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울릉도 봉쇄 (1) >
“뭐 하는지 안 보이느냐! 지금 그놈이 나타···.”
왕가홍은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이를 향해 소리를 지르다가 섬뜩함을 느끼고는 삐그덕 소리가 나는 것처럼 어색하게 몸을 돌렸다.
“난 건지도 모···. 를···. 사···. 최, 최!”
자신의 등 뒤에서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준혁을 보더니, 왕가홍은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벌벌 떨었다.
“설마 나를 잡기 위해 이 모든 걸 준비하신 겁니까?”
벌벌 떠는 왕가홍을 보며 준혁의 입가가 살짝 비틀렸다.
탑과의 연계가 끊기며 수행이 떨어지기 시작했다고는 하나, 영기에 대한 민감도는 화신기 수준이 유지되고 있던 준혁.
그런 그는 기감을 퍼트릴 필요도 없이 유적 입구 지하가 무언가를 구속하고 가두기 위한 진법으로 도배되어 있다는 걸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중에는 영력을 억제하기 위한 진법도 동서남북 사방으로 중첩되어 펼쳐져 있어, 일반 수사라면 환영진에 갇힌 순간 모든 수단이 막힐 정도로 철저한 준비였다.
그랬기에 준혁은 유적에서 나온 순간 발동되던 환영진을 가볍게 정지시켜버리고는 적마도의 힘을 연달아 사용해 진법의 중추로 이동해 버렸다.
“최 수사님! 그것이!”
왕가홍은 사색이 된 얼굴로 준혁의 이름을 부르짖었고, 동시에 주변에 배치되어 있던 네 명의 수사도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파악하고는 곧바로 진법을 발동시키는 열쇠 역할의 깃발을 꺼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찰나의 순간, 준혁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왕가홍은 이미 기호지세라는 걸 깨닫고는 발아래로 영기를 쏘아 보내며 수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전부 발동!”
그 순간 진법의 중추에 해당하던 왕가홍이 서 있던 곳에서 강렬한 영기가 터져 나왔고, 동시에 네 명의 수사는 동서남북 사방을 향해 깃발을 일직선으로 휘두르더니 땅속에 꽂았다.
우우웅-
“오호.”
그 모습에 준혁은 의미 모를 감탄사를 내뱉었다.
직후, 다섯 사람의 신호에 맞춰 각종 진법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영기파동을 퍼트리기 시작하니, 지하 공동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법의 중추란 말은 진법을 유지 관리, 조종하기 위한 자리이기도 하지만, 진법의 총체가 집약된 곳이기도 하다는 것.
왕가홍은 생전 처음으로 죽을힘을 다해 전신의 기운을 폭발시키며 진법을 조종했다.
그나마 준혁이 함정을 알아차리고 소리 없이 등 뒤로 다가와 놓고도, 자신을 포함한 수하들을 바로 처리하지 않았던 것이 천운이라고 생각하며.
쿠우웅-
화악-
순식간에 발동된 진법은 눈에 보일법한 영기파동을 퍼트리며 준혁을 집어삼켰다.
그 모습을 보며 왕가홍은 안일한 준혁을 비웃으며 재빠르게 수결을 맺어 진법을 빠져나가려 움직였다.
“이제! 모두 탈출한다!”
아니 움직이려 했다.
그때, 지금껏 가만히 왕가홍이 하는 짓을 지켜보던 준혁이 한쪽 발을 살짝 들었다가 사뿐히 내리찍었다.
콰앙!
그 순간 지면과 부딪친 준혁의 발에서부터 시작된 영기파동이 주변을 휩쓸고 지나가더니, 유적 입구 지하를 가득 메운 진법을 한꺼번에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왕가홍을 포함한 네 명의 수사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무형의 힘에 구속당해 허공에 둥둥 떠올랐다.
“커억! 이, 이게 무, 무슨!”
준혁이 어떤 술법을 사용한 것도 아니고 그저 발을 한 번 굴렀을 뿐인데, 황천문의 지원과 자신 가문의 역량이 총동원된 준비가 단숨에 무력화되자, 왕가홍의 얼굴은 창백함을 넘어서 푸르죽죽하게 변해버렸다.
“살려 달라며 빌 줄 알았더니, 제법 용기가 있으십니다그려?”
준혁의 말에 허공에서 아등바등하던 왕가홍이 필사적으로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직전에 죽이려고 과감히 행동하더니 곧바로 살려달라 비는 왕가홍을 보며 준혁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손을 가볍게 젓자, 무형의 힘이 더욱 강하게 조여 들어가 다섯 명을 옥죄였고, 잠시 후 다섯은 시체처럼 축 늘어져 버렸다.
“응결식에서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했거늘, 부족했나 보구나.”
원영기인 안토니오를 한 수만에 처리해버린 건, 응결식을 방해한 괘씸죄도 포함되어 있지만, 세상에 경고를 한 것과 마찬가지.
자신의 경고가 충분히 먹혀들어 간 것 같지 않아 준혁은 입안이 썼다.
그러다 축 늘어진 왕가홍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하긴···. 욕심은 공포를 이기는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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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법이 파괴되며 터져나간 뒤, 황폐해진 지하.
준혁이 가볍게 손을 젓자 땅속에서 영력이 뭉치더니, 꽃잎 몇 장이 준혁의 손으로 날아와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유적에 들어가기 전에 준비해 놓았던 힘을 회수한 준혁은 지상으로 향하는 통로를 향해 움직였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실이 달린 것처럼 지하에서 준혁을 기습하기 위해 기다렸던 다섯 명의 수사들이 둥둥 떠서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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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이것 참.”
지하 입구를 지나 진시황릉 유적지를 통과해 지상으로 올라온 준혁은, 지상으로 통하는 입구 주변을 포위하듯 빙 둘러 있는 수사들을 보고는 혀를 차고야 말았다.
“하긴, 인해전술은 중국의 특기지.”
한 가문 혹은 한 문파의 단일 세력은 아닌 듯, 어디서 끌어모았는지 각양각색의 모습을 갖춘 결단기 수사들이 수십이었다.
수십 명의 결단기 수사들은 준혁이 입구에서 나오자 각각의 법기를 꺼내며 전투준비에 들어갔다.
그 모습에 준혁은 짜증이 솟구치려다 의문이 생겨났다.
‘그러고 보니···. 왜 도망치지 않지?’
아주 특수한 경우라면 모를까, 대부분의 수사가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은 자신의 안위였다.
그렇다면 준혁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1차로 준비한 함정이 실패했다는 뜻이니, 아무리 많은 보상을 받기로 했다 한들 눈앞의 수사 중 몇이라도 도망가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러다 한가지 가정에 도달했다.
‘아! 설마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이곳에 온 자들인가?’
만약 그렇다면 현 상황이 이해되었다.
원영기의 숫자만 부족했을 뿐, 땅덩어리에 비례해 중국의 결단기 및 그 이하 수사의 수는 차고 넘치는바.
그들 중 준혁에 대해 전혀 모른 채 수련만 하던 자들을 끌고 오는 게 아주 어려운 일처럼 보이진 않았다.
피식-
준혁은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며, 한편으론 왕가홍의 꾀가 여러 가지 상황을 염두에 두었음을 깨닫고는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토율서.”
준혁이 이름을 부르자 허공에서 흙으로 만든 다람쥐 석상이 나타나더니, 땅이 푸딩이라도 되는 것처럼 포옹하고 들어갔다.
그러자 땅속에서 부르르 진동이 느껴진다 싶은 순간, 이곳저곳이 쟁기질이라도 한 것처럼 뒤집히더니 그 안에서 흙 인형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탑 입구에서 나타났던 것들과 동일하게 생긴 흙 인형들은 나타나기가 무섭게 결단기 수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그들이 반항할 틈도 없이 하나의 인형이 한 명의 수사를 잡아채며 땅속으로 끌고 들어가 버렸다.
“으악!”
“사, 살려줘!”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몇 명은 흙 인형을 피해 몸을 날리며 공격을 시도했고, 또 몇 명은 공격을 포기한 채 허공으로 치솟았다.
“도망치는 건 허락할 수 없지.”
준혁은 흙 인형들의 성능을 지켜보다, 허공으로 도망치는 자들을 향해서만 손을 까딱거렸다.
잠시 후, 지상 입구를 지키던 자들이 전부 땅속으로 끌려들어 가자, 준혁은 지하에서 데려왔던 자들 중 왕가홍을 제외한 나머지도 바닥에 던져버렸고, 기다렸다는 듯 땅속에서 흙 인형이 나타나더니 전부 끌고 들어가 버렸다.
준혁이 학살을 즐기는 살인마도 아니고,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죽일 수 있는 하급 수사들을 전부 죽일 생각은 없었다. 응결식과는 상황이 다른 것.
그랬기에 토율서의 능력을 확인도 해볼 겸 전원을 땅속에 가둬버린 것이었다.
흙 인형을 부리며 계약자에게 흙 계열 신통을 부여하는 것. 그것이 토율서의 능력이었다.
제이엘이 계약한 장구수와 전혀 다른 원소를 다루고 있었지만, 능력으로 보자면 비슷한 계열.
토율서의 성능을 확인한 준혁은 만족한 표정으로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는 위로 치솟아 오르더니 잠시 후엔 빛 꼬리를 남기며 하늘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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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울릉도로 날아온 준혁은 성인봉에 내려섬과 동시에 섬 전체를 빠르게 훑어보고는 전음부를 꺼내 날렸다.
잠시 후 기다렸다는 듯 사쿠라가 여인들을 꼬리처럼 달고 나타났다.
“잠깐 다녀오신다더니···. 이게 몇 년 만이셔요.”
“오빠! 걱정했잖아! 언니한테 연락한다고 했다면서 연락도 없고!”
“스승님! 걱정했어요!”
소녀처럼 준혁을 맞이하는 사쿠라와 달리 최나연은 뿔난 황소처럼 달려들었고, 천이화는 진심으로 준혁을 걱정했는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럴만한 사정이 생겼었다. 그리고 걱정할 게 무어 있느냐.”
준혁은 동생을 달래준 후, 천이화와 사쿠라에게 안부 인사를 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에 맞춰 여러 명의 인기척이 빠르게 날아와 준혁 앞에 부복했다.
“어르신 오셨습니까요”
“도주! 부르셨습니까?”
청명을 필두로 한 마선문을 이끄는 주요 인사들이었다.
준혁은 가볍게 손을 내저어 사쿠라를 비롯한 여인들을 한쪽으로 밀어버리고는 마선문의 인사들 전원을 한 번씩 바라보다 청명을 향해 입을 열었다.
“청명, 이시간부로 섬의 문을 닫는다.”
몇 년 만에 나타나 해후를 만끽하기도 전, 느닷없는 준혁의 선언에 몇몇 인사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비각주가 ‘이게 무슨 말이야?’라는 표정으로 입을 열려고 한 순간, 청명이 크게 답했다.
“예! 하명하신대로 하겠습니다요!”
준혁의 도움으로 결단기를 뚫어버린 청명은 준혁이 죽으라고 명한다면, 그것마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여기며 단번에 목숨도 끊어버릴 준비가 돼 있는 상태.
그 어떤 것에도 의문을 표하지도 않았다.
청명이 즉각 답하자, 준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도천을 향해 살짝 손을 저었다.
그러자 준혁의 손끝에서 흙으로 만든 다람쥐 석상이 날아가더니 도천 앞에 이르렀다.
“도천. 이것을 가지고 중국 시안으로 가거라. 그곳에 나를 습격했던 놈들을 전부 묻어두고 왔으니, 그것들을 데리고 황천문을 찾아가 내 이름으로 대가를 받아내 오거라.”
“감히! 단 하나도 살려두지 않겠습니다!”
함께한 시간에 비한다면 이상하리만치 충성심이 강한 도천이 이를 아득 깨물었다.
“죽일 것이면 내 손으로 처리했겠지. 대가만 받아오면 된다.”
“예!”
힘차게 대답하는 도천에게 전음으로 몇 가지 사항을 지시한 준혁은 곧이어 다른 이를 불렀다.
“그리고 비각주.”
“예! 도주!”
준혁은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던 비각주가 신색을 빠르게 고치며 대답하자, 피식 웃고는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잔뜩인 것 같군. 말해 보거라.”
청명이나 도천과 다르게 납득해야만 행동에 옮기는 오명한은 준혁이 발언 기회를 주자 기다렸다는 듯 속사포같이 말을 뱉어냈다.
“무례한 말인 줄 알고 있으나 한 마디 올리겠습니다. 섬의 문을 닫는다 하심은 봉문을 일컫는다 생각되옵니다. 하지만 봉문이란 말을 꺼내지 않으신 것으로 보아 말 그대로 울릉도에 출입하는 인원을 전부 통제하라는 의미일 터. 만약 그렇게 한다면 지금껏 어렵게 구축하고 있던 것들이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비각이라도 활동을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게 아니라면 이유라도 알고 싶습니다.”
정보를 다루는 비각은 울릉도 밖의 수많은 곳에 연락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만약 섬을 드나드는 인원을 전부 통제한다면 그때부턴 정보가 통제되는 것과 마찬가지. 흘러나가는 정보도 없을 테지만, 들어오는 것도 없을 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말해주려 했다.”
준혁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자리를 비우고 난 후 한 달 정도 지나 수련 증진 효과가 사라져 다들 당황했을 것이다.”
이곳에 모인 자들은 전부 마선문의 주축들.
전원이 성인봉에 거처를 두고 있었기에 준혁의 말의 의미를 단번에 파악했다.
개중 몇몇은 그렇지 않아도 그것이 가장 궁금했는지 움찔하는 기색을 보였다.
다들 진법을 이용해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인 준혁을 하늘을 우러러보듯 여기고 있었는데, 그런 준혁이 사라지며 수련 증진 효과마저 사라져버려서 무언가 비밀이 있다 여기고 있었던 것.
준혁은 수하들이 어떤 의문을 가지고 있을지 알고 있었지만, 사실을 알려줄 생각은 없었기에 자신이 할 말만 계속했다.
“그렇기에 당분간 내 수련을 포기한 채 전심전력으로 거처에 펼쳐둔 진법을 강화할 생각이다. 아니, 정확히는 거처뿐만 아니라 그 주위의 산맥까지.”
누군가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 말은···. 수련 증진 효과가 더 높아질 거란 말입니까? 그것도 성인봉 주위 산맥까지?”
준혁은 고개를 끄덕여준 후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다. 여전히 성인봉의 거처가 가장 효과가 높을 테지만, 주변까지 효과를 공유할 것이다.”
준혁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비각주 오명한이 서둘러 물었다.
“그렇다면 섬의 문을 닫는 이유가···. 저희의 수련 때문이란 말씀이십니까?”
고개를 끄덕여준 준혁에게서 평소답지 않은 따뜻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아! 그래서 섬을···.”
예전에도 많게는 3배가량의 수련 증진 효과가 있었는데, 그보다 효과가 높아진다는 건 엄청난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시키지 않아도 수련에 매진하게 될 터. 대부분은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성인봉 주위로 몰려들 터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섬의 치안이 나빠질 건 불 보듯 뻔했기에, 준혁은 마선문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자들을 제외한 모든 인원을 섬 밖으로 추방하려 했던 것.
준혁의 명령에 담긴 참뜻을 파악한 이들이 하나같이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그럼 모두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시행하도록, 진법은 내일 자정부터 발동시킬 테니.”
“예!!”
모두 하나 된 듯 우렁차게 대답하더니 빠르게 떠나갔다.
수도자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수행을 올리는 것이었기에, 성인봉을 내려가는 모두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자신들을 위해 본인의 수련을 포기하려는 준혁을 칭송하며 다시 한번 마선문에 몸담은 자신을 칭찬했다.
잠시 후, 모든 이들이 자리를 비우자, 준혁이 씁쓸한 듯 혀를 차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지···. 전부 사라지기 전 이렇게라도 활용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