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백호 (3) >
눈앞의 광망이 사라졌다고 느낀 순간, 준혁은 자신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어딜 다녀온···? 너!”
준혁은 여인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손을 내밀어 기다리라는 듯 행동을 취했다.
그리고는 어지러움이 가시길 기다렸다가, 여인을 직시했다.
여인은 처음의 반가움은 날려버린 듯 의심 가득한 눈으로 준혁을 보고 있었다.
‘아! 내 모습이.’
백호를 만나고 있는 동안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갔었는데, 그 모습 그대로 돌아오니 여인의 눈초리가 매섭게 변한 듯했다.
다른 호왕족들이야 호랑이 모습을 하나 인간의 모습을 하나 똑같은 기운을 내뿜었을 테지만, 준혁은 그 어떤 기운도 내뿜지를 않았으니, 백호의 모습조차 하지 않은 상태면 이게 인족인지 호족인지 판단을 할 수 없는 것.
준혁은 여인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 백호 혈맥의 힘을 은은히 발산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여인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 내가 착각했나 보군. 사라지기 전까지만 해도 호족의 모습을 유지하길래 너도 신통을 유지하기 위함인 줄 알았지. 그건 됐고. 갑자기 어디로 사라진 거지? 설마 봉인지 안으로 들어간 거야?”
‘신통? 다른 원영기 수사들이 호족의 모습을 유지하는 게 신통 때문이었나?’
예전 목족의 봉인지에서 천균에게 배움을 받을 당시 들은 내용이 떠올랐다.
목족 역시 인간과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목족 특유의 신통을 사용하기 위해선 신체 일부는 예전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었던 것.
준혁은 의문이 하나 풀리는 걸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분을 만나고 왔습니다.”
“만나?!!”
여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한참 동안 그렇게 넋을 놓고 있다가 성큼 다가와 준혁의 양어깨를 잡았다. 하지만 준혁의 눈초리가 변하자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손을 놓고 한걸음 물러났다.
“아 미안. 너무 놀라서. 그분께선 스스로를 희생해 봉인 결계를 만들었다고 배우며 자랐었다. 그런데···. 의식이 남아있으시다고?”
“네. 네 분이 결계를 만드실 때···.”
준혁은 네 종족의 수장이 구지대륙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며, 다음을 기약하기 위해 결계를 만들었다는 걸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환희에 찬 듯한 여인을 보며 한 손을 앞으로 내밀며 영력을 움직였다.
그러자 준혁의 손끝으로 하얀 기운이 뭉쳤다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분께서 이 힘을 주시며 호왕족의 안녕을 도모하라 하셨습니다.”
그 순간 준혁 주위 일정 공간의 귀기가 정화되듯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여인의 얼굴에서 놀라움이 지워지지 않는 건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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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막혀있는 어두컴컴한 공간.
준혁은 백호가 마지막에 전해준 힘을 살짝 보여준 후, 개미집처럼 얽혀있는 봉인구역의 중심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백호로부터 힘을 전해 받긴 했으나, 시간이 부족해 제대로 다루는 방법은 전해 듣질 못했으니 정비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기나긴 세월 동안 귀령과 싸워왔던 여인은 그것들을 완전히 퇴치할 수만 있다면 수련하는 게 문제겠냐며 준혁을 가장 좋은 거처. 자신이 머물던 곳으로 안내했다.
혼자가 되자 공간대를 뱉어낸 준혁은 그 안에서 진법 깃발들을 꺼내 주변을 완벽하게 막았다.
“불편하긴 하구나.”
인간의 모습을 한다고 해도, 백호 기운을 은은하게 뿜어내주면 인족으로 오해받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와 같이 있는 시간 동안 계속 일정 기운을 내뿜으며 신경을 쓰는 게 편하진 않았다.
쓰게 웃은 준혁은 상념을 날려버리고는 내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우선은 귀기를 억누르는 힘보단 백호가 전해준 혈맥의 힘을 파악하는 게 먼저.
잠시 후 준혁이 눈을 감고 집중하자, 그의 정수리에서 가부좌를 한 채 눈을 감은 원영이 천천히 솟아올랐다.
그리고는 바람을 타고 움직이듯 준혁의 가슴 앞으로 이동하더니 갑자기 두 손을 모으며 합장했다.
우우웅-
그 순간. 원영의 등 뒤에 새겨진 백호 문신에서 강렬한 파동이 전해오며 준혁의 몸을 일깨웠다.
파앗-
그리고 파동이 사라진 순간 준혁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어두운 공간, 준혁의 본체가 사라진 후 혼자남은 원영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합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때 원영 주위로 뇌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쿠릉- 쿠쾅쾅-
동시에 거처에 광풍이 몰아치더니 사방이 무언가로 할퀴듯 터져나갔다.
그것은 마치 바람의 신이 한바탕 춤사위를 벌이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요란한 굉음이 사라지고 나서야 바람이 잦아들며 평화가 찾아왔다.
다행히 진법으로 보호했기에 토굴이 무너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바람이 완전히 멈추자 준혁이 어느새 원영 앞에 나타나 입가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입가엔 만족이 잔뜩 걸려있었다.
“이것이 진짜 풍둔술이구나. 아니, 순수한 풍력이라 해야 하나?”
그동안 사용한 풍둔술은 그저 장거리를 빠르게 날아가는 이동 수단일 뿐이었다.
하지만 백호 혈맥의 힘을 제대로 사용하자, 풍둔술은 이동 수단임과 동시에 공격수단이 되어있었다.
진법으로 보호조치를 해놓았다고는 하나 좁은 토굴 안이라 힘을 최대한 억눌렀다. 그럼에도 그 위력이 심상치 않았다.
“아! 자비에가 말한···. 풍뢰···.”
그리고 백호 혈맥의 진짜 힘을 느끼고 나서야 자비에가 말했던, 바람을 타고 뇌성을 부른다는 혈맥의 힘이 무엇인지 온전히 깨닫게 되었다.
만약 일정 공간 안에서 제약이 있는 상태로 누군가와 겨루게 된다면 풍둔술은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할 게 틀림없었다.
준혁은 흥분감을 가라앉힌 채 입가에 미소를 지우고 원영을 몸 안으로 돌려보낸 후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맛은 보았으니 이제 제대로 수련을 해볼 생각.
물론 울릉도로 돌아가야 하니 오랜 시간은 허비할 수 없었지만, 최소한 혈맥의 힘을 겉핥기식이라도 파악해놓을 작정이었다.
+++
준혁이 머무는 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좁고 퀴퀴한 토굴.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리더니 검은 인영이 힘겹게 걸어와 토굴 한쪽에 놓인 흙 침대에 몸을 던졌다.
“빌어먹을, 오늘따라 유난하구나.”
토굴 안에 욕설이 퍼져나갈 때, 또 다른 이가 천천히 들어서며 안을 살폈다.
“스승님. 괜찮으신가요?”
흙 침대에 누워있던 사내는 귀찮은 듯 뒤척이다가 몸을 일으켰다.
“걱정말거라.”
“아까 귀령에게 크게 당···. 밀리시는 걸 보았습니다. 제가 그놈들에게 가서 활율단(活栗丹)이라도 구해 올까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사내, 도율은 제자의 걱정스러운 말에 쓰게 웃음을 짓다가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노예 취급도 받지 못하는 우리에게 활율단을 주겠느냐? 예전엔 죽기 직전이었으니 그 귀한 것을 내준 것이지.”
“......”
도율의 말에 그의 첫 번째 제자이자 평생을 아들처럼 따랐던 김석환이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마주 보고 있으니 스승의 모습도 나이가 들어 병이 든 것처럼 초췌했다.
하지만 노화가 아닌 귀기에 침식당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스승님···.”
“내 걱정보다는 네가 더 걱정이다. 이 못된 호족 놈들에게 잡혀 수행도 올리지 못하고···. 어찌 스승으로서 면목이 없구나.”
“그런 말씀 마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대답하는 제자가 괜찮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 도율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곳 봉인구역은 영기와 귀기가 뒤섞여있어 수행을 올리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호족 놈들은 귀령을 잡아먹고 조금씩이라도 수행을 올리는 듯싶었지만, 인간인 두 사람은 불가능한 일.
도율 자신이야 아직 수명이 많이 남았기에 상관없었으나, 제자인 김석환은 결단기에 머문 상태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거기다 결단기의 몸으로 귀기에 침식당하다 보니 살날은 더욱 줄어들고 있었다.
“휴···. 못난 스승의 욕심 때문에···. 너에게 이리 큰 짐을 지게 만들고.”
도율은 고대 유적에서 바람을 다루는 특수한 공법을 얻은 뒤, 그곳에 숨겨져 있던 단약과 비술을 얻어 손쉽게 원영기에 오른 경우였다.
다만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인지, 원영기에 오른 후에도 생각보다 압도적인 실력을 갖추진 못했었다.
그러다 자신이 발견한 고대 유적에서 고대 수사의 무덤으로 의심되는 장소가 적힌 지도를 발견할 수 있었고, 그것을 파헤치다가 결국 이곳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처음 고대 수사의 흔적을 찾았을 때만 해도 자신뿐만 아니라 아들 같은 제자까지 엄청난 실력향상을 도모할 수 있을지 알았지만, 현실은 무덤을 지키던 호족들에게 잡혀 노예 신세로 전락하고 만 것.
“아닙니다. 아니에요. 평생 저를 돌봐주셨는데···. 당연히 해야 할 도리입니다.”
조금은 약은 자신과 달리, 세상 누구보다 착한 첫째 제자의 말에 도율은 마음에 한줄기 훈풍이 부는 걸 느꼈다.
‘그래···. 이런 너의 모습에 만학이나 라온 이를 마음에 담지 못했지.’
설악산에 있을 제자들을 떠올린 도율은 씁쓸한 표정을 짓다가, 제자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이리 눕거라.”
스승의 부름에 잠시 머뭇거리던 김석환이 흙 침대에 누웠다.
“스승님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무리는. 이 정도는 거뜬하니 네 걱정이나 하여라.”
도율은 양손에 영력을 뭉치며 김석환의 몸을 천천히 주무르기 시작했다.
영력을 뭉친 손으로 제자의 몸속에 침투한 귀기를 강제로 몰아내는 일.
그것이 그나마 김석환이 그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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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남은 것마저 흡수한다면···. 혈맥의 힘은 또 한 번 변화를 거듭하겠구나.’
3주간 수련을 마친 준혁의 결론이었다.
혈맥의 힘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난 후부터, 공간대에 따로 담아둔, 청호를 위해 남겨둔 털 뭉치가 계속해서 준혁을 자극했다.
-내가 더 강력해, 나를 흡수하고 온전한 힘을 깨닫는다면 진정한 풍신(風神)이 될 수 있어.
마치 악마의 유혹처럼 자신을 먹어달라며.
‘흐음···. 이것이 심마인가.’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지만, 계속해서 스스로가 스스로를 설득하며 괜찮다고 부추기고 있었다.
-청호는 화목단으로 충분해. 3품 화목단만 있어도 원영기엔 충분한데. 1품 화목단까지 챙겨줄 테니 금세 완영기에도 오를 거야.
마치 귓가에 누군가 소곤대는 것처럼, 계속해서 공간대 속 털 뭉치는 혈맥의 기운을 풍기며 준혁을 자극했다.
“안될 말!”
좌정한 채 있던 준혁은 피가 나게 입술을 깨물고는 허공에 손을 털어냈다.
그러자 공간대에서 목함 하나가 튀어나와 스스로 열렸고, 잠시 후엔 털 뭉치가 그 안으로 쏘옥 들어갔다.
텅 뭉치가 목함 안에 들어가자 준혁은 빠르게 수결을 맺은 후 목함을 가리켰고, 목함 주위로 금실이 칭칭 감기더니 그 위로 부적이 날아와 덕지덕지 붙어버렸다.
직후 준혁이 재차 수결을 맺자 하얀 보호막이 목함 전체를 가려버렸고, 그 후엔 그 위로 서리가 끼더니 하나의 얼음덩어리로 만들어 버렸다.
준혁이 손가락을 까딱 움직이자, 얼음에 싸인 목함은 공간대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흐음.”
털 뭉치의 기운이 완벽하게 세상과 차단당하자, 왠지 욕심도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잠시 후. 크게 숨을 내쉬어 호흡을 가다듬고 심신을 안정시킨 준혁은 수결을 맺어 호랑이로 변한 후 공간대를 집어삼켰다.
아무리 수행에 도움이 된다 해도 남의 것에 손대는 일은 자신의 신념을 저버리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것이 아끼는 수하의 것이라면 더더욱.
“겨우 이런 일로 흔들리다니. 내 마음가짐이 아직도 부족하구나.”
하지만 준혁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것.
이건 심마가 아닌, 백호가 심어둔 금제가 준혁이 인식하지도 못하게 그를 자극한 것이었다.
그때 거처에 둘러놓은 진법으로 무언가가 강하게 자극하는게 느껴졌다.
준혁이 잠깐 눈살을 찌푸리다 손을 저어 진법을 해제하자 벼락같은 전음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수사! 수련 중 방해해 미안한데, 완영기급 귀령이 폭주하기 시작했어! 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큰 희생이 따를 수도 있어! 당장 나와줄 수 있겠어?
연형기인 그녀와의 수행 차이를 생각한다면 명령을 내려도 될법해 보였지만, 그녀는 반말을 툭툭 내뱉긴 해도 준혁을 백호족 전사로 우대해 주는 게 보였다.
준혁은 전음을 듣자마자 진법 깃발을 회수한 후 흐릿하게 변하더니 바람이 되어 거처를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