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백두 비경 (2) >
비행법기에 앉아 느긋하게, 하지만 속도로 따지자면 결단기급 수사가 전심전력으로 둔광을 일으키며 날아가는 속도로 이동한 준혁은 어느새 칼같이 솟은 산을 앞에 두고 있었다.
산 주위엔 소규모 영석 광맥이 있었는지, 여기저기 파헤쳐진 흔적이 가득했다.
‘두 개의 바위가 창과 방패같이···. 저곳이군.’
준혁은 기감을 퍼트려 주위 지형을 파악하고는 청명이 건넨 옥간에 적힌 장소를 찾아 움직였다.
“저곳인가?”
잠시 후, 진법으로 가려져 있는 장소를 발견하고는 다가가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러자 진법이 터져나가며 먹이를 단숨에 집어삼킬 것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동굴이 드러났다.
이곳에서 신비경을 발견한 천이수가 혹시 몰라 진법으로 동굴 입구를 가려놓은 것이었다.
준혁은 다시 한번 기감으로 동굴 내부를 살피고는 주저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에서 보았던 것과 달리 동굴은 꽤 깊었는데, 이런 곳에서 신비경을 찾아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한참을 이동하자 끝에 다다를 수 있었고, 준혁은 오랜만에 추억의 장소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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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구나.”
식검, 적마도 등이 봉인되어있던 마선을 만났던 곳과 동일하게 생긴 장소에 도착한 준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내부를 살펴보았다.
천장에서 별빛처럼 떨어지는 빛도, 원형 공동의 넓이도, 심지어 한쪽에 놓인 단상과 중앙의 진법까지 모든 게 같았다.
다만 단상 위 법기도, 중앙 진법의 마선도 아무것도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천이수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안이 텅 빈 상태였다고 했다.
내부를 전부 둘러본 준혁은 진법용 깃발을 꺼내 사방으로 쏘아 보내며 수결을 맺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하더니 한참 후에야 천천히 눈을 떴다.
“역시 이 술법엔 한계가 있구나.”
준혁이 펼친 술법은 장소에 남아있는 잔류 기를 읽어 이곳을 거쳐 갔던 자들을 파악해 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천이수로 느껴지는 기운 말고는 영수로 짐작되는 아주 희미한 기운이 파악되었을 뿐, 그것이 언제였는지 수행 정도가 어떠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원래 계획은 마선을 데려간 존재의 기운을 파악해 그것을 바탕으로 비경을 조사하려 했는데, 그 정도로 존재감이 남아있질 않았다.
“어쩔 수 없나.”
그렇다면 마선을 찾을 방법은 하나뿐.
제이엘이 마선의 기운을 느꼈다던 장소로 가서 무식하게 수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동굴의 입구에 들어서는 누군가의 인기척이 준혁의 기감에 걸려들었다.
‘이건?’
처음 느껴보는 기운이었지만 인간이 아닌 영수족이란 것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 순간, 준혁의 발이 푸딩을 밟은 것처럼 스르륵 꺼지더니 땅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토율서의 능력 중 하나인 토둔술이었다.
잠시 후, 신비경의 입구로 그림자가 비치더니 노란 줄무늬를 가진 호랑이 하나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호족(虎族)이구나.’
땅속에서 신비경 내부를 감시하던 준혁은 백두 비경에서 출몰하는 영수족 중 사람들의 눈에 가끔 발견된 적이 있던 호족의 등장에 쾌재를 불렀다.
우연히 내부로 들어왔다기엔 발걸음이 거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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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왕족의 전사이자 제사장의 피를 이은 찌르는가시는 오랜만에 방문한 공동 중심으로 걸어가더니, 중앙의 진법을 살펴보다가 단상으로 이동해 그곳도 살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주변 곳곳을 조사하다가 푸념 섞인 소리를 내뱉었다.
“역시 이곳에선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인가.”
오랫동안 라이벌 관계였던 이글대는포효.
그가 어느 순간부터 갑작스레 강해지기 시작했고, 그것을 이상하게 여긴 족인들은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거주지의 결계를 벗어나 한참 떨어진 곳에서 찾게 된 이 장소.
이곳에 대한 정보는 어떤 고서에서도 찾을 수 없었지만, 중앙에 새겨진 진법이 무언가를 봉인하고 있던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때부터 이글대는포효가 강해진 이유가 봉인되어있던 귀령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하지만 찌르는가시는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제사장의 피를 이었기에 귀령의 냄새는 누구보다 확실하게 파악할 수가 있었던 것.
그랬기에 이 장소를 발견한 뒤, 진짜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꾸준히 이곳을 방문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관심에서 지워버렸었다.
그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랜만에 재방문을 했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찾을 수 없자 깊은 한숨이 나올 뿐이었다.
“도대체 그 녀석이 갑자기 강해진 이유가 뭐지? 이곳에서 뭘 얻은 거야?”
그때 낯선 이의 목소리가 찌르는가시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 녀석이 누구더냐?”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경험을 겪은 찌르는가시는 반사적으로 앞발에 영력을 뭉치며 빠르게 휘둘렀다.
쉬익-
하지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거짓이라도 된 건지, 아무런 흔적도 기척도 느낄 수가 없었다.
“허, 다짜고짜 손부터 나가는 걸 보니 말이 통할 녀석은 아니로군.”
곧이어 등 뒤에서 들리는 말에 다시 한번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던 찌르는가시는 온몸이 굳어가며 마치 물에 빠진 것처럼 무엇엔가 몸이 잠식되어감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는 바닥이 점점 가까워짐을 느끼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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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혁은 눈앞에서 축 늘어져 기절한 호랑이를 보고는 청호를 불렀다.
“나와 보거라.”
외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이 수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청호는 왜 방해하냐는 눈빛으로 모습을 드러내다가 눈앞의 호랑이를 발견하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인님! 이자는.”
청호가 말을 잇지 못하자,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신 대답해 주었다.
“그래. 너와 비슷한 기운을 가진 걸 보니, 동족일 가능성이 크다.”
어깨로 이어지는 귀밑머리가 푸른색인 청호와 달리, 노란색인 호랑이. 그것을 제외하고 외형이나 느낌이 비슷했다.
동족을 만날 줄 꿈에도 몰랐는지 청호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다가 준혁을 향해 물었다.
“주인님. 이자를 어찌하실 거예요?”
바닥에 쓰러져있는 걸 보면 호의적인 만남이 아니었던 건 분명한 일.
청호는 상대방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지 조금 초조해 보였다.
준혁은 피식 웃고는 바닥을 툭 하고 쳤다.
그러자 발끝에서 만들어진 금빛 실이 호랑이를 향해 뻗어나가더니 포박하듯 둘러싸기 시작했다.
잠시 후 준혁은 공간대에서 부적 한 장을 꺼내 수결을 맺고는 말했다.
“걱정 말거라 죽이진 않을 테니.”
잠시 후 준혁의 손을 떠나간 부적이 호랑이의 이마에 닿자 호랑이는 동공이 하얗게 변하며 정신을 차렸다.
“정신부로 무엇을 알고 있는지만 알아볼 것이다.”
수행이 낮을 땐 정신부로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크게 후유증이 남는다. 하지만 준혁의 수행에 이제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는 일.
준혁은 동공이 풀린 호랑이 앞으로 다가가 수결을 맺은 후 손가락으로 그의 이마를 툭 하고 건드렸다.
그러자 정신부가 화르르 타면서 사라졌다.
“이곳과 관련된, 알고 있는 걸 전부 말해 보거라.”
명령이 떨어지자.
“이곳은···. 오래전···. 버려진 곳. 이글대는포효가 이곳에서···. 무언가를 얻은 것으로 의심돼···.”
뚝뚝 끊기긴 했지만, 천천히 자신이 아는 바를 줄줄이 내뱉은 상대를 보며 준혁은 질문을 이어갔다.
그렇게 찌르는가시는 신비경과 이글대는포효에 대한 것뿐 아니라. 그동안 신비에 싸여있던 종족의 거주지와 그곳에 얽힌 비사까지 낱낱이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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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줄무늬 호랑이. 자신을 찌르는가시라고 소개한 호랑이의 말을 전부 듣고 난 준혁은 새로운 사실에 깊은 호기심이 생겨남을 느꼈다.
한쪽에서 찌르는가시를 상대로 질문을 하는 청호를 내버려 둔 채 생각에 빠져들었다.
‘여태껏 백두 비경엔 결단기급 영수가 최고 수행이라 알고 있었거늘···.’
사실은 원영기에 오른 영수가 수십에 이른다고 했다.
인간들이 원영기 수사를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귀령이란 존재 때문.
호왕족은 원영기에 이르게 되면 종족의 비사에 얽힌 지역으로 이동해 귀령이란 존재들과 싸워야 했기에 그동안 누구도 결계로 이루어진 거주지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귀령이라···.”
설명으로 들은 귀령은 귀신과 비슷한 존재였는데, 악의를 품은 혼이 영기를 받아들여 수사와 같은 힘을 얻은 존재라 했다.
그리고 백호 비경에 온 이유인 마선과 계약한 것으로 의심되는 이글대는포효라는 영수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준혁을 가장 놀라게 한 정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이의 행방에 대한 것까지 알게 되었다.
“설마 여기서 도율의 행방을 알게 될 줄이야.”
원영기에 오른 후 대제자와 함께 사라져버린 도율.
그가 제자와 함께 소리소문없이 자취를 감춘 곳이 바로 호왕족의 거주지였다.
아니 정확히는 잡혀간 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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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혁이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청호는 호기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너희 족인들중 나처럼 푸른 줄무늬를 가진 이도 있어?”
“푸른 줄무늬는···. 백호족의 혈통만이 가지는 것···.”
백호족이란 말에 청호의 눈이 반짝였다.
“백호족에 대해 아는 걸 말해줘.”
“백호족은···. 구지대륙(九地大陸)을···. 수호하던···. 사신 위···. 우리 호왕족은···. 백호족을 모시는···. 제사장을 배출한 종족으로···.”
“아니 멍청아! 너희 호왕족 말고 백호족에 대해 말해 달라고!”
“백호족은···. 구지대륙을···. 수호하던···. 사신 위···. 우리 호왕족은···.”
정작 알고 싶은 정보에 대해 상대방이 말을 돌리자 청호는 신경질이 난 듯 어깨를 들썩였다.
그런 청호를 준혁이 말렸다.
“아는 것이 없어서 그런 것일 테다. 그만하거라.”
청호는 그 말에 더는 궁금한 것이 없는지 다시 작게 줄어들며 준혁의 품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청호가 품속으로 들어가자 준혁은 수결을 맺어 찌르는가시의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는 다시 땅속으로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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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머리야.”
찌르는가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흔들며 몸을 일으키다가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를 흘렸다.
“이런 곳에서 깜빡 잠이 들다니, 내가 모르는 사이에 진법에라도 걸려든 건가?”
입김을 내뱉어 영기로 몸 구석구석을 살펴본 찌르는가시는 아무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자신이 진짜 잠에 들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는 아쉬운 듯 공동 내부를 한차례 둘러보고는 동굴 입구로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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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으로 돌아온 찌르는가시는 곧 있을 의식을 준비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원래대로라면 다른 일을 할 여유 없이 의식을 준비해야 했지만, 이글대는포효 때문에 지하의 동굴에 다녀오느라 시간이 없었다.
그랬기에 잠시 쉴 틈도 없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그때 자신만큼이나 바쁘게 의식을 준비해야 하는 동료가 불쑥 나타나더니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찌르는가시! 지금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야!”
“왜? 설마 의식 제단에 문제라도 생긴 거야?”
찌르는가시의 말에 상대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 부족에 손님이 오셨어!”
손님? 거대한 고대 결계로 보호된 이곳에 손님이라는 존재가 찾아올 수가 있나?
그전에 자신들이 머무는 땅은 오래전 아홉 조각으로 갈라져 왕래가 불가능했기에 지금껏 손님이라 불릴만한 인물이 방문한 적이 없었다.
찌르는가시가 알기로 아홉 조각으로 갈라진 땅 중, 그 중심에 있던 두 조각의 땅에 사는 인족들만이 갈라진 대륙을 왕래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인족이 아닌 손님이 찾아왔다는 말에 궁금증이 동했다.
“누군데? 대체 누가 왔길래 이렇게 난리야?”
찌르는가시가 빨리 말해보란 듯 재촉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상대방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놀라지 마? 백호족. 바로 백호족의 전사들이 이곳을 찾아왔어!”
전사들?
“몇 명이? 아니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왔는지는 나도 모르지. 지금 족장님이 모시고 가셨으니까. 아! 그리고 백호족 전사분들은 두 분이야. 한 분은 원영기에 오르신 분이고, 다른 이는 축기기 후기 수행이래.”
원영기라는 말에 찌르는가시의 눈빛에 기대감이 서렸다. 그것은 소식을 전해준 상대방이 하고있는 눈빛과 같은 것이었다.
“그럼···.”
“그래! 이제 귀령 때문에 희생하며 살 필요가 없어! 그분들이 진짜 백호의 피를 이으셨다면! 우리는 이제 자유야!!”
호왕족에겐 오래전부터 지켜야 하는 게 있었다.
바로 구지대륙을 수호했다던 사신위의 진체(眞體)가 잠들어있다던 땅.
하지만 진짜 백호족이 나타났다면 더는 그곳을 지킬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곳에 잠들어있던 사신위의 진체를 깨운다면 귀령 따위는 숨 한번 내쉬어도 사라져버릴 것이었다.
전설처럼 전해오는 고서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