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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157화 (157/408)
  • < 157화. 도율 (2) >

    인족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시원하게 넘겨준 매혹하는구름은 준혁이 몸을 돌리려 하자, 불쑥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진짜 그 이유?”

    너무 쉽게 허락해주길래 ‘인족에 관한 관심이 전혀 없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던 준혁은 ‘역시나’ 하면서 대답했다.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분께서 내린 명 때문이지요.”

    매혹하는구름이 호기심 짙은 얼굴로 고개를 위로 슬쩍 들었다. 빨리 말해달라는 듯.

    준혁은 작게 한숨을 내뱉고는 ‘너니까 말해준다.’라는 감정을 내비치며 말을 이었다.

    “그분께서 시키신 일을 행하기 위해서 가장 우선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사신 분들을 찾아야겠지?”

    매혹하는구름의 대답에 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대륙이 갈라져 서로 이동하지 못하니···. 제가 선택할 방법은 하나뿐이지요.”

    “설마!”

    무언가를 알아챈 듯, 매혹하는구름은 화들짝 놀란 것처럼 두 눈을 크게 떴다.

    “예. 인족 놈에게 종속의 인을 걸게 한 후, 저를 결계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만들 겁니다.”

    “세상에! 백호족의 전사가 인족의 종속이 된다고?! 말도 안 돼! 정녕 그런 짓을 한다고?”

    물론 비경 밖으로 자유롭게 출입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준혁이 급조한 핑계였지만, 매혹하는구름 입장에선 엄청난 일이었다.

    그녀라고 그런 방법을 몰랐겠는가?

    인족에게 종속이 되면 갈라진 대륙을 감싼 결계를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다는 건 오래전 인족이 처음 출몰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대략 600여 년 전 처음 인족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이미 수백 명은 넘게 잡아다가 기억을 들춰보았기에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찌 대영수족의 피를 이은 전사들이 인간 따위에게 종속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진짜 종속이 아닌 이동 수단을 얻기 위한 가짜라고 해도 절대 할 수 없는, 해서도 안 되는 일일 뿐이었다.

    “백호족 전사로서 제 명예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이 있으니 행할 뿐입니다.”

    준혁이 단호하게 의견을 밝히자, 매혹하는구름은 고민에 빠진 듯한 얼굴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헌데 그 인족 놈은 겨우 원영기 초기 수행인데? 아무리 너와 같은 수행이라 할지라도 종속이 불가능할 수도 있어.”

    준혁을 원영기 수사로 알고 있음에도 고개를 젓는 그녀. 만약 준혁이 완영기 수사라고 말했었다면 그녀는 종속의 인이 가당키나 하냐며 비웃었을지도 몰랐다.

    매혹하는구름의 걱정에 준혁이 입가를 끌어올렸다. 이미 그에 대한 답을 준비해 놓았다.

    “그분께서 밖의 사정을 아시고는 도움을 주셨습니다. 하위 수사로부터 종속의 인을 유도 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제가 그 주체를 조종할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을 말입니다.”

    실제로 준혁은 원영기일 때 완영기인 아마르곤을 종속시켜보았기에 그에 대한 답변은 술술 할 수 있었다.

    “아!”

    하지만 굳이 이것저것 말하지 않아도, 백호라는 이름 하나면 모든 게 일사천리로 통과.

    “그리고 당부드릴 게 있사온데.”

    준혁은 자신이 인족을 이용해 결계 밖을 자유자재로 이동하며 호족의 영광을 재현하겠다고 밝히면서, 동시에 다른 호족들은 절대 인족을 이용해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말라며 당부했다.

    희생하는 사람은 자신 한 명뿐이면 된다고 말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제게 맡긴 일을 해내기 위해선 종족 간의 화합이 필요하다 말씀하셨습니다.”

    백호가 한 말은 사신이라 불리는 네 종족의 화합이었지만, 준혁은 그것에 한 가지를 더했다.

    “그러니 앞으로는 이곳으로 오는 인족들과도 연계를 이끌어내 보려 합니다.”

    “인족 따위와?!”

    “아홉 조각으로 나뉜 대륙에서 그분들의 흔적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이곳저곳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는 인족의 도움이 필수이지요.”

    준혁이 말을 마치자 매혹하는구름은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하지만 완전히 납득한건 아닌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

    +++

    인족에 대한 문제를 일단락지은 준혁은 매혹하는구름의 거처가 아닌, 새로운 거처를 배정받고는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귀령 출몰 지역을 정화해야 하는 게 우선이었지만, 한번 힘을 소비하고 난 뒤엔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핑계를 댄 후였다.

    물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있자, 거처밖에서 인기척과 함께 신호가 왔다.

    준혁은 목소리에 영력을 담아 밖으로 보냈다.

    “들어오거라.”

    잠시 후, 도율과 그의 제자가 쭈뼛거리며 거처 안으로 들어오더니, 준혁을 발견하고는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시립 했다.

    명동거리를 걷다 보면 수백 번은 마주쳤을 법한 평범한 한국 아저씨 모습의 도율.

    그리고 인상 좋은 푸근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다크써클이 얼굴 전체를 뒤덮은 듯한 도율의 제자.

    준혁은 두 사람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가볍게 혀를 찼다.

    “쯧, 두 사람 모두 귀기에 침식당해 말이 아니구나.”

    준혁의 걱정스러운 말에도 두 사람은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까 겁먹은 표정이 가득했다.

    도율은 준혁이 자신을 살피며 생각에 잠긴 듯 보이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호왕족의 전사시여···. 저희는 무슨 연유로 부르셨습니까.”

    도율의 공손한 태도에 준혁은 위에서 아랫것들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훑어보다가 앞발을 가볍게 저었다.

    그러자 도율의 바지 끝단에서 꽃잎 한 장이 툭 떨어지더니 준혁에게로 날아와 흡수되어 사라졌다.

    그 모습에 도율이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몸을 더듬거렸다.

    “걱정말거라. 그저 네 녀석의 성품이 어떤지 확인한 것뿐이었으니.”

    처음 도율을 발견했을 때 날려 보낸 꽃잎.

    그것은 한 달여 동안 도율의 몸에 붙어 주위의 소리를 준혁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했다.

    영역이자 심상 세계인 봉인지 안으로 끌려가 있던 시간을 제외하고는 한 달 가까이 돼가는 동안 쉬지 않고 도율과 그의 제자의 대화를 전해 왔던 것.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술법에 당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도율은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고, 제자 역시 덩달아 어두운 낯빛이 더더욱 새까맣게 변했다.

    하지만 도율이나 그의 제자가 허둥지둥 대든 말든.

    준혁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도율.”

    꽃잎으로 변한 술법이 도대체 무슨 술법이었는지 파악해보려 노력하던 도율은 호왕족에 잡혀 온 후, 인족, 인족놈, 버러지 등이 아닌 처음으로 이름이 불렸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고 황급히 준혁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예?”

    “네 제자는 삼 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알고 있느냐?”

    허둥대던 도율이 제자의 눈치를 살피고는 말을 받았다.

    “예···. 정확한 시기는 몰랐사오나···. 대충 짐작하였습니다.”

    급격하게 표정이 어두워지는 도율을 보며 준혁은 말을 이었다.

    “원한다면 네 제자를 치료해주겠다.”

    치료라는 말에 도율과 김석환이 동시에 깜짝 놀라는 표정을 했다.

    “치, 치료 말씀이십니까? 진정이십니까?”

    “거기다 너와 네 제자를 이곳에서 나가게 해줄 수도 있다.”

    준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율이 바닥에 꿇어앉더니 이마를 땅에 댔다.

    “석환이를 살려만 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아들 같던 제자의 죽음을 무기력하게 기다려야만 했던 지난 시간.

    도율은 상대가 혼을 담보로 이능을 부여해주는 악마라 할지라도 받아들일 마음가짐이었다.

    귀기가 영기와 다르다고는 하나, 그것 역시 기의 일종.

    이미 몸에 스며들어 체화돼버린 기운을 강제로 빼낼 방법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만약 그런 일이 가능한 자라면, 타인의 몸에서 영기도 빼낼 수 있다는 말.

    이미 수도자라는 경계를 넘어선 절대자라 불러야 할 수준이었다.

    그랬기에 제자의 죽음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좋다. 그럼 이걸 받아라.”

    도율이 바닥에 부복한 채 고개를 살짝 들자, 그의 얼굴 앞으로 새빨갛다 못해 검붉은색을 지닌 피 한 방울이 날아와 멈춰 섰다.

    “내 정혈이다. 그걸 먹고 나면 차후에 금제까지 가할 것이다. 금제를 가하고 나면 내가 원할 때 넌 내 꼭두각시나 다름없게 되겠지. 그래도 상관없다면 그걸 먹어라.”

    “안 됩니다! 스승님!”

    도율이 ‘그까짓 것!’ 하는 얼굴로 입을 벌리려고 하자, 지금껏 눈치를 보고 있던 김석환이 도율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스승님! 제가 살아난다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살아난다 해도 스승님께서 그런 꼴을 당하고 사실 수는 없습니다.”

    지금도 노예 같은 삶인데, 얼마나 더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한 채 삶을 연명하겠느냐는 말은 차마 목구멍을 넘지 못하고 삼켜졌다.

    두 사람은 귀기를 치료해준다는 말에 너무 놀라, 준혁이 밖으로 나가게 해준다는 말의 의미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석환아. 어차피 이곳에 잡혀 있거늘, 굳이 이런 절차를 밟을 필요도 없는 일이다.”

    애초에 연형기인 호왕족의 수사가 마음만 먹었다면 처음부터 금제로 구속당한다 해도 피할 수 없었던 것.

    도율의 판단에는 눈앞의 하얀 호랑이가 번거로운 일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마 복종 때문이겠지.’

    눈앞에 당사자가 있고, 제자가 걱정할까 봐 꺼내진 않았지만, 상대가 당근을 제시하며 자신을 구슬리는 이유.

    그것은 정신에 직접 작용하는 상위 금제를 하려 할 땐, 상대방의 완전한 굴복과 허락이 함께 해야만 진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일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상관없다. 너만 구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런 도율의 생각은 일부분 적중했다.

    준혁은 금제를 가함과 동시에 혹시 모를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도율의 기억을 조작할 생각이었다.

    그를 어느 정도 믿어야 하는지 알 수 없기도 했거니와 만약 매혹하는구름이 간섭하고 나섰을 때 그녀를 속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강압적으로 금제를 거는 것보단, 상대방의 동의를 얻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았다.

    준혁은 두 사제 간의 눈물겨운 모습에 피식 웃고는 입김을 후우 내 불었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하얀 빛 덩어리가 쏘아져 나가더니, 김석환이 피할 새도 없이 그의 이마를 파고들어 갔다.

    “서, 석환아!”

    “헉!”

    제자를 설득하려 했던 도율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려다가, 두 눈이 찢어지게 커지면서 입을 벌렸다.

    하얀 빛덩이에 쏘인 김석환은 어느새 얼굴색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고, 몸 전체를 뒤덮던 귀기가 타버리듯 흩어지는 중이었다.

    +++

    김석환이 치료된 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김석환을 먼저 내보낸 준혁은 도율에게 정혈을 먹이고는 금제를 가했다. 그리고는 정신을 잃은 그의 기억을 조작한 후 밖으로 내보냈다.

    이제부터 매혹하는구름이나 다른 이들이 도율의 머릿속을 들여다본다 해도 걱정할 게 없었다.

    도율은 실제로 자신이 준혁에게 종속의 인을 펼쳤다고 알고 있을 테니까.

    원래는 굳이 정혈을 낭비하면서까지 이렇게 일을 진행할 생각은 없었지만, 한 달간 엿들은 대화로 인해, 도율의 제자 사랑이 마치 자신이 동생을 치료하기 위해 애쓰던 것처럼 느껴졌기에 행한 조치였다.

    그렇다고 치료를 도와준 후 무작정 비경 밖으로 보냈다가는 어떤 트롤짓을 할지 몰랐기에 겸사겸사 안전장치를 해둔 것이었다.

    “의외긴 하지. 강만학이나 가라온처럼 인성이 어그러진 자인 줄 알았더니.”

    준혁은 오래전 설악산의 일들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날려버렸다.

    그리고는 현재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을 떠올렸다.

    “보호할 방법을 찾아야 하거늘···. 흠···. 수행을 올리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단 말인가?”

    준혁이 고민하는 것.

    그건 백호를 만난 후 가지게 된 화두였다.

    영역과 심상 세계가 하나 된 일종의 백호의 의식 속으로 들어갔다고는 하나, 자신의 모든 것이 낱낱이 드러나고, 생각조차 읽혀버린 일은 하나의 충격에 가까웠다.

    앞으로 나머지 사신들을 만날 때 역시 그렇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진 선계로 향하는 걸음은 멈춰야 하는 게 맞았다.

    준혁이 청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백호 역시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기에 망정이지.

    자신이 백호를 만나고 살아나온 것은 그저 운일 뿐이었다.

    거기다 준혁은 그 후로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었다.

    정신부에 당한 것처럼 기억이 온전히 읽히고 생각마저 파악 당했다면, 반대로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다른 기억을 주입 당하거나 조종당할 수도 있는 것.

    게다가 백호가 자신에게 건 금제가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온통 그 문제로 정신이 쏠려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준혁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만큼 백호 역시 당황하고 있었다.

    삼경에도 이르지 못한 한없이 약하디약한 인족의 정신을 온전히 읽어내지 못했던 것.

    자신이 만들어낸 완벽한 영역 안 임을 생각한다면 절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백호가 읽어낸 준혁의 기억은 아주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것들 뿐이었다.

    다만 기의 파동을 읽고 뇌파를 실시간으로 감지할 수 있었기에, 준혁의 기억과 행동을 완벽하게 파악한 척 할 수가 있었던 것.

    백호는 하급 수사에 불과한 인족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인한 준혁의 혼에 남모르게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준혁은 자신이 살아나온 것이 운이라고 여겼지만, 기나긴 시간 동안 봉인지에 온 것은 준혁이 유일했기에, 백호에겐 선택 권한이 없었던 상황.

    오히려 백호가 믿을 건 준혁뿐이었기에, 자신의 능력 중 일부를 떼어주기까지 한 것이었다.

    이렇듯 오해가 깊어지며 호왕족의 하루가 또 지나가고 있던 그때.

    귀기를 정화하는 일에 준혁이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보이자 매혹하는구름은 결국 준혁의 거처를 찾아와 그를 닦달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세 곳을 정화한 후론 더 이상 일을 진행하지 않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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