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인연 >
준혁에게서 허락이 떨어지자, 청명은 전음부 한 장을 꺼내 날려 보냈고, 잠시 후엔 무위각 휘하의 단원이 여수사 한 명과 성인봉 정상으로 올라왔다.
청명이 말한 축기기 여수사는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미인이었다.
가는 눈썹이 청초함을 가지고 있었고, 코는 오똑했으며 입술은 살짝 도톰했다. 몸매마저 그런 외모를 받쳐주는지 군살 하나 없음에도 도드라지는 굴곡까지 가지고 있었다.
영기를 몸 안에 받아들이는 행동이 오행을 바로잡아 인체의 균형을 만들기에 자연적으로 미인 미남이 많은 수도계라 하지만, 그녀는 그중에서도 눈이 갈만한 미녀였다.
착-
비행법기에서 사뿐히 내려 자세를 낮추는 축기기 여수사를 보며, 사쿠라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을 쏘아 보냈고, 최나연은 준혁과 여수사를 계속해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준혁은 그녀를 보고는 짧게 침음을 흘렸다.
“흠···.”
분명 준혁으로서는 처음 보는 여수사.
그럼에도 준혁은 단번에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하늘 같은 도주 어르신을 뵈어요. 소녀 천이화 라고 하옵니다.”
축기기 여수사는 목소리마저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듣기 좋은 음색이었다.
준혁은 그런 그녀를 향해 성큼 다가가더니 살며시 미소 지으며 손을 저었고, 여수사는 무형의 기운에 강제로 몸이 일으켜지며 깜짝 놀란 표정을 했다.
“마동화의 손녀로구나.”
준혁의 말에 여인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하다가 화사하게 웃음 지었다.
“단번에 알아봐 주시는군요. 어머니의 말씀이 거짓이 아니었어요.”
“오빠 딸이야?!!”
대화가 진행되기도 전, 최나연이 깜짝 놀라며 나서려 하자, 준혁이 피식 웃더니 바람을 일으켜 그녀의 입을 막고 제자리에 붙잡았다.
그리고는 여인을 향해 말을 이었다.
“마동화의 딸···. 아니 네 어머니는 어찌하고 혼자 온 것이냐?”
준혁의 물음에 여인이 잠시 아련한 표정을 짓다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께선 삼 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혹 무슨 일을 당한 것이냐?”
준혁이 급히 되묻자 여인은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아닙니다. 오랜 지병으로 돌아가셨어요.”
여인의 말에 잠시 과거를 회상하는 듯 멀리 허공을 바라보던 준혁이 말했다.
“하긴 갈 나이가 되었긴 했구나···. 그래, 이곳까지 나를 찾아왔다면 그녀가 그것을 전해줬겠지?”
“네. 도주 어르신.”
여인은 공간대에서 전음부 한 장을 꺼내 조심스럽게 준혁에게 내밀었다.
잠시 후 전음부는 스스로 움직여 준혁에게 날아갔고, 그 앞에서 화르륵 타면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최태식은 훗날 약속을 이행할 준비가 되었을 때, 마동화의 딸인 이다영을 제자로 맞이하겠다.
그랬다. 청명이 데리고 온 축기기 여수사.
그녀는 준혁이 최태식이란 가명으로 설악산에 숨어들었을 때 인연을 맺었던 여인.
차경수에게 죽임을 당했던 마동탁의 여동생 마동화의 손녀였다.
준혁은 처음 그녀를 보자마자, 그녀의 미모에 혹하기보다는 그녀의 얼굴에서 오래전 보았던 십대 소녀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흐릿하긴 했지만, 천이화는 어머니의 모습을 많이 닮아 있었던 것.
전음부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사라지자, 준혁은 옛 추억을 떠올리며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동화와 그녀의 딸. 그리고 또 너까지. 삼대에 걸쳐 인연이 이어지는 걸 보면 우리의 연이 얕지 않다. 그 당시 그녀가 떼를 쓰기에 제자로 받아들인다고 말은 했지만, 원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한정해 어떤 소원이든 들어준다 약조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이곳까지 왔을 터이니···. 말해 보아라. 무엇을 바라느냐?”
준혁의 말에 조용히 시립 해있던 사람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준혁에 입에서 나온 소원이라는 말의 무게가 가볍지 않은 것.
다들 여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기대가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천이화는 작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사실···. 아무것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게 무슨 말이더냐?”
머뭇거리던 천이화가 말을 이었다.
“이곳 마선문에서 산수 출신도 가리지 않고 받아준다는 말에 들렀다가···. 갑작스레 부적이 반응하길래 찾아왔거든요···. 사실, 어머니 말씀을 반신반의하며 잊고 살았어요.”
천이화의 말에 준혁은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있었다.
마동화의 딸에게 부적을 전해줄 때 준혁은 겨우 축기기. 일정 거리를 벗어나면 부적을 발동시킨다 해도 자신이 알아차릴 수 없었기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용도로 부적에 장치를 해두었던 것.
‘하긴, 그녀에게 가명을 말했으니, 나를 찾아온 것도 신기하구나.’
“그럼 어찌 알고 나를 찾은 것이냐?”
“부적이 계속해서 섬의 중심을 가리켰어요. 이곳에 머무는 분이 같은 최 씨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실은 허튼소리 말라며 쫓겨날 줄 알았는데···. 이곳까지 오게 돼 당황스러워요.”
천이화는 말을 하면서 볼이 살짝 발그레해졌다.
“뭐? 하하하. 그래서 내가 책임져 준다며 아무 말이나 한 것이냐?”
“아무 말은 아니에요. 어머님이 그러셨거든요. 그분은 약속을 쉬이 저버릴 분이 아니니 언제가 되었든 다시 나타나실 거고 그땐 우리 가족을 책임져 주실 거라고···.”
준혁은 꾸밈없이 순수하게 말하는 그녀를 보며 오랜만에 소리 내 웃음을 터트렸다.
준혁의 수행에 그녀의 심장 소리, 피부의 솜털 하나까지 느낄 수 있었기에, 천이화의 말이 거짓이 아니란 건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랬기에 오랜 시간이 지나 되돌아온 인연이 변질하지 않아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좋다! 당시에는 제자로 받아달라는 그 아이의 부탁을 일언지하 거절했었지만 네가 원한다면 그 소원마저도 들어주마. 내가 너를 책임져 주겠다! 내 제자가 되겠느냐?”
법보라면 법보, 영석이라면 영석, 만약 마선문의 고위직을 원한다면 그것마저도 들어줄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제자까지는 전혀 생각이 없던 준혁의 마음을 천이화가 움직였다.
준혁의 말에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혁에게 첫 제자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
1년 후.
울릉도 성인봉의 중턱.
마선문에 입문하는 자들이 늘어나자 가심악은 광맥을 관리하는 일에서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진법의 유지보수도 점점 할 일이 줄어들었고, 자신을 찾는 사람도 갈수록 적어졌다.
그러던 차에 청명을 통해 준혁에게서 출입패 하나를 받은 가심악은 준혁의 거처가 위치한 성인봉을 향해 움직였고, 성인봉 3분의 2지점쯤에 있는 동굴 앞에 도착했다.
“나도 받기는 하는구나.”
준혁이 선별한 자들만 배정받을 수 있다는 소문이 돌던 성인봉의 거처.
가심악은 거처를 만드는데 자신이 직접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까지 거처가 배정될 줄 생각지도 못했다.
수행으로 치자면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었지만, 반역이나 다름없는 언행을 하다 들킨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 3–5 ]
가심악은 손에든 출입패 뒷면의 숫자를 확인하고는 눈앞 동굴을 향해 날아갔다.
성인봉 아래엔 총 5층으로 나누어진 거처가 만들어졌고, 가심악이 배정받은 곳은 정상에서 3번째 층에 해당하는 곳의 다섯 번째 동굴.
가장 아래층이 아닌 것에 안도의 한숨이 나오긴 했지만, 울릉도 초창기 인원이었던 사쿠라와 청명이 1층을 배정받은 걸 알았기에 씁쓸함이 멈추질 않았다.
“화령 수사는 4층이라고 했던가? 하긴 모두 자업자득이지.”
동굴 앞에 설치된 진법을 가볍게 통과한 가심악은 내부를 살펴보며 안쪽 끝까지 이동했다.
동굴은 단순한 석실 구조였고, 가구도 없는 단조로운 모습이었다.
솔직히 말한다면 성인봉 아래 마련된 거처는 원래 자신이 살던 곳보다 초라하고 좁고 불편했다.
다만 이곳을 배정받았다는 것 자체가 울릉도에서의 지위를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불편 정도는 참을 수 있는 문제일 뿐이었다.
그때 거처의 침상 위에 옥간 하나가 놓여있는 것이 가심악의 눈에 들어왔다.
궁금증에 다가간 그는 옥간 속 내용을 살폈고. 잠시 후 화들짝 놀라더니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반나절 후.
“말도 안 돼!! 이것이 사실이라니!”
침상 위에서 발견한 옥간이 보물이라도 된다는 듯 조심히 공간대에 집어넣은 가심악은 쏜살같이 움직여 동굴을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곧장 위로 솟구쳐 1층의 첫 번째 동굴 앞에서 전음부를 날려 보냈다.
잠시 후 1층의 동굴 앞 진법이 흐릿하게 변하자 가심악은 망설이지 않고 안으로 뛰쳐들어갔고, 그 안에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던 세 여인을 마주할 수 있었다.
세 여인 중 중심에 있던 여인.
사쿠라가 가심악을 보며 냉소했다.
“무슨 일? 한동안 내외하더니?”
사쿠라의 말에 가심악이 움찔하고는 급히 대답했다.
“내외라니요. 그저 예전 일이 민망해 그런 것뿐입니다.”
“그래 뭐. 그렇다고 치지. 그나저나 웬일이야?”
가심악은 공간대에서 옥간을 꺼내며 물었다.
“설마 여기에 적힌 말이 전부 사실입니까?”
그의 태도에 사쿠라가 입꼬리를 올리며 살짝 비웃는 모습을 보였다.
“왜? 후회돼?”
“사실인지 여쭤보지 않았습니까?”
“그래. 못 믿겠으면 확인해 보든가.”
사쿠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심악은 다른 여인들의 의구심 가득한 눈빛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공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반나절 후.
번쩍 눈을 뜬 가심악이 넋을 잃은 표정으로 한탄했다.
“진짜라니···. 진짜라니···.”
“확인했으면 가봐.”
사쿠라의 축객령에 가심악은 힘없는 얼굴로 몸을 추스르고는 천천히 동굴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사쿠라가 그를 불러세웠다.
“가심악. 무위각주 도천도 너와 같은 3층을 배정받았다. 청명 문주와 나를 제외하곤 1층과 2층이 전부 비어있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파악해. 그분께서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는 것이니까.”
순간 사쿠라의 말에 가심악의 눈빛이 맹렬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
가심악이 사라진 후, 동굴 안.
그곳에 모여있던 사쿠라와 최나연, 천이화는 조금 전 있었던 일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언니, 저 할아버지는 갑자기 왜 오신 거예요?”
여전히 수도계의 호칭에 익숙해지지 않은 최나연의 말에 사쿠라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이번에 이곳의 새로운 거처가 사람들에게 배정된 건 알고 있지?”
“네.”
최나연 옆, 천이화도 궁금증 가득하단 눈빛을 하고 있었다.
가심악의 태도? 그것은 성인봉에 마련된 거대한 진법의 영향 때문이었다.
준혁은 성인봉 전체에 수련을 돕는 진법을 설치했고, 진법의 효과는 준혁과 가까워질수록 그 공능이 배가 되었던 것.
즉 최하층인 5층에선 일반적인 수련을 할 때보다 3할~5할 정도의 수련 증진 효과를 보였고, 가심악이 머무는 3층에서 2배 가까운 효과를.
사쿠라가 머무는 1층에선 세 배 정도 수련 속도가 빨라졌기에 가심악이 그걸 확인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것.
“그런데 그게 그렇게 대단해요?”
최나연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자 사쿠라가 싱긋 웃어 보이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우리 나연이는 오라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니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수사들에게 여긴 이상향 같은 곳이지.”
게다가 일반적인 수련 속도뿐 아니라, 단약을 먹었을 때의 효율도 동반해 상승했다.
사쿠라마저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진법 효과는 들어본 적도 없었기에, 준혁의 능력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오랜 시간 산수 출신으로 살아왔던 천이화 역시 가심악보다 더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사쿠라 선배님. 그럼 이게 소문이 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천이화의 질문에 사쿠라가 시선을 허공으로 두며 말했다.
“어떻게 되긴. 세상이 발칵 뒤집히겠지. 이곳에 오고 싶어 발광하거나···. 아니면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애쓰거나···. 그것도 아니면···. 빼앗고자 불나방처럼 달려들거나.”
하지만 사쿠라가 짐작도 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수련 속도를 앞당겨주는 진법은 사실 진법이 아니라 준혁 고유의 능력이었다.
정확히는 준혁이 흡수한 기목청이 보유했던 혈맥의 힘.
지목족을 선계에서 손가락 꼽힐만한 거대 세력으로 만들기도 했으며, 선계 최강 중 하나라는 법문이 크도록 탐냈던 능력.
그리고 그 누구도 감히 짐작하지 못한 한 가지.
준혁의 수행이 아직 부족해 혈맥의 힘이 온전히 발휘되지 못했기에 범위도 지극히 좁고 여러 가지 제약사항까지 있다는 것.
준혁이 얻은 지목족 혈맥의 힘은 아직 제대로 꽃피지도 못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