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탑의 주인 (1) >
아득하게 느껴지는 상대방의 수행에 준혁은 지체없이 인지경과 식검을 공명시키며 영력을 충당했고, 동시에 귀원패를 이용해 몸을 보호했다.
“선배님!”
도움을 요청하자, 기다렸다는 듯 용각족의 머리 위로 빛무리가 생겨났다.
이미 여러 번 경험했기에, 빛무리가 영력을 억제할지언정 수행 자체를 아래 등급으로 떨어트리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던 준혁은 곧장 진법 깃발을 뿌리며 진각을 밟았다.
진법 깃발은 사방으로 퍼지며 황금 기둥을 만들었고, 허공엔 오색 무지개가 생겨나 거대한 용각족의 몸을 비췄다.
“크아아악!”
마지막 상대 역시 이성은 없는지 무지개를 쏘이자 눈이 뒤집히며 괴성을 질렀다.
마선에게서 배운 용각족을 가두는 진법.
이것 역시 수행 자체를 떨어트리진 못했지만, 강철보다 단단한 용각족의 피부를 약하게 만들 수 있었기에, 준혁이 시간을 끌며 천천히 상대를 요리할 수 있게 해줬다.
-이놈은 탑에 배치되기 전 소천경에 이른 놈이었다! 지금은 화신기에 겨우 미칠 정도이지만, 네 수행으론 절대 이길 수 없다! 내가 알려준 비술을 사용해!
동의도 구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18층으로 던져놓고, 율서는 준혁을 걱정하듯 빠르게 조언했다.
준혁은 상대의 행동에 이가 갈렸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당장 급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행동했다.
착착착-
수결을 맺어 양손을 뻗자 주변의 대기가 요동쳤고, 그 순간 공간대에서 빠져나온 종(鐘)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수십 배나 크기를 부풀렸다.
뎅-
그리고는 스스로 움직여 진동음을 퍼트렸다.
그러자 종소리에 맞춰 진법으로 만들어진 황금 기둥들이 회전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전투를 준비 중인 용각족의 몸을 휘감아 버렸다.
준혁은 상대를 구속하는 데 성공하자, 바로 공간대에서 벽돌 모양의 법기를 꺼내 상대에게 던졌다.
그리고 재차 수결을 맺자, 벽돌이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더니 용각족의 머리 위에서 어마어마한 크기로 커지면서 하강하기 시작했다.
“선배님! 이제 나서시지요! 제 구속은 얼마 가지 못합니다!”
벽돌 법기는 마선이 직접 추천해준 공격형 법기였고, 진법과 공명한 종은 탑의 보상이 아닌 용각족을 상대하라며 마선이 준 물건이었다.
화신기급 수행이라고는 하나, 원영도 없고 이성도 없기에 용각족을 상대하는데 특화된 기술로 잠시나마 잡아둘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시간이 지나면 다른 층에서 그랬던 것처럼 상대는 구속을 깨고 나올 터였다.
“선배님!”
준혁이 재차 소리를 지르자, 용각족을 덮고 있는 무지개 위로 강렬한 기운이 뭉치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 오래전 보았던 용천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탁-
용천무는 나타나자마자 주저 없이 바닥으로 내려서더니, 단숨에 18층 문지기의 몸을 꿰뚫어 버렸다.
퍼걱-
그리고는 몸을 사리듯 빠르게 뒤로 물러나더니 준혁에게 눈짓했다.
“탑의 규칙에 대해 말해줬지? 어서 마무리해? 네 손으로 직접 죽여야 수련을 마친 것으로 인정되니까.”
+++
준혁은 율서의 재촉에도 바로 움직이질 않았다.
18층 문지기 몸통에 생겼던 구멍이 점점 메꿔져 가고 있었지만, 마지막을 장식하고 난 후의 일이 염려됐기에 차마 마무리를 하지 못했다.
준혁이 주저하는 모습을 보고, 율서가 이죽거리며 말을 걸었다.
“이제 와서 뭘 망설이지? 올라가지 않으면 저놈에게 죽으려고? 탑의 규칙을 깨고 네놈을 도와주느라 나 역시 온전치 못한 상태야. 두 번은 못 도와준다는 거 알지?”
실제로 용천무의 기운은 여전히 아득하게 느껴졌지만, 예전보다 그 아득함이 살짝 옅어져 있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달리 방도가 없다는걸 알고 있기에 준혁은 전신에 광신체령투선공을 일으키며 오른손에 월광지력을 뭉쳤다.
그리고는 율서가 뚫어놓은 몸통의 구멍으로 주먹을 내뻗으며 용각족을 움직이는 핵인 심장을 직접적으로 강타했다.
쩌저정- 콰직-
강철처럼 단단한 피부와 달리 심장은 유리처럼 깨져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율서가 득의양양한 광소를 터트리며 손바닥만 한 비늘을 꺼내더니 두 쪽으로 갈라버렸다.
“크하하, 드디어 해방이다!”
18층 문지기의 심장을 파괴한 준혁은 율서의 반응에 재빨리 허공으로 솟구쳤다.
“하하하, 끝이다!”
하지만 자리를 피하는 준혁을 보고는 율서는 상관없다는 듯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스르륵-
잠시 후. 탑이 미칠 듯이 진동하더니, 철탑 같던 용천무의 몸이 모래처럼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동시에 준혁의 주위 영기가 요동치더니, 거대한 영력이 준혁의 심장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건!”
그 순간 준혁은 자신의 수행이 순식간에 연형기를 넘어 화신기에 접어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가 연달아 깨지며 마치 숨만 쉬어도 세상을 파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단(丹)안에 있던 원영은 몸 위로 수많은 비늘이 생겨나더니 무언가에 구속당한 듯 자리에 털썩 쓰러져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준혁은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탑과 하나가 되었다는걸.
+++
탑의 정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거대한 대전과 그 중심에 놓인 단상.
준혁은 단상을 중심으로 율서와 마주한 채 서 있었다.
“어때 기분이?”
홀가분하다는 듯 말하는 율서를 보며 준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당장 선배님을 때려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워워~ 진정하라고. 내가 다 알려줬잖아. 탑 정상으로 100명만 올려보내면 된다니까. 물론 너는 탑의 규칙을 위반해서 100명 안에 포함되지 않지만.”
준혁은 탑과 하나 된 느낌을 받은 순간, 자신의 심장으로 스며들었던 기운이 용천무의 힘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것 외엔 특별한 제약이 생기지 않아 정상으로 올라와 율서와 대화를 가졌다.
율서는 이제 탑에서 벗어났다며 자신이 아는 바를 다 말해주었고, 준혁은 심드렁하게 얘기를 듣고 있었다.
“선배님은 왕의 정수를 얻기 위해 계약을 했다면서 아깝지 않으십니까? 제가 임무를 수행해내면 그 힘은 제 것이 될 텐데?”
탑과 하나 되며 수행이 급상승하자, 준혁은 용천무의 몸을 쓰지 못하는 율서의 수행이 단번에 파악됐다.
연형기 중기.
하지만 그것도 계속해서 떨어지는 중이었다.
아마 용천무와의 계약이 완전히 끝나면서 마선이면 응당 그렇듯 원래의 자기 수행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빌어먹을! 내가 그것 때문에 이 고생을 했어. 필요 없으니 너나 가져. 헌데 말이야. 오랜만에 만났는데 분광소 이 친구는 모습을 보이지 않네? 무슨 이유라도 있나?”
율서는 다른 마선들은 관심없다는 듯 분광소만을 찾았다.
“제가 알려드릴 필요가 있습니까? 저를 속인 분께?”
“속 좁게. 내가 말했잖아. 계약자 놈을 발견하면 여기로 보내준다니까? 그럼 그놈에게 넘기고 나오면 되지. 안 그래?”
“......”
탑에서 해방된 율서가 처음으로 꺼낸 말이 바로 다음 희생자를 보내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율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테지만, 준혁은 그런 치졸한 방법을 쓰지 않아도 탑을 벗어날 방법이 있었다.
그렇기에 탑에 얽매이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침착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용천무의 기운을 받아들여 화신기에 오르면서 우연히 알게 된 방법이었지만 말이다.
“쩝. 말하기 싫으면 어쩔 수 없지. 그럼 난 가볼 테니. 잘 있게.”
준혁에게 이것저것 많은 정보를 알려준 율서는 홀가분하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뜨려 했다.
하지만 움직이기도 전, 주변 영기가 유형화되며 자신을 옥죄는 걸 느끼며 준혁에게 시선을 옮겼다.
“나가게 그냥 둘 것 같습니까?”
준혁이 탑 밖으로 도망갔을 때 율서가 쫓아왔듯이, 용천무의 힘을 사용하면 일시적으로 탑 밖으로 나갈 수가 있었다.
준혁이 마음먹고 막고자 한다면 수행이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는 율서는 절대 유적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내가 말했지. 힘을 함부로 쓰면 탑과 완전히 하나가 돼버릴 거라고. 나를 막을 순 있을지 모르지만, 그럼 더 많은 걸 포기해야 될 거야.”
“......”
“탑의 규칙을 위반하고 너를 위로 올리느라 이미 꽤 많은 힘을 소비했으니까. 영원히 탑에 갇혀있기 싫다면 앞으론 절대 용천무의 힘을 사용하지 마. 이건 같은 길을 걷는 선배로서 하는 충고니까.”
선배란 말에 준혁의 이마가 꿈틀했다.
“선배? 그래서 저를 이렇게 만드신 겁니까?”
“다른 놈 보내준다니까? 아무튼 그렇게 알고 잘 있어. 도대체 얼마 만에 바깥에 나가는 거냐. 휴우···. 나가면 마선경의 눈을 피해 인족놈들 세상에서 유락이나 즐겨야겠네.”
‘이자는 이곳이 선계와 연결돼있다고 생각하는구나.’
마선경 얘기를 하는 걸 보면 크나큰 착각을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럼 나가볼 테니 이 기운 좀 걷어가게. 영 움직이는 게 불편해. 진짜 자네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그 힘을 남용하지 마.”
율서는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듯 준혁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준혁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감사합니다. 그전에 한 가지만 더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준혁의 물음에 율서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물론이지. 얼마나 오랫동안 혼자 있어야 할지 모르는데 알고 싶은 게 있으면 전부 물어봐.”
그 순간. 준혁의 손끝에서 식검이 나타나며 붉은 광검을 뻗어냈다.
“이!”
유형화된 영기에 갇혀 움직임이 둔화되 있던 율서는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회피하려 했지만, 순식간에 심장을 관통당하며 식검에 빨려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 모습에 준혁은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인 끝났습니다. 역시, 잘 통하는군요.”
+++
율서, 법명 토율서인 마선을 흡수한 준혁은 능력을 간단하게 확인해 보고는 탑의 정상을 확인했다.
탑의 정상은 넓은 대전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율서의 말에 의하면 정식으로 탑을 등반해 정상에 오르면 대전 중심에 놓인 단상 위로 보상이 생겨난다고 했다.
그중 첫 번째가 용천무가 살아생전 지니고 있던 그의 비늘 한 조각이었고.
두 번째는 왕가홍이 욕심내던 명혼단.
세 번째가 용각족의 발톱이었다.
용천무의 비늘과 용각족의 발톱은 그들 후예의 수행 상승에 도움이 되는 물건이었다.
다만 명혼단은 왕가홍이 생각하는 것처럼 원영기에 올려주는 단약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혼을 강화해주는 영단.
그것이 고서를 통해 해석되다 보니 정보전달이 잘못된 것이었다.
하지만 혼을 강화해주기에 원영을 만들 준비만 되어있다면, 원영기에 오르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확실했다.
주변을 전부 살펴본 준혁은 좌정한 채 원영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용천무의 근원이자 힘의 원천인 용 비늘은 원영과 융합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생하는 것처럼 착 달라붙어 있었다.
“이건 탑을 등반할 때마다 차차 해결되겠지. 그럼 시간 낭비할 필요 없이 시작해야겠구나.”
준혁은 율서에게 속아 강제로 탑에 얽매이게 되었지만, 그로 인해 화신기의 수행에 오르면서 기대하지 못했던 보상을 얻게 되었다.
물론 화신기라는 수행은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용천무가 사라지며 없던 일이 돼버릴 것이기에 그 보상도 잠시뿐인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그동안 자신의 정체를 숨기며 꼭꼭 숨어있던 이의 능력을 알 수 있게 되어서 기쁘기 그지없었다.
“분광소.”
준혁은 어느새 한 손에 식검을 쥔 채로 분광소를 소환했다.
화신기에 오르며 얻은 보상이란 건 바로 분광소와 공천령의 진짜 능력에 대한 정보가 해금된 것.
처음 식검과 세 법기를 얻으며 뇌리로 파고들었던 기억 중 온전하지 못했던 정보들이 퍼즐이 맞춰지듯 완성된 것이었다.
허공에서 명령을 기다리는 분광소를 식검과 공명시키자, 언제나처럼 분광소는 하얀 빛 덩어리로 변했다.
“눈앞에 보물을 두고도 사용하지 않았다니.”
그 모습에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준혁은 공간대에서 괴뢰 인형을 꺼내 빛덩이로 던졌다.
파앗-
그 순간 괴뢰 인형을 단숨에 집어삼킨 분광소가 눈 부신 빛을 내뿜더니 사람의 형상으로 변했고.
잠시 후 준혁의 눈앞엔 영력을 줄줄 흘리는 또 다른 준혁이 명령을 기다린다는 듯 가만히 시립 해 있었다.
그랬다. 29번째로 태어난 분광소의 능력은 이름 그대로 또 다른 분신을 만들어내는 것.
원래는 아무런 조건 없이 분신을 만들어내야 했지만, 수행이 부족한 준혁은 괴뢰 인형의 도움을 받아 분광소의 능력을 끌어낸 것이었다.
분광소로 만들어낸 분신의 능력은 본신의 능력보다 한 등급 아래.
즉, 눈앞의 분신은 연형기 초기 수행을 가지고 있었고, 본신인 준혁과 달리 기운을 감추지 못했기에 어마어마한 영력을 발산하며 존재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준혁은 그런 분신을 향해 입을 열었다.
“탑을 돌파할 준비는 됐지?”
100명이 정상에 오르면 탑이 해방되며 왕의 정수를 얻을 수 있다고?
준혁은 분광소의 능력을 깨닫자마자 머릿속에 한가지 계획을 세웠다.
100명의 후예? 분광소와 적마도의 조합이면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