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이글대는포효 (1) >
거처에 펼쳐둔 진법을 뚫고 전해오는 목소리에 준혁은 밖으로 나가 그녀를 맞이했다.
“이제 움직일 거지?”
준혁이 백호에게서 받아온 힘으로 정화한 구역은 겨우 세 곳.
매혹하는구름이 의구심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준혁은 그녀의 시선을 무시하며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라고.”
준혁은 연형기급 귀령을 처치한 뒤 3번 공동에 정화의 힘을 주입해 귀령이 더 이상 생성되지 못하게 막았다.
그 후론 두 곳을 연달아 처리해 호왕족 전사들을 들뜨게 했다.
하지만 그리고 나서야 백호가 준 힘이 무한한 것이 아닌, 소비 후 회복할 수 없는 힘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귀령을 소멸시키거나 귀기 자체를 정화할 땐 상관없었으나, 백호가 알려준 대로 일정 공간에 힘을 주입해 더는 귀령이 생성되지 못 하게 하자 힘의 일부가 사라져 버렸던 것.
그랬기에 준혁은 세 곳을 정화한 뒤, 힘을 회복해야 한다는 핑계로 일을 멈춰버린 것이었다.
‘이 힘을 이렇게 소비해 버리는 건 안 될 일이지.’
귀령이라는 존재를 이곳에서 처음 보기는 했지만, 매혹하는구름이나 백호의 말에 따르면 다른 곳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존재라는 것.
그 말은 정화의 힘은 쓰임새가 무궁무진하단 말과도 같았기에 어떻게 해서든 호왕족을 돕는 것과 동시에 최대한 힘을 아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었다.
“흠. 진짜?”
너무나 쉽게 세 곳을 정화해버린 준혁이 엄살을 떨자, 매혹하는구름은 의구심을 지우지 못한 채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원영기 수사 두 명이 지키고 있던 공동에 도착하자 준혁은 다른 이들에게 물러나 줄 것을 요청하고는 공동 중앙으로 이동했다.
+++
매혹하는구름과 두 명의 원영기 수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준혁이 앞발로 가볍게 땅을 건드리자 금빛 실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직후, 입을 열자, 입속에서 하얀 빛덩이가 빠져나오더니 구슬처럼 뭉쳤다.
구슬처럼 뭉친 기운이 잠시 허공에 떠 있자 바닥에 퍼져나가던 금빛 실이 위로 솟아오르며 구슬을 감싸기 시작했고, 잠시 후엔 금빛 실의 끌어당김에 따라 땅으로 스며 사라졌다.
구슬이 땅속으로 사라지자 준혁은 진법 깃발들을 뱉어내 사방으로 쏘아 보냈고, 입김을 내뱉어 진법을 발동시켰다.
우우웅-
그 순간, 공동 전체에 아주 옅은 하얀 안개처럼 생긴 희끄무레한 것이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동시에 귀기가 천천히 소멸하여 사라졌다.
“응? 인족들의 술법 아닌가?”
순수한 정화의 힘을 땅속에 주입했던 이전과 달리, 진법으로 모호한 결계를 만들어내는 준혁을 보며 매혹하는구름이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맞습니다. 얼마 전에 주신 인족 놈의 머릿속에서 찾아낸 방법입니다.”
“왜?”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공동 전체를 처리하기엔 그분께서 주신 힘이 부족합니다.”
정확히는 너무 딱 떨어져 남는 게 없었다.
“그래서 진법의 도움으로 조금 약화된 결계를 펼친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하면 대략 3할가량의 힘은 비축한 채 결계를 마무리할 것 같습니다.”
3할은 남겨야 나도 수지맞은 장사 아니겠습니까? 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준혁의 말에 매혹하는구름이 가자미 같은 눈을 하며 결계의 중심부를 살폈다.
“그런데 이것마저 나중에 회수할 수 있게 처리한듯한데? 무슨 이유라도?”
준혁이 진법에 혈단법의 묘리와 함께 자신의 힘을 담아 최대한 감추려고 했던 사실.
사실은 3할의 힘을 남겨두기 위해 진법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진법에 들어간 정화의 힘마저 나중에 다시 회수하기 위해 자신의 힘으로 봉인을 한 채 결계를 만든 것이었다.
물론 그렇기에 결계에 포함된 정화의 힘은 더욱더 효율이 떨어졌고, 귀령이 생성되는 걸 완전히 막을 수도 없었다.
그런 사실을 매혹하는 구름이 단번에 파악하자 속으로 뜨끔했지만, 태연한 척 대답했다.
“후일을 위해서입니다. 당장은 그분이 주신 힘으로 인해 귀기를 잠재울 순 있지만, 모든 것은 누르는 만큼 솟아오르게 되어있는 법. 훗날 귀기가 더 강해질 때를 대비해 힘을 회수해 다시 펼치려고 이렇게 조치한 것입니다.”
“흐음···.”
“저를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으신 겁니까?”
귀기 정화용 진법 설치를 마친 준혁은 매혹하는구름을 향해 몸을 돌리고는 한참 동안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입을 크게 벌려 하얀 빛덩이를 뱉어내 그녀에게 날려 보냈다.
“무슨 연유에서 갑자기 저를 못 미더워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수사께서 직접 하십시오. 호왕족이 저와 뿌리가 같다고는 하나, 굳이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는 것. 저는 그분께서 명하신 임무를 수행함과 동시에 저희 백호족의 남은 족인들을 찾아 떠나겠습니다.”
매혹하는구름은 기감으로 준혁을 살피고는 그의 몸속 정화의 힘이 전부 빠져나온 것을 확인했다.
당당한 준혁의 태도에 혀를 차고는 정화의 힘을 다시 돌려보낸 후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의심하려는 게 아니라. 조금 찝찝해서 그랬어.”
“무엇이 말입니까?”
“아니야. 그분께서 너에게 이 힘을 주신 걸 보면···. 네가 다루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여기신 거겠지. 앞으론 관여하지 않을게.”
매혹하는구름은 준혁이 인족과 종속의 인을 걸겠다는 말을 했을 때부터 알 수 없는 위화감 같은 걸 느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가지 생각이 가득했다.
‘정말 가능한가? 백호족의 전사가?’
아무리 백호족의 시조인 그분께서 명령한 일이라고는 하나 호왕족보다 자긍심이 높던 백호족의 전사가 택할 일은 아니었다.
준혁은 합리적인 판단이라 여기고 만든 핑곗거리였지만, 영수족인 그녀 입장에서는 가장 비합리적인 선택이었던 것.
애초에 자신들의 하늘 같던 그분이 인족의 종속이 되라는 명령을 후손에게 내렸을 리 없다고 여겼다.
거기에 더해 준혁이 정화작업을 미루기까지 하자 그 의심은 점점 커져갔다. 결국 준혁 몰래 인족 수사를 잡아다 머릿속까지 들여다보게 되었다.
결과는 진실로 종속의 인을 맺어버렸다는 것.
매혹하는구름은 종족의 미래를 위해 준혁이 모든 걸 혼자 희생했다고 여기는 것과 동시에 모든 일에 자신이 눈치채지 못하는 거짓이 숨어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의 감.
수행이 올라갈수록 수사들은 하늘의 기운에 조금씩 근접해 가기에, 감이라는 것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감은 말하고 있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고.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장소로 이동하지요. 오늘은 두 곳 정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밖에 일러 진법 깃발을 보급해달라 전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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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하는구름의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견뎌내며 두 곳을 봉인한 준혁은 거처로 돌아와 삼청조를 발동시켰다.
이제 울릉도에 펼쳐둔 수행증진 효과가 사라져 버릴 터.
예전처럼 다른 이들이 혼란스러워 하기 전에 청명을 통해 사실을 알리려는 것이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 그때까진 진법 가동을 멈춘다고 알리도록 하거라.”
-예. 어르신.
“특별한 일은 없느냐?”
준혁의 질문에 나무새가 잠시 침묵하다 조막만 한 입을 뻐끔거렸다.
-아가씨···. 아니 최나연 수사가 사유리 수사와 함께 눈꽃 비경으로 떠났습니다요.
사쿠라가 수련을 담당하고 있었으니, 비경으로 실전을 익히기 위해 떠난 건 신경 쓸 문제도 아니었다.
게다가 결단기인 사쿠라의 제자 사유리가 따라붙었다면 더더욱.
“알겠다. 당분간은 연락을 자제할 테니 돌아가서 보자꾸나.”
-예. 어르신. 몸조심하십시오
준혁은 삼청조를 집어넣고, 거처에 몇 겹으로 둘러놓은 방음진을 제거했다.
매혹하는구름의 태도가 심상치 않기에 앞으론 삼청조를 비롯해 의심이 갈만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정화의 힘을 완전히 사용할 걸 그랬나?’
매혹하는구름의 태도가 그렇게 변할 줄 몰랐기에 살짝 후회되긴 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귀기를 정화하는 힘. 다른 곳에서 구할 수도 없는 특별한 힘을 이곳에서 전부 소비하고 갈 수는 없는 법.
조금 사이가 껄끄러워지더라도 챙길 수 있는 건 전부 챙기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준혁은 매혹하는구름이 자신을 의심하는 진짜 이유를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이건 준혁이 눈치가 없거나 어리숙해서가 아닌, 인간과 영수족이라는 생물적인 차이에서 오는 가치관의 차이 때문이었기에 어쩔 수가 없는 문제였다.
그리고 준혁은 시간이 더 흐른 뒤. 그 이유를 알게 되고 허탈하게 웃고 만다.
물론 아주 먼 미래의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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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후.
수많은 호왕족 전사들이 모여있는 제단.
오늘은 그 어떤 날보다 특별했기에 제단 주위엔 축제가 펼쳐져 있었다.
축제 분위기 속에 유독 눈에 띄는 무리가 있었는데, 거대한 나무 그늘에 모여있는 선남선녀, 청호와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여 호랑이들이었다.
청호가 허공의 어느 한점을 바라보고 입을 열 때마다, 여 호랑이들은 꿈에 빠진 것처럼 몽롱한 표정을 했다.
“그래서 말야.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었지?”
“그···. 선계 최강자라는 지목족의 봉인지에 방문한 일이요.”
여인이 말을 덧붙여주자, 그리운 과거를 추억하는 듯 청호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맞아. 그곳은 거대한 공간 전체가 환영으로 만들어진 곳이었어.”
“우와.”
“주이···. 인. 아니 형님께서는 환영이 만들어진 각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 수련이 필요하셨지. 나는 그것을 대번에 알아채고는 지목족의 보물이라는 지유목을 수집해 형님을 도왔어. 그 뒤로는 말이야···.”
청호의 입에서 사실과 조금은 다르지만, 대부분은 거짓이 아닌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여 호랑이들은 한마디라도 더 들으려는 듯 그의 곁으로 바짝 붙었다.
개중엔 조금이라도 청호에게 가까워지기 위해 서로를 밀치는 자들까지 나왔다.
“그래서요?”
제사장의 손녀이자 가장 부드러운 털을 지닌 여 호랑이가 솔방울만 한 눈을 껌뻑거리자 청호는 베베 꼬이는 몸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시련은 그게 끝이 아니었어. 처음 봉인지를 나선 후엔 하늘정원이라는 두 번째 봉인지를 방문해야 했고, 마지막엔 황금궁전으로 가 선계의 괴···.”
“나오시나 봐요!”
청호는 자신의 모험담이 중간에 끊기자 입술을 샐룩 내밀다가, 제단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가 이곳에 나온 이유는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위함이 아닌, 기다리는 이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니까.
잠시 후 봉인구역으로 통하는 틈으로 수많은 인원이 모습을 드러내자, 제사장이 눈에 눈물을 머금고는 제단 아래로 내려가 넙죽 엎드렸다.
그 뒤를 이어 수많은 호왕족인들이 제사장 뒤로 다가가 제단 정상을 향해 환호했다.
“아아! 이렇게 저희 종족을 위해 애써 주시다니.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제사장이 엎드린 방향.
그곳에서 매혹하는구름을 필두로 준혁과 수많은 원영기 수사들, 그리고 도율과 그의 제자까지 모습을 보였다.
준혁은 절반에 불과하지만, 성공적으로 공동 전체에 결계를 만들어냈고, 그 덕에 최소한의 인원만을 남겨놓은 채 전원이 봉인구역을 벗어나 마을로 돌아온 것이었다.
물론 원래대로라면 완벽한 결계로 호왕족 전사 전원이 돌아와야 했겠지만 말이다.
“흐으으읍! 하아. 이 얼마 만에 느껴보는 것인가.”
무리의 선두에 있던 매혹하는구름의 말에 그 뒤 수사들 전원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미 봉인구역에 대한 소문이 퍼져 전사들이 복귀하는 날을 기점으로 축제가 펼쳐져 있던 상황.
잠시 후 각자 제단을 내려가 흩어지자 준혁은 매혹하는구름의 눈치를 한번 보고는 도율과 그의 제자에게 따라오라 손짓하고는 조금 떨어진 나무로 몸을 날렸다.
나무 아래 도착한 준혁은 수많은 여성 호랑이들에 둘러싸인 청호의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제사장이 찾아와 안내하자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저희 호왕족을 구원해 주신 걸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백호족을 모시는 일의 중추 역할을 맡은 제사장이기 때문인지, 옆에 자리한 호왕족 최고 수행의 매혹하는구름 에게보다 준혁에게 더욱더 깍듯이 행동했다.
그 모습이 조금 불편했던 준혁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분께서 주신 힘으로 결계를 만든 것뿐. 저보단 매혹하는구름님을 위시한 다른 수사분들께서 지금껏 고생하신 것이지요.”
거듭 겸양의 태도를 보이는 준혁의 모습에 제사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앞으로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정녕 인족들이 머무는 곳으로 떠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인족들은 눈썰미가 없으니. 제 정체를 알아보지도 못할 테지요. 그곳에서 세력을 만들어 사신들의 행방을 찾을 겁니다.”
“아···.”
준혁은 매혹하는구름의 눈치를 살짝 보다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매혹하는구름 님께도 말씀드렸었는데···. 앞으로 제가 인족들을 규합해 세력을 만들면 그들과 연계를 맺었으면 합니다.”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제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요. 다 종족의 번영을 위한 일인데. 그리고 오래전엔 인족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어왔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려울 건 없지요.”
족장의 역할을 하는 제사장의 확답에 준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때 얘기를 듣고 있던 매혹하는구름이 입을 열었다.
“그럼 곧바로 떠날 건가?”
말투는 평이했지만, 눈빛은 여전히 무언가를 의심하는 눈빛.
준혁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고개를 살짝 좌우로 움직였다.
“아닙니다. 당분간은 이곳에 머물며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확인?”
“아직 확인하지 못한 고서가 꽤나 남아있습니다. 거기에 더해 인족들의 행동양식도 제대로 파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준혁의 말에 매혹하는구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특히 인족 놈들은 비열하기 그지없으니. 네 정체를 알게 되면 어떤 행동을 보일지 뻔하니까.”
“그렇습니다. 인족 놈들이···. 좀 그렇지요.”
그녀의 말에 맞장구친 준혁의 시선은 봉인구역을 벗어난 직후에 마선의 기운이 느껴지던 곳을 향하고 있었다.
단(丹) 안에선 원영이 식검의 검신을 쓸며 조금만 참으라고 달래는 중이었다.
‘이글대는포효라고 했었지? 몇 번째 마선과 계약을 한 것이냐. 부디. 늦게 태어난 녀석이면 좋겠구나.’
식검과 마찬가지로 준혁 역시 기대감에 차 있었다.
백호가 전해준 점진적이란 명제를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