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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139화 (139/408)
  • < 139화. 율서 (1) >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웃고 있는 사내.

    마선이 분명한 사내는 깡마른 몸을 감추려는 듯 넉넉한 옷으로 전신을 가리고 있었다.

    짙은 눈썹과 얄팍한 입술이 대조되어 간사하다는 인상이 매우 강했다.

    10층에 나타난 마선은 집 근처 친구를 만나러 나온 듯 편안하고 여유 가득한 모습으로 준혁을 맞이했다.

    “언젠간 이곳을 나갈 수 있을 줄 알았지. 크흐흐”

    다짜고짜 뜻 모를 말은 내뱉는 상대를 보며 준혁은 당장이라도 출수를 할 수 있게 전신의 영력을 끌어올렸다.

    “어이, 긴장하지 말라고. 당장 뭘 해볼 생각은 없으니까. 혹시나 도망갈까 봐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젠 도망도 못 갈 테고. ”

    “도망이라니, 혹시 탑을 나가는 걸 말하는 겁니까?”

    준혁의 질문에 사내가 비릿하게 입술을 비죽였다.

    “크흐, 그래. 네놈이 혹시나 중간에 나갈까 봐 여기서 대기하고 있었지. 하지만 이 층에 오른 이상 더는 상관없지. 그럼 위에서 보자고 친구.”

    스르륵-

    말을 마친 사내는 스펀지에 물이 흡수되듯 바닥으로 스며들며 사라져버렸다.

    홀로 남은 준혁은 사라진 마선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는 9층을 제외하곤 각층마다 존재하는 출구로 만들어진 전송진을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의 말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작동을 안 하는구나.”

    남궁명이 말한 것과 달리 탑 밖으로 나가는 전송진은 기능이 멈춘 상태였다.

    +++

    ‘자신을 대신할 거라고?’

    준혁은 마선이 내뱉었던 말들을 조합해보며 그와 탑, 그리고 탑 방문자의 관계를 추측해보았다.

    ‘설마 그자는 탑에 갇혀있는 상태고, 누군가 이곳까지 올라오면 풀려날 수 있는 건가? 방문자를 제물로 삼아?’

    한정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추리를 해보던 준혁은 고개를 털어버리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연히 만난 마선은 준혁이 탑을 나가지 못할 거라고 확신한 듯 말했지만, 준혁에겐 적마도가 있었다.

    새로운 마선을 만나, 정보를 얻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위층으로 올라갈 생각은 없었다.

    9층에서 완영기 초기 수행의 용각족이 나타났으니 11층부터는 그 수가 늘어나든 더 강해지든 할 텐데, 굳이 모험을 할 생각이 없었다.

    “보상이나 챙겨서 돌아가야겠네.”

    상념을 날려버린 준혁은 우선 10층에 놓여있던 법기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나갈 땐 나가더라도 챙길 건 챙겨야 했으니까.

    내부에 진열된 법기들의 종류는 각양각색이었다.

    5층에서 보았던 배 형태의 비행법기도 보였고, 종, 갑옷, 단검, 팔찌, 모자 등. 대충 기능을 유추할 수 있는 것도 있는 반면, 겉모양만으론 기능을 짐작기 어려운 것들도 있었다.

    물건들을 살펴보던 준혁은 10층의 물건들이 5층의 것들과 하나도 겹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탑 안의 보물의 수가 상상을 불허하는구나.”

    만약 탑 안의 모든 법기들이 5층에서 준혁이 골랐던 법기 수준이라면, 이곳은 진정 보물창고나 다름없었다.

    “전부 가져갈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니.”

    한동안 고민을 거듭하던 준혁은 많은 물건 중 귀걸이에 손을 뻗었다.

    손짓에 따라 준혁의 손안으로 귀걸이가 빨려오자, 다른 물건들은 5층과 마찬가지로 자취를 감추었다.

    +++

    귀걸이 법기의 상태를 확인한 준혁은 공간대에 물건을 담고는 10층의 벽면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탑 역시 평범한 건물이 아닌 진법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적마도를 이용해 탈출할 수 있다는 판단은 끝난 상태였다.

    다만 강제로 통과할 때의 충격을 미리 계산할 필요는 있었다.

    그때 준혁에게 빨리 올라오라는 듯, 한쪽에 있던 11층으로 향하는 전송진이 잘게 진동하며 존재감을 표했다.

    그 모습에 준혁은 피식 웃어 보인 후, 천장을 향해 말했다.

    “만나서 얘길 나누고 싶긴 하나 오늘은 때가 아닌 듯합니다. 그럼.”

    말을 마친 준혁이 양손을 가볍게 까딱 움직이자, 양손에 각각 식검과 적마도가 나타나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순간 준혁의 입에서 정혈 한 방울이 튀어나오며 퍼엉 하고 터졌고, 안개처럼 퍼져나간 정혈은 이내 꽃잎으로 변하더니 준혁의 피부 위로 안착했다.

    동시에 꽃잎이 안착한 피부 위로 육각 타일이 만들어지며 준혁의 신체 강도를 엄청나게 올렸다.

    ‘용각족의 강체술을 익힐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건 매우 아쉽구나.’

    이곳이 수련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라면, 끝에 도달하거나, 혹은 중간쯤엔 종족 특유의 수련 방법을 얻을 가능성도 컸다.

    백호 유족에서도 그들의 공법을 얻었고, 지목족 비경에서도 그랬으니 말이다.

    하지만 욕심이 날 뿐, 없으면 안될 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었기에 관심에서 금세 지워낼 수 있었다.

    ‘최소한 연형기에는 올라야겠지.’

    준혁은 다음에 다시 방문할 것을 기약하며 식검과 적마도를 공명시켰다.

    그러자 준혁의 모습이 파앗 하며 허공을 찢어 사라져 버렸다.

    +++

    예순일곱 번째로 태어난 마선 율서(栗鼠)

    토율서(土栗鼠)라는 법명을 가지고 있는 그는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탑에 갇힌 지도 수천 년.

    아니 수만 년인가?

    기억도 가물가물해질 만큼 길고 긴 세월을 아무도 찾지 않는 유적에 갇혀 살다 보니 희망도 뭣도 없는 나날이었었다.

    용각족 최후의 왕인 용천무(龍天武).

    그가 후인들을 위해 남겨놓은 빌어먹을 탑은 제 기능을 수행해보지도 못한 채 영원히 잊힌 듯했다.

    원래 용천무의 계획대로라면 100여 년에 한 번씩 용각족의 후인들이 무리를 지어 방문해야 했다.

    그리고 총 100명의 후인이 탑 끝에 오르면 유적은 자동으로 해방되며 그때까지 탑을 유지해야 하는 율서의 마지막 임무도 끝나는 셈.

    “생각해 보니 열받네. 망할 용천무 새끼! 뭐? 용각족은 뛰어나니깐 생각보다 빨리 끝날 거라고? 내 마선기를 조금만 빌려주면 유적이 해방될 때, 자신의 정수를 남겨주겠다고? 씨부레! 누가 와야 끝나든 말든 할 거 아냐!”

    용천무가 죽기 전 마지막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다.

    평범한 유적이 아닌, 수련을 통해 용각족의 기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유적.

    그것을 작동, 유지하기 위해선 마선기가 필요했고, 용천무는 ‘왕의 정수’라는 먹잇감으로 율서를 꼬드겼던 것.

    계약자가 죽는 순간 다른 계약자를 찾아가면 될 일이었지만, 율서는 또다시 성장하기 위해 수천 수만 년을 낭비하기보다는 왕의 정수를 습득해 단숨에 다음 계약자를 성장시키길 원했다.

    그런 두 사람의 계약이 이 사태를 이르게 한 것,

    “빌어먹을 놈한테 속아 탑에 묶여버리다니.”

    율서는 지난날을 떠올리다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새로운 방문자를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몇 해 전 유적이 만들어진 후 처음으로 탑 안으로 방문자가 나타났었다.

    하지만 그자는 인족이었기에 탑을 제대로 발동하지 못했고, 수행도 하찮은 수준이라 석상 몇 개를 깨부수고는 줄행랑 쳐버렸다.

    그 후 새롭게 나타난 지금의 방문자.

    처음엔 그 역시 인족이었기에 짜증이 올라왔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인족은 마선기를 품은 계약자였던 것. 처음엔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마선과 함께하길래 깜짝 놀랐지만, 다다익선이라 놀라움은 기쁨으로 변했다.

    거기다 더해 용각족의 후예로 생각되는 이들과 같이 있는지 탑 본연의 기능을 작동시켜 버렸다.

    그 모습에 율서는 쾌재를 불렀다.

    다른 마선의 계약자로 보이는 인족 놈이 탑 끝까지 오르게만 만든다면 자신이 탑을 벗어날 방법이 생각난 것.

    원래대로라면 100명의 등반자가 나타나기 전까진 절대 벗어날 수 없었지만, 다른 마선이 있다면 얘기가 달랐다.

    그동안 길고 긴 세월 동안 이곳에 잡혀있으면서 만약에? 라는 생각을 수십만 번도 더했고, 그 과정에서 다른 마선으로 마선기를 대체할 방법을 고안해 냈던 것이다.

    “내가 조금 도움을 준다면 15층까진 별문제 없겠지? 그다음엔 흐흐.”

    율서는 밖으로 나갈 생각에 들떠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기운을 조종해 10층에 머물고 있는 방문자를 탐색했다.

    방문자는 보상용 법기를 고른 후 벽을 만지며 생각에 잠겨있는 것처럼 보였다.

    “크흐흐, 그 어떤 방법을 써도 이곳을 나갈 순 없을것이야. 만약 5층 전이었다면 나도 막을 순 없었겠지만.”

    그때 방문자가 처음 보는 법기와 붉은 장도를 꺼내는 모습이 감지되었다.

    붉은 장도의 기운을 느낀 순간 율서는 심장이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몇 번의 전투 과정에서 어렴풋이 느끼긴 했지만, 다른 마선기와 뒤섞여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던 기운.

    “설마? 적마? 에이 아니겠지. 인지경에 분광소, 거기에 귀원패까지 함께하고 있던데···. 설마 그러···. 이! 썅!!”

    그때 방문자의 모습이 허공을 뚫고 사라져버렸다.

    그건 분명 적마 고유의 능력.

    율서는 또다시 수천 수만 년을 홀로 보내기가 싫었기에 바로 몸을 날려 제단에 가만히 앉아있는 시신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지금 자신은 그전까지 가지고 있던 수행이 전부 사라져 버린 상태, 용천무가 남긴 그의 육체를 이용해야만 진정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할 수가 있었다.

    다만 거기에도 제약은 있었다.

    계약자가 없는 마선의 서러움, 거기에 더해 탑에 묶여있는 지박령 같은 처지에 율서는 이를 아득거릴 뿐이었다.

    “절대 놓치지 않는다.”

    +++

    파앗-

    탑 밖으로 나온 준혁은 천천히 땅으로 착지한 후, 숨을 골랐다.

    “후우···. 아슬아슬하구나.”

    기목청이 만들어놓은 봉인 수준과 비슷한 탑의 결계를 강제로 뚫다 보니, 기혈이 들끓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준혁의 수행도 크게 늘고, 아마르곤과 함께했던 기억을 바탕으로 몸을 더 단단하게 보호했기에 예전처럼 힘에 부칠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다는 건 아니었기에 준혁은 화목단 한 알을 삼키고는 자리에 좌정했다.

    하지만 몸을 회복하기도 전.

    쿠르릉-

    땅이 뒤집히며 처음 탑에 들어가기 전 보았던 흙 인형들이 솟구쳐 올라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탑 꼭대기에 시커먼 먹구름이 생성되더니 순식간에 부피를 키우며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이런!”

    그 모습에 준혁은 몸을 회복하려던 걸 멈추고는 곧장 출구를 향해 몸을 날렸다.

    혹시나 중국 수사들이 뒤통수를 칠까 염려해 컨디션을 완벽하게 하고 유적을 벗어나려 했던 계획을 접어야만 했다.

    하지만 출구에 다다르기도 전 준혁은 행동을 멈춰야만 했다.

    출구 주변 땅이 뒤집히며 그 안에서 흙더미들이 쉬지 않고 솟아났고, 출구 전체를 완전히 뒤덮어 버린 것.

    준혁은 빠르게 분광소를 날려 보냄과 동시에 식검과 분리한 적마도를 발동해 출구 앞까지 순식간에 이동했다.

    그리고는 주먹에 월광지력을 최대한으로 뭉치며 단번에 내리쳤다.

    “깨져라!”

    흙이건 돌이건 극한으로 얼리면 부서지긴 마찬가지.

    콰앙!

    준혁의 주먹질에 출구를 뒤덮던 흙더미들이 얼음 파편이 되어 터져나갔다.

    하지만 준혁을 기다린 건 흙더미 속에 묻혀버렸던 출구가 아닌, 50㎝가 넘는 뿔 세 개가 삼지창처럼 솟아있는 어깨가 떡 벌어진 용각족 이었다.

    지금껏 만났던 용각족 보다 세 배가량 큰.

    “이런 식으로 도망가면 곤란하지.”

    상대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는 분명 처음 들어보았지만, 말투는 조금 전에 만났던 그가 분명했다.

    “마선?”

    준혁이 전신에 월광지력을 끌어올리며 동시에 귀원패를 이용해 보호막을 만들어내는 걸 보면서 흙더미 속에서 튀어나온 용각족, 아니 용각족의 몸을 차지한 율서가 말을 받았다.

    “소개하지. 내 계약자 용천무라고 해. 아 물론. 지금은 죽었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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