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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132화 (132/408)
  • < 132화. 제안(2) >

    준혁의 말에 당황한 눈빛을 내비친 조명수가 급하게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선배님께 그러겠습니까?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말이.”

    옆에 있던 이태성도 조명수의 말을 거들었다.

    “선배님 노여워 말아주십시오. 저희 역시 선배님의 귀한 시간을 뺏고 싶겠습니까? 다만 이대로 백두 비경을 빼앗기게 된다면, 그것을 시작으로 한국의 영토를 야금야금 뺏기게 될 것입니다. 중국의 만행이 하루 이틀 된 것도 아니고···. 저흰 한국의 수도자들을 대표해 일을 해결해야 하니, 해결할 능력을 갖추신 선배님을 찾아뵙게 된 것입니다. 절대 오해는 말아주십시오.”

    황급히 설명을 이어갔지만, 준혁의 분위기가 점점 안 좋아짐을 느낀 두 사람은, 가문과 문파의 힘을 믿고 원영기 수사 앞에서 너무 허리를 꼿꼿이 세웠음을 뒤늦게 후회했다.

    하지만 후회란 항상 늦은 법.

    “더는 얘길 나눌 가치가 없군. 배웅하지 않을 테니 나가들 보게.”

    축객령이 떨어지자, 조명수의 표정이 살짝 경직되었다.

    “서, 선배님. 제가 말실수를 한 듯하니, 다시 현 문제에 대해 자세히···.”

    조명수가 급하게 말을 꺼내자, 그 순간 석실 내부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가 보라 했네.”

    결국 조명수와 이태성은 더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준혁의 거처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자신들이 유흥을 즐기느라 응결식에 늦게 와 놓쳐버린 수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색이 돼버린 두 사람은 허둥지둥 서울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쾅!!

    근사한 수염을 기른 노인의 행동에 앞에 있던 탁자가 산산조각 부서지며 파편이 튀었다.

    탁자를 부숴버린 노인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앞에 나열한 수많은 수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특히 그중 두 명을 노려보면서.

    “도대체 생각이 있는 겁니까?!!! 도대체 뭘 했길래 뒤늦게서야 찾아간 겁니까?! 아니 뒤늦게 찾아갔으면 오히려 소식을 접했을 테니 융통성 있게 일을 진행했어야지요!! 어찌! 그런 멍청한 태도로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겁니까?!”

    노인의 책망에 준혁을 만나고 온 조명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놈이 동급 원영기 수사를 한 손에 죽인 걸 알았다면 내가 그랬겠어? 니미럴, 어쩐지 태도가 고압적이다 했더니.’

    조명수가 아무 말 못 하고 있자, 노인이 다시 소리쳤다.

    “입이 있으면 말이라도 해보십시오! 설마 예전처럼 일본 유락가에서 시간을 보내신 겁니까?! 약에 취해 들려오는 소문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노인의 말에 조명수가 움찔했다. 실제로 두 사람은 환락단이라는 약을 섭취한 후 하급 여수사 들과 함께 꿈같은 시간을 보내다가, 계획보다 시간이 지체되었음을 뒤늦게 깨닫고는 부랴부랴 응결식에 참석했던 것.

    그때 이태성이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게 어찌 저희만의 잘못입니까? 도율 때처럼 최대한 늦게 응결식에 참석해 일방적인 통보를 하라고 다 같이 합의하지 않았습니까?”

    “조금 늦으라 했지! 눈과 귀를 닫고 참석하라 했습니까?! 말도 안 되는 신위를 선보였다는 소문이 여기까지 단숨에 퍼졌습니다! 그랬으면 눈치껏 행동하셨어야지요!”

    “그게···. 도율 때를 생각해···.”

    도율이란 말에 노인이 재차 언성을 높였다.

    “그놈의 도율! 도율!! 지금 최준혁이란 자가 도율과 같습니까? 불완전하게 원영기에 올라 우리와 협약을 맺었던 그자와 같냐 이 말입니다! 막말로 팔대가문의 정예를 모아 대적한다 해도 씨알도 안 먹힐 자라 이 말입니다! 그런 이에게 반협박이나 다름없는 제안을 하다니! 후우···.”

    노인은 말을 하다 심호흡을 하며 진정하려는 듯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 회의실이 벌컥 열리며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새누문에서 울릉도로 사람을 보냈다 합니다!”

    새로운 소식에 사람들이 분분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니! 이번 일은 우리 도부문에서 맡기로 약조했거늘, 이 무슨 염치없는 짓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것, 상대 진영이 어떻게 나올지 몰랐기에, 도부문 수사들은 분주히 움직이며 회의실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

    응결식과 관련된 행사가 전부 끝난 후 산처럼 쌓인 선물들을 정리하려던 준혁은 또 한 번 정부와 관련된 인사를 만나고 있었다.

    “그래, 또 무슨 일이지? 분명 내 의사를 밝혔을 텐데.”

    준혁 앞, 긴 눈썹을 기르고 매부리코를 지닌 노인이 음침하게 생긴 얼굴과는 다르게 또랑또랑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팔대가문의 대표로서 일전에 방문한 도부문의 멍청이들의 행동을 사과드리옵니다.”

    음침한 노인은 도부문의 두 사람과 달리 처음부터 공경을 담아 저자세를 취했다.

    “도부문이 팔대가문을 대표해 선배님을 찾아뵈었다고는 하나, 그들의 언행이 저희를 대변한다 생각하진 말아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옵니다.”

    노인의 장황한 말에 준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본론만 얘기하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백두 비경에 관해 저희 새누문과 저희를 따르는 가문들의 의견을 전해드리려고 왔습니다.”

    준혁의 시선을 받으며 노인은 입술을 적시고는 말을 이었다.

    “중국과 맞닥뜨린 국경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중요한 일인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선배님을 오라 가라 하는 건 후배 된 도리가 아니 옵지요. 허면 이건 어떠십니까? 저희의 부탁이 아닌. 선배님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이 된다면 말입니다.”

    준혁이 아무 말 없이 바라보자 노인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백두 비경을 선배님의 소유로 선정하겠습니다.”

    비경의 개인화.

    원영기 수사라면 작은 비경 하나쯤은 소유하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정확히는 비경이 자리한 인근에 원영기 수사가 거처를 마련하는 것.

    하지만 비경이라 해봐야 소규모 비경이었지 백두 비경처럼 거대한 규모의 비경은 개인뿐 아니라 가문에서도 소유하지 못했다.

    노인의 제안에 준혁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비경을 내 소유로 만들어주면 내 집 앞에서 알짱거리는 놈들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선배님께서 중국 원영기 수사가 거슬리지 않는다면···. 그냥 두셔도 무방한 일이지요.”

    노인이 웃으며 화답하자, 준혁이 되물었다.

    “헌데, 그럴 능력은 되고? 팔대가문 전체도 아니고 새누문 한곳에서 그걸 결정해도 되는가?”

    준혁의 물음이 긍정의 표현이라 생각했는지, 노인의 입가가 양쪽으로 길에 늘어졌다.

    “이른 시일 안에 그렇게 되도록 만들겠습니다.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개인에게 국가를 대표할만한 비경을 소유하게 한 적은 없었지만, 준혁의 무력을 앞세워 다른 가문이나 문파들을 설득하는 건 어렵지 않다고 판단한 노인이었다.

    노인의 말에 준혁은 턱을 괴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비경을 소유하게 된다고 해도 그걸 독식해 돈벌이를 해봐야 명성에 똥칠을 할 뿐이었다.

    오히려 비경 안에서 문제가 안 생기게 하느라 마선문의 일만 늘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선문의 규모가 커진다면 비경을 가지게 된다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거기다 이미 허울뿐인 정부라고는 하나, 모든 가문의 동의를 통해 소유권을 정식으로 인정받는다면 그건 힘으로 차지하고 있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

    막말로 준혁이 마음만 먹는다면 백두 비경뿐 아니라 한국 전체를 강제로 발아래 둔다 해도 그걸 막아설 사람은 없었다.

    다만 그런 부질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할 생각도 시간도 없는 준혁이었기에 애초에 울릉도를 벗어난 다른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뿐이었다.

    ‘백두 비경이라···. 결국 그곳으로 가야 하는 것인가.’

    정부의 부탁과는 상관없이 준혁이 고민하고 있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제이엘이 전한 비경 안 마선의 정체.

    정확히는 백두 비경에서 마선으로 의심되는 영수를 보았다는 게 제이엘이 전한 두 가지 마선 소식 중 하나였다.

    다만 너무 짧은 시간이었고, 마선을 직접 마주한 것이 아닌, 제이엘이 계약을 맺은 장구수가 어렴풋이 느꼈다고 전한 것이었기에 마선을 찾기 위해선 비경 전체를 뒤져야 할 판이었다.

    그것도 제이엘이 울릉도에 머물며 시간을 보내다 특정 재료를 찾기 위해 그곳을 방문했기에 얻을 수 있었던 것이지, 다른 경로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정보였다.

    게다가 준혁은 백두 비경을 찾아가야 할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영수로 데리고 있는 청호와 관련된 것.

    우연히 백두 비경에서 하얀 호랑이가 나타난 적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었기에, 한 번쯤은 그곳을 탐문해볼 의향을 가지고 있었었다.

    결국 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어디 호언장담대로 일을 처리하는가 두고 보지.”

    +++

    새누문의 수사가 물러간 후, 비각주를 불러 백두 비경과 관련된 일들을 조사하라 시킨 준혁은 응결식을 통해 들어온 물건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많기도 하군.”

    대부분은 상급 법기나 법기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귀한 재료들이었고, 특수한 부적과 결단기 후기들이 먹는 단약들도 있었다.

    그중엔 평생 염원했던 물건인 구색초도 두 뿌리나 존재했다.

    “이것을 얻기 위해 평생을 바칠 생각도 했었거늘, 이젠 고작 인사 선물로 얻게 되는구나.”

    구색초를 보며 잠시나마 회상에 잠겼던 준혁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랑 저었다.

    잠시 후 짧은 시간 만에 필요한 물건의 분류를 끝마친 준혁은 거처 안에 마련된 상자들에 물건들을 나눠 담고는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 리암이 다가오며 고개를 숙였다.

    “나오셨습니까?”

    한없이 공손한 리암을 보고 고개를 끄덕여준 준혁은 성인봉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곳엔 지구에선 볼 수 없던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이 조성돼 있었다.

    준혁의 시선을 따라 나무를 바라보던 리암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배님께서 직접 공수해 오셨다던데···. 꽤 아끼시는 것 같습니다.”

    진법으로 보호 처리가 된 작은 숲. 그곳에 빽빽이 박혀있는 나무는 준혁의 공간대를 가득 메우고 있던, 비경 봉인지에서 가지고 온 지유목이었다.

    “지유목이라 하지. 어떤가? 그대도 수행을 올리며 영목을 본적은 있을 텐데.”

    “함유한 영기의 질이 독특하긴 한데, 다른 영목과 차이점은 잘 모르겠습니다.”

    ‘역시 다른 이들의 눈엔 그저 평범한 영목중 하나로 보이나 보군.’

    이미 다른 수하들을 통해 비슷한 말을 들었기에 일반적인 수사들의 눈엔 지유목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고 있었다.

    목족의 연단 비법을 이용하면 완영기를 넘어 연형기의 수행도 올려주는 고급 영단의 재료인 지유목.

    리암의 대답에 준혁은 속으로 고소를 금치 못했다.

    지유목을 살피던 준혁은 잠시 후 인근 밭에 선물로 들어온 재료중 약초류를 전부 옮겨 심고는 다시 거처로 돌아왔다.

    하지만 거처로 돌아온 준혁의 표정은 밝질 못했다.

    공간대에서 꺼낸 지유목을 다시 옮겨심기는 했지만, 자라던 자리를 옮긴 나무들은 새로운 싹을 틔우질 못했다.

    가지를 잘라 묘목을 만들어 내는 것도 불가능.

    연단각을 맡은 나한을 통해 연구를 시키고는 있지만, 환경의 문제인 건지 지유목의 특성인 건지, 아무런 성과가 없는 실정이었다.

    그렇다고 지유목의 종자를 얻는 것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어차피 시간은 많았으니, 천천히 하지만 느리지 않게 방법을 알아낼 작정이었다.

    그게 어떤 방식일지는 모르지만.

    +++

    응결식이 끝난 지도 반년.

    최준혁이란 수사에 대한 관심이 수도계를 한참 달아오르게 만들던 중.

    울릉도엔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문이 도착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백두산 일대를 원영기에 오른 최준혁에게 양도하며, 백두산 천지에 자리한 비경의 소유권까지 인정하겠다는 것.

    사쿠라와 동생의 수련을 도와주고 있던 준혁은 청명이 가지고 온 소식에 별 흥미도 보이지 않고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어르신! 그럼 앞으로 백두산으로 거처를 옮기실 것입니까요?”

    무얼 상상하는지 기대감이 가득한 청명을 보며 준혁이 고개를 저었다.

    “당장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하오면 비경 관리는 어찌 하올까요?”

    비경 관리란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준혁이 명을 내렸다.

    “내 소유가 되었다고는 하나 크게 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비경 인근에 마선문의 지부를 세워두긴 해야지. 그건 청명 네가 알아서 하거라.”

    “예, 어르신. 명성에 누가 가지 않게 처리하겠습니다요.”

    소식 전달을 끝낸 청명을 뒤로한 채 준혁은 다시 사쿠라에게 집중했다.

    “화신목영을 사용할 땐 기운 전체가 아닌 목기만을 움···. 아직 할 말이 남았더냐?”

    사쿠라에게 가르침을 내리려던 준혁은 아직 할 말이 남은 듯 대기하고 있는 청명을 보며 물었다.

    그러자 청명이 사쿠라의 눈치를 살짝 보더니,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기···. 대인 어르신. 그게 축기기 여수사 하나가 찾아왔사온데···. 어르신께서 자신을 책임져주기로 약조하셨다고···.”

    청명의 입에서 책임이라는 말이 나오자 사쿠라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다만 준혁은 모르겠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약조? 내가 모르는 약조가 있었나? 감히 이곳에서 내 이름으로 속이려 하진 않았을 터인데. 올려보내거라. 한번 만나볼 테니.”

    그때 사쿠라의 심경을 대변한 듯 최나연이 천천히 다가와 그의 등 뒤에서 속삭였다.

    “오빠. 사고친 거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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