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탑의 주인 (3) >
명혼단을 흡수했지만, 원영이 비늘에 덮여있기 때문인지 별 효과를 보지 못한 준혁은 우선 원영에게 자유를 주는 게 먼저라는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그 일은 쉽지 않았다.
기목청과 마찬가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용천무가 걸어둔 제약.
탑과 하나 되며 원영이 탑에 구속돼버린 일로 원영은 자유의지를 잃고 맥없이 쓰러져있을 뿐이었다.
광신체령투선공을 운용하며 달의 정기를 이용해보았고, 혈단법으로 정혈을 터트려 원영을 도와보려고도 했지만, 그 어떤 것도 소용이 없었다.
원영이 힘을 쓰지 못한다면, 수행을 올려줄 화목단이나, 혼을 강화해줄 명혼단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는 일.
준혁은 분광소가 탑을 등반하는 동안 마지막 층에서 도움을 주는 일을 제외하곤 모든 것을 멈춘 채 원영의 회복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돌파구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식혈만복이 효과가 있다.”
율서에게서 얻은 용각족의 수련법은 그들 종족 특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기에, 준혁으로서는 아무런 효과도 이득도 얻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용각족의 수련법이 영수족과 비슷하게 상대방의 기운이 응축된 심장 혹은 다른 부위를 이용한다는 것에 착안해, 식혈만복을 적용해보자 마치 준비되어있었다는 듯 원영이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저 기운을 차리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정신을 차린 원영은 스스로 식혈만복의 기운을 운용하더니 몸에 붙어있던 수많은 비늘 중 하나를 떼어내 아득- 거리며 씹어먹기 시작했다.
처음엔 수백 번 깨물어도 꿈적도 하지 않던 비늘은 점차 조금씩 깨져나가더니 원영에게 흡수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원영에게 흡수돼 사라졌던 비늘은 원래 있던 자리에 새롭게 생겨났지만, 그전보다 구속력이 약해졌는지 살짝 옅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준혁은 식혈만복이 그저 사람의 사체를 먹어 치우며 수행을 올리는 공법이 아닌, 영수족의 수련법을 사람이 익힐 수 있게 만들어놓은 공법이란 걸 알아차렸다.
“그때 극악한 공법이라며 익히지 않고 폐기해 버렸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뻔했구나.”
식혈만복을 처음 익혔을 땐 혈단법에 필요한 보조용으로 몇 가지 기능을 사용하기 위함이었는데, 시간이 지나 크게 도움이 되니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을 지식이란 없음을 깨닫는 중이었다.
그때 전송진이 발동되며 등반을 마친 분광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분광소는 그전과 동일하게 보상들을 전부 수거한 후 준혁에게 다가와 식검과 분리됐다.
“드디어 절반이군.”
분광소가 탑을 등반한 지 2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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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2년 후.
준혁은 마지막 등반을 앞둔 상태에서 고민에 빠져있었다.
이제 분광소를 이용해 한 번만 더 탑을 등반한다면 탑에 준비돼있던 모든 보상을 얻음과 동시에 탑에 속박되어있던 육신이 자유를 되찾게 되는 것.
하지만 안일하게 생각하다 율서에게 당한 것을 떠올린 준혁은 마지막 등반을 하기 전 준비에 나섰다.
만에 하나라도 율서가 한 말이 거짓이거나, 아니면 율서조차도 용천무에게 속아 있던 것이라면?
마지막 등반을 끝낸 후 해방이 아닌 소멸이 기다린다면 그건 절대 사양이었다.
계획을 세운 준혁은 용천무의 힘을 이용해 탑 밖으로 나가 율서가 땅속에 묻어둔 출구를 원래대로 돌려놓은 후 돌아왔다.
그리고는 기운을 북돋을 진법을 탑 곳곳에 설치하고는 용각족을 약화할 진법까지 연달아 발동시켰다.
마지막으로 분광소를 식검과 결합하며 적마도와 귀원패뿐만 아니라 삼청조 역시 공명시켰고, 동시에 자신은 언제든지 원영 상태로 몸에서 분리될 준비를 마쳤다.
식혈만복으로 비늘을 먹기 시작한 후 원영은 온몸에 반투명한 비늘을 가진 어인 같은 모습으로 영력을 사용할 수 있는 상태였다.
삼청조를 분광소 안에 집어넣은 이유는 혹시라도 모든 계획이 실패했을 경우, 율서가 말했던 방법으로 삼청조를 제물로 바쳐 탑의 구속을 넘겨버릴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율서가 탑에 얽매여 있던 예전과는 상황이 달랐기에, 삼청조가 가진 마선기를 탑에 넘겨주는 조건으로 탑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지만, 준혁은 할 수 있는 준비는 전부 해놓을 생각이었다.
잠시 후 모든 준비를 마친 분광소가 탑 밖으로 나가자, 준혁은 자리에 좌정한 후 향후 벌어질 상황들을 심상 속에서 모의실험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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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했다. 대기해.”
100번의 등반을 끝낸 분광소는 보상을 전부 수거해 준혁에게 건넨 후, 원래의 단검으로 돌아가지 않고 분신체를 유지한 채 대기했다.
그 모습에 분광소를 마주하고 서 있던 준혁은 수결을 맺어 분광소의 몸 전체에 금빛 진법을 새겨넣었다.
그리고는 삼청조의 기운을 극대화하며 분광소를 포함한 모든 마선들의 기운을 최대한 억제했다.
만약 탑이 구속을 풀어주지 않고 공멸을 택한다면, 준혁은 주저 없이 분신체를 제물로 사용해 버릴 생각이었다.
그 과정에서 삼청조만 제물로 바쳐지게 설계를 마쳤지만,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본인만이라도 빠져나오려는 마음가짐까지 끝낸 상태였다.
잠시 후 모든 임무를 마쳤다는 듯, 탑이 울기 시작했다.
키르르-
기이한 소리와 함께 진동을 시작한 탑.
그와 동시에 준혁은 몸 안에서 원영을 구속하고 있던 기운들이 한곳으로 모이는 이상 현상을 느끼고는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했다.
몇 호흡할 시간이 지나자, 탑의 진동은 점차 강해져 갔고, 그에 맞춰 준혁의 원영을 감싸고 있던 비늘들이 전부 벗겨지더니 하나의 기운으로 뭉쳐 심장으로 치솟아 올라갔다.
그리고는 심장에 닿은 비늘의 기운은 심장 안에 뭉쳐있던 용천무의 기운을 빨아들이더니 강하게 압축하기 시작했다.
커억-
잠시 후 준혁이 피를 토하듯 기침을 하자, 남색 구슬 하나가 준혁의 입속에서 튀어나와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하강했다.
그리고는 밝은 빛을 내뿜기 시작한 남색 구슬은 율서가 이용하던 용천무의 모습이 되어 환영처럼 준혁 앞에 내려섰다.
그 모습에 준혁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전투태세를 준비함과 동시에, 분광소의 몸에 새겨놓은 진법을 발동시켰다.
하지만, 준혁이 염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남색 구슬의 기운을 이용해 헌신한 용천무의 환영은 반가운 이를 맞이하는 표정으로 준혁을 보며 말했다.
“율서, 내 부탁을 전부 이행해 줘서 고맙네.”
환영은 사고를 할 수 없는, 그저 녹화된 영상 같은 것이었다.
“이제 자네도 느끼고 있을 테지? 맞네. 자네가 느낀 그대로일세. 우선 나의 오랜 친구에게 사과부터 함세.”
환영은 한 손으로 양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더니 손가락으로 이마와 입술을 만지고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마 용각족 고유의 사과법 같았다.
“자네의 마선기가 있어야만 내 후인들에게 힘을 나눠줄 수 있었기에 거짓을 말해야만 했네. 그렇네. 자네에게 주겠다고 한 왕의 정수는 이미 탑을 오른 100명에게 나눠줘 버렸지. 이제 이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아주 미약한 힘이 남은 것의 전부라네.”
사과로 말문을 연 용천무는 율서에게 탑의 진정한 의미와 기능을 천천히 설명했다.
용천무는 누군가에게 패배한 후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 용각족의 미래를 걱정해 탑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힘이자, 용각족 왕의 힘인 ‘왕의 정수’를 자신의 신체 일부였던 100개의 비늘에 나눠 담아 후인들에게 나누어줄 계획을 세웠다.
너무 강대한 힘이라 개인이 가질 수도 없으니 힘을 균등하게 나누어 수많은 족인 들이 나눠 가질 수 있게 안배한 것.
그 과정에서 율서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그를 속여 탑에 얽매이게 해놓았던 것이었다.
결국 율서는 모든 일을 마친 후에도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하고 팽 당할 운명이었다.
‘그럼 내가 가진 100개의 비늘을 전부 연화시키면 왕의 정수를 온전하게 이어받는 건가? 기목청 정도의 강자의 힘을?’
300개의 법기와 100개의 비늘, 100개의 발톱, 그리고 99개의 명혼단.
모든 건 준혁의 공간대 안에서 고이 대기 중이었다.
만약 용천무가 사고를 할 수 있었다면, 종족의 모든 안배를 훔쳐 갔다며 준혁을 때려 죽이려고 했을지도 몰랐다.
그런 사정도 모르고 용천무는 아낌없는 나무처럼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노여워 말게나. 그대의 노고에 답한다기에는 부족하나 내가 생전에 사용하던 영보를 남겨두었네. 물론 자네에겐 크게 의미가 없는 물건일 테지만, 자네의 다음 계약자에겐 큰 힘이 될 것이 분명하네.”
용천무의 말이 끝난 순간 탑의 천장에서 강렬한 빛기둥이 떨어져 내렸고, 빛기둥 안엔 세 가지 물건이 둥둥 떠 있었다.
“천영보급인 전함과 내 본명기인 울부짖는 날개, 그리고 마지막은 자네가 다음 계약자는 인족으로 할 것이라고 말한 게 생각나 약하디약한 인족의 몸을 개조할 화령관을 남겨놓았네. 어떤가? 나의 배려가?”
말이 끝나기도 전 빛기둥이 사라지며 세 가지 물건이 준혁에게로 날아왔다.
작게 축소된 기다란 배 모형과 뼈가 앙상한 푸른 날개, 그리고 관처럼 생긴 네모난 법기.
준혁이 영력으로 물건들을 허공에 띄운 채 어떤 장치가 되어있나 조사하는 사이 용천무는 마지막 인사를 했다.
“하하하, 욕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구먼. 율서. 이 친구야. 이 못난 계약자를 만나 그동안 고생했네. 자네 말대로 우리가 조금만 더 빨리 만나 동화율이 높았다면···. 그놈에게 당하진 않았겠지···. 그럼 율서. 영원불멸하는 나의 친구여. 다음엔 꼭 그토록 찾던 심영근자를 만나길 진심으로 바라네.”
그리고는 준혁이 물건들을 공간대에 집어넣자, 용천무의 환영은 빛 안개처럼 흩어지더니 허공엔 남색 구슬만이 남았다.
파스르르-
그 순간 준혁은 화신기에 이르던 자신의 수행이 떨어지기 시작함을 느꼈다.
그 공허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콰르릉!
하지만 공허함에 허탈함을 느끼기도 잠시, 용천무의 환영이 사라지자 탑은 미친 듯이 진동하며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요동쳤고, 탑을 이루고 있던 수많은 결계 들이 힘을 잃기 시작했다.
준혁은 아차 하는 생각으로 분광소를 식검과 분리하며, 혹시나 하는 생각에 준비해 놓았던 모든 것들을 회수하고는 마지막으로 남색 구슬을 낚아채며 식검과 적마도를 공명시켰다.
파앗-
그리고 준혁이 탑에서 벗어난 순간.
거대한 거인이 힘을 잃고 쓰러지듯, 탑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 여파는 탑 주위뿐 아니라 유적 전체를 강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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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릉 지하.
처음엔 모든 이들이 주목하던 곳이 이제는 버려진 것처럼 관심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오직 왕가홍만이 가문의 재산을 털어가며 유적을 지킬 뿐이었다.
“정말 죽었단 말인가···.”
그동안 수차례 자신을 설득했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의 조언을 무시한 왕가홍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후회가 생겨나는 중이었다.
수백 년을 사는 수도자이니 5년이란 시간은 아깝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황천문에서 가문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 마음 아팠다.
수많은 황가의 친인척들이 모여있는 황천문.
그곳은 모두가 동료인 것처럼 굴어도 조금만 발을 헛디디면 득달같이 몰려와 구렁텅이로 밀어버리는 치열한 전쟁터 같은 곳이었다.
“망할 놈! 원영기 수사를 한 수만에 처리한 놈이 그깟 유적 하나 제대로 조사하지 못하다니!”
왕가홍은 있지도 않은 자를 욕하며 간신히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때, 진법을 조율하고 있던 수하 하나가 급하게 신호를 보냈다.
“유적 입구에 매설된 환영진이 발동됩니다!”
수하의 말에 정신이 번쩍든 왕가홍은 재빨리 품속에서 몇 장의 부적들을 꺼내 단숨에 찢어버렸다.
5년간 자신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기다려왔던 신호탄, 아니 신호부였다.
부적이 찢어지며 수많은 빛줄기가 진법을 통과해 통로를 따라 위로 올라가자, 왕가홍은 진법의 중추로 다가가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때 환영진의 발동을 알렸던 수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왕가홍을 보며 말했다.
“왕 수사님. 이게···. 이상합니다.”
“뭐가 말이냐?”
“환영진이 발동된 걸 보면 유적 입구에 누군가 나타났다는 뜻인데···. 아무것도 잡히지가 않습니다.”
정확히는 진법만 발동되었을 뿐, 그 안에 정신을 잃거나 혹은 환영과 싸우고 있어야 할 대상이 없는 것.
왕가홍은 수하의 말에 빠르게 수결을 맺어 중첩되어있는 진법을 움직이며 상황을 파악하려 행동했다.
“그자는 원영기 수사다! 우리가 모르는 술법을 사용할 수도 있으니, 정신을 집중해! 모든 진법을 전부 발동시켜라!”
그때. 누군가 왕가홍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왕 수사.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