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혼령패 (2)
혼령패(魂靈牌).
그것은 말 그대로 혼을 담은 패를 의미했다.
원영을 응결한 원영기 수사들은 자신의 혼을 일부분 떼어낼 수가 있었다. 혼을 떼어낸 뒤엔 혼이 깃들만한 물건에 그것을 담을 수 있었고, 각종 고급 술법에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준혁이 말한 의미의 혼령패는 조금 다른 뜻이었다.
술법을 발동하기 위한 준비물로서가 아니라 인질의 의미로 혼령패를 만들라는 것.
혼령패엔 혼 일부가 담겨있었기에, 만약 강제로 파괴한다면 혼령패를 만든 주체에게 심대한 피해를 줄 수 있었다.
게다가 혼령패를 만든 주체가 아닌 타인이 그것을 이용해 술법을 사용한다면, 그것 또한 크나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법.
“수사, 혼령패란 목숨이나 다름없습니다. 저희 전원을 인질로 삼으시려는 것입니까?”
“그럼 어쩌시겠습니까? 그 정도가 아니면 제가 수사들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
“아니면 이건 어떠십니까? 제가 오래전 인족의 정혈을 흡수한 적이 있습니다. 그걸 이용하면 당신들과 종속의 인을 맺을 수 있지요. 어떠십니까, 이 방법은?”
“종속의 인이라니….”
같은 종족끼리는 종속의 인을 펼칠 수 없으니, 핑계를 만들어냈다.
산들바람도 준혁이 인족의 정혈을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었으니,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영수들이 종속의 인을 꺼리는 것만큼 준혁 역시도 꺼리기는 마찬가지.
종속의 인이라는 것도 결국은 시전자의 수행에 영향을 받는 것이었기에, 한두 마리면 몰라도 7명에게 종속을 거는 건 벅찬 일이었다.
부스럭-
그때, 죽은 듯 쓰러져있던 곰 같은 사내가 몸을 뒤척이며 일어났다.
“…나는 하겠소.”
그리고는 다른 이들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 입김을 내뱉어 전신에서 황토색 빛을 내뿜더니 거대한 곰으로 변했다.
거대한 곰으로 변한 황웅족 수사는 한껏 몸을 웅크렸고, 한참 동안 움직이질 않았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을 웅크린 끝에, 마침내 안색이 창백해지며 옅은 노란색의 사각 패를 뱉어냈다.
사각 패를 뱉어낸 황웅족 수사는 꽤 지친 표정으로 준혁을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수사가 원하는 대로 내 혼령패를 드리겠소. 혼을 담을 물건이 없어 내 정혈로 만들었으니 내 목숨이나 다름없다 생각해도 좋소.”
영수족 수사들 중 가장 다혈질로 보이던 황웅족 수사는 그전까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지운 채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대신 나도 조건이…. 아니, 부탁이 있소이다.”
상대의 눈빛에 준혁도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해 보십시오.”
“내 비록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전부라 자만하진 않았지만, 그대 같은 강자는 처음이외다. 아무리 차이가 난들, 같은 원영기인데 이런 압도적인 능력이라니…. 그대가 이토록 강해질 수 있었던 방법. 그것을 알려주시오. 그렇다면 당신의 수하라도 자처하겠소.”
황웅족 수사는 이번 전투 결과에 충격이 컸는지 상위등급의 고 수사를 대하는 것처럼 준혁을 향해 자세를 낮췄다.
그런 그를 말없이 바라보던 준혁은 흐읍- 하며 숨을 들이켜 황웅족 수사 앞에 떠 있던 혼령패를 가져왔다.
“좋습니다. 지금 당장은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으니, 조만간 불러 내 비술을 알려 드리지요.”
“감사합니다. 저는 황웅족의 대표, 거웅(巨熊)이라 합니다. 수사를 어찌 불러드리면 되겠소이까?”
“나는 ‘최’라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최 수사.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황웅족 수사가 몸을 추슬렀다.
그 순간, 준혁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거웅 수사. 혹시 황웅족엔 오래전 역사서나 고서는 없습니까?”
“무엇 때문에?”
“산들 수사에게 들으니 마족이 나타난 경위에 의문이 생겨서 말입니다.”
마족이란 말에 잠시 말없이 생각에 빠진 거웅은 입속에서 옥돌 하나를 꺼내더니 이마에 가져다 댔다.
잠시 후 옥돌을 준혁에게 건네주었다.
“아주 오래전 기나긴 전쟁으로 인해 아홉 부족에 대한 자료가 대부분 소실되었다고 알고 있소이다. 구전으로 전해오던 것들이 상당하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소.”
준혁은 옥돌을 기감으로 살펴보고는 안에 내용을 대충 훑어보았다.
“충분히 도움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그럼 전 돌아가 수사가 불러주기만을 기다리겠소이다.”
다시 인간과 비슷한 모습으로 변한 황웅족 수사는 종족 특유의 인사법으로 예를 표했다.
동급 수사를 대하듯 말했지만, 행동엔 존경이 가득 담겨있었다.
‘이자는 옛 영수들의 성향이 가장 많이 남아있구나.’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영수족.
오직 강함만을 숭배하던 그런 영수족의 피가 가장 진하게 남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황웅족 수사가 인사를 끝낸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자,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있었던 수사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그러다 까마귀같이 생긴 흑오족 수사가 영수족의 모습으로 변하며 혼령패를 만들기 시작하자, 하나같이 서둘러 행동하기 시작했다.
***
나머지 영수족의 대표들도 황웅족 수사와 마찬가지로 준혁의 강함에 대해 의문을 표했다.
그리고는 똑같은 요구 조건을 말하고는 혼령패를 바친 후 각자의 부락으로 사라졌다.
사라지기 전 준혁의 요구에 거웅과 마찬가지로 각 부족에 구전으로 전해오던 이야기들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모두 사라진 뒤, 준혁과 둘이 남은 산들바람만이 얼떨떨한 얼굴을 한 채 손끝을 만지작만지작할 뿐이었다.
“큰둥…. 아니. 최…. 그 혼령패는 어떻게 할 거야? 우리들의 왕이라도 되려고 그래?”
산들바람이 예전과 다르게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자, 준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예전처럼 행동해. 그리고 아까 말한 게 거짓은 아니야. 너와 적호족을 보호하기 위해서지. 내가 영수족의 대표가 되어서 뭘 해?”
물론 진실은 조금 달랐다.
이제 각 부족 원영기들의 목숨줄을 쥐고 있으니, 실질적으로 준혁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과 다름없는 일.
우선 수하들을 찾아내 전부 풀어줄 테고, 그다음으론 갑자기 생긴 의문을 풀 생각이었다.
그 와중에 준혁이 머무는 적호족의 위상은 자연스레 올라갈 테니, 산들바람에게 한 말이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
거처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산들바람이 준혁의 옷자락 끝을 잡았다.
고갤 돌리는 그를 향해 산들바람이 머뭇거렸다.
“무슨 문제라도? 할 말이 있으면 그냥 말해도 돼. 나한테 못 할 말은 없잖아.”
준혁은 산들바람이 무슨 말을 할지 대충 예상이 갔기에, 그녀의 눈을 직시했다.
“그게…. 위험한 부탁인지는 알지만. 언니를 구해주면 안 돼?”
준혁은 자신의 예상대로 들어맞자, 바로 ‘그래’라고 긍정을 말하진 못하고 살짝 뜸을 들였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려 했던 산들바람의 부탁이면 들어주는 게 도리에 맞았다.
하지만 내경은 짙은 마기에 잠식되었고, 어느 정도 강자가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
거기다 더해, 바람꽃이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으니, 그녀를 구할 방법이 까마득해 보였다.
능력이 된다면 해 줄 테지만, 불가능한 일에 목숨을 걸 순 없었다.
준혁이 말없이 생각에 잠긴 듯 보이자, 산들바람은 입을 벌려 길쭉한 사각 옥패를 꺼내 들었다.
사각 옥패는 은은한 빛을 내며 반짝거렸는데, 산들바람이 말하지 않아도 준혁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명원패?”
“응. 언니가 떠나기 전에 주고 간 거야….”
명원패(命原牌).
혼령패와는 쓰임이 달랐지만, 혼이 담겨있다는 것은 동일한 명원패.
혼령패가 혼 일부를 주입한 것이라면, 명원패는 혼의 티끌 정도를 담아둔 것에 불과했다.
그랬기에 명원패를 강제로 파괴한다고 해서, 혼령패처럼 패를 만든 주체에게 타격을 줄 순 없었다.
그런 명원패엔 한 가지 기능이 있었는데, 명원패를 만든 주체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있다는 것.
만약 명원패를 만든 자가 죽는다면, 패는 빛을 잃고 조각나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준혁은 산들바람에게서 바람꽃의 명원패를 건네받아 살폈다.
“흠….”
“큰둥아. 부탁할게. 이기적이겠지만…. 다른 부족의 원영기 수사들은 구하지 못해도 상관없어. 언니만이라도 구해줘.”
‘살아있는 수사들이 한둘이 아닌가 보구나.’
어디에 잡혀있는지는 몰라도 명원패나 혹은 비슷한 술법으로 생존 여부를 파악 가능한 듯싶었다.
‘하긴. 이게 있다면 그녀를 찾는 게 어려운 일만은 아니긴 할 텐데….’
특히 적마도의 능력이라면 계면의 압박이 존재하는 이곳의 생명체가 만든 장애물 따위는 문제없었으니, 하고자 한다면 못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마경에서 나온 놈들의 수행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으니….’
9종족의 원영기 수사들이 한 사람도 도주하지 못하고 전부 죽거나 잡힌 것이라면 상대방엔 최소한 완영기 수사가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연형기에 이른 자도 존재할지 몰랐다.
‘하긴, 어차피 내 의문을 풀기 위해서라면 내경 안으로 들어가야 하긴 할 테니까.’
준혁은 간절한 눈빛으로 호소하는 산들바람을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다가 그녀의 머리를 앞발로 쓰다듬었다.
예전엔 꼬마 같은 외형이라도 감히 그럴 수가 없었으나, 이젠 준혁이 압도적인 무력을 행사해서인지 그 모습이 잘 어울렸다.
“그래. 내 노력해볼게. 네가 내 목숨을 구했듯이. 나도 네가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바람꽃을 구해보도록 할게.”
“정말?!”
와락-
준혁의 입에서 긍정적인 답변이 나오자마자, 산들바람은 준혁을 처음 봤을 때처럼 두 팔을 활짝 벌려 품에 안았다.
***
기쁨에 춤이라도 출 것 같은 산들바람을 진정시킨 준혁은 거처 중심에 몸을 말고 앉아 조용히 밤이 오길 기다렸다.
그리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산들바람이 눈치채지 못하게 발끝으로 금빛 실들을 방출했다.
땅속으로 파고든 금빛 실들은 마치 뱀이라도 된 것처럼 땅을 자유자재로 헤엄쳤다.
그러더니 인족 수사들이 갇혀있던 감옥을 향해 미친 듯이 움직였다.
감옥 깊은 곳 지하로 이동한 금빛 실들이 자리를 잡자, 그 위로 기운을 쏘아 보냈다.
그리고는 감옥을 감싼 결계에 간섭하며 술법을 원활하게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냈다.
‘지금!’
사쿠라가 토율서의 도움으로 도망을 칠순 있겠지만, 좀 더 확실하고 안전하게 도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는 것.
잠시 후 금빛 실들이 요동치는 느낌과 함께 사쿠라에게 준 토율서가 발동한다는 감각이 전해져 왔다.
그와 동시에 영력이 쑤욱 하고 빠져나갔다.
그 순간, 감옥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과 함께 금빛 실들이 파앗- 하면서 자연스레 흩어져 사라졌다.
멀리서 세심하게 기운을 움직이던 준혁은 만족스러움에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다행히 잘 빠져나갔구나.’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무사히 여동생과 제자, 그리고 사쿠라가 빠져나간 듯 보이자 준혁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인족 놈들이 도망갔다!
-멀리 가지 못했을 거야! 당장 흩어져서 뒤져!
-너는 빨리 족장님께 알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감을 통해 주변이 소란스러워진다는 게 느껴졌다.
거처 한쪽에서 준혁이 전투 후 몸을 회복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산들바람은 갑자기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밖으로 뛰어나갔다.
얼마 뒤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씩씩대며 돌아왔다.
“큰둥아! 그놈들이 도망갔어!!”
“그놈들이라니?”
“네 삼청조를 훔쳤던 그 인족 놈들 말이야. 도대체 무슨 수로 빠져나간 거지? 영력도 사용할 수 없고, 결계로 완벽하게 막아놓았었는데.”
산들바람의 반응에 따라 준혁도 짐짓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아쉽네. 재료로 사용하려고 했더니.”
“재료라니? 결계?”
도천 등을 구할 계획을 구상해놓은 준혁은 산들바람의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답해주었다.
“아니. 혼령패를 바친 이들에게 비술을 전해주기로 했잖아? 그걸 위해선 인족 놈들을 연구할 필요가 있었거든.”
“아!”
불현듯 무언가가 떠오른 듯한 모습을 연기하며 준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생각난 김에 미리 재료들을 수급해 놔야겠다. 잠시 결계를 살펴보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