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거래 (2) >
공부석이란 말에 준혁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름이란 지역마다 다를 수 있는 법. 준혁이 얻은 지식은 법기 자체에 기록된 고대의 지식이었기에 이름이 다를 소지가 다분했던 것.
“혹시 그것이 남아있다면 볼 수 있겠나?”
기대감 가득한 준혁의 목소리에 야마기가 고개를 저었다.
“전부 소비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다만 그것을 구할 방법을 알고 있으니 선배님께 알려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야마기는 공간대에서 빈 옥간을 꺼내더니 이마에 가져가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지식을 기록한 옥간을 준혁에게 날려 보냈다.
옥간을 받아 안의 내용을 확인한 준혁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진짜 인사를 고했다.
“만일 내가 찾는 것이 맞다면 후일 크게 사례하지. 그럼.”
인사를 마친 준혁이 거대한 땅덩어리를 날려 보내더니 그 위에 안착해 유유히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대금당 당주가 야마기 곁으로 다가오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공부석을 채집하는 방법은 오랫동안 숨겨오던 것인데···. 이렇게 쉽게 알려줘도 되는 걸까요?”
당주의 말에 작은 점이 되어 사라져가는 준혁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 야마기가 대답했다.
“어차피 그가 마음먹으면 감출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호의라도 얻는 것이 옳은 판단이지요.”
말을 마친 야마기는 시선을 거두며 공간대에서 준혁이 주고 간 법기를 꺼내 들었다.
어느새 연구 욕구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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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에 도착한 준혁은 성인봉 바로 옆의 봉우리를 깎아버리고는 그곳에 영천수를 안착시켰다.
수결을 맺어 영천수의 기운과 새로운 땅의 기운이 서로를 배척하지 않도록 조율하고는 냉기를 거뒀다.
잠시 후, 영천수에서 진한 영기가 흘러나오며 제대로 자리를 잡자, 진법 깃발을 꺼내 주변 일대를 완벽하게 막았다.
그리고는 공간대에서 상자를 꺼냈다.
상자에 담긴 지목족의 뿌리를 꺼내 영천수 한쪽에 조심히 내려두고는 다시 한번 진법을 설치해 혹시라도 연단을 위해 영천수를 떠갈 때 영향이 가지 않도록 조치했다.
그리고는 손끝에 지목족 혈맥의 힘을 뭉치며 뿌리들이 모여있는 진법안으로 날려 보내 주었다.
“천균 수사. 이제 이것들이 발아할 환경은 만들어 두었으니···. 내 할 일은 끝났습니다.”
한 달 정도 지나면 혈맥의 힘이 흐려질 테니 꾸준히 방문해 기운을 불어넣을 테지만, 뿌리가 발아하고 안 하고는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것.
애초에 천균이 준비한 모든 일은 선계를 바탕으로 예상한 일들이었고, 준혁이 머무는 지구는 선계와 비교해 영기가 극도로 희박했고 환경이 달랐으니 어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모든 일을 마치고 자리를 떠나려던 준혁은 문득 자신을 열성적으로 가르치던 천균을 떠올리다가 영천수 속에 잠긴 뿌리 중 천균의 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있다가 입을 벌려 정혈 한 방울을 뱉어냈다.
잠시 후 허공에 둥둥 떠 있던 정혈은 천균의 뿌리로 날아가 스며들었고, 그 순간 뿌리 전체가 옅은 핏빛 광채를 내뿜다 원래대로 돌아갔다.
“내 정혈에 혈맥의 힘을 농축했으니 당신만이라도 발아했으면 좋겠습니다.”
완영기에 오른 준혁의 정혈엔 어마어마한 영기가 담겨있었다. 거기에 오래전 백호 청혈처럼 혈맥의 힘까지 담았으니 그저 정혈 한 방울이라 하기엔 엄청난 보물이나 다름없는 것.
그렇다고 모든 뿌리에 그런 짓을 할 순 없었기에, 수십 년간 환영을 이용해 가르침을 전해주었고, 그 후엔 직접 수련을 지도해줬던 천균의 뿌리에만 정혈을 주입했다.
그리움이라기보단 고마움에 가까운 감정을 마음 한켠에 정리한 준혁은 천균의 뿌리를 원래대로 돌려놓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그날부터 영천수가 놓인 봉우리는 영천봉이란 이름이 붙었고, 허락된 이들을 제외하곤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금지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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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수를 확보하는 일을 끝마친 준혁은 곧장 백두산으로 떠나려던 계획을 변경했다.
원계획은 비경을 할양받음과 동시에 중국의 원영기를 내쫓고 그동안 잡혀간 한국 수도자들을 되돌려 받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비각주가 가져온 소식을 접하고는 백두 비경과 관련된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우습게도 백두산을 비롯한 비경 전체가 준혁의 소유가 되었다는 소문을 한국 정부에서 널리 퍼트리기 시작했고, 그 결과 중국 랴오닝성 심양에 거처를 두고 있던 남궁명이 겁을 먹고 사라져 버린 것.
무언가를 찾기 위해 떠났다는 소문이 돌긴 했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자는 드물었다.
그렇게 정부의 골칫거리였던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돼 버리자, 백두산에 마선문 지부를 세우는 일은 탄력을 받았고 이내 치안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준혁의 명에 의해 그동안 백두 비경에 출입할 때마다 정부에서 거둬들이던 세금이 철폐되자 한국의 수많은 영수문과 산수들이 두 손 들고 환호를 불렀다.
백두 비경은 영초나 특수 재료는 그렇게 많이 발견되진 않았지만, 다양한 영수들이 존재해 영수문 출신들에겐 상시 출입하는 곳이나 다름없던 곳.
게다가 지금껏 발견된 영수 중 가장 고 수행의 영수가 결단기 초기였기에 산수들도 어느 정도 안전을 보장받으며 활동할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은 출입에 제한은 없지만, 늘 위험이 도사리던 일본의 눈꽃 비경이나 버뮤다 삼각비경 같은 곳으로 가지 않아도 되니 준혁을 칭송하는 목소리가 연일 끊이지 않고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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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 비경의 문제가 해결돼 버리자, 마선을 만나는 일이나 백호족의 흔적을 찾는 일은 당장 급한 일이 아니었기에 준혁의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는 지구로 복귀한 뒤 여러 일을 처리하며 한동안 본인을 위한 수련을 하지 못한 것을 만회하려는 듯, 밀린 숙제를 하듯 1품, 2품 화목단을 만들기 위해 모든 방해를 차단한 채 연단에만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시간은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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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1품은 쉽지 않구나.”
준혁은 눈에 보일 정도로 진한 영기를 품은 단약을 두 손가락으로 잡은 채 혀를 찼다.
원영기에 먹기 적합한 3품 화목단은 이제 손쉽게 만들 수 있었지만, 완영기에 먹는 2품은 단약 제조에 성공할 확률이 30%에 불과했고, 1품 화목단은 겨우 10%도 되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다른 단약과 달리 화목단 제조 비법은 단약 제조에 실패한다고 재료가 완전히 날아가 버리는 것이 아닌, 1품 화목단을 만드는 데 실패해도, 그것들이 2품이나 3품으로 남을 뿐이었기에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렇게 1품 화목단의 제조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고심을 거듭하고 있을 때, 출입문에 설치된 진법에 전음부가 날아들었다.
자신이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방해하지 말라 명을 내려놓은 터이기에 준혁은 손을 저어 전음부를 가져왔다.
그리고는 안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가볍게 손을 저어 출입문을 열어주었다.
잠시 후, 청명은 몸집이 뚱뚱하다 못해 거대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남자를 대동한 채 다가왔다.
“도주 어르신, 이분이 중국 정부를 대표하시는 왕가홍이란 자입니다요.”
전음부를 통해 중국 정부에서 부탁을 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준혁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뚱뚱한 남자를 쳐다보았다.
준혁이 말없이 바라보자 왕가홍이 두 손을 맞잡으며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천문(黃天門)을 맡고있는 왕가홍이라 하옵니다.”
‘황천문이면 중국 황가의 후예들이던가?’
준혁이 의문을 가지는 사이 왕가홍이 말을 이었다.
“이렇게 찾아뵌 것은 선배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이옵니다.”
“말해 보십시오.”
준혁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왕가홍이 혀를 날름거리며 입술을 적셨다.
“선배님의 과거를 묻는 것이 무례한 일이란 걸 알고 있으나···. 혹.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을 때, 버뮤다 삼각비경에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왕가홍의 말에 중국 정부가 찾아온 이유를 내심 짐작할 수 있었다.
“왕웅 수사 때문입니까?”
“아! 역시! 그곳에서 본 적이 있으시군요! 맞습니다. 주기마다 삼각비경의 어떤 봉인지를 찾아 떠나셨던 왕웅 수사께서 수십 년째 행방불명 상태입니다. 처음엔 모종의 이유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여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아닐 것이란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지요”
왕가홍은 준혁의 눈치를 보며 말을 계속했다.
“그러던 차에 그곳에서 제이엘님과 함께 있었다는 걸 알아내고는 그분을 찾아가 왕웅 수사의 행방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알려달라 간곡히 부탁했사온데···. 그분께서 선배님을 거론하며 만약 그것에 대해 아는 이가 있다면 선배님이 유일할 거라 조언해 주셨습니다. 하여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제이엘이 그 안에서 벌어졌던 감금과 도주에 대해 자세한 얘기를 한 것 같진 않았다.
“흠···. 알려준다 해도 그대들이 어찌할 문제가 아닙니다.”
“알고 계신단 말입니까?! 알려만 주신다면 크게 사례하겠습니다!”
만약 중국 정부가 왕웅을 구한답시고 수많은 수사들을 이끌고 삼각비경으로 간다면 어떻게 될까?
보나 마나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랬기에 준혁은 알고 있는 사실을 통해 그들을 만류할 생각이었다.
“내가 제이엘 수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걸 당신에게 말하는 이유는 그대들이 무모한 짓을 벌이지 말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준혁이 사실을 알려줄 듯 말하자 왕가홍이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미리 감사를 표했다.
“알려만 주신다면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준혁은 짧게 혀를 차고는 입을 열었다.
“왕웅 수사는 삼각비경 내 목족의 대지에 갇혀있습니다.”
“목족의 대지라면···. 완영기 수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도는 그곳 말입니까?”
완영기란 말에 준혁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실은 완영기가 아닌 연형기 수사도 존재했지만, 굳이 그 사실을 꺼내진 않았다.
“그렇습니다. 하여 그를 구하기 위해 인원을 동원한다면 필히 전부 큰일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들은 그를 포기하고 되도록 삼각비경에 가까이 가지도 말길 바랍니다.”
준혁의 말에 왕가홍이 다리를 덜덜 떨었다. 결단기 후기 수행치고는 너무나 심약한 모습이었다.
“그, 그럼···. 선배님께선 어떻게···.”
어떻게 그 사실을 아는 것인지, 혹은 어떻게 도망쳤는지 묻는 것이든, 해줄 말은 같았기에 준혁은 왕가홍의 말을 자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천운이 닿아 수십 년 만에 겨우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대답이 되었습니까?”
준혁의 대답에 왕가홍은 결국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 안돼···. 완영기 수사에게 잡혀있었던 것이라니···.”
왕가홍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자, 준혁은 그의 반응에서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남궁명!’
준혁이 백두산을 할양받았다는 소문이 퍼짐과 동시에 무언가를 찾기 위해 자취를 감췄다는 소문이 돌았던 중국의 새로운 원영기 수사.
“혹, 남궁명 수사가 그를 찾기 위해 삼각비경으로 떠난 겁니까?”
왕가홍이 처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5년 전···. 떠난 후···. 지금까지 행방이 묘연합니다···.”
응결식이 끝난 후 자리를 잡기 시작하며 준혁은 버뮤다 삼각비경의 위험에 대해 널리 알리려고 했었다.
봉인지의 비밀이 풀리면 비경 안으로 들어오는 인족 수사들을 보이는 족족 죽일 거라는 아마르곤의 경고 때문.
하지만 그 일은 비각주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준혁의 압도적인 능력이 알려지며 삼각 비경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시점이었기에, 만약 준혁이 나서서 삼각비경에 대해 경고한다면, 오히려 수상하게 생각한 수사들이 더욱더 몰릴 것이라 예상했던 것.
차라리 다른 비경에 대한 거짓 소문을 퍼트려 사람들을 분산시키자고 비각주가 제안했다.
비각주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긴 준혁은 그에게 그와 관련된 일을 일임했고 그 후로도 삼각 비경에 들어가는 인원에 비해 적긴 했지만, 간간이 밖으로 나오는 인원들이 있다는 걸 전해 들었기에 크게 걱정은 하지 않고 있었다.
애초에 삼각 비경은 출구가 무작위로 나타난다는 특수한 환경 때문에 들어가는 이와 나오는 이가 항상 비슷하지는 않았었기 때문.
한동안 망연자실한 눈으로 바닥을 응시하던 왕가홍이 정신을 차리며 준혁을 직시했다.
“선배님! 중국을 대표해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두 수사를 찾아달라는 것이라면 들어줄 수 없습니다. 제 능력 밖인 걸 아시지 않습니까?”
준혁 역시 다시 삼각비경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연형기에 오르거나, 목족 여왕을 상대할 방법을 찾기 전엔 절대 그곳에 갈 생각이 없었다.
준혁의 말에 왕가홍이 양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완영기 수사가 관련된 일을 어찌 선배님께 부탁하겠습니까?”
“그럼 들어보고 판단하지요.”
왕가홍이 호흡을 가다듬더니 마치 비밀을 알려주기라도 한다는 듯 입을 열었다.
“산시성 시안에 진시황릉이 있다는 걸 아시는지요?”
“물론이오. 옛 황가가 남긴 유적이 아닙니까?”
“유적 아래 진짜 유적이 있다는 건 아무도 모르고 있습죠.”
진시황릉이라면 수도계와 관련된 유적이 아닌, 역사와 관련된 일반 유적.
“흐음.”
“유적 안쪽엔 고대의 비술로 만들어진 명혼단이란 것이 있습니다. 만약 그것을 구하는 데 도움을 주신다면···. 유적의 모든 보물을 선배님께서 드리겠습니다.”
명혼단이라면 준혁 역시 알고 있었다. 결단기 수행을 넘기는 데 도움을 준다는 구색초로 만든 원혼단. 원혼단이 명혼단의 열화 버전이었다.
즉 명혼단은 원영기에 이르는 걸 살짝 돕는 정도가 아닌, 충분히 준비된 자라면 높은 확률로 원영기에 올려주는 것.
다만 정보가 존재할 뿐 실물이 나타난 적은 한 번도 없는 보물이나 다름없는 단약이었다.
당장 두 명의 원영기를 잃은 것과 다름없는 중국 처지에선 국가 간의 균형이 무너진 것과 다름없는 일.
그렇기에 그 어떤 보물보다 명혼단이 중요한 것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준혁은 왕가홍의 부탁에 짙은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왕가홍 수사.”
“예! 말씀하십시오.”
차분하지만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눈빛으로 준혁이 말했다.
“그런데 어찌 그걸 나에게 부탁한단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