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탑의 주인 (2) >
자신의 모습으로 변한 분광소를 탑 밖으로 보내기 전에 준혁은 품속에 있던 도마뱀 두 마리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새근새근 잠들어있던 두 녀석에게 정혈을 한 방울씩 주입해 금제를 걸며 동시에 종속의 인을 새겼다.
그리고는 분광소의 품속으로 잠든 녀석들을 옮겨주고는 빈 공간대 하나와 진법 깃발들을 꺼내 건네주었다.
“석상을 처리한 후 생겨나는 기운은 이 녀석들이 흡수할 수 있게 하고, 공간석은 이 안에 담아오거라.”
분신은 본신과 연결돼있기에 심상으로 생각만 해도 될 일이었지만. 사람의 형상을, 그것도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있는 분광소를 보고는 사람을 대하듯 말을 걸었다.
당연히 대답 없이 대기하는 분광소를 보며 피식 웃은 준혁은 적마도와 귀원패를 소환해 던져주고는 수결을 맺어 정혈을 뱉어냈다.
잠시 후 적마도와 귀원패를 삼킨 분광소가 수많은 꽃잎으로 뒤덮이다가 번쩍 빛을 내며 탑 안에서 사라졌다.
“나보다 낫군.”
식검과 공명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인지, 분신은 다른 마선들까지도 동시에 공명시킬 수가 있었다.
만약 본신보다 수행이 한 단계 낮지 않았다면, 어쩌면 동일한 조건에서 싸운다면 분신이 훨씬 강할지도 몰랐다.
+++
탑 밖으로 나온 분광소는 번쩍하며 순식간에 탑 입구로 이동하더니, 입구 문이 열리려는 낌새와 동시에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었고, 마치 시간에 쫓기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하루라도 빨리 유적에서 벗어나고픈 준혁의 마음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했고, 용천무의 힘이 소비되는 걸 최소한으로 하려는 이유이기도 했다.
탑 안으로 들어선 분광소는 석상이 깨어남과 동시에 몸체를 터트려버렸다.
완영기였던 준혁도 힘들지 않게 올라갔던 탑 등반, 연형기인 분광소는 기교도 부리지 않고 그저 무식하게 처리할 뿐이었다.
순식간에 1층을 깔끔하게 정리한 분광소는 도마뱀들이 기운을 전부 흡수하자, 바닥에 떨어진 공간석을 전부 회수하고는 2층으로 향했다.
+++
기감을 퍼트릴 때와는 조금 달랐지만, 탑을 통해 분광소의 행동을 지켜보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다만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었기에 기의 움직임을 통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유추할 뿐이었다.
“정말 빠르구나.”
연형기에 오른 분광소는 정말 질주하는 말처럼 탑을 올랐다.
9층에서 나타난 완영기 초기 용각족마저도 단숨에 때려 부수고는 10층으로 올라가 아무 법기나 집어 들어 공간대에 넣더니 곧장 11층으로 이동했다.
11층부터 15층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나타나면 달려들어 대가리를 날려버리고는 심장을 뚫어버렸다.
“무식하군···. 나완 달라.”
준혁은 술법을 사용해 고수사의 위엄을 보이던 자신의 모습을 애써 상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수행 차이가 있었기에 여유롭게 분광소를 날려 적의 목을 깔끔하게···.
“아! 분광소는 분광소를 날릴 수 없겠구나.”
15층에 올라선 분광소는 이번에도 아무 법기나 집어 들더니 곧장 16층으로 향했다.
하지만 16층부터는 같은 연형기 수행을 가진 상대가 나타났기에 단숨에 돌파하지 못했다.
16층에 올라선 분광소는 진법 깃발을 날려 용각족의 피부를 약화시키는 진법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황금 기둥과 함께 허공에서 무지개가 생겨나며 상대를 약하게 만들었다.
준혁은 정상에서 눈을 감은 채 기운으로 분광소의 행동을 살피다가 흐뭇하게 웃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16층부터는 율서가 그랬던 것처럼 도움을 주려 했었다.
하지만 분광소가 적을 상대하는 걸 보니 당장 도움이 필요 없어 보였고, 그 덕에 용천무의 힘을 아낄 수 있었다.
+++
16층에선 3일, 17층에선 8일.
분광소가 자신의 능력만으로 탑을 통과하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준혁이 1년 가까이 걸린 걸 생각하면 엄청나게 짧은 시간 만에 돌파해버렸다.
그것도 아무런 도움 없이.
16층에서 황금 기둥과 무지개로 상대를 약하게 만든 분광소는 적마도를 발동시키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상대를 농락했다.
동시에 5층, 10층, 15층에서 얻은 법기들을 시기적절하게 이용해 공격했고, 귀원패의 능력을 온전하게 사용했기에 방어적인 면에서도 용각족에 뒤처지지 않았다.
결국 16층을 무리 없이 통과한 분광소를 보며 준혁은 17층에서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율서가 생각 없이 힘을 남용한 덕분에 용천무의 힘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 수 없는 상황.
조금 시간이 걸린다 해도 힘을 아낄 수 있다면 아끼는 게 최선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율서처럼 탑과 완전히 하나 되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어차피 100번의 등반으로 탑은 해방될 테니. 그때까지 용천무의 힘과 연관된 왕의 정수를 온전하게 얻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17층에 올라선 분광소는 16층 때처럼 날아다녔지만, 상대가 계속 회복하자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인지경도 공명시킬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분광소의 압도적인 성능을 보며 준혁이 가장 아쉬워하는 것 중 하나였다.
+++
분광소가 18층에 올라 용각족을 약화시키는 진법을 발동하자, 준혁은 곧장 18층으로 이동해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율서처럼 직접적인 타격으로 탑의 규칙을 위반할 순 없었기에 보조적인 도움을 줄 뿐이었다.
우선 종을 꺼내 분광소가 만들어낸 진법을 강화해 적을 붙들었고, 인지경을 소환해 분광소에게 비춰주었다.
타인에게 능력을 나눠주는 것이었기에 준혁이 직접 사용할 때보다 성능이 수 배 저하된 상태였지만, 인지경을 통해 영력을 전달받냐 못 받냐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거기에 더해 주기적으로 용각족에게 디버프를 걸어주었다.
“크아아앙!!”
화신기에 오른 준혁이 사용하는 혈맥의 힘은 지금까지와는 그 수준이 차원이 달랐다.
분광소는 활력이 넘치는 사람처럼 날아다녔고, 결국 18층 문지기의 목은 땅에 떨어졌다. 심장엔 성인 팔뚝만 한 구멍이 뚫렸다.
“수고했다.”
문지기의 생명이 완전히 사그라들기 전.
준혁은 멋쩍은 칭찬을 남기고는 허공으로 스며들 듯 정상으로 먼저 올라갔다.
+++
고요함이 가득한 대전.
한쪽에서 전송진이 발동하더니, 준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준혁의 모습을 한 분광소가 18층을 마무리하고 대전에 올라선 것이었다.
분광소가 모습을 드러내자, 탑은 모든 수련 과정을 끝마친 후예를 반겨주듯 작은 진동과 함께 흔들렸고, 흔들림이 멈추자 대전 중심에 놓인 단상 위로 은은한 푸른 광채가 생겨났다.
분광소는 단상으로 천천히 걸어가더니 손을 뻗어 준비된 보상을 전부 수거했다.
그리고는 걸음을 옮겨 준혁 앞에 이르더니 파앗- 하는 빛과 함께 식검과 분리되며 도마뱀 두 마리를 뱉어냈고, 공간대 하나가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준혁은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 분광소와 식검, 귀원패, 그리고 적마도까지 회수하고는 허공에 떠 있던 정혈 한 방울마저 먹어 치운 후, 도마뱀들을 품에 품었다.
마지막으로 손을 저어 괴뢰 인형과 공간대를 손안으로 끌어왔다.
그리고는 바로 좌정한 채 기운을 정리했고, 그 상태로 3일이 지나갔다.
분광소가 식검과 공명해 분신을 만들었다고는 하나, 어쨌든 마선을 부리는 주체는 준혁.
분광소가 날뛰는 만큼 영기가 소모되었기에 회복의 시간이 필요했다.
+++
분광소를 다시 탑 밖으로 보낸 준혁은 분신이 1회차 탑 등반을 끝내고 획득한 공간석을 공천령에 주입했다.
지이잉-
옥빛이 넘실대다 사라진 공천령을 바라보는 준혁은 생각에 빠져있었다.
지금껏 준혁이 알기론 공천령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순간이동 법기였다.
내부에 공간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공간을 보유하고 있다고는 하나, 어차피 이동 능력을 사용하면 그 안에 있던 영기를 함유한 물건들은 전부 소모될 테니, 저장 법기로는 큰 의미가 없다 판단했었다.
하지만 화신기에 오르며 알게 된 정보에 의하면 공천령은 이동법기도, 그렇다고 저장법기도 아니었다.
정확히는 주거용 법기.
소천경에 이른 후 영역을 사용하게 되면 그때부턴 공천령 내부를 비경처럼 사용할 수가 있었던 것.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준혁은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였다.
세상에 누가 휴대용 비경을 들고 다닌단 말인가?
다만 온전한 능력을 발휘하려면 식검과 공명시켜야 했기에, 소천경에 이른다 해도 사용할 일이 있을까 의문이 들긴 했다.
한동안 공천령의 쓰임새에 대해 고민하던 준혁은 상념을 날려버리며 명혼단을 삼켰다.
혼을 강화해준다는 명혼단의 약효를 확인해보려는 것.
그리고 그 일이 끝나면 용천무의 비늘마저 연화시켜 몸을 단련하는 데 사용할 생각이었다.
용각족의 후예로 생각되는 도마뱀 두 마리를 위해 몇 장 남겨놓을 생각이긴 했지만, 강체공을 익힌 준혁에게도 용천무의 비늘은 엄청난 효과를 가진 재료.
당장은 본인의 수행을 올리는 데 사용하는 게 먼저였다.
그렇게 보상으로 얻은 물건들을 이용해 수행을 올리며 동시에 분광소의 행동을 지켜보며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
중국 시안, 진시황릉의 지하.
처음 준혁이 유적에 들어갔을 때보다 몇 배 넓어진 공터는 수많은 진법이 교차되어 매립되어 있었다.
그런 진법의 중추이자, 방어 진법으로 둘러싸인 장소엔 두 명의 사내가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왕 수사. 이곳뿐 아니라 위에까지 철통같이 지킨 지 3년이나 지났습니다. 그만 포기하심이···.”
포기란 말에 왕가홍이 버럭 소릴 질렀다.
“말이 되는 소릴 하십시오! 최준혁 그자를 잡기 위해 이곳에 들인 돈이 얼만지나 아시오?”
지하 깊은 곳에 있던 유적 앞 공터를 개발해 몇 배나 넓게 만들었으며, 그렇게 넓어진 땅 전체를 진법으로 메운 상태였다.
그것도 한두 가지 진법이 아니라, 중국 내에서 최고의 진법가라 불리는 사람들을 모조리 모아 수십 개의 진법을 설치했다.
게다가 어마한 양의 영석을 쏟아부어 각각의 진법이 서로 상승작용을 하게 그 위로 또 다른 진법을 중복설치까지 했다.
만약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상황.
이번 일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총대를 멘 왕가홍으로서는 절대 포기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왕가홍이 화를 내자 맞은편 사내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죠. 압니다. 하지만 위에선 더 이상 지원을 해주지 않는다고 하는데 어쩌겠습니까? 축기기라면 모를까, 결단기급 수사들을 고용하는데 얼마나 많은 돈이 드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사내의 말이 일리 있는 듯, 왕가홍은 잠시 말없이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 품속에서 전음부 한 장을 꺼내더니 목소리를 담고는 사내에게 건넸다.
“이걸 가지고 우리 가문으로 가시오. 문에서 지원해주지 않는다면, 내 힘으로라도 일을 성사시킬 테니.”
“진심이십니까?”
“그럼 지금 농이나 하는 거로 보입니까?!”
버럭 소릴 지른 왕가홍이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남궁 수사가 유적을 조사하는데 얼마나 걸린 줄 압니까? 겨우 며칠입니다. 며칠! 그 말인즉 저 안에 들어간 그자가 죽지만 않았다면 어쩌면 명혼단을 손에 넣을 만큼 조사가 진행 됐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절대 포기란 없습니다.”
서슬 퍼런 왕가홍의 말에 사내는 전음부를 전해 받고는 조용히 진법을 빠져나가 지상으로 향했다.
사내가 사라지고 혼자가 된 왕가홍은 유적의 입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최 수사. 난 당신을 믿습니다. 안토니오를 단숨에 처리한 실력이면 남궁 수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능력을 갖추고 있을 터. 부디 명혼단을 구해와 우리의 밑거름이 돼주십시오. 당신을 발판삼아 우린 수많은 원영기를 보유한 세계 제일 문파로 거듭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