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화. 백두 비경 (1) >
성인봉 거처 앞 공터에서 잠시 기다리자, 청명이 축기기 수사 한 명을 대동한 채 나타났다.
“어르신, 이자는 백두산 지부에서 일하던 자로 이번에 신비경을 발견한 자입니다요.”
“도주를 뵙습니다.”
준혁은 청명과 함께 나타난 이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천 수사 아닙니까?”
“이렇게 또 보게 되었습니다.”
버뮤다 삼각비경에서 벗어났을 때 만났던 자. 설악산에 처음 입문하려 방문했을 때 만났던 천이수였다.
“왔으면 나에게 올 것이지, 언제부터 마선문에 들어온 것입니까?”
천이수는 하늘 같은 위치에 올랐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에게 존대해주는 준혁을 보며 깊게 허리를 숙였다.
“도주께서 도움을 주시고 난 후···. 아니 그전에 말씀을 편히 해주십시오.”
천이수의 부탁에 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네. 그러니 말해보게.”
“그것이···.”
천이수는 준혁이 빚을 탕감해주자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오래전 잠시 스쳤던 인연을 내세우며 준혁을 찾아갈 만큼 낯짝이 두껍진 않았기에 설악산 인근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 울릉도에서 원영 응결식이 진행된다는 소식에 섬을 방문했고, 멀리서 준혁의 신위를 보며 전율했다.
오래전 같은 연기기 수사였던 준혁이 하늘 같은 원영기 수사를 처리하는 걸 보며, 오래전 친분을 내세워 그를 찾아가지 않은 자신을 칭찬했다.
하지만 응결식이 끝난 후 바로 울릉도를 떠나지 못했다.
준혁이 다른 원영기 수사를 얼음덩어리로 만들어버린 모습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것.
결국 천이수는 결심을 다지며 마선문에 투신했고, 열심히 임무를 수행하다가 청명의 눈에 띄어 그의 직속으로 배치되면서 백두산 지부로 파견 나가게 되었었다.
천이수가 지난 일을 간략하게 요약하자 준혁이 매우 흡족한 모습을 보였다.
자신의 이름을 팔면 더 쉽고 더 편안하게 마선문의 요직을 차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 요직은 몰라도 오래전 친분이 반가운 준혁은 그에게 단약을 주고 수련에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주었을 터였다.
물론 그것으로 오래전 인연을 마무리했겠지만.
그랬기에 욕심내지 않는 그의 모습에 마음이 동했다.
“내가 안토니오를 처리한 게 그리 감명 깊었나?”
“예. 그자를 단숨에 얼려버리는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련하던 공법도 바꾼 것이고?”
준혁이 즐거운 듯 입가에 미소를 띠며 묻자, 천이수가 움찔하더니 부끄러운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단번에 알아보시는군요···. 맞습니다. 그날 이후 빙하신정공(氷下身正功)을 구해 익히고 있습니다.”
빙하신정공은 냉기를 다루는 공법 중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공법이었다. 다만 이름에 어울리게 냉기를 다루기 적합하게 몸을 단련하는 수준 정도의 공법이었다.
마음이 동한 준혁은 공간대에서 옥간 하나를 꺼내 잠시 이마에 가져다 댄 후, 천이수에게 날려 보냈다.
천이수가 엉겁결에 옥간을 받고는 놀라워하자, 그것에 대해 설명했다.
“월하현적체공이라 한다. 달빛을 받으며 몸을 단련하는 강체공이지. 해가 떠 있을 땐 빙하신정공으로 수련하고 해가 지고 난 후엔 그것으로 대체한다면 큰 발전이 있을 것이야.”
준혁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천이수가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준혁이 준 공법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파악할 수준이 되진 않았지만, 원영기 수사가 장담할 정도라면 그 가치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은 분명했다.
“감사합니다! 도주!”
“감사는 무슨. 그대가 가져온 소식 때문에 비경으로 가야 하기에 술 한잔 대접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니 그것으로 대신해주게.”
오래전 장난처럼 한마디 했던 것이 자신의 운명을 크게 바꾼 것처럼 느껴져, 천이수는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잠시 후, 몇 마디 더 덕담을 전해 들은 후 천이수와 청명은 성인봉을 내려왔다.
성인봉을 내려온 천이수에게 청명이 말했다.
“어르신과 인연이 있었다면 미리 말해주었으면 좋지 않았나?”
“그저 작은 인연인 것을 도주께서 마음을 써주신 것에 불과합니다. 말할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공손하게 말을 하는 천이수를 보는 청명의 눈에 호감이 비치고 있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기에 문주 직속 단체에 편입시켜 일을 시키고 있었다. 이젠 거기에 더해 사람 자체가 마음에 들어오는 중.
“이번에 백두산 지부로 가면 주변 정리를 하고 돌아오게. 앞으로 다른 일을 맡길 터이니.”
먼 훗날, 청명의 오른팔이자 마선문의 수호대를 이끄는 수사.
무위각주 도천과 더불어, 울릉도 도주 최준혁이란 이름에 먹칠을 하는 자들에겐 철퇴를 가하는 빙제(氷帝)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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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단과 법기들을 흡수해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하기에 앞서, 준혁은 백두 비경에서 발견된 신비경에 다녀오기 위해 성인봉을 떠났다.
처음 제이엘에게 백두 비경 마선에 대한 정보를 들었을 때, 무작정 그곳을 뒤지기보단 그녀가 말한 정보와 부합되는 단서를 찾으라 명령을 내려놓았던 것.
완영기에 올라 엄청나게 넓은 범위를 기감으로 훑을 수 있다고는 하나, 직접 움직이기보단 수하들을 이용하는 게 효과적이라 판단했었다.
그리고 그 판단에 맞게 마선이 풀려났을 것으로 예상되는 신비경이 발견되어 그곳을 향해 날아가는 중이었다.
다만 준혁은 비행법기 한쪽에 대기하고 있는 청호를 보며 어이가 없어 한숨을 연달아 쉬고 있었다.
“나와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지 않았으나, 내가 백호족의 유물을 전부 전해주었거늘···. 어찌 발전이 하나도 없었느냐?”
포동포동하게 살이 올라온 청호는 변명거리가 없는지 말없이 딴청을 피우다가 매서운 준혁의 눈초리에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그것이···. 사실은···.”
최나연과 함께하게 된 청호는 그녀를 보호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며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만 말이다.
아직 일반인의 때를 벗지 못한 최나연은 틈 날 때마다 민가로 내려가 수행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화식을 먹어댔고, 청호 역시 그녀를 따라 호기심에 인간들의 음식을 먹게 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되었다.
그 이후 최나연이 사쿠라에게 잡혀 살다시피 하며 강제 수련을 하게 되자, 청호는 혼자서 식도락 여행을 시작했다.
수련? 그딴 건 치킨, 족발, 피자 앞에선 아무런 가치도 없게 느껴졌다.
이미 울릉도 내 일반인들은 청호가 도주의 애완동물이라 알고 있었기에, 청호가 나타나면 먹을 것을 아낌없이 풀었다.
그 결과 영수로서는 최초로 수행으로 인한 것이 아닌, 음식으로 살이 찌는 영광을 맞이하게 되었다.
“앞으로 화식을 금한다.”
“주, 주인님! 안 돼요!”
음식 금지령에 청호가 비명을 질러대자, 준혁은 품에서 잠자고 있던 도마뱀 한 마리를 꺼내 들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처음 보는 영수족이네요. 혹시 제 동생이 생긴 건가요?”
어느새 음식 생각이 사라진 건지, 호기심 가득한 눈을 한 청호를 보고 준혁이 무미건조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 오래전 얻긴 했다만, 이번에 알에서 부화한 새로운 영수다. 그럼 이 아이의 수행이 느껴지느냐?”
수행이란 말에 도마뱀을 향해 정신을 집중하던 청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요. 아직 새끼라 그런 건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주인님! 제가 잘 인도할게요!”
호기롭게 외치는 청호를 보며 준혁이 잠시간 말없이 눈빛을 보내다가 슬쩍 고개를 흔들었다.
“느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네? 그게 무슨···.”
“이 아이. 그리고 품에 있는 다른 녀석까지. 지금은 잠들어있지만, 잠에서 깨어난 순간 최소한 원영기 이상의 수행을 지니게 될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깨어나는 순간, 그리될 것이라고 준혁은 생각했다. 어쩌면 원영기를 넘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
용천무가 탑에 등반할 100명의 후인들을 위해 심어두었던 석상의 기운 전체. 그중 절반씩을 나눠 가진 녀석들이 어느 정도 수행을 가질지 정확한 예측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다만 지금 새끼에 불과한 몸뚱이임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거력을 품고 있는 걸 보면 최소한 원영기에는 이를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판단한 가장 큰 이유는, 어쩌면 두 마리의 도마뱀은 용각족의 후예가 아니라, 용의 피를 이은 비슷한 계열의 다른 종일지 모른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
잠들어있는 새끼의 모습이 원영과 가까운 형태가 아닐까 하고 예상하고 있었다.
“네?!! 원영기라고요?! 그럼 저보다···!!”
깜짝 놀라는 청호.
“그래. 넌 동생들에게 맞고 다니는 최초의 영수가 될지도 모르지.”
“!!!”
준혁의 말에 청호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짓다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린 청호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백호 유적에서 가져온 백호 가죽을 뒤집어쓰더니 무언가를 우물우물 씹으면서 공법수련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준혁은 피식 웃더니 날아가는 법기의 속도를 매우 느리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석양이 지고 있는 바다를 바라보며 오래전 누군가와 함께 양탄자에 올라 바라보던 노을을 떠올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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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비행법기의 속도를 늦추어도 울릉도와 백두산은 지척지간.
청호는 변환술을 사용해 강제로 몸을 축소시키더니 준혁의 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고이 자는 도마뱀들 사이를 파고들어 준혁의 심장 부위에 얼굴을 맞대더니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준혁은 두툼하게 부푼 가슴부위를 영기로 감싸면서 비행법기를 거두고는 백두산 천지를 향해 움직였다.
잠시 후 천지에 만들어진 공간의 틈 앞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두 명의 축기기 중기 수사가 다가와 바닥에 부복했다.
“도주를 뵙니다!”
그들을 향해 살짝 손을 저어 강제로 몸을 일으킨 준혁은 ‘수고가 많다.’라는 말을 남기고는 비경 안으로 몸을 날렸다.
잠깐의 어지러움이 생겨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자, 백두 비경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준혁이 들어선 비경의 입구는 거대한 산맥의 정상에 만들어져 있었고, 앞뒤, 사방으로 끝없는 산맥이 뒤덮여있었다.
영기의 농도는 지구와 비슷했는데, 비경 특유의 코끝을 간지럽히는 청아한 풀 내음이 가득 전해오고 있었다.
“이곳이 내 비경이군.”
한국 정부로부터 정식으로 할양받은 비경.
준혁은 드높은 산맥이 가득한 비경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져 살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비경 내부를 감상하던 준혁은 기감으로 주변을 샅샅이 훑어보고는 청명이 건네준 옥간을 꺼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주변을 돌아보며 나들이 겸 풍광을 구경하고 싶었지만, 그건 나중에 시간을 두고 하면 될 일.
우선은 마선과 관련된 신비경이 먼저였기에 다시 비행법기를 꺼내 영기를 불어넣었다.
잠시 후 비행법기에 올라탄 준혁은 하늘을 가르며 서쪽을 향해 쏘아져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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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스무 명이 손을 맞잡아야 겨우 둘러쌀 수 있을 법한 두께의 거대한 소나무, 그런 소나무 군락지 가장 깊은 곳.
하얀 털을 가진 호랑이 한 마리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다 한쪽 수풀을 향해 그르렁거렸다.
“거기 숨어있는 거 알고 있다. 나와.”
순백처럼 하얀 호랑이의 말에 비슷하게 생겼지만 귀밑부터 어깨로 이어지는 노란 줄무늬를 가진 호랑이가 수풀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이글대는포효. 어딜 가는 거지? 설마 또 외부에 나갈 건가?”
“네놈이 상관할 필요는 없지.”
이글대는포효의 말에 노란 줄무늬 호랑이가 이빨을 드러내며 입술을 뒤집었다.
“상관없다니? 네놈이 귀령을 몸에 받아들였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또 다른 귀령을 받아들이고자 밖으로 나가는 걸 수도 있지 않나? 우리 호왕족은 귀령들을 잡아먹어야 할 의무를 지고 태어났거늘···. 만약 소문이 사실이라면···. 네놈은 내 손으로 죽일 것이야.”
귀령이란 말에 하얀 털 호랑이가 피식 웃더니 눈알을 번들거렸다.
‘멍청한 것들. 내가 계약한 건 귀령 따위가 아니다. 비교도 되지 않을 더 위대한 존재라고.’
“걱정 마라. 찌르는가시. 나 역시 귀령을 잡아 죽이지 못해 안달 난 호왕족의 전사니까.”
할 말을 마친 이글대는포효는 상대방이 또 다른 반응을 보이기 전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찌르는가시가 그런 그의 등 뒤로 경고했다.
“당장은 믿어주지! 호왕족의 명예를 아는 자가 귀령에게 몸을 내어주진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곧 있을 그 날을 준비해야 하니 늦지 말고 돌아와라! 그렇지 않다면 족장 어르신께 네놈의 행방을 낱낱이 고할 테니까.”
“흥. 그러든가 말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