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다시 찾은 눈꽃 비경 (3)
다른 이들에 관해 묻자 사쿠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가 이 아이들을 찾았을 땐 벌써 어딘가로 잡혀간 후였어요.
이후 읍읍- 거리는 최나연과 천이화를 뒤로한 채 사쿠라와 대화를 이어가던 준혁은 가볍게 앞발로 땅을 두들겼다.
그러자 앞발 끝에서 영력이 뭉치며 토율서가 나타났다. 땅속을 파고들어 간 토율서는 사쿠라에게 다가갔다.
동시에 금빛 실이 뻗어 나오더니 사쿠라의 몸속을 파고들며 그녀를 구속하고 있던 기운을 날려버렸다.
“아!”
사쿠라가 준혁이 전해준 힘에 깜짝 놀라 들뜬 소리를 내다가 자신도 놀라 황급히 입을 막았다.
-적당한 시간이 되었다고 여길 때 그 녀석에게 영력을 주입하면 아이들과 함께 토둔술을 쓸 수 있을 것이오.
-토둔술을요?
둔술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게 해주는 법기라니, 그것도 타인까지 포함해서.
사쿠라는 준혁의 말에 깜짝 놀라며 발치 끝에 나타난 흙으로 빚은 다람쥐를 바라보았다.
-그럼 섬에서 봅시다.
토율서를 전해준 준혁은 너무 오랫동안 이곳에 머무는 게 좋지 않을 거란 판단에 사쿠라에게 눈빛으로 인사를 보낸 후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산들바람에게로 이동하며 다른 이들을 찾을 방법을 생각했다.
‘도천…. 사고는 치지 말았어야 할 텐데.’
그냥 잡혀가 결계의 제물이 되었다면, 몰래 구출하면 그만이었지만, 만약 반항하며 난동이라도 부렸을 경우, 인족을 싫어하는 영수들에게 어떤 꼴을 당했을지 알 수가 없는 일.
도천의 성격상, 준혁처럼 눈치를 보아가며 고개를 숙일 인물은 아니었기에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
산들바람의 거처로 돌아온 준혁은 곧장 다른 이들의 행방을 물어 최대한 빠르게 수하들을 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을 진행하기도 전.
산들바람을 찾는 다른 원영기 영수들의 방문으로 계획을 멈춰야 했다.
그들이 방문한 목적이 바로 준혁이었기 때문이었다.
“산들 수사! 나와 보십시오. 이족을 들였다고 하던데! 정말입니까?”
거처 앞으로 몰려와 영기를 풀풀 풍기는 이들 때문에 준혁은 결국 산들바람의 뒤를 따라 거처 밖으로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수하들만 구한 뒤 몰래 사라져버릴 계획이 처참히 무너진 순간이었다.
‘이렇게 빨리 나의 방문이 알려지다니.’
사실 내경에서 쫓겨난 아홉 종족은 부락의 경계만 나뉘어 있을 뿐, 예전처럼 내외하며 서로를 배척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다른 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빠르게 소문이 퍼져나갔다.
게다가 준혁의 등장은 시체수거반 일을 하며 업무 만족도가 매우 높았던 수하들 덕분에 더욱 빠르게 소문이 퍼진 경향이 있었다.
“드디어 나왔군. 산들 수사. 이 시국에 정체도 모르는 이족이라니요?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산들바람의 거처 앞에 모인 자들은 총 일곱 명이었는데, 전부 원영기 수사들이었다.
그중 가장 대표로 나선 자는 여전히 아홉 종족 중 가장 강하다고 평가되는 사안족의 수사였다.
노란 눈동자가 유난히 번들거려 준혁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마족 놈들 중 환술에 뛰어난 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건 아니겠지요?”
아홉 종족 중 적호족의 위상이 그리 높진 않은지, 사안족 수사는 산들바람을 대놓고 무시하고 있었다.
덩달아 그녀 옆에 서 있는 준혁에게도 수시로 영력을 발산해 위압감을 주려 시도했다.
“마족이라니! 큰둥, 아니 여기 백호족 수사는 오래전부터 우리 적호족과 인연이 있는 자야!”
“백호족이라니. 이곳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하늘에서 혼자 뚝 떨어지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실제로 준혁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갑작스레 나타났기에, 산들바람은 순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준혁은 가볍게 혀를 차며 앞으로 한발 나섰다.
수백 년을 살았다지만 여전히 아이 같은 산들바람이 상대하기엔 다른 영수족의 원영기들은 노회한 인족 같은 모습이었다.
특히 사안족 수사는 인상마저 꿍꿍이가 가득한 모사 같은 모습.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제가 마족이라는 말입니까?”
산들바람 등 뒤에 숨어있을 거라 생각했던 준혁이 앞으로 나서자, 다른 원영기 수사들이 의외란 듯 웅성거리다가 사안족 수사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사안족 수사는 다른 수사들이 자신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마족인지 아닌지는 확인을 해봐야 알겠지요. 다만 그전에 우리 허락도 받지 않고 이곳에 머무는 건 절대 허락할 수 없습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사안족 수사의 태도에 준혁이 피식 웃고 말았다.
“허락? 내가 적호족 부락에서 머문다는데 여기 산들 수사의 허락 말고 다른 이의 허락을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이곳은 적호족이 머무는 곳임과 동시에 우리 아홉 부족의 연합지이오! 당연히 허락을 받아야지!”
사안족 수사가 대답하기도 전, 그 뒤에 서 있던 우락부락 곰처럼 생긴 사내가 소릴 질렀다.
준혁은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다 시선을 돌려 산들바람을 쳐다보았다.
“산들 수사. 그렇다는데, 정말입니까? 저들이 허락해주지 않는다면 이곳에 머무를 수 없다는데? 내가 떠나야 합니까?”
다른 이들을 의식해 존대하자, 그 정도는 눈치챘는지 산들바람도 바로 맞대응을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내가 우리 영토 안에 손님을 받겠다는데 왜 허락을 받아! 야 이 뱀 눈깔아!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상스러운 말에 사안족 수사가 인상을 쓰더니 산들바람을 노려보았다.
“쯧쯧, 여러분.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산들 수사는 무리를 이끌기엔 경험이 너무 부족하다고. 이번 기회에 적호족의 발언권은 제하는 게 어떻습니까?”
상황이 갑작스럽게 적호족을 왕따시키는 분위기로 변하자, 준혁은 모든 게 준비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영수족들은 어디서 배워왔는지 인간들처럼 협작질을 하려는 중이었다.
‘나는 핑계고 애초에 적호족을 배제하려고 마음먹은 것이었구나.’
“수사의 말이 맞습니다. 저자는 한 부족을 맡기엔 너무 부족해요!”
“맞습니다. 맞아요. 우리가 적호족을 이끌어줘야 합니다!”
애초에 산들바람은 원영기라고는 하지만 미완성된 느낌이 강했었다. 거기다 여전히 아이처럼 행동했으니 다른 이들이 보았을 땐 자신들과 같은 줄에 세우는 게 불만이었을 터.
상대하기도 벅찬 적을 앞에 두고 내부에서 권력을 쥐려 움직이는 모습이 인간들을 닮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이끌어주는 게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겁니다.”
“훗날 바람꽃 수사가 돌아온다 해도 우리에게 고마워할 겁니다!”
상황을 파악한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산들바람을 만난 게 반갑기는 했지만, 수하들만 구하고 나면 조용히 사라지려고 생각했던 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눈꽃 비경이 마족에게 지배를 당하든 완전히 침식을 당하든, 준혁 입장에선 전혀 고려할 일도 아니었던 것.
하지만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해 주고,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려고 했던 산들바람이 대놓고 무시를 당하는 것 같자, 짜증이 솟아올랐다.
지금은 겨우 이 정도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른 부족들의 압박은 점점 심해질 테고, 고립된 적호족과 산들바람은 점점 더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을 터.
준혁은 치솟아 오르는 짜증을 억누르며, 나서는 것과 숙이는 것의 결과를 비교해보았다.
그리고는 생각을 거듭한 끝에 결국.
파앙-
꾹꾹 눌러왔던 힘을 퍼트리며 전방을 향해 이마의 내 천 자를 보여주었다.
한마디를 더하며.
“그래서 내가 이곳에 머무르려면 네놈들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그럴 자격은 되고?”
그 순간, 준혁의 몸이 흐릿하게 흔들리더니 말이 끝났을 땐 사안족 수사의 등 뒤에 나타난 후였다.
***
행방불명된 수사들을 제외하곤 현재 사안족 최고 고수이자, 아홉 부족에서도 가장 수행이 높은 뮤두는 눈앞에 서 있던 하얀 호랑이가 움직이는 모습을 놓쳐버렸다.
“자격은 되고?”
직후 그를 찾기도 전, 등 뒤에서 들리는 말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으며 황급히 몸을 날렸다.
그리고는 이곳에 오기 전 다른 수사들과 상의하고 있었던 ‘적호족 무력화시키기’ 작전의 여러 유형 중 한 가지를 떠올렸다.
영수들이 아무리 힘에 굴복하는 경향이 크다고는 하지만, 명분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무 이유 없이 다른 부족의 족장 및 원영기 수사를 핍박하다가는 언젠가 부메랑처럼 자신이 당할 수도 있는 것.
뮤두는 그리 멍청한 자가 아니었기에 일을 진행함에 신중함을 기했다.
그런 뮤두의 머릿속에 지금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였다.
-뮤두 수사, 차라리 이건 어떠합니까? 산들 수사를 찾아왔다는 그자를 도발해 우릴 공격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마족의 첩자라는 누명을 씌우면 될 테고, 마족을 감싼 적호족의 족장 역시 죄를 피할 순 없지 않겠습니까?
-하하,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어떤 미친 자가 혼자서 우리 전원을 상대로 투기를 드러내겠습니까?
처음 대화가 오갔을 땐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뮤두는 그 제안을 했던 이를 칭찬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칭찬은 차후에 하면 될 일.
당장은 소릴 지르는 게 먼저였다.
“기습을 가하다니!! 모두 보셨습니까?! 이자는 마족의 첩자입니다! 산들 수사가 마족과 결탁한 것이니 모두 힘을 합!”
그저 등 뒤로 이동해 온 것뿐이었지만, 준혁의 행동은 어느새 기습으로 포장돼있었다.
하지만 상대의 태도를 보고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이미 예상했던 준혁은 상관없다는 듯 땅을 박차며 멀어지려는 뮤두에게 바짝 붙었다.
그리고는 말이 끝나기도 전 앞발을 휘둘렀고, 말을 하던 뮤두는 세상이 두 쪽 날 것 같은 기운을 느끼며 몸을 틀었다가 안면으로 공격을 막는 희대의 방어술을 보여주었다.
퍼억-
하지만 안면 방어술이 그리 효율적이진 못한지, 뮤두의 얼굴은 처참하게 함몰되며 바닥으로 내리꽂혀지고 말았다.
철퍼덕-
그리고 뮤두가 바닥에 쓰러지자 순간 장내의 모든 것이 멈춰버리듯 적막감이 찾아왔다.
“이 비겁한 마족의 종자가!!”
그때 곰처럼 덩치가 산만 한 수사가 입김을 내 불어 전신으로 영력을 발산하자, 그것이 신호가 되어 나머지 수사들도 전부 전투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뮤두는 자신의 말마따나 기습을 당한 것이기에 안 좋은 모습을 보인 것이었지만, 자신들은 그리될 리 없다고 보았다.
애초에 원영기 한 명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여섯 명의 손을 막을 수 없다는 건 당연한 사실이었으니까.
곰처럼 산만 한 수사가 양손에 황토색 빛이 어른거리는 기운을 뭉쳐 준혁에게로 날아가자, 다른 이들은 이미 합을 맞춰봤다는 듯 제각각 맡은 바를 이행하기 시작했다.
쥐처럼 간사하게 생긴 사내는 몸을 작게 만들더니 땅속으로 파고들어 갔고,
머리털이 갈퀴처럼 찰랑거리는 여 수사는 허공을 박차며 몸을 여러 개로 만들어 준혁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강인한 인상의 배우처럼 생긴 남 수사는 온몸에 회색 털을 일으키더니 곰 사내의 반대편으로 날아가 준혁을 막아섰다.
그리고 키가 작고 통통하게 생긴 사내가 온몸에 가시를 만들어 낸 후, 입김을 내 불어 가시를 총알처럼 쏘아 보내는 사이.
“나는 그자가 도망 못 가게 막겠소!”
음침하게 일행의 가장 뒤에 서 있던 수사가 두 팔을 날개로 만들어 허공으로 솟구치며 주변에 거대한 장막을 만들어냈다.
그 준비 과정을 전부 지켜보던 준혁은 입김과 함께 보호 법기를 발출해 산들바람이 전투에 관여하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그리고는 산들바람이 당황해 어? 어? 하는 사이.
“인지경.”
거울을 소환해 머리 위에 띄웠고.
“적마도.”
붉은 장검을 불러내 운신의 속도를 끌어올렸다.
마지막으로.
“귀원패.”
새하얀 털 위로 육각 타일의 보호막을 만들어 방어까지 준비를 마쳤다.
완영기에 오른 후, 원영기 수준의 수사들은 애들처럼 상대할 수 있다고는 하나, 이미 힘을 드러내기로 한 이상 대충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이제 수월하게 수하들을 찾고 일을 진행하기 위해선. 압도적인 우위로 영수들을 굴복시키는 게 최선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