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율서 (2) >
3m에 이르는 신장.
성인 두 명이 나란히 서 있는 것 같은 어깨.
지금껏 상대해왔던 용각족들은 덩치에 비례해서 조금씩 강했다. 그걸로 보자면 눈앞에 서 있는 용천무라는 용각족은 완영기는 가볍게 넘기고 연형기.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랑 같다. 전혀 느껴지지 않아···.’
목족의 여왕을 마주했을 때보다 더한 아득함이 느껴졌다.
“선배님, 그냥 보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크흐흐, 너 같은 후배를 둔 기억은 없으니 탑으로 돌아가라!”
준혁이 기회를 보기 위해 대화를 걸자, 상대는 피식 웃더니 한 손을 앞으로 내밀며 움켜쥐었다.
그 순간 주변 영기가 유형화되었고, 그걸 느낀 준혁은 잠깐의 주저함도 없이 적마도를 이용해 거리를 벌렸다.
스팟-
“선배님! 무슨 이유로 저를 탑 위로 올라가게 하려는지는 모르나,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말.”
단 한 수만에 상대방과의 격차를 느낀 준혁은 다시 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말을 끝마치기도 전. 또 한 번 유형의 기운이 주변을 옥죄며 몸을 구속하려 했다.
파앗-
연달아 몇 번을 회피한 준혁은 상대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진 후, 겨우 숨을 돌렸다.
‘식검으로 처리할 수 있을까?’
스스로 육체는 이미 죽었다고 말했으니, 마선만 흡수해버리면 끝날 상황.
닿기만 한다면 식검이 상대를 흡수할 거라고 확신했으나, 문제는 다가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당장은 하라는 대로 해야 하겠구나···.’
상대의 수행이 완영기라면 후기라 할지라도 비벼볼 수 있었겠으나, 그 이상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처럼 느껴졌다.
한편, 여유 가득한 모습과는 다르게 율서 역시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이 요리조리 잘도 피하는구나. 어쩌지···. 힘을 과하게 사용하면 정상에서 이 몸을 사용할 수 없을 텐데.’
용천무의 시체는 막대한 영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사용 제한이 있었다.
탑의 원동력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만약 힘을 완전히 소비해 버린다면 율서 자신이 그 자리를 대체하게 돼버릴 터.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어떤 방법을 써도 절대 탑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기에 영원히 탑과 한 몸이 되어야 했다.
“조용히 탑을 오르면 죽이지는 않겠다. 하지만 더 이상 시간을 끌겠다면···.”
허공에 떠서 언제든 회피하려 준비 중인 준혁을 향해 율서는 나지막한 경고를 날리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자 탑 위에 머물던 먹구름에서 천둥소리가 터져 나왔고, 그와 동시에 주변 습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쩔 테지?”
율서의 경고에 준혁은 난처함을 표했다.
“선배님. 제 능력에 더 위로 올라가는 건 힘듭니다. 오죽했으면 강제로 탑을 벗어났겠습니까?”
준혁의 대답에 율서가 손을 내리자 먹구름의 크기가 줄어들며 주변의 습기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도와줄 테니. 너는 그냥 편안히 정상까지 오르면 된다.”
“알겠습니다. 그럼 돌아가도록 하지요.”
결국 도주를 포기한 준혁은 법기류를 전부 회수하고는 상대의 눈치를 보다가 탑의 입구로 날아갔다.
그러자 탑의 입구가 처음 손님을 맞이하는 것처럼 요란하게 열렸고, 준혁은 주저 없이 안으로 발을 옮겼다.
그 모습에 율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크흐흐, 너는 결국 나를 대신해야 할 운명이야.”
준혁이 완전히 탑 안으로 사라지자 율서는 손바닥을 어긋나게 붙이고는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렸다.
그러자 영기 파동과 함께 주변 영기가 요동치더니, 흙더미 속에서 살짝 모습을 드러냈던 출구가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잠시 후엔 원래 평지였던 듯, 출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 흔적마저도 찾을 수가 없었다.
“흐흐.”
출구를 없애버린 율서는 간사한 웃음을 흘리다가, 환영이 깨져나가듯 몸이 빛으로 화하더니 사라졌다.
+++
탑에 들어서자 준혁을 반긴 건 1층에 빙 둘러 서 있는 석상과 벽을 환히 밝히는 불빛이었다.
“설마?”
당연히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10층까지 방해 없이 이동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준혁은 모든 것이 초기화되며 다시 나타난 석상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의 도주를 막은 마선은 곧장 10층으로 복귀해 11층에 도전하라는 식으로 말했기 때문에 순간 상황이 이해되질 않았다.
“설마···. 적마를 이용해 강제로 벗어났기 때문인가? 아니면 원래 탑을 나간 후 다시오면 초기화가 되는 거였나?”
잠시 고민해보던 준혁은 이러나저러나 상관없었기에 금세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중요한 건 석상이 다시 초기화되냐 아니냐가 아닌, 어떤 방법으로 탑에서 도망치느냐였으니까.
‘탑을 오르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게 어떤 건지 알 수가 없으니···. 그래. 우선은 상황을 보아가며 판단하자.’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선 그에 맞는 정보가 필요한 법.
준혁은 탑이나 마선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었기에 우선은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탑을 올라야 했다.
11층부터 상대방이 도움을 준다면 탑을 돌파하며 정보를 얻어내는 게 최선이라 판단했다.
“크아악”
잠시 후, 처음과 마찬가지로 석상 하나가 깨어나자 단숨에 다가가 목을 꺾어버렸다.
퍼걱-
그러자 석상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준혁의 품속으로 흘러 들어갔고, 그 모습에 준혁의 눈초리가 살짝 길어졌다.
‘석상뿐 아니라 보상도 전부?’
시선을 옮기자 석상이 놓여있던 자리엔 공간석이 떨어져 있었다.
+++
“뭐지?”
탑 안에 들어선 준혁을 찾기 위해 기운을 퍼트렸던 율서의 동공엔 지진이 일고 있었다.
“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지? 설마 탑을 강제로 벗어났기 때문인가?”
준혁은 몰랐지만, 율서 역시 탑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는 않았다.
그저 용각족의 왕인 용천무의 부탁으로 마선기를 빌려줬을 뿐, 탑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에 대해선 가벼운 지식을 보유했을 뿐이었다.
다만 율서가 알고 있기론 정식으로 탑을 등반하는 자는 동일한 수련을 반복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5층까지만 오르기를 반복하며 100명의 후인을 위해 남겨놓은 보물들을 한 명이 독차지 할 수도 있는 일.
어느새 율서의 표정엔 심각함이 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율서는 피식 웃고는 한쪽에 만들어진 의자에 걸터앉았다.
“하긴 그깟 보물 몇 개 더 가져가 봐야 흐.”
정상까지 이르는 탑의 층수는 18층.
5층마다 보상이 준비되어있기에, 법기 몇 개를 더 가져간다 해도 정상에서 결과가 달라질 리는 없었다.
다만 이제 탑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들뜨는 마음에 조급함이 생겨날 뿐이었다.
“강제로 정상까지 끌고 온다면 편할 텐데, 망할 탑의 규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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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잉-
공간석을 끊임없이 잡아먹으며 점점 내부를 확장하는 공천령을 보며 준혁은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이대로 계속해서 내부가 확장된다면, 공천령은 법기라는 한계를 넘어설 것 같았다.
“설마, 무한정 넓어지는 건가?”
뜨악한 표정으로 공천령 내부를 살피던 준혁은 수거하지 못한 공간석이 있나 한 번 더 확인하고는 다음 층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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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층과 10층에서 두 개의 법기를 추가로 얻은 준혁은 다시 한번 탑을 벗어나 10층까지 돌파를 반복할까 하는 고민을 가졌다.
하지만 탑에서 얻은 법기들이 법보급의 법기라고는 하나, 아무리 공격수단이 많아진다 한들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기에 고민을 거듭하다 11층으로 향했다.
11층은 9층과 마찬가지로 허허벌판, 넓은 초원이었다.
잠시 후 대련의 시작을 알리듯 용각족 하나가 나타났고, 수행은 완영기 중기에 이르러있었다.
“수가 늘어나진 않지만···. 수행이 상승하는구나.”
9층에서 보았던 상대보다 수행뿐 아니라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운도 더 강력해져 있었다.
그 말인즉, 상대의 강인한 신체를 뚫어내기가 힘들다는 뜻.
“선배님! 도움을 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준혁은 상대를 확인하자마자 허공에 대고 소릴 질렀다.
그러자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용각족 머리 위에 희미한 빛무리가 잠시 머물다 사라졌고, 상대의 수행이 완영기 초기까지 떨어졌다.
-어련히 알아서 해줄 것을. 무슨 이유인지 네놈의 수행이 읽히지는 않지만, 대략 이쯤 되겠지? 15층까지는 이렇게 유지해주마. 빠르게 올라오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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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선의 도움으로 15층까지 돌파한 준혁은 16층에서 좌절을 맛봐야 했다.
16층의 상대는 연형기 초기였고, 마선의 도움을 받아도 상대할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회피를 반복하며 시간은 끌 수 있었으나, 강인한 신체를 뚫고 피해를 줄 수가 없었던 것.
할 수 없이 율서의 도움으로 15층으로 물러난 준혁은 그가 전해준 용각족을 상대할 방법에 관해 연구를 거듭하고는 하나의 진법을 익혀야 했다.
그 후 6개월이 걸려 16층을 통과했고, 비슷한 방법으로 1년 후 17층을 통과했다.
“이제 마지막인가.”
한 달 안에 돌아가겠다는 계획은 이미 망친 지 오래. 게다가 탑 안에선 삼청조마저 작동하지 않아 누구와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조급한 마음과 달리, 준혁은 다음 단계 준비를 핑계로 17층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다음 층이 마지막.’
마지막 층을 해결하고 정상에 올라선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기에, 준혁은 섣불리 다음 층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렇게 준비를 핑계로 다음 층 도전을 계속해서 미루자, 결국 마선이 끼어들었다.
-빨리 안 올라갈 테냐? 이제 마지막이다.
뇌리로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준혁은 천장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선배님. 이제 진실을 말씀해 주시지요. 저를 왜 정상으로 부르시는 겁니까?”
그동안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대화를 통해 정보를 알아내려 했던 준혁은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직접 질문했다.
-이미 한번 알려주지 않았나? 네가 정상까지 와야 내가 탑을 벗어날 수 있다고?
“정말 그게 다입니까? 혹 저를 제물로 사용하시려는 게 아닙니까? 분명 선배님을 대신할 거라 말하지 않았습니까?”
처음 만났을 때 상대가 했던 말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자, 잠깐의 침묵 후 대답이 들려왔다.
-쩝, 그래 그땐 그랬지. 예전에도 말했듯이 내 마선기의 일부가 탑에 얽매여있기에 네놈이 올라와야지만 이곳을 벗어날 수가 있다고.
또다시 침묵이 이어지더니 잠시 후 마선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네놈이 그렇게 많은 이들과 계약을 했을 거라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네가 계약을 맺은 마선 중 한 놈만 이곳에 묶어둔다면, 너와 나 둘 다 탑을 벗어날 수 있지. 게다가 넌 정상에 올라 보상을 얻을 테니. 서로에게 좋은 일 아니겠느냐?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를 타이르듯 어느새 마선의 말투도 바뀌어있었다.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허나 그를 피해 달아날 수도 없으니. 진정 진퇴양난이구나···.’
목족에게 붙잡혔을 때도 가진 정보를 바탕으로 상황을 주도했었고, 적호족에게 잡혔을 때도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갔었다.
하지만 이곳에선 모든 게 무용지물이었다.
목족의 여왕과 비슷한 수준이라 예상했던 용천무 몸에 들어간 마선의 수행은 화신기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
16층에서 처음 좌절을 맛보았을 때, 한 번 더 탈주를 시도하다 잡혀 온 전적이 있던 준혁은 그때 분노한 상대방에게 단번에 제압당해 강제로 탑을 다시 오르게 됐었다.
그리고 그때 상대가 비웃듯 내뱉은 한마디에 상대의 수행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결국 따라야 하는가···.’
목족의 비경만 아니라면 지구에서 더는 견줄 이가 없다고 판단했던 자신의 안일함에 자책했다.
‘수천 년을 살아갈 것을···. 겨우 100년도 되지 않아 초심을 잃었었구나···.’
용각족 유적에 들어오기로 결정한 데엔 공간석에 대한 욕심도 있었지만, 수행에 대한 자신감도 함께 했었던 것.
준혁은 다시 한번 오래전 결심을 깨달으며 마음에 되새겼다.
그때, 준혁의 주위로 금빛 진법이 자동으로 새겨지며 전송진이 생겨났다.
-자꾸 시간을 끌겠다면 어쩔 수 없지. 당장 올려보내 주마!
“이런!”
갑작스러운 현상에 준혁은 바로 몸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전송진은 벗어나려는 준혁을 붙잡았고, 다른 행동을 해보기도 전에 강제로 발동돼 버렸다.
그렇게 준혁은 고민에 휩싸인 상태로 다음 층에 대한 해결 방안도 없이 18층에 올라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볼 수 있었다.
5m가 넘는 거구의 용각족을.
가벼운 손짓만으로도 자신을 짓이겨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압도적 강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