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명혼단 >
시안에 묻혀있던 결단기 수사들로부터 얻은 전리품에 관한 문제를 준혁에게 물은 후,
도천은 얼굴 가득 흥분과 감격을 담은 채 거처를 빠져나갔다.
도천이 나가자 준혁은 본격적인 수련 준비를 시작했다.
혈맥의 힘을 사용하는 주체가 본인이다 보니 지목족 혈맥의 힘의 혜택을 볼 순 없었지만,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명혼단과 용천무의 비늘을 흡입해야 했기에 아쉬움 따윈 없었다.
잠시 후, 주변 정리를 마친 준혁은 거처 중심에 좌정한 채 천천히 호흡을 가라앉혔다.
그렇게 3일간 명상을 거치며 원영의 상태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준혁이 입을 벌리자, 공간대에서 단약 하나가 쏘옥 빠져나오더니 입안으로 날아들어 갔다.
잠시 후 입속으로 들어간 명혼단이 스르륵 녹아 흡수되자, 단(丹)에서 대기 중이던 원영이 준혁의 정수리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오더니 입을 크게 벌리며 숨을 들이마셨다.
스으으읍-
그 순간 주변 영기가 요동치며 원영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원영은 영기를 음미하듯 입을 오물쪼물하다가 다시 단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는 단(丹)속에서 준혁과 동일한 자세로 좌정한 후 양손을 합장했다.
합-
마치 원영에게서 목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저음을 내는 무언가가 주변에 파동처럼 퍼져나갔다.
우웅-우웅-
그러자 원영의 몸 전체가 심장이 두근대는 것처럼 조금씩 커졌다가 파동을 퍼트리며 다시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원영의 크기가 커졌다가 작아지는 반복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한 달 후.
번쩍-
“후우···.”
원영이 명혼단의 기운을 온전하게 흡수하자 준혁은 눈을 번쩍 뜨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준혁의 눈빛이 금빛 광채를 뿜어내다가 순식간에 혈빛으로 바뀌며 으스스한 장면을 연출했다.
“대단하구나···. 수행은 크게 늘지 않았지만, 원영 자체가 성장한 느낌이라니···.”
탑에서 명혼단을 흡수했을 땐, 용천무가 걸어둔 제약으로 아무 효과를 보지 못했었다.
이번에 처음으로 기운을 온전하게 흡수하고 나니, 명혼단이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알고 있던 준혁도 깜짝 놀랄 만큼 그 효과가 상상을 불허했다.
명혼단은 혼을 강화해주는 단약.
영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원영은 명혼단을 흡수하자 점점 단단해지며 강해졌다.
그리고 그 영향은 곧장 준혁에게 나타났다.
준혁이 손을 앞으로 내밀며 가볍게 움켜쥐자, 단(丹) 속에 있던 원영도 준혁을 따라 조막만 한 손을 내밀며 움켜쥐었다.
콰직-
그 순간, 아무것도 없던 허공이 일그러지며 영기가 강하게 뭉쳤다가 터져나갔다.
만약 이것을 다른 이들, 그러니깐 율서나 목족의 여왕처럼 연형기 이후를 경험한 자들이 보았다면 놀라 자빠졌을 것이었다.
조금 전 준혁이 보여준 무형의 영기를 유형화시켜 임의로 부릴 수 있는 능력.
그것은 연형기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좋구나.”
용천무의 기운이 사라지기 전 자유자재로 사용하던 힘. 그 힘을 미약하게나마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되자 준혁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그렇게 본격적인 수련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준혁은 알지 못하는 일이지만, 명혼단을 이용해 혼을 단련하는 것. 그것은 선계에서 수련 중인 화신기에 오른 선인들도 오매불망 바라는 일이었다.
화신기를 넘어 소천경에 오르는 가장 기본 조건.
영기를 의지의 지배하에 두어서 영역을 선포하기 위해선, 막대한 의지력이 필요했고. 그것은 혼을 단련해야만 얻을 수 있는 능력이었기 때문이었다.
준혁은 자신이 식검을 얻었을 때만큼이나 천재일우의 기회를 접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또 다른 명혼단을 사탕 먹듯 삼키고 있었다.
남은 사탕이 90개가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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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후.
준혁이 섬을 봉쇄한 지 3년.
그 기간 동안 어마어마한 양의 영단이 섬에 풀렸고, 연기기부터 결단기까지 벽으로 느껴지던 수행을 돌파하는 자들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3년간 울릉도는 소리 없는 축제가 진행되고 있는 것과 진배없었다.
하지만 3년째 되는 오늘.
섬 이곳저곳에선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하아···. 개꿀···. 이 여기서 끝이라니···.”
그중 장탄식을 터트리는 자가 있었으니, 연단각을 책임지고 있던 나한이었다.
단약을 만드는 데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연단사 특성상 다른 이들보다 공법수련에 할애하는 시간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짧은 시간 몇 배의 수행 효과를 보여주는 3년은 마치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아쉽구나, 정녕 아쉬워.”
하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진법 효과가 사라져 버리자 부모를 잃은 사람처럼 무기력에 빠져버렸다.
만약 이런 호사를 몇십 년만 더 누린다면 원영기에 오르는 것도 꿈은 아닐 거라 여겼었거늘 3년은 너무나도 짧았다.
물론 그전과는 다르지만, 여전히 진법이 발동 중이긴 했다.
하지만 뽕 맛을 한번 본 나한에게 효과가 떨어진 진법은 미지근한 온탕에 들어온 것처럼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아···. 이것이 독이 될지 득이 될지 모르겠어.”
자신을 포함해 수련 뽕 맛을 본 자들이 과연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때 손녀 나설헌이 거처로 들어왔다.
“할아버지. 사쿠라님께 가셔야죠.”
사쿠라라는 말에 나한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내가 깜빡했구나. 같이 가자꾸나. 드디어 밖으로 나오셨다니. 인사를 드리러 가야지.”
3년 전까지는 자신과 같은 결단기였던 사쿠라.
그녀가 원영기에 오른 후 수행을 다지기 위해 거처에 틀어박혀 버렸기에 축하 인사를 하지도 못했었다.
나한은 은연중에 준혁의 연인으로 보이는 사쿠라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했었는데, 이제 원영기에 오르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그녀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공간대 안엔 선물까지 준비돼 있었기에 손녀를 대동한 채 그녀의 거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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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거처 앞에 사람들이 모여있어요.”
사쿠라가 원영기에 오른 후 다시 그녀의 거처로 이동해 온 최나연은 동굴 앞에서 느껴지는 사람들의 인기척에 사쿠라를 불렀다.
다른 이들은 원영기에 오른 사쿠라가 경지를 다지기 위해 두문불출한다고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거처에서 최나연과 천이화의 수련을 도와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버려 둬, 그것들이 나를 보러온 것이 아니라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어서 온 것이니까.”
“궁금증이요? 그게 뭐예요?”
원영기에 오르며 하늘 같은 사람이 되었지만, 여전히 언니라고 부르며 따르는 최나연의 머리를 쓰다듬은 사쿠라는 별것 아니란 듯 설명했다.
“저것들이 궁금한 것? 내가 최 수사의 거처에 들어간 후 원영기에 오른 것 때문이지. 내가 청명처럼 그분의 도움으로 원영기에 오른 것인지 아니면 자력으로 오른 것인지 궁금해하는 거야.”
사쿠라의 설명에 최나연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중요하지. 모두 너처럼 금수저를 물고 있는 건 아니니까?”
저급 단약이긴 하지만 최나연은 쉴 새 없이 단약을 먹고, 최고의 수행을 지닌 사쿠라의 지도까지 받는 상황.
하지만 본인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금수저란 말에 최나연이 두 손을 저었다.
“저랑 오빠랑 얼마나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는데요. 특히 오빠는 정말 악착같이 살았는걸요.”
사쿠라가 말할 금수저는 준혁 남매의 태생에 관한 것이 아닌, 현재 최나연의 처지를 말한 것이었지만, 그녀는 굳이 지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사쿠라의 미지근한 반응에 최나연이 두 주먹을 꽉 쥐며 자신은 흙수저란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정말이에요! 얼마나 힘든 나날이었는데요! 나는 아파서 오빠를 도와줄 수도 없고, 오빠는 내 걱정에 하루도 쉬지 않고···. 그땐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
과거가 떠오른 최나연의 눈가가 살짝 붉어지자, 사쿠라는 그녀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그녀 역시 준혁이 힘들게 살았다는 말에 동의했다.
“그래. 나도 잘 알지.”
최나연의 말에 일본에서 준혁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려본 사쿠라는 쓰게 웃음 지었다.
자신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피부를 화상 입은 것처럼 만들었었다는 사실을 후에 들었기에, 그때를 떠올리면 괜히 미안하고 가슴이 아팠다.
목숨을 구해주고, 원영기에 오르게 해준 준혁.
갚아야 할 것들이 끝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사쿠라는 자신이 준혁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연아.”
“네?”
“수련하자. 더 빡세게.”
“...갑자기 얘기가 왜 그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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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는 다시 개방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여러 업무를 다시 배정받으며 임무를 수행하는 마선문 문도들의 표정은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수행뿐 아니라 마음가짐 자체가 달랐다.
예전부터 성인봉 거처를 배정받으면 수행증진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소문이 돌긴 했었으나. 그 사실 여부를 떠나 100여 명 정도만이 혜택을 받는 것이었기에 남의 일처럼 여기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한번 수련 증진 뽕 맛을 본 자들은 다시 뽕 맛을 보고자 성인봉 거처를 배정받길 염원했다.
“자네 그 말 들었나?”
“뭐?”
“성인봉 거처, 그러니까 천은소 말일세! 그곳은 지금도 수련 증진 효과가 발동 중이라 하는 말!”
“물론일세! 그래서 지금 본청에 가는 길 아닌가.”
“본청? 그곳엔 왜?”
“임무를 받아야지!”
그리고 사람들의 염원에 발맞추어, 청명은 그동안 모호하던 공과를 점수표로 만들어 공시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이젠 어떤 일을 해야 높은 점수를 받는지 알 수 있었기에, 위험하고 어려운 임무를 자처해 점수를 빠르게 높일 수 있는 것.
그렇게 울릉도에 자리한 마선문은 또 한 번 들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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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간의 봉문을 풀고 마선문이 새로운 시작을 시작한 그때.
준혁은 10번째 사탕, 아니 명혼단의 소화를 마친 후였다.
“후우···. 갈수록 쉽지 않구나.”
처음 명혼단을 흡수했을 땐, 겨우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었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흡입하는 양이 많아지자 원영은 명혼단을 소화하는것을 힘들어하기 시작했다.
마치 지금의 수행으론 이 정도가 한계라고 선이라도 그어진 것 같았다.
“지금도 충분하다. 욕심내지 말고 천천히 가자.”
사실 3년이라는 시간은 수도자에게 짧은 순간이나 다름없었기에, 그동안 10개의 명혼단을 통해 얻은 이익을 생각한다면 어마어마한 성취를 이룩한 것과 마찬가지.
준혁은 명혼단 섭취를 중단하고는 품에서 잠자고 있는 도마뱀 두 마리를 꺼내 들었다.
“이것도 문제고 말이야.”
명혼단을 제외하고도 한가지 문제는 용천무의 비늘을 연화시키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원영이 명혼단을 체화시키는 동안 용천무의 비늘 하나를 삼켜 천천히 연화시키던 준혁은 그 어떤 방법을 써도 비늘 안에 담긴 힘을 뽑아내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용각족이 아니면 접근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비늘을 녹여보려고 애쓰던 준혁은 고민을 거듭하다가 자신이 직접 연화시키는 것이 아닌, 알에서 나온 도마뱀을 통해 비늘이 연화되는 과정을 알아내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하지만 도마뱀 두 마리는 여전히 손바닥만 한 크기를 유지한 채,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중이었다.
“흠···.”
새근거리며 잠들어있는 도마뱀을 보는 준혁의 눈빛은 여러 감정을 내포하고 있었다.
“설마···. 너무 많은 기운을 받아들였기 때문인가?”
용천무가 준비해놓은 안배대로라면, 한 명의 용각족이 1층부터 18층을 한번 완주하며 얻어야 하는 기운이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두 마리 도마뱀은 정해진 양의 50배를 흡수했으니, 어쩌면 너무나 많은 기운을 소화해야 했기에 잠에서 깨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준혁의 그런 예상은 정확했다.
두 마리 도마뱀은 그저 잠들어있는 것이 아닌, 몸을 가득 채운 고밀도의 영기와 탑의 기운을 소화하기 위해 한시도 쉬지 않고 성장하고 있었던 것.
다만 그런 일들이 내면에서 폭풍처럼 일어나고 있었기에 겉으로는 그저 잠에 빠진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한참 동안 도마뱀을 바라보던 준혁은 품 안으로 두 마리를 집어넣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명혼단을 흡수하는 것도 용천무의 비늘을 연화시키는 것도 힘들다 여겼기에 이제부턴 화목단과 그동안 모아온 법기들을 이용해 수행을 상승시킬 예정이었다.
그전에 잠깐 바람 좀 쐬며 기분 좀 전환하려 했다.
하지만 준혁이 거처 밖으로 나오자마자 마주한 것은 상쾌한 공기도,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멀리서 쏜살같이 날아드는 전음부.
청명이 날려 보낸 그것이 거처를 막 벗어난 준혁의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준혁은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힌다고 생각하며 전음부를 발동시켰다.
-백두 비경에서 지시하신 신비경을 찾아냈습니다요. 부르신다면, 자세한 사항은 그곳을 발견한 자와 함께 찾아뵙겠습니다요.
어떤 방해도 하지 말라는 준혁의 명령에 전음부로 소식만을 알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