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151화 (151/408)
  • < 151화. 호왕족 (2) >

    고서보관소에 머문 시간은 짧았지만, 흰 눈썹이 말한 전통에 대해 기록을 읽었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그에 관한 언급이 있었던 것.

    백호족의 뛰어난 전사들은 백호족을 모시는 다른 부족들을 주기적으로 방문했고, 그때마다 부족 여성 중 잠재력이 높은 이들에게 잉태의 기회를 주었다.

    그 후 백호족의 피를 계승한 이가 태어나면 백호족의 부락으로 이동해 그곳에서 생활하는 것이었다.

    호족을 대표하는 백호족 안에선 유난히 새 생명이 태어나지 않았기에 생긴 전통이었다.

    준혁이 여 호랑이들을 보며 난처함을 표하고 있을 때, 흰 눈썹이 말을 이었다.

    “더군다나 그 참혹한 전쟁 때, 백호족 전사들을 너무 많이 잃었습니다···. 그러니 꼭 이 아이들을 품어 주십시오.”

    잉태의 기회를 주는 게 전통이긴 하나 강제는 아니었다. 백호족 전사나, 잉태의 기회를 받는 여성이나.

    그렇기에 거절하면 그만이었지만, 눈앞에서 간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리 깔고 있는 흰 눈썹과 여 호랑이들을 보니 ‘싫다’라고 딱 끊어 말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준혁은 백호족이 아니었기에 할 수도 없는 일. 물론 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다 살짝 시선을 옮긴 준혁의 눈에 몸을 배배 꼬고 있는 청호의 모습이 담겼다.

    ‘......’

    종속의 인을 통해 청호의 들뜬 감정이 전달되었다.

    ‘하긴 같은 종족을 보는 것도 처음인데, 거기다 이성이면.’

    준혁의 눈엔 생김새가 조금씩 다르긴 해도 별 차이 없는 암컷 호랑이들로 보였지만, 청호의 눈엔 그렇지 않은 것.

    피식 웃은 준혁은 흰 눈썹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당연히 그리해야지. 허나 지금은 이 술을 즐기고 싶으니 내가 따로 부르겠네. 그때 차례대로 이 아이들을 보내주면 되네.”

    허락이 떨어지자 흰 눈썹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백호족 개체 수 늘리기에 대한 일이 일단락되자, 흰 눈썹은 부족원들을 시켜 남은 선주를 전부 가져오라 명했다.

    그리고는 자신도 몇 잔 즐기다가 준혁의 눈치를 보고는 조용히 자리를 비켰다.

    +++

    어느 정도 술맛을 즐긴 준혁은 공간대를 뱉어내 남은 선주 항아리를 전부 집어넣었다.

    옆에선 청호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아쉬워 말거라. 선주를 계속 마신다고 기운이 계속 쌓이는 것이 아니니.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주마.”

    원영을 씻어주듯 청아하게 만들어주는 선주의 효능. 그것은 계속해서 마신다고 더 높은 효과를 발휘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은 적당히 마시고, 주기적으로 일정량을 소분해서 마시는 게 더 효과가 좋았다.

    물론 대부분 수사는 취기를 느끼기 위해 준혁처럼 이성적으로 행동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공간대를 챙긴 준혁은 곧바로 공법을 운용해 선주의 기운을 온전하게 받아들였다.

    옆에선 청호도 눈을 감고 준혁을 따라 했다.

    한참 후, 기운을 정리한 준혁은 청호에게 사고 치지 말고 호족들의 생활을 살펴보라며 개인 시간을 주었고, 자신은 고서보관소로 이동했다.

    +++

    고서보관소에 들어선 준혁은 수북이 쌓인 옥돌들을 차례대로 확인하기 시작했다.

    호왕족의 역사 속에 틈틈이 숨어있는 백호족의 과거를 엿보며, 선계의 정보와 그곳에 살아가는 인족에 대한 정보까지.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습득할 수 있자 준혁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그중 놀란 것 중 하나는 선계의 외곽에 위치했었다는 구지대륙에 관한 것이었다.

    거대한 아홉 땅덩이가 옹기종기 모여 하나의 대륙을 형성한 구지대륙.

    인족 목족 영수족 등 다양한 종족들이 살아가던 그곳은 선계 거대세력의 전쟁에 휩싸이게 되었고, 대륙의 강자들은 힘을 합쳐 대륙 수호에 나섰다.

    대륙 안에서는 티격태격하며 전쟁과 전투를 반복하는 사이였지만, 대륙 밖의 외세에는 힘을 모으게 된 것.

    그중 대륙의 사방(四方)에 위치한 네 종족이 가장 선두에 섰다.

    하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전쟁에서 패했고, 그 과정에서 대륙 전체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대륙을 대표하던 네 종족의 수장은 결국 본인들을 제물 삼아 대륙 전체에 거대한 결계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외부에서 구지대륙을 지지하는 수많은 신선의 도움으로 대륙 전체를 선계와 분리해버렸다.

    하지만 이미 전쟁으로 힘을 소비해버린 네 종족의 수장은 결계를 온전하게 유지하지 못했고, 구지대륙은 온전한 상태가 아닌 아홉 개의 대지로 떨어져 나가며 이상 현상을 초래하고 만다.

    “허. 그것이 지금의 구도란 말인가.”

    옥돌에 적힌 내용을 바탕으로 유추해 보자면, 구지대륙을 이루던 아홉 땅덩이 중 가장 작은 땅 3개가 지금의 지구였고,  어긋난 결계로 인해 나누어진 과거 구지대륙의 다른 땅덩어리들이 바로 비경이었다.

    지금껏 비경은 어딘가의 장소가 모종의 이유로 지구와 연결된 것이라 알고 있었던 준혁에겐 나름의 충격이었다.

    “삼각비경이나 눈꽃 비경이나···. 처음엔 전부 하나였었다니.”

    거기다 영수족이 비경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이유가, 그들이 외부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펼쳐놓은 결계 때문이란 것도 처음 알게 된 것이었다.

    구지대륙 전체에 펼쳐놓은 결계가 대륙이 갈라지며 각각 조각난 대륙에 적용되어 버렸던 것이었다.

    “허면 왜 우리는 아무런 제약이 없는 것이지?”

    유일하게 모든 비경과 통로로 연결된 지구만이 결계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있었다.

    한참을 고민해보던 준혁은 다시 새로운 옥돌을 꺼내 이마에 대고는 새로운 정보들을 습득했다.

    아직 고서보관소의 정보 중 3할도 채 확인하지 못했으니, 나머지는 천천히 알 수 있을 거란 생각과 함께.

    옥돌의 내용을 빠르게 파악해 머릿속에 집어넣다 보니 머리끝에서 김이 올라올 정도였다.

    +++

    보름이란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봉인구역으로 자원을 보낼 준비가 끝났다는 소식에 준혁은 고서보관소를 나와 흰 눈썹에게 향했다.

    흰 눈썹이 말했던 마을의 북쪽으로 향하자, 젊은 호랑이 하나가 나타나 길을 안내했다.

    잠시 후 제를 지내기 위해 준비된 장소에 도착하자 거대한 제단을 호랑이들이 빽빽하게 모여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중 찌르는가시를 발견한 준혁은 이유 모를 미소를 짓다가 안색이 바뀌었다.

    ‘저자가 이글대는포효로군···.’

    찌르는가시 근처에 서 있던 호랑이에게서 마선기가 미약하게 느껴졌다.

    단(丹) 안, 식검이 잘게 진동하며 반응하려 하자, 원영이 식검을 잡아채며 검신을 쓰다듬어 주었다.

    ‘우선은 백호 진체를 보는 게 먼저니 다녀와서 만나봐야겠군.’

    그때, 준혁을 발견한 흰 눈썹이 청호와 함께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의식을 치르고 문을 열겠습니다.”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흰 눈썹은 다시 제를 준비하기 위해 사라졌다.

    “너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봉인구역은 귀기(鬼氣)로 가득 차 있어 함께하지 못할 테니.”

    “네. 주인님.”

    청호를 데려갈 순 있었지만, 봉인구역은 전쟁터나 다름없는 곳.

    수십 명의 원영기 수사들이 귀령과의 전투로 인해 발을 빼기 힘들 정도면 혹시 모를 상황이 생길 수도 있는 일.

    굳이 청호를 보호하기 위해 힘을 낭비할 순 없었다.

    잠시 후, 미세한 진동이 제단으로부터 전해오더니 영기파동이 은은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결단기 호랑이 수십 마리가 공중으로 솟아올라 제단을 둘러쌌고, 하나같이 입을 벌려 색색의 입김을 불어내며 진법을 발동할 때처럼 기운을 조종했다.

    우우웅-

    결단기 호랑이들의 기운이 뭉쳐 들자, 제단에서 눈 부신 빛이 터져 나왔고, 빛은 점차 뭉치더니 세 개의 빛기둥으로 변했다.

    그리고는 허공에 떠 있던 수십 명의 결단기들을 향해 무작위로 날아가더니 그중 세 명의 몸에 적중했다.

    “저런 식이군.”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하고 있는 동안, 빛기둥에 부딪힌 세 명의 결단기는 온몸에 금빛 보호막을 두른 채, 제단 아래 수북하게 쌓인 물건들을 삼켰다.

    그 모습에 준혁이 움직일 준비를 하자, 기다렸다는 듯 전음이 파고들었다.

    -지금 가시면 됩니다.

    흰 눈썹의 전음에 준혁은 가볍게 땅을 차며 제단 정상으로 움직였고, 세 명의 결단기 역시 준혁의 뒤를 따랐다.

    파앗-

    제단 정상에 도착한 준혁은 아직 미약하게 남아있던 제단의 빛을 통과하며 모습을 감추었고, 나머지 결단기들도 사라졌다.

    예전처럼 그저 물건만 전하는 제(祭)가 아니었기에 호왕족 호랑이들은 하나같이 간절함을 담아 제단을 바라보았다.

    조용한 제단 주위. 흰눈썹의 간절한 목소리만이 조용히 흘러 지나갔다.

    “제발···. 그분을 깨워주시길···.”

    +++

    파앗-

    제단의 통로를 타고 넘어온 준혁이 가장 먼저 본 것은 어둑한 하늘이었다.

    어디선가 빛이 들어와 주위를 식별할 수 있는 정도의 밝기는 유지되었지만, 전체적으로 칙칙하고 어둠이 가득한 곳이었다.

    같이 안으로 들어온 결단기중 한 명이 이미 경험이 있는지 앞으로 나서며 준혁에게 말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준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잠시 후 네 명은 봉인구역 안쪽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하지만 얼마 이동하지 않아, 준혁은 이내 인상을 찌푸려야 했다.

    그러더니 피부위로 육각 타일이 올라와 온몸을 보호했다.

    ‘이것 때문이었군.’

    결단기 이하 수사들이 봉인구역에서 버틸 수 없었던 이유.

    봉인구역 전체를 지배하다시피 가득 채운 귀기가 준혁의 몸을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겨우 귀기가 귀원패의 보호막을 뚫지는 못했고, 준혁은 여유롭게 결단기 수사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한참을 이동하자 준혁의 눈에 어설프게 만들어놓은 삼각형 움막 같은 것들이 모여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자 움막뿐 아니라 움막 주위로도 보호진이 펼쳐져 있었다.

    네 사람이 다가오자 무언가가 번쩍한다는 느낌과 함께 두 명의 수사가 나타나 앞을 막았다.

    한 명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노란 줄무늬 호랑이였다.

    준혁은 두 사람이 느끼지 못하게 기감으로 그들을 살폈다.

    ‘원영기 중기와 후기로군.’

    준혁은 두 호랑이가 중상으로 인해 요양 중인 상태라는 걸 단번에 파악했다.

    “누군가 했더니 자네였군. 벌써 보급을 받을 때였나.”

    사람의 모습을 한 호왕족 수사가 입을 열자, 준혁과 함께 온 결단기 수사들은 입을 열어 보급품을 전부 꺼내놓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자네들도 고생이 많네.”

    겨우 물건을 배달하는 일이었지만, 얼마나 많은 준비와 고생을 해야 하는지 겪어본 원영기 호랑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치하했다.

    그리고는 손을 휙 젓더니 세 명의 결단기가 뱉어낸 물건들을 전부 입안으로 집어넣고는 준혁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이자는 누구···. 설마···. 아니겠지?”

    준혁은 자신에게 시선이 모이자 앞으로 나서며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백호족 전사 최다. 그분이 남기신 진체를 깨우기 위해 왔다.”

    준혁의 소개에 호랑이 모습을 하고 있던 원영기 후기 수사가 입을 열었다.

    “최? 특이한 이름을 사용하는군.”

    “최고가 되라는 의미로 최고의 첫 글자만 따서 만든 이름이지.”

    준혁의 부연 설명에 나머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백호족인가? 설마 백호족에겐 결계를 뚫을 방법이 있었단 말인가?”

    두 명의 원영기 수사는 눈앞의 준혁을 의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만나자마자 준혁의 존재감에 압도당한 제사장과는 달리, 우선 의심부터 하고 있었다.

    “아니. 나 역시 내가 속한 곳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어 발버둥 칠 뿐이었지. 그러다 유적을 통해 우연히 이곳으로 왔을 뿐이다. 이곳에 온 후 호왕족의 기운을 느끼고는 그분의 진체가 자리한 곳이란 걸 알게 되었고, 이렇게 찾아온 것이지.”

    준혁의 설명에도 두 명은 의심을 지우지 않고는 은연중에 기감을 퍼트려 준혁을 살폈다.

    그 모습에 준혁은 피식 웃더니, 백호 혈맥의 기운에 영기를 섞어 파동을 터트렸다.

    파앙-

    “허억!”

    “컥!”

    두 원영기 호랑이는 백호 기운을 느끼고는 비틀하며 각기 한 걸음씩 물러났다.

    모든 호족이 백호족을 섬기는 이유.

    그것은 피에 새겨진 명령처럼 호족의 최상위 개체인 백호족의 기운에 근원적인 공포감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저, 정말 백호족 전사셨군요.”

    “이 힘···. 분명.”

    두 수사의 반응에 준혁은 별반 표정 변화 없이 입을 열었다.

    “그럼 확인은 끝났고. 그분의 진체를 보고 싶은데?”

    준혁의 말에 두 수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하늘에서 무언가가 번쩍하며 전광석화처럼 떨어져 내려 바닥을 내리쳤다.

    콰아앙!

    속도를 줄이지 못한 것인지 안 한 것인지 모르지만, 바닥에 거대한 구덩이를 만들며 착지한 이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분명 백호족의 기운인데? 누구야? 방금 누가?”

    먼지가 사라지기도 전, 주변을 빠르게 훑던 여인이 준혁과 시선이 마주치자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녀의 시선은 준혁의 귀밑에서 이어지는 어깨 줄무늬에 고정되어 있었다.

    “진짜? 백호족의 전사께서 오셨다고?”

    준혁은 여인이 나타나자 지금까지의 고압적인 태도를 버리고는 고개를 살짝 내리며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백호족의 최라 합니다. 선배님.”

    ‘완영기 수사다. 그것도 끝자락.’

    붉은 머리 여인에게선 목족의 여왕과 비슷한 거력이 느껴졌다. 물론 그녀에 비한다면 한참 부족했지만, 터질 것 같은 기운이 잔뜩 웅크리고 있는 모습.

    그건 분명 연형기에 근접한 모습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