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호왕족 (3) >
여인은 붉은 머리를 찰랑거리며 준혁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느새 말을 꺼내려던 두 원영기 수사도 두 걸음 물러나 공손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
“이 느낌은 진짜야···. 어떻게 이곳에 왔다고?”
성큼 다가오며 내려다보는 시선에 준혁은 원영기 수사들에게 했던 설명을 반복했다.
그 말에 붉은 머리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몸을 돌렸다.
“가자, 내가 안내하지.”
팟-
말을 내뱉기가 무섭게 땅을 박차며 허공으로 치솟는 여인을 보며 준혁은 혀를 차고는 옆에 시립 해있던 원영기 수사들을 보았다.
그들도 여인의 행동에 난처한지, 어깨를 으쓱하고는 고개를 끄덕여 따라가라는 무언의 표시를 하였다.
파앗-
원영기 수사들의 고개가 멈추기도 전, 준혁은 하얀빛 꼬리를 남기며 허공에 점이 되어가고 있었다.
+++
어두컴컴한 하늘을 빠르게 이동하길 잠시.
붉은 머리 여인은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한 나무 앞에 내려서더니, 준혁이 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준혁이 여인을 따라 바닥에 내려서자, 등 뒤의 산처럼 거대한 나무를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여기가 그분이 스스로를 봉한 곳이야.”
준혁은 호왕족 거주지에서 보았던 소나무 군락지의 나무보다 수십 배는 큰 나무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지다가, 기감으로 나무를 살폈다.
그리고는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여인이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느꼈지?”
“그렇습니다.”
준혁은 고개를 끄덕여준 후, 자신이 기감으로 확인한 게 맞는지 물었다.
“그분의 진체가 있다는 이곳이 왜 귀기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까?”
여인은 한숨을 한번 내뱉고 대답했다.
“이곳이 발원지니까.”
“그게 무슨?”
“그분이 스스로를 봉인했을 때, 함께 봉인 당한 상대 수사들의 혼이 귀령의 원인이야.”
귀령이라는 존재 자체가, 지상에 남은 혼령이 영기를 받아들여 수사와 같은 상태가 되는 것.
다만 그전의 존재 의미는 잃어버리고, 전혀 다른 무언가가 돼버리는 악령에 가까운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말뜻을 알아들은 준혁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선배님과 호왕족 전사들은 그들이 봉인구역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입니까?”
이번엔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게 방치했다가 만에 하나라도 그분의 진체를 귀령이 잠식해 버리면 정말 끝이지. 우리는 봉인구역 안에서 그들이 진체에 닿지 못하게 막고 있어.”
여인의 말에 준혁은 심각한 표정을 했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맞을까?’
찌르는가시로부터 정보를 얻은 후, 백호의 진체를 얻게 되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겼다.
혹시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해도, 백호족의 혈통과 혈맥의 힘을 정식으로 이은 청호에겐 분명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지만 여인의 설명을 듣고 나니, 그것을 얻기 위해선 꽤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할지 모른다고 느꼈다.
완영기 끝자락으로 보이는 여인. 그런 여인이 속해있는 호왕족이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귀령.
‘과연 진체만 얻고 돌아오는 게 가능할까?’
준혁은 그건 아닐 거라 판단했다.
생각을 거듭하던 그를 여인이 불렀다. 입구로 생각되는 곳을 가리키며.
“들어가지.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균형이 깨질 수도 있어.”
“선배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저 안엔 호왕족 수사가 몇이나 있습니까?”
준혁이 자신의 권유에 질문으로 답하자, 질문의 의도를 알겠다는 듯 여인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완영기 수사 두 명. 원영기 수사 열여섯. 그게 다야. 왜? 설마 백호족 전사가 귀령을 앞두고 두려움이 생긴 건 아닐 테고.”
여인의 반문을 가벼운 웃음으로 흘려버린 준혁.
“두 명의 완영기···. 에 선배님도 포함입니까?”
“나? 푸흐흐, 하긴 네 눈엔 그렇게 보일 수 있겠구나.”
그 순간 여인이 뽀뽀라도 할 듯 입술을 내밀며 바람을 후우 불었다.
그러자 입에서 빠져나온 입김이 그녀의 몸을 한차례 감싼 후 사라졌고, 그걸 신호로 허공에 갑작스럽게 기운이 뭉치더니 벼락이 떨어져 내렸다.
콰쾅!
번쩍-
여인은 갑작스레 떨어져 내리는 벼락을 손을 들어 쳐 내버리고는 준혁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어때? 알겠어?”
그녀가 입을 여는 사이에도 곳곳에서 기운이 뭉쳐 들며 뇌전이 떨어져 내렸다.
마치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무언가를 처리해야 한다는 듯이.
“연형기···. 어찌···. 설마! 선배님께서는 수행을 강제로 떨어트릴 수 있단 말입니까?”
계면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선 수행을 숨기는 거로는 부족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목족의 여왕이 고대의 진법으로 둘러싸인 지하에서 숨어 살지도 않았을 것.
여인은 대답 대신 흡족한 미소를 띠고는 입김을 재차 내 불어, 온몸을 감싸게 했다.
그러자 그녀의 기운이 서서히 흩어지더니 허공에서 뭉치던 기운들도 함께 사라졌다.
“운이 좋아 천봉족의 능력을 배울 기회가 있었지.”
“천봉족이면···. 설마 주작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대륙의 사방(四方)에 자리했었다던 네 종족의 수장들.
그들 중 술법을 다루는 능력으론 으뜸이라던 주작.
여인이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분의 절제술을 익혔어. 왜? 알려줘?”
준혁은 용천무의 비늘을 전부 흡수하고 나면 연형기에 오를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형기에 오른 순간 계면의 압박을 받아야 하니, 그때부턴 목족의 여왕처럼 하늘을 피해 숨어 살아야 할 운명.
선계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전까진 연형기에 올라가는걸 막아야 할 처지였다.
하지만 천봉족의 절제술이 있다면 얘기가 달랐다.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싶습니다.”
겸양의 태도는 어디 던져버렸는지, 솔직하게 말하는 준혁을 보며 여인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 그전에 들어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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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의 진체와 천봉족의 절제술이라는 미끼를 물지 않을 수 없었던 준혁은 결국 여인을 따라 봉인구역 안으로 들어섰다.
“흐음···.”
안은 바깥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귀기가 짙었다.
곧장 귀원패를 강화한 준혁은 정혈 한 방울을 뱉어내 터트렸다.
그 순간 정혈이 꽃잎으로 변해 터져나가며 준혁의 새하얀 털 위를 감싸듯 스며들었다.
“목족들의 비술?”
“우연히 배웠습니다.”
여인은 준혁이 사용한 술법을 신기한 듯 바라보다가 금세 관심을 지워버리고는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봉인구역은 커다란 공동이 개미집처럼 엮여있었는데, 백호 진체는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고 했다.
앞장서 걷던 여인은 입에서 작은 돌조각 하나를 뱉어내더니 준혁에게 건넸다.
“이곳의 지도야. 외워둬.”
돌조각을 기감으로 살핀 준혁이 그것을 허공에 띄운 후 이마에 가져가자,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있는 봉인구역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중 가장 아래 공동에 하얀 표시가 있는 걸 보니 백호 진체가 자리한 곳 같았다. 그리고 하얀 표시로부터 조금 떨어진 공동에 검은 표시가 수십 군데 있었는데 그곳이 아마 귀령의 발원지인 것 같았다.
질문을 통해 확인하기도 전.
여인이 입을 열었다.
“지도에서 보이는 검은 표시가 귀령이 나타나는 곳이야. 우리는 그놈들이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게 막아야 하고.”
개미집처럼 복잡한 공동 중, 외곽을 빙 두르듯 귀령의 발원지가 있었고, 호왕족은 중심지에서 그들을 막아서는 처지였다.
귀령을 제압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하고, 오직 귀령이 중심지를 통과해 백호 진체에 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 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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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의 공동을 지나쳐 계속 아래로 내려가자, 분주히 움직이는 원영기 수사들을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은 여인과 다르게 인간의 모습이 아닌 호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빨리 갑시다! 이지(二地)에 후기 급이 또 나타났답니다.”
“쉴 시간을 안 주는구먼. 빌어먹을 악령 덩어리들!”
급하게 이동하던 두 원영기 수사는 여인을 발견하더니 살짝 고개를 숙이다가, 그 옆 준혁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급한 볼일이 있는지, 호기심을 억누른 채 빠르게 사라졌다.
그들의 모습에 준혁은 궁금증이 일었다.
‘영수족은 원영기에 오르면 인간의 형태를 하게 되는 것 아니었나?’
시선을 돌려 인간의 모습을 하고있는 여인을 보며 의문에 잠겼다.
준혁이 접한 적호족이나 설토족, 목족 등은 원영기에 오르면 전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여러 고서에도 영수들은 원영기에 오르면 인간과 흡사한 모습으로 변한다고 적혀 있었다.
물론 강제로 호랑이 모습을 할 수도 있었지만, 원영기에 오르며 자연스럽게 변한 모습을 억지로 바꿀 이유가 없었다.
준혁이 변신술로 백호족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호랑이 모습을 유지하는 것과는 달랐다.
처음 마주친 원영기 수사들을 봤을 땐 별생각이 없었으나, 다른 수사들까지 대부분이 호랑이 모습을 하고 있으니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꼬치꼬치 캐물을 수가 없었기에 의문을 삼켰다.
그때 준혁의 시야에 생각지도 못한 것이 들어왔다.
“선배님 저자는?”
준혁이 바라보는 곳엔 두 명의 인물이 이동 중이었는데, 한 명은 원영기 초기 수행의 인족 수사였고, 나머지 한 명은 결단기 후기 수사였다.
결단기 수사는 귀기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든지 몸에 은은한 보호막을 두른 채 얼굴색은 시커멓게 변해있었다.
‘귀기로 인해 정상이 아니구나. 얼마 살지 못하겠어.’
“아! 저 인족 놈들 말이야? 흐흐, 오래전 마을에 몰래 숨어든 도둑놈들이지. 그냥 죽여버릴까 하다가 이곳에서 귀령들과 싸우게 만들고 있어.”
긴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이 준혁은 그들이 오래전 행방불명 되었던 도율과 도율의 대제자 임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수행에 비해 너무 약해서, 금제를 걸어둔 후, 여기 최후방 쪽에서만 일을 시키고 있지.”
준혁의 표정이 굳어지는 듯 보이자, 여인이 의외란 듯 말을 이었다.
“인족 수사는 처음 보나?”
여인의 질문에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가 있던 곳엔 목족들의 세력이 우세해, 인족들이 모습을 드러내진 않습니다.”
사실확인을 할 수가 없으니 준혁은 거리낌 없이 거짓을 말했다.
“인족 놈들은 음흉하니깐 혹여 나중에 만나게 되더라도 조심해.”
여인은 짧은 감상평을 내뱉고는 더 깊은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에 생각에 빠진 듯 말없이 있던 준혁도 그녀의 뒤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준혁이 떠나간 자리.
반투명한 분홍색 꽃잎 하나가 바람에 날리듯 도율로 의심되는 수사가 사라진 방향으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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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공동을 지나는 동안 몇몇 원영기 수사를 더 만날 순 있었지만, 대부분 시간에 쫓기듯 가벼운 인사만 한 채 사라졌다.
완영기 수사는 만나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하 끝이라 판단되는 곳에 도착하자 여인이 경건한 자세로 지하 끝 벽 쪽에 놓인 백호 동상 앞으로 걸어가더니 입을 열었다.
“이곳이야.”
준혁은 여인의 말에 기감으로 주변을 살피고는 바닥 아래 미증유의 무엇이 존재함을 느낄 수 있었다.
여인은 준혁을 안내하면서 보였던 표정이 아닌, 살짝 들뜬 듯 흥분한 얼굴로 입술을 적셨다.
준혁을 향한 눈빛엔 ‘빨리 그분을 깨워봐’라는 열망이 서려 있었다.
애초에 진체를 얻기 위해 이곳까지 온 준혁은 서슴없이 동상 앞으로 이동한 후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원래 계획은 청호의 피를 이용하는 것이었으나, 이곳에 청호를 데려왔다가 혹시나 잘못될 수도 있었기에 혼자만 온 상황.
만약 자신의 피로 백호 진체를 깨울 수 없다면 다시 밖으로 나가 청호를 데려와야 할 수도 있었다.
‘혈맥의 힘이 온전하게 내 피와 동화되었으니, 분명 반응은 오겠지.’
적호족이나 설토족처럼, 변신술을 위해 그들의 정혈을 흡수한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청호를 데려왔을 터.
준혁은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동상 위에 올려둔 손끝에 피를 맺히게 했다.
뚝- 뚝-
그리고는 손끝에서 피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져 동상에 닿은 순간.
화아악-
동상의 눈에서 거부할 수 없는 빛이 쏟아져 나오더니 준혁을 단숨에 집어삼켜 버렸다.
빛이 사라지자 놀란 얼굴의 여인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입을 벌렸다.
뭔가 자신이 예상한 현상이 아니란 듯이.
“뭐야? 어딜 간 거야?”
+++
핏빛으로 가득한 공간.
준혁은 눈 부신 빛이 사라지고 나자, 자신이 다른 곳으로 전송됐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한편으론 환영에 휩싸여 있나 하는 의심도 들었다.
그런 의심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서 있는 공간이 위아래 좌우 공간감을 느낄 수도 없었고, 기감도 통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영력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직 몸속에 피만이 무엇을 감지한 듯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곳은 어디지?”
주변을 살피던 준혁은 순간적으로 한가지 상황을 떠올렸다.
“설마? 진체를 깨운 것이 아니라···. 봉인지 안으로 들어온 것인가?”
그리고 그때. 전면에서 무언가가 흐릿하게 흔들린다 싶더니, 하얀 털에 붉은 귀밑머리를 가진 두 눈이 부리부리한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있었다.
호랑이는 등치가 5톤 트럭 정도 돼 보일 정도로 거대했는데, 눈이 마주친 순간,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준혁이 채 말을 잇지 못하고 긴장한 채 서 있자, 호랑이가 입맛을 다시며 이죽거렸다.
“이 반푼이는 뭐지? 넌 인족이더냐 아니면 백호족이더냐?"
그리고는 준혁이 대답하기도 전, 또 다른 질문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여긴 어떻게 들어온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