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화. 백호 (2) >
백호의 말에 준혁은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훽하고 돌렸다.
“설마. 사신 혈맥의 힘을 전부 손에 넣으면 선계로 갈 수 있단 말입니까?”
지구에 나타난 그 어떤 비경에서도, 그 어떤 고서에도 선계로 가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당연하게도 구지대륙은 애초에 선계의 일부였었기에, 그에 관한 자료가 남아있을 수가 없는 것.
준혁의 물음에 백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렇겠느냐? 우리가 이곳을 분리하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데. 다만 내가 잠들기 전 천제단을 만들었다는 얘길 들은 기억이 있다. 대륙 어딘가에 있겠지.”
“천제단이 무엇···. 아니 그전에···. 제가 선계로 가고 싶단 걸 어떻게...?”
백호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심장으로 쏘아 보냈던 기운.
유형화된 기감처럼 자신의 상태를 파악한다고 여겼거늘, 술법으로 기억을 읽어버린 것 같았다.
‘정신부!!’
정신부 역시 술법을 부적에 담아놓은 것. 준혁은 자신이 감지하지도 못한 사이 정신부에 당한 것처럼 기억을 모조리 읽히고 말았다는 걸 깨달았다.
“설마? 제 기억을 전부.”
준혁이 물음을 끝내기도 전, 백호가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제 알았더냐? 이곳은 내 영역이자 나의 심상 세계. 네놈이 이 안에서 무언가를 감출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네놈 머릿속이야 훤히 보이지.”
백호의 말에 준혁은 그와의 대화가 잔상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그를 기만하거나 거짓을 말하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어쩌면 생각보다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맞다. 네가 그분의 후인일지라도, 버러지 같은 놈이었다면 그냥 죽여버렸겠지. 네놈 따위야 수많은 후인 중 한 명일 뿐이니까.”
사실은 청호를 아끼고 보살핀 기억들이 더 후한 점수를 받았다는 걸 준혁은 모르고 있었다.
준혁은 자기 생각이 실시간으로 읽히자,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는 차분한 마음으로 조금 전의 대화를 이어갔다.
어차피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면, 솔직하게 모든 걸 내려놓고 최대한 많은 이득을 얻는 것이 나았으니까.
“천제단이 무엇입니까? 저는 처음 들어봅니다.”
준혁의 질문에 백호가 처음으로 입가를 씰룩거렸다.
마치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는 듯이.
“호오, 이런 태도는 예상 못 했는데. 재밌는 놈이긴 하군. 천제단이란 하계로 이동하기 위한 임의적인 통로다. 그곳을 통한다면 선계에 이어져 있는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을 터. 그곳에서 정식 절차를 밟아 선계로 올라가면 되느니라.”
준혁은 생각지도 못한 방법에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쉽게 갈 수 있다고?’
“쉬운 게 아니다.”
백호가 생각을 읽을 수 있단 사실을 재차 깨달은 준혁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입을 열었다.
“알려주신다면 깊이 새기겠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선계에서 하계로 가기 위한 통로이기에 몇 가지 조건만 갖추었다면 문제없었겠지만, 지금은 같은 하계인지라 이동 중에 생기는 공간 압박을 맨몸으로 버텨야 할 것이다.”
“공간 압박이라···.”
처음 목족의 봉인지를 강제로 뚫을 때가 떠올랐다.
“그깟 진법으로 만들어진 공간의 틈 따위와는 비교를 말거라.”
백호는 준혁의 생각을 읽고는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또한 천제단을 찾고 준비가 되었다 한들. 우리 사신이 동시에 길을 열어주지 않으면 안 되지.”
준혁은 원영 등 뒤의 문신을 떠올렸다.
“그래서 모든 이들의 힘을 모으시라 하신 겁니까?”
“그래. 최소한 그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어야, 봉인지에 갇힌 우리가 반응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자신 없다는 듯, 백호의 목소리는 마지막에 조금 작아져 있었다.
“감히 묻습니다. 혹여나···. 사신들께서는 훗날 선계로 갈 것을 염두에 두고 구지대륙을 봉인하려 하신 겁니까?”
“아주 멍청한 것은 아니구나. 그래. 우리는 지켜야 할 것이 있었기에 이런 선택을 한 것일 뿐. 언젠간 이 치욕을 갚아야겠지.”
백호의 말에 준혁은 자신에게 혈맥의 힘도 나눠주고 어디 가서도 들을 수 없는 정보를 순순히 알려준 이유를 깨달았다.
“제가 선계에 올라 이곳으로 통로를 열길 바라시는 것입니까?”
준혁의 입에서 원하던 바가 나왔는지, 백호의 입가가 쭈욱 늘어졌다.
그의 하얀 머리칼이 유난히 반짝이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래. 그렇기에 조금 전 내 힘을 준 것이다.”
웃으며 대답하는 백호를 보며 준혁은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 금제를 걸어두셨군요.”
“그래. 왜? 후회되느냐?”
대화를 진행하고 나서야 준혁은 자신이 가진 의문이 다 해결되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혈맥의 힘을 이었다고 한들, 종족의 후예를 살뜰히 보살폈다고 한들.
청혈 한 방울만으로도 백호 혈맥의 힘을 사용해 풍둔술과 사자후 신통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 혈맥의 힘을 과할 정도로 자신에게 준 것에 무슨 꿍꿍이가 있다고 여겼는데, 이제야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차라리 잘된 것인가.’
준혁은 오고 가는 이득이 있다면 오히려 안전하다고 여기며, 마음 한편이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아닙니다. 어차피 네 분의 힘을 얻지 못한다면 선계로 갈 수도 없는 것. 저는 꼭 가야 할 이유가 있으니 오히려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준혁은 백호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의 태도에서 묻어나는 진심 때문이었을까.
백호가 흐뭇하게 웃더니 입김을 후 불어 준혁의 자세를 바로 하게 만들었다.
“그래. 좋게 생각하려무나.”
백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준혁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한 가지 더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를 보고 그분의 후인이라 하시던데···. 그분이 누군지 알 수 있겠습니까?”
준혁의 질문에 백호는 말해줄까? 말까? 하는 듯 장난스러운 표정을 하다가 입술을 부딪쳐 씁 하는 소리는 냈다.
“굳이 알아봐야 네놈이 수행을 올리는 데 방해만 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
“그게 무슨···.”
정체를 아는 것이 수행에 방해가 된다니? 오히려 그분이라는 사람의 수행과 특징을 본받으면 자신에게 적합한 수련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심지어 심영근이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영근을 가지고 있다 했으니, 그것에 대한 정체만 알아내도 크게 도움이 될 건 분명했다.
그러다 문득 준혁의 뇌리로 오래전 들었던 한 수사의 얘기가 떠올랐다.
그자는 결단기 스승을 둔 축기기 수사였는데, 스승이 사용하던 뇌전술이라는 술법을 따라 하려다 뇌전의 과부하를 이겨내지 못하고 심장이 타버려 수련 중 죽었다고 했었다.
뇌전술 자체가 결단기에는 이르러야 사용 가능한 것이었는데, 스승이 사용하는 뇌전술에 매료되어 스승이 없을 때 몰래 익혔었다고 했다.
‘아, 그런 이유인가?’
속으로 이유를 찾고 있자, 백호의 목소리가 생각에 빠진 준혁을 깨웠다.
“비슷한 이유다.”
‘...이걸 편하다고 해야 하나···.’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놈은 네 녀석뿐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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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도 준혁은 영역에 관한 것, 술법에 관한 것. 혈단법과 월광지력까지, 사소한 의문이라도 품고 있었던 것에 대해 쏟아내듯 질문했다.
거래를 목적으로 이루어진 관계이긴 하나, 자신의 모든 것을 낱낱이 알고 있는 만큼 거리낌이 없었다.
하지만 영역은 시기상조라며 거부당했고, 술법은 잡스럽다고 무시당했다. 그나마 혈단법은 진혈단신공이라는 공법에서 파생된 것 같으니 그것을 찾아보라는 말을 들었다.
또한 월광지력은 성광지력과 함께 극음을 대표하는 기운이라 모든 이들이 탐내는 것 중 하나라는 말도 했다.
그리고 선계에선 그 힘을 얻고자 달려드는 이들이 많을 테니 조심하라는 경고도 함께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렇게 질문의 시간이 지나자, 백호는 시간이 되었다는 듯 준혁을 데리고 초가집을 나섰다.
인족의 모습을 한 채 유유자적 걸음을 옮기는 백호를 보며 준혁은 문득, 봉인지에서 만난 호왕족의 원영기 수사들을 떠올렸다.
인간의 모습을 한자와 영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자.
그것에 대한 의문을 떠올리다가 앞서 걷던 백호를 불렀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남았습니다.”
“내가 네 스승이라도 되느냐? 궁금한 것도 많으니···. 그래 말해보거라.”
허락이 떨어지자, 왜 호왕족이 억지로 영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지에 대해 물으려던 준혁은 갑작스레 떠오른 생각에 질문을 바꿨다.
원래 질문보다 더 근원적인 물음이었다.
“왜 영수족이나 목족 등. 다른 종족들은 수행이 올라갈수록 인족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입니까?”
물론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이 그랬다.
종족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날개나, 꼬리. 귀 같은 특정 부위를 남겨놓는 예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수행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인간과 외형이 똑같이 변해갔다.
준혁의 물음에 백호가 몸을 돌리며 코웃음을 쳤다.
“뭐라? 참으로 인족다운 생각이구나.”
“경청하겠습니다.”
“인족 역시 누군가를 닮기 위해 변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더냐?”
“!!”
생각지도 못한 발상에 준혁이 놀란 사이.
“태초에 세상을 다스리던 이들은 거신족과 천신족 두 무리뿐이었다. 우리 백호족이나 네놈이 속한 인족이나···. 그들에게서 발원한 미세한 것들에 불과하지.”
“설마···.”
“그래. 우리 모두는 우리의 근원이나 다름없는 그들을 닮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 염원이 수행이 올라가며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지.”
“아!”
“시간이 된다면 한번 그들에 대해 알아보거라. 자료를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자료를 구할 수 없다는 듯 말하자, 준혁은 거듭 질문을 하려 했다. 하지만 백호는 손을 저으며 거부 의사를 표했다.
그리고는 다시 등을 돌리더니 걸음을 옮겼다.
‘천신족 거신족 이라···. 왠지 알아보아야 할 것 같구나.’
알 수 없는 묘한 이끌림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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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주변이 다시 붉은 공간으로 바뀌자, 백호는 입을 벌려 조그마한 구슬을 뱉어내더니 준혁을 향해 쏘아 보냈다.
준혁이 구슬을 받아들자, 백호는 입김을 후우~ 불었고, 구슬이 펑 터지며 연기로 변해 준혁에게 흡수됐다.
“이건 선물 겸 부탁이다. 네 기억을 보니 내 후인들이 귀령으로 고통받고 있더구나. 그깟 귀령들 따위에 힘겨워하다니 쯧. 조금 전 그 힘을 사용하면 네 수행에 맞는 것들은 전부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백호의 설명에 준혁은 조금 전 흡수된 기운을 느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판별할 수는 없지만, 귀기를 억압하는 힘이 느껴졌다.
백호의 말대로 호왕족을 도울 힘임과 동시에 준혁에게도 큰 도움이 될 힘이었다.
“꼭 이행하겠습니다.”
“그래. 네 성품을 알고 있으니 믿고 보내도록 하마. 네 종족의 힘을 얻고 난다면 다시 한번 들리도록 하거라.”
“예.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작별 인사가 끝나자 백호는 마지막 당부를 건넸다.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리 기꺼운 사이는 아니었으니, 화합을 끌어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야.”
‘네 종족이 합심해서 구지대륙을 봉인한 것이 아니었나?’
백호의 말에 준혁은 의문을 풀기 위해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질문을 꺼내기도 전.
백호가 그만 가라는 듯 손을 휙 젓자, 주변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일그러지던 공간이 순식간에 준혁을 집어삼켜 버렸다.
스악-
“갔군.”
준혁이 사라지자 백호는 무언가 아쉬운 듯 제자리에 미동도 없이 서 있다가, 한참 후에야 천천히 몸을 돌려 초가집이 있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붉은 공간뿐이었던 곳이 준혁이 떠나고 나자 점점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사실 준혁을 보호하기 위해 백호가 무리를 하고 있었던 것.
마음 같아서는 몇 년이고 몇십 년이고 수련을 도와주고 싶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주인님. 당신의 후인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미약하게나마 당신의 향기를 가지고 있더군요···. 그리웠습니다.”
으득-
감상에 젖으며 걸어가던 백호가 갑자기 이를 악물었다.
“당신을 그렇게 만든 거인 놈들···.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이 갈리는 소리를 내던 백호는 고개를 돌려 준혁이 사라진 방향을 시선에 담았다.
“저 아이가 저희의 염원을 풀어줄 것입니다. 가장 성질이 더럽던 청룡 그놈도···. 설마 자기 후인이 찾아가는 데 도움을 주지 않을순 없을 테니까요.”
백호는 준혁이 영수대에 꼭꼭 숨겨두었던 생명체를 떠올렸다.
이미 운명의 이끌림처럼 인족 꼬마놈은 사신과 진하게 얽혀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 예상이 맞다면···. 아마 그것은 그녀를 봉인한 곳의 열쇠겠지.”
인족 꼬마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물건.
그것에서마저 인연의 끈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