서 그만한 힘을 가진 존재라면, 사신 중 한 명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준혁은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었다.
‘문제는 문을 열었을 때 마경이 열렸다는 것인데…. 이건 둘 중 하나다.’
백호가 잠들어있던 곳처럼, 특수한 환경이 조성되며 그곳에 함께 봉인되었던 마족들이 크게 번성했을 가능성.
그것이 아니라면, 가짜 열쇠를 만들었기에, 봉인된 존재가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공간의 틈이 벌어지고 만 것.
준혁은 둘 다 충분한 가능성이 있었기에 결론을 내지 못하고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사신이 잠든 곳일지 모른다는 확률 때문에 준혁은 마족을 경계하기 위해 영수들에게 혈피갑을 전수했다.
그리고 진짜 사신 중 한 명이 봉인된 지역이라면 영수들을 더 도울 의향도 있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사신들 네 명의 힘을 전부 모아야 할 테니까.
그리고 훗날을 생각한다면, 백호 봉인지에서 호왕족이 귀령들을 막아선 것처럼 이곳에서도 그 정도의 균형은 이뤄지게 준비해놓는 게 현명한 판단이었다.
다만 추측을 통해 결론을 내린 후에도 준혁이 심각하게 고민하는 건, 바로 산들바람의 부탁 때문이었다.
만약 바람꽃이 내경 어딘가에 숨어있거나 잡혀있는 것이라면 큰 문제가 없었다.
활동하는 마족들을 피해 은밀히 움직이며 명원패를 이용해 바람꽃의 행방을 찾으면 그뿐이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사신 중 한 명이 있을지도 모르는 봉인지 안에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준혁은 절대 그곳에 갈 생각이 없었다.
백호 때를 생각한다면, 어떤 식으로 그들을 마주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
이미 백호에게 기억을 비롯한 모든 것이 읽혔다고 여기고 있는 준혁은 사신들로부터 정신과 자신을 보호할 준비가 되기 전엔 절대 그들과 마주칠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움직이지 않고 고민만 할 수도 없는 것이거늘…. 흠.’
현 상태가 계속 유지된다면, 마족에 대한 경계를 영수들에게 맡긴 채 수련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바람꽃이 죽기라도 한다면….
준혁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움막을 보호하던 진법들을 전부 수거했다.
***
움막 밖으로 나오자 초조한 얼굴로 서 있는 산들바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준비는 끝났어? 이제 언니를 구하러 갈 거야?”
애원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산들바람을 외면할 수 없었던 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그래. 허나 미리 말해둘 게 있다.”
“??”
“내경을 뒤져 찾을 수 없다면 포기할 거다. 내 실력으로 마경엔 들어갈 순 없으니까.”
마경이 혹시 사신의 봉인지일지 모른다는 말은 삼간 채, 준혁은 산들바람이 실망할지 몰랐지만 미리 양해를 구했다.
다행히 그녀는 이해한다는 듯 수긍했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워…. 이 은혜는 꼭 갚을게.”
“은혜는 내가 갚는 거니까 그런 말 마. 그럼 다녀와서 보자.”
내경에서 바람꽃을 찾는 것과 동시에, 마족들로부터 마경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획득하려 계획한 준혁은 산들바람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렸다.
하지만 채 한 걸음도 걷기 전.
어느새 산들바람이 앞에 나타나 두 팔을 활짝 편 채 이동을 방해했다.
“나도 같이 가야지!”
“안 돼. 내경에 완영기 수사라도 있다면 너까지 보호할 자신이 없어.”
생각지도 못한 산들바람의 동행요구에 준혁이 난감하다는 듯 고갤 저었다.
혼자라면 아무리 위험해도 적마도로 탈출할 수 있었다. 만약 그것마저 힘들다면 공천령의 힘까지 사용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보호할 사람이 있다면 도주가 불가능할 수도 있는 일.
그렇다면 일의 위험도가 수배, 혹은 수십 배 올라갈 수 있었다.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
그때 준혁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말이 산들바람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나한테 종속의 인을 걸어. 그럼 네 안에 숨어서 같이 다닐 수 있잖아. 그렇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