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혼령패 (1)
땅바닥에 처박힌 사안족 수사를 제외한 여섯 명의 원영기 영수.
그들 전부를 죽여버리는 일이라면 지금의 준혁에겐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영원히 비경에 머물며 마족에게서 산들바람과 적호족을 지킬 것이 아니라면, 그들을 살려둔 채 제압해야만 했다.
준혁이 마선 법기들을 소환하며 전투준비를 마치자, 그 모습을 본 영수들은 옳다구나 하면서 소리쳤다.
“보십시오! 진정 마족인가 봅니다!”
강체공 위주의 전투술을 사용하는 영수들 처지에선 인간들처럼 법기부터 꺼낸 준혁의 모습이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마족들도 법기와 강체술을 적절히 사용했기에 준혁이 그들과 겹쳐 보이는 것.
보호 법기에 갇혀있던 산들바람마저 준혁의 행동에 상황판단을 못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수라 해서 법기의 사용 빈도가 낮은 건 아니었다.
눈꽃 비경에서 살아가는 영수족들이 유난히 강체공에만 특화되어 있었던 거지, 선계의 수많은 영수들은 인족과 마찬가지로 법기와 강체공, 각종 술법을 익히고 사용했다.
‘우물 안 개구리들.’
구지대륙이 갈라진 후 수많은 세월이 흐르고, 그동안 이 좁은 땅에 고립된 채 살아오다가 만난 것이 약하디약한 지구의 수사들.
그랬으니 눈꽃 비경 안 영수들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발전할 생각은 못 하고, 원영기를 넘어 완영기에 든 자조차도 나오지 못한 것일지도 몰랐다.
준혁이 법기들을 꺼내며 진짜 마족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주자, 영수족 원영기들은 조금 더 진지한 표정으로 전투에 임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사이 곰 같은 사내는 황토색 기운이 넘실거리는 주먹을 앞세우며 준혁의 코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휘익-
하지만 단순한 주먹질을 맞상대해주기엔 준혁의 눈엔 너무도 느려 보였다.
무식하게 돌진해오는 곰 같은 사내의 공격을 가볍게 회피한 준혁은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까마귀 같은 기운을 풍기는 음침한 수사가 만들어낸 거대 장막에 다가가 입김을 내 불었다.
“저자가 도망가려 합니다!”
장막을 만들어 퇴로를 차단했던 수사는 준혁의 행동에 장막을 강화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준혁은 주변 일대를 뒤덮은 장막을 제거하려는 게 아니라,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자신의 의지 아래에서.
퉁-
까마귀 같은 수사가 영력을 폭발시키며 장막을 강화하는 사이, 준혁 역시 영기파동을 퍼트리며 발아래 주변으로 금빛 실을 퍼트렸다.
금빛 실은 당장이라도 장막을 뚫어버릴 것처럼 움직이더니, 막상 장막에 닿자 흔적도 없이 흡수돼 사라져 버렸다.
“어? 이게 무슨?”
그 순간, 까마귀 수사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조처하려고 했지만, 이미 장막의 소유권은 준혁에게 넘어가 버린 후였다.
준혁은 한 번 더 장막 안으로 기운을 불어넣어 누구도 도망갈 수 없게 만들었다.
그때, 곰 같은 사내와 회색 털을 휘날리는 미남 수사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도망갈 수 없다. 마족 놈!”
그리고 두 사람의 공격에 발맞추어 수십 개의 가시가 준혁의 사방을 찔러왔다.
준혁은 귀원패로 만든 타일 보호막을 키워 구 형태의 보호막을 만들었다.
팅- 티디팅-
보호막이 만들어짐과 동시에 총알처럼 쏘아져 찔러오던 가시들이 튕겨 나갔고.
“크아아아앙!!”
그 순간, 준혁의 입에서 혈맥의 힘이 가득 담긴 사자후가 터져나갔다.
“으윽!”
“이 무슨!”
사자후가 터진 순간, 여섯 명의 수사는 비틀거리더니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각각의 방어 술법을 펼쳐 몸을 보호했다.
하지만 이미 디버프에 당한 몸이 방어 술법을 펼친다고 원래대로 돌아오지는 못하는 법.
준혁은 가장 가까이서 당황을 감추지 못한 채 엉거주춤하는 곰 사내에게 쏘아져 다가갔다.
“조금 전까지 당당한 모습은 어디 갔습니까?”
곰 같은 사내가 황급히 두 팔을 교차하며 앞을 막아선 사이, 준혁의 앞발이 휘둘러졌고,
쾅!
무언가 터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곰 같은 사내는 수십 미터를 날아가더니 퇴로를 막아놓은 장막에 부딪치고는 주르륵 바닥으로 쓰러졌다.
어느새 곰 사내의 전신엔 서리가 끼어있었고, 두 팔과 가슴 부위는 반투명한 얼음덩이로 변해있었다.
단 한 수만에 곰 사내 역시 사안족의 수사처럼 당해버리자, 회색 털을 날리며 공격에 나섰던 미남 수사가 멈칫하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준혁의 손에서 벗어나기엔 이미 너무 가까이 근접해있었다.
하긴, 떨어져 있었다고 한들 결과가 달라지진 않았겠지만….
회색 털 미남 수사가 급하게 입김을 내뱉으며 온몸의 털을 이용해 몸을 보호하려는 찰나.
쾅!
옆구리에서 무언가 깨져나가는 충격과 함께 몸의 절반이 얼어붙어 버렸고, 공포가 전신을 지배했다.
그것이 회색 털 수사가 느낀 마지막 감정이었다. 기절하기 전에.
***
“어찌 다들 머뭇거리십니까? 조금 전과 다르게.”
준혁의 손에 사안족 수사와 곰 같은 황웅족(黃熊族) 수사, 거기다 민첩함으로는 영수족의 으뜸이라는 비랑족(飛狼族)까지 단숨에 당해버리자 장내엔 침묵만이 감돌았다.
가시를 쏘아냈던 수사도, 분신을 만들어 위협을 가했던 자도 상황이 자신들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전개되자 공통된 생각을 떠올리며 시선을 모았다.
그리고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까마귀 같은 수사, 흑오족(黑烏族) 수사가 입을 열었다.
“도망칠 수 없습니다…. 우린 이미 갇혔어요.”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전투가 시작되기 전 하얀 호랑이가 장막에 손을 대는 것을 보았기에 모두의 얼굴엔 그늘이 드리웠다.
“가만히 있겠다면 이번엔 내가 가지.”
하지만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전투의지를 잃든 말든. 준혁은 하등 상관없었기에 팟- 하며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사라짐과 동시에 갈퀴 같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수많은 분신체를 만들어 허공에 떠 있던 수사의 앞에 나타나더니 그녀의 목을 단숨에 잡아챘다.
“커억, 마, 말도….”
종족 특성 중 하나인 분신술로 언제나 다른 종족보다 우위에 섰던 마후족(馬螑族) 수사.
그녀는 피할 틈도 없이 목이 잡혔다는 것보다도, 수많은 분신 중 단번에 본체가 발각되었다는 것에 경악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이건 준혁의 능력이라 하기도 우스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완영기에 머물러있지만, 명혼단으로 인해 연형기에나 사용할 수 있는, 영기를 유형화시키는 능력까지 어설프게나마 사용할 수 있었기에.
겨우 원영기 수사가 만들어낸 분신체의 가짜와 진짜를 기감으로 구분해 내는 건, 준혁에게 있어서 누워서 떡 먹기보다 편한 앉아서 떡 먹기 수준이었다.
슈욱- 철퍼덕-
공중에 떠 있던 마후족 수사마저 몸의 상반신이 얼려진 채 바닥으로 추락하자, 흑오족 수사와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쏘아 보냈던 수사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수사! 우리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같은 영수족 아닙니까? 서로 해를 입힐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이 모든 게 저기 쓰러져있는 사안족 수사가 주도한 일이지, 우리는 처음부터 내켜 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반항하지 않겠다는 듯 영력을 갈무리하며 소리치자, 준혁은 피식 웃으며 천천히 바닥에 내려섰다.
그리고는 앞발을 쿵 하고 찍었다.
“커르륵.”
직후, 땅속에 숨어있던 쥐같이 생긴 수사가 위로 올라오더니 피를 한 움큼 토해내고는 준혁을 경악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땅에 쓰러졌다.
“언제까지 숨어있을 생각이었습니까? 기회를 줄 때 스스로 나왔어야지.”
모든 반항 의지를 지운 채 항복 의사를 밝힌 두 수사와 달리, 땅속에 숨어있던 자는 준혁이 바닥에 내려선 순간을 노려 공격을 가하기 위해 만반의 태세를 갖춘 상태였다.
그랬기에 준혁은 땅에 내려섬과 동시에 영력을 방출해 상대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거기다 더해 금빛 실을 쏘아 보내, 다른 이들처럼 얼음으로 무력화시킨 것이 아닌 직접적인 타격을 가한 것이었다.
순식간에 장내가 정리되자, 산들바람은 두 눈만 껌뻑일 뿐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떻게든 보호 법기를 벗어나 준혁을 도우려던 생각도 이미 저 멀리 날려버린 후였다.
“큰둥아…. 너. 진짜 큰둥이 맞아?”
진짜로 마족이 큰둥이로 변한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의 충격적인 상황.
만약 준혁에게서 나는 특유의 향기가 아니었다면, 산들바람은 절대 눈앞의 준혁이 진짜 큰둥이라고 믿지 못했을 것이었다.
***
설토족을 제외한 아홉 종족의 원영기 수사들이 전부 모인 산들바람의 거처 앞.
준혁은 조금 전까지의 전투가 장난이기라도 한 듯, 아무런 감흥 없이 바닥에 쓰러져있는 다섯 수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항복 의사를 밝혀 간신히 얼음덩이가 되는 걸 모면한 나머지 두 수사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설토족 수사만 안보이군요.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아홉 종족 중 적호족과 가장 사이가 나쁜 설토족이 빠져있자 의문이 들었다.
“뢰비 수사가 실종된 후…. 아직 설토족엔 부족을 대표할 원영기 수사가 없습니다.”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산들바람을 보니 사실인 것 같았다.
천년화를 준혁에게 빼앗긴 설토족은 원영기 수사가 없기에 아홉 종족의 연합에서 이미 뒤치다꺼리나 하는 신세로 전락한 지 오래.
만약 준혁이 없었다면 적호족도 설토족의 뒤를 이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준혁이 잠시 동안 뢰비와 얽혀있던 일들을 떠올리고 있는 사이, 그 침묵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한 흑오족 수사가 급하게 말문을 열었다.
“수사! 여기 산들 수사와 친분이 있다면 우리와도 남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이번 일은 수사의 아량으로 그냥 넘어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흑오족 수사의 말에 상념을 날려버린 준혁은 생각에 잠긴 척하다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를 죽이려고 한 것을 그냥 참고 넘어가라는 것입니까?”
“죽이다니요! 절대 아닙니다.”
“아니라면 이렇게 우르르 몰려와 저와 산들 수사를 위협하려 했겠습니까?”
흑오족 수사는 안색이 시커멓게 변하더니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부정했다.
“절대 아닙니다! 산들 수사가 설토족처럼 부족의 운영을 우리에게 맡기기만 하면…. 군말 없이 물러갈 생각이었습니다. 마족을 상대하는 데 한 손이라도 보태야 하거늘 어찌 원영기 수사를 핍박할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것이 핍박 아닙니까?”
준혁이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웃고 말자, 흑오족 수사와 옆에 서 있던 고슴도치 같은 수사의 안색이 썩어들어갔다.
웃음 속에 살짝 스며있던 진한 살기를 느낀 것이었다.
“수사…. 우리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후우…. 저희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압도적인 상황을 만들어 버린 준혁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으며 잘잘못을 따지고만 있자, 흑오족 수사는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상대의 태도에서 알아서 기라는 뜻을 포착한 것.
그제야 준혁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산들바람을 한번 쳐다보고는 시선을 돌려 두 수사에게 말했다.
‘떠나기 전, 산들 수사의 안전은 보장해 놓고 가야겠지.’
“앞으로 내가 적호족의 영토에 머물며 산들 수사의 후견인이 될 겁니다. 그러다 보면 또 언젠가 수사들이 힘을 모아 나와 산들 수사에게 해를 가하려 들지 모르겠지요?”
“절대 아닙니다! 이미 넘을 수 없는 벽을 보았거늘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양손을 저으며 허둥대는 두 수사를 보며 준혁은 ‘그래, 믿는다 믿어.’ 하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하지만 입에서 나온 말은 표정과 전혀 달랐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미리 방지해야겠습니다.”
“방지라 하심은?”
잠깐 말을 멈춘 준혁은 두 수사의 눈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그들의 눈에 공포가 올라온다 싶자 입을 열었다.
“여덟 종족의 대표들은 혼령패를 만들어 내게 바치십시오. 아니, 설토족은 할 수 없을 테니 일곱 종족의 대표들은.”
혼령패라는 말에 두 수사뿐 아니라 산들바람마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혼령패라니요…. 어찌 그런….”
“아니면, 나를 죽이려고 했으니. 지금 전부 죽여드리면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