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화. 도율 (1) >
호왕족의 큰 어른이자 최고 수행을 가진 매혹하는구름.
그녀는 준혁이 수련을 마치고 나오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천형(天刑)처럼 호왕족을 말라가게 했던 귀령.
아무리 호족이 귀령을 잡아먹는 종족이라 하나, 그것도 어느 정도 수행 차이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
호왕족이 발전하고 커지는 것보다 빠르게 증식해가는 귀령을 막기 위해, 그녀를 포함한 그녀의 선조들. 그리고 그녀의 후손들 전부 종족을 위해 삶을 갈아 넣고 있었다.
그런 귀령을 억제할 힘을 백호족의 시조인 그분에게서 직접 받아오다니.
매혹하는구름은 자신의 대에서 호왕족이 크게 번식하고 번영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기쁜 마음을 무한히 표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원영기급 귀령 하나를 처치한 후 그놈의 핵을 먹어 치우고 있자니, 다른 구역을 맡고 있던 아이들이 급하게 날아오며 소리치는 게 보였다.
“어르신!! 지, 지금! 3번 공동에 완영기급 귀령이 출몰했사온데! 그, 그것이!”
귀령 역시 연형기를 넘어가면 계면의 압박을 받는 건 똑같았기에, 완영기가 최고 수행이었다.
대부분은 매혹하는구름 혼자 처리하거나, 두 명의 완영기 수사가 합동하여 처리했었다.
하지만 창백해진 얼굴로 소리치는 족인을 보니 일이 터진 게 틀림없었다.
“설마? 폭주라도 했어?”
“그, 그렇습니다! 지금 수행이 수배나 높아지고 있습니다!”
귀령의 폭주.
그것은 수백 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현상으로, 우위를 지켜가던 호왕족을 한 번씩 휘청이게 만드는 현상이었다.
완영기인 귀령이 본인의 귀기를 감당하지 못해 주위 귀령 들과 융합해버리면서 연형기급 이상의 귀령으로 재탄생해 버리는 것.
재탄생 후엔 폭주로 인한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소멸해 버리는 현상이었다.
문제는 폭주하는 순간부터 스스로 소멸하기 때문에 계면의 압박을 받지 않았고, 그로 인해 연형기급 위력을 맘껏 뽐내며 호왕족을 반파시켜놓고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당장 가자!”
매혹하는구름은 말을 내뱉는 동시에 한 줄기 바람이 되어 토굴 사이를 미친 듯이 이동했다.
그러던 그녀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길을 살짝 돌아가 입김을 내뱉어 뭉쳐진 기운을 자신의 거처 쪽으로 집어 던졌다.
그리고는 다시 3번 공동이 있는 곳으로 치달렸다.
그녀의 머릿속엔 마지막 귀령의 폭주로 죽어 나간 완영기 한 명과 원영기 다섯 명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잃을 순 없어!”
으드득-
+++
매혹하는구름이 3번 공동에 도착했을 땐 이미 전투가 벌어진 후였다.
공동 중앙엔 시커먼 기운을 뒤집어쓴 사람 모양의 귀령이 얼굴의 절반을 차지한 입에서 새까만 침 같은 것을 질질 흘리며 양손을 번갈아 휘두르고 있었다.
아주 가볍게 술 취한 사람이 휘청거리는 것처럼 목표도 없고 힘도 없어 보였지만, 귀령의 손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양쪽에서 공동 입구를 막고 있던 완영기 수사 두 명은 번갈아 가며 뒤로 날아갔고, 한번 충격이 있을 때마다 입가로 피를 내비쳤다.
“빌어먹을···. 너무 강해. 어찌 폭주로 인해 의식도 없는 것이 이리도 강해질 수 있단 말인가!”
또 한 번 귀령의 공격을 막던 호왕족 완영기 수사는 피를 울컥 뱉어내고는 뒤를 향해 소리쳤다.
“아직이더냐?! 최대한 빨리 알리라고···.”
“왔으니 물러나, 회복에 전념해.”
줄무늬 호랑이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 매혹하는구름은 두 명의 완영기 수사를 지나치더니 공동 중앙의 귀령에게 달려들며 입김을 내뱉었다.
그러자 그녀의 몸이 바람처럼 흩어지더니 귀령을 중심으로 거대한 호랑이 발톱이 환영처럼 나타나 할퀴었다.
스가아악-
쾅-
하지만 귀령은 이지가 없는 상태임에도 가볍게 발톱을 피하고는, 사각에서 파고든 발톱은 손을 뻗어 막아버렸다.
매혹하는구름은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반발력에 뒤로 튕겨 나온 후 겨우 자세를 잡았다.
이미 여러 번 경험해 본 적이 있던 연형기급 귀령.
그것이 나타날 때마다 호왕족의 수가 줄어들었기에 이번엔 누구도 전투에 참여하지 못 하게 할 생각이었다.
“들꽃과 뇌우! 너희들은 절대 끼어들지 말아! 이번엔 나 혼자 상대한다!”
“안 됩니다! 다 같이 해도 어찌 될지 모르거늘 혼자선 절대!”
매혹하는구름은 후배들에게 말을 마친 직후 입김을 내뱉었고, 잠시 후 그녀의 주위로 허공이 일그러지며 뇌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콰쾅-
그녀를 향해 뇌전이 떨어져 내렸다.
“안 됩니다! 어르신도 위험합니다!!”
“저희도 돕겠습니다!!”
다른 수사들의 걱정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매혹하는구름은 떨어지는 뇌전을 가볍게 쳐내더니 귀령을 보며 싸늘하게 웃어 보였다.
“한번 해보자고. 이 악령 덩어리야.”
쾅-
말을 마친 매혹하는구름은 하얀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고, 그 순간 귀령이 무언가에 받히며 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귀령에게 첫 공격을 선사한 그녀는 연신 입김을 내뱉으며 양손을 현란하게 휘둘렀다.
그러자 그녀의 손짓에 따라 1m는 넘을 것 같은 발톱 무더기들이 생성되며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쏟아져 귀령의 몸을 파고들었다.
푹퍽- 푸퍼퍽-
그녀가 절제술을 해제하고 연형기 수행을 되찾자 귀령 따위는 손안에든 장난감이라도 된 듯 간단하게 무력화됐다.
하지만 그녀는 안도하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쉬지 않고 계속해서 각종 술법을 때려 박았다.
“이제 슬슬···.”
그때 그녀의 공간 주위가 마치 고장 난 화면처럼 어긋나더니 엄청난 영기가 뭉쳐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동시에.
쿠아앙! 번쩍-
사람 몸통만 한 뇌전이 매혹하는구름을 단번에 녹여버릴 듯 쇄도했다.
연형기로 복귀하자마자 떨어져 내리던 뇌전들을 손쉽게 처리하던 그녀는 이번엔 귀령을 공격하던 걸 멈추고는 잔뜩 긴장한 채로 입김을 내뱉어 두꺼운 보호막을 만들어냈다.
그리고는 뇌전에 강타당한 순간.
쾅!
귀령처럼 속절없이 날아가더니 벽면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랬다.
계면의 압박.
그것은 그저 간지러운 뇌전을 쏘아 보내 수도자를 위협하는 것이 아닌, 수사가 움직이는 영기에 비례해 강도 높은 뇌겁을 내려 상대를 죽이려고 하는 것.
매혹하는구름이 사용하는 기운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녀가 받아내야 하는 계면의 압박은 제곱으로 강해지는 것이었다.
“으···. 역시 안 되려나···.”
매혹하는구름은 계면의 압박이 들어오기 전 귀령의 폭주하는 기운을 최대한 흩어버리려고 했다.
그리고는 한두 번의 뇌겁을 받아낸 후 완영기로 돌아가 안전하게 처리하려던 계획.
하지만 막상 실행하고 나니 자신의 판단에 얼마나 큰 착오가 있었는지 깨닫는 계기가 될 뿐이었다.
그때 벽에 박혀있던 그녀가 움직이기도 전.
또 한 번 그녀 주위 공간이 비틀렸고, 그곳에서 뇌전이 떨어져 나왔다.
쿠아앙! 번쩍-
너무나 빠르게 재생성된 뇌전에 매혹하는구름은 풍둔술을 사용해 피했으나, 모든 걸 태워버릴 듯한 뇌기를 완전히 와해하지 못하고는 한참 떨어진 곳에 나타난 후 비틀거렸다.
“이런···.”
그때 귓가로 기다리던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해결할 테니 선배님은 몸을 추스르십시오!”
+++
매혹하는구름이 남긴 목소리를 따라 이동한 준혁은 강렬한 기운을 느끼며 풍둔술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공동 입구까지 이동한 후 난처한 듯 헐떡이는 여인을 지나치며 혈맥의 힘을 끌어올렸다.
동시에 백호가 마지막에 전해준 귀기를 억누르는 힘까지 합치자.
쾅!!
벽에 처박혀 있다 겨우 몸을 일으키던 귀령은 몸이 기역자로 꺾이며 다시 벽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벽에 박힌 귀령의 몸 위로 하얀 서리가 내려앉으며 온몸을 굳게 만들었고, 파인 벽의 흙들이 물컹물컹하게 변하며 귀령의 몸을 옥죄기 시작했다.
귀령의 상태를 확인하며 살짝 곁눈질하자, 매혹하는구름은 절제술을 이용해 완영기로 돌아오며 계면의 압박에서 자유를 되찾고 있었다.
“후···. 와줘서 고마워.”
“그분과 약속을 했으니 당연합니다. 제가 저자를 약화시킬테니 선배님께서 마무리해주시겠습니까?”
여인이 그러겠다고 답하자, 준혁은 빠르게 입김을 내뱉고는 머리 위로 하얀 기운을 뭉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땅을 강하게 밟으며 영력을 방출했다.
파앙-
준혁을 중심으로 하얀빛이 거미줄처럼 번져나가다 먹이를 찾는 것처럼 귀령이 박힌 벽으로 몰려갔다.
그 모습에 토율서의 능력으로 불러낸 흙더미를 해제시키며 입을 벌려 분광소를 날려 보냈다. 어느새 분광소는 흰빛에 휩싸여 하나의 빛 뭉치처럼 보였다.
“끼엑!”
벽에 처박혀 있던 귀령은 준혁의 공격에 그다지 충격을 받지 않은 건지, 괴이한 괴성을 질러내 월광지력의 한기를 날려버리고는 자신을 구속하던 흙더미를 땅에서 뜯어내 버렸다.
흙더미가 사라지며 완전히 구속에서 풀려나자 준혁에게 쏘아져 나가려다가 하얀빛의 거미줄에 칭칭 감기더니 또 한 번 괴성을 질렀다.
“끼엑!”
그 순간 분광소가 하얗게 빛을 내며 귀령의 이마를 꿰뚫어 버렸다.
+++
일련의 과정이 순식간에 지나가며 귀령이 죽은 듯이 추욱 처지자, 준혁이 가진 힘이 무엇인지 모르는 두 명의 완영기 수사는 넋을 놓고 말았다.
“원영기 수사라 알고 있거늘···. 어찌···.”
“역시 백호족은 백호족이란 말인가.”
하지만 두 사람의 평가완 다르게 준혁은 귀령이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는걸 알고 있었다.
백호가 전해준 힘은 귀기를 정화할 순 있었지만, 준혁의 수행으로 연형기급 강자를 단숨에 제압할 정도까진 아니었으니까.
그랬기에 준혁은 재차 입김을 내뱉었다.
순간 주위 온도가 급하강하더니, 준혁의 발아래로 얼음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눈 깜작할 사이에 얼음꽃이 점점 커지다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고, 어느새 활짝 핀 백합처럼 변하자 준혁이 앞발을 크게 구르며 소리쳤다.
“크아아앙!”
그 순간 하얀 거미줄에 걸린 귀령이 움찔했고, 그 위를 백합처럼 변한 얼음꽃들이 칼날처럼 변해 쇄도했다.
‘역시 혈맥 신통에 힘을 섞으니 효과가 있구나.’
원래라면 연형기인 상대에게 안 통하는 게 정상이었지만, 귀기를 억누르는 힘 덕에 디버프가 먹혀들어 간 것,
하지만 준혁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입을 벌려 족자 두 개를 뱉어냈다.
그리고는 족자를 향해 입김을 내뱉자. 두 개의 족자에서 각각 인자하게 생긴 하얀 수염의 백호와 흉포하게 생긴 눈이 찢어진 백호가 나타나더니.
한 마리는 ‘크아앙!’ 하며 신통을 펼친 후 달려 나갔고, 다른 한 마리는 입을 크게 벌리며 입안에 푸른 기운을 잔뜩 머금은 채 귀령을 향해 뛰어들었다.
잠시 후.
“선배님!”
아무리 연형기 급이라고는 하지만, 백호 종족이라는 상성과 혈맥의 힘, 거기에 정화의 기운, 두 마리 백호족 전사의 환영 공격까지 더해지자, 귀령의 폭주 기운은 빠르게 해소되었다.
준혁이 상대를 가늠해보니 충분히 소멸시킬 수 있을 것 같았으나, 굳이 힘을 전부 드러낼 필요는 없기에 빠르게 매혹하는구름을 불렀다.
준혁의 부름에 그녀는 귀령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란 걸 파악하고는 입김을 불어 발톱을 소환했다.
그 모습에 두 명의 완영기 수사도 눈치껏 각각 공격에 나서자, 결국 귀령은 점차 약해지더니 검은 핵만을 남기고는 소멸해 버렸다.
“아쉽네.”
매혹하는구름은 귀령이 완전히 소멸한 후, 그 핵마저 점차 먼지처럼 흩어지자 입맛을 다시고는 준혁과 눈을 마주쳤다.
“고마워. 덕분에 처음으로 희생 없이 지나갔어.”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그분과 약속을 했으니까요. 그리고 우리가 남은 아니지 않습니까?”
준혁의 거듭된 겸양에 매혹하는구름과 두 완영기 수사는 무엇이 좋은지 입가를 끌어올리며 웃음 지었다.
사실 아무리 약속이니 신의니 하더라도, 목숨을 걸어야 할 일에 발 벗고 나서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두 완영기 수사도 그랬지만,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매혹하는구름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그리고는 준혁이 한 번 더 겸양을 표하려 할 때,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나중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 들어줄 수 있는 건 모두 들어줄게.”
준혁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오늘 몇 명의 희생이 나왔을지 모르는 일. 매혹하는구름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러자 준혁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럼. 한가지 부탁드릴 일이 있는데···. 이런 말을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뭔데 그래? 말해봐?, 난 빈말 하지 않으니까.”
매혹하는구름이 재차 말해보라며 촉구하자 준혁이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후방에 있는 인족 놈들 두 명. 제게 주실 수 있으십니까?”
“인족? 왜?”
“인족들의 법기를 다루는 기술에 오래전부터 흥미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준혁의 말에 매혹하는구름이 아! 하는 표정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사용하는 술법들이 조금 독특하다 느꼈는데, 그런 이유 때문이었구나? 좋아. 그깟 도움도 안 되는 인족 놈들, 마음대로 해. 대신 나머지 구역을 봉쇄해준다는 약속을 지킨다면.”
준혁이 기분 좋게 고개를 움직였다.
“물론입니다.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