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제안 (1) >
아직 마선이 무언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의식해서인지 제이엘은 전음을 통해 말했다.
준혁으로서는 기다리던 정보였기에 바로 수긍했다.
“좋습니다. 대신. 그들 가문에겐 사과를 받아내야겠으니, 그 일까지 무마하려 하진 마십시오.”
“물론이에요. 개인들의 일탈과 가문과는 전혀 상관이 없지만, 책임 여부를 완전히 피해 가긴 힘들죠. 수사께서 이번 일과 관련된 가문을 징치하지만 않으신다면, 나머지는 전부 수사의 뜻대로 하세요.”
제이엘의 말은 사건을 빌미로 다른 수사들을 죽이지 말아 달라는 뜻이었다.
애초에 한곳에 자리 잡고 무리의 수장 격이 되었기에 본보기식으로 관용 없이 처치한 것이지, 더는 살생할 생각이 없었던 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리를 옮겨 대화를 나누시지요.”
준혁은 제이엘에게 성인봉 방향을 눈짓하고는 그녀를 지나쳐 단의 가장 끄트머리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전신의 영력을 개방해 영기파동을 낮고 넓게 퍼트리며 동시에 소리쳤다.
“원영응결식은 이것으로 마무리한다! 본 섬은 누구에게나 개방돼 있으니, 아직 하고자 하는 일을 마무리 하지 못한 자는 언제까지나 이곳에 머물러도 된다.”
아직까지 인사를 마치지 못한 결단기 수사들이 수두룩했으니, 필요하다면 기다렸다가 인사를 하러 오라는 의미.
더불어 산수 출신 수사들에겐 마선문에 입문할 기회를 주려는 것.
“단! 섬의 규칙을 지켜라! 위로는 존경을 아래로는 존중을! 자세한 건 마선문주가 대신할 것이다.”
말을 마친 준혁이 제이엘에게 눈짓하며 허공으로 솟아오르자, 그녀와 리암이 동시에 준혁의 뒤를 쫓아 날아갔다.
그리고 준혁이 사라진 후. 청명이 단 위로 올라왔고, 단 주위엔 마선문의 각주들이 빙 둘러 위세를 뿜어냈다.
“나는 도주 어르신의 명으로 마선문을 맡은 청명이다! 지금부터 섬에서 활동할 시 주의해야 할 사항에 대해 알려주겠다!”
이미 준혁의 무서움을 경험한바, 수사들은 그의 오른손이나 다름없는 마선문 문주의 말에 침 한 번 삼키지 못하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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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크기로 보자면 세계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없어야 정상일 것 같은 작은 나라.
그런 나라에서 도율이라는 원영기 수사가 나왔을 때, 전 세계 수사들이 한국이라는 나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관심도 잠시. 수도계는 일상 그렇듯 또 다른 이슈에 파묻혔고, 새로운 단약이나 약초, 법기 등의 소문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번에 한국에서 퍼진 소문은 그 파급력이 지금껏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20여 년 전 원영기에 오른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원영기 수사인 안토니오가 한국에서 새로 원영기에 오른 최준혁이란 인물의 원영응결식에 참석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
더 놀라운 건 참석은 허울일 뿐, 사실은 수십 명의 결단기 수사와 결탁해 한국의 원영기 수사를 처단하려고 했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사람들이 경악한 건 바로 그 결과.
한국의 원영기 수사는 단 한 수만에 안토니오를 제압하고, 수십의 결단기 수사를 도륙하는 신위를 선보였다.
소문이 퍼져가자 사람들은 그것이 진실일 리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같은 원영기 초기 수사끼리 그만큼의 수행 차이가 날 수가 없으며, 더군다나 수십의 결단기 수사들까지 도륙하다니? 누군가의 망상일 거라고 치부했다.
하지만 진실은 빠르게 퍼져갔다.
수십 개의 가문이 모여 만들어진 유럽연합은 중추 역할을 하던 거대 가문에서 결단기 수사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가자 소리 없이 삐걱대기 시작했다.
제이엘이라는 수장 격인 존재가 버티고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제이엘은 유럽연합의 상징적 존재.
실질적으로 지역을 다스리던 가문들끼리는 세력 교체가 일어나며 암투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
소문의 발원지인 한국 역시 조용하지 못했는데, 그동안 한국 정부를 나누어 다스리던 가문 중 힘을 잃고 축출당한 청룡가가 조용히 급부상하며 일선에 합류했다.
들리는 말로는 청룡가의 뒤에 소문의 원영기 수사가 버티고 있다는 말이 맴돌았지만, 그걸 확인해볼 깜냥을 가진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중국과 일본, 러시아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함경북도 부근에서 연일 수도자원을 놓고 시비를 걸어오던 러시아 수사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더는 시비를 걸어오지 않고 전부 방어적인 자세만 취했다.
반대로 중국은 오히려 확장정책을 펼치며 수많은 수사들을 각국에 파견하며 위력을 과시했다.
그리고 중국에게 점점 침식당하는 것처럼 보였던 일본은 지역별로 연합이 생겨나며 큰 무리를 이루기 시작했고, 그중 일부는 한국과 연계하려 손을 뻗고 있었다.
그렇게 한국에서 발원한 변화의 시작은 중국과 일본 러시아를 거쳐 더 넓게 퍼져갔고, 그동안 깨지지 않을 것처럼 경직돼 있던 수도계의 힘의 경계가 조금씩 무너질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변화에 발맞추어, 사람들은 변화를 불러일으킨 시작점. 최준혁이란 수사에 대해 궁금증을 가졌고, 그가 밟아온 길을 조사했다.
그 결과, 그의 공법이나 법기의 정체에 대해선 알아내지 못했지만, 그만큼이나 중요한 흔적을 찾아내고 말았다.
바로 일본의 눈꽃 비경과 북대서양의 버뮤다 삼각비경.
지구 곳곳에 존재하는 수많은 비경 중 오직 두 곳만이 최준혁이란 수사가 오랜 기간 머물렀던 곳이란 것에 착안해, 사람들은 그가 그곳에서 엄청난 무언가를 얻어 동급 수사를 간단하게 참살하는 능력을 얻었을 거라 추측했다.
그리고 그런 소문은 점점 규모를 키워가더니 진실을 왜곡할 수준이 되었고, 왜곡된 소문을 접한 수많은 수사들은 두 비경을 향해 몰려가기 시작했다.
어떤 일이 생길지 짐작도 하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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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응결식이 끝난 후.
제이엘에게서 마선에 대한 정보를 얻은 준혁은 그 후로도 지루하지만 바쁜 시간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응결식이 중간에 끝나버렸기에, 인사를 하지 못한 수많은 수사가 계속해 방문했던 것.
거기에 더해, 응결식을 훼방 놓기 위해 동맹을 맺었던 자들이 속한 가문에서 금은보화를 짊어지고 찾아와 사죄한 일까지.
결국 10여 일을 더 보내고 나서야, 준혁은 대부분 수사의 접견을 끝마쳤고, 몇 명만을 남겨놓은 상황이었다.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아 뒤늦게 찾아뵙습니다.”
성인봉 정상에 마련된 준혁의 거처.
투박한 석실 형태에 간단한 의자뿐인 그곳엔 청룡가의 대리 가주를 맡고 있던 여동현이 부복한 채 준혁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어느새 결단기에 올랐군, 축하한다.”
“도주께 비한다면 반딧불 같은 수행일 뿐입니다.”
여동현의 입에 발린 말에 준혁은 피식 웃고는 본론을 꺼냈다.
“내 알기로 다른 이를 통해 이미 성의를 보인 것으로 아는데. 어쩐 일이지?”
응결식에 이어 십여 일간 계속된 업무로 인해 준혁의 정신적 피로도가 꽤 올라가 있었다.
공법수련을 쉬지 않고 몇 년간 하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건 수행과 상관없이 곤욕이었다.
“뵈온 지 오래되었기도 하고, 먼저 소식을 전해드려야 하는 게, 제 도리일 것 같아···.”
여동현은 살짝 말꼬리를 흐리며 공간대에서 옥간 하나를 꺼내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쳤다.
준혁은 손을 저어 옥간을 끌어온 후, 영기를 흘려보내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고는 옥간을 이마에 가져다 댔다.
잠시 후.
“흥. 사태 파악을 못 하는 이들이 정녕 유럽연합만은 아니었나 보군.”
“면목 없습니다. 이제 곧 찾아올 것입니다.”
뜻 모를 준혁의 말에 여동현은 몸을 더 납작 숙였다.
“그대 잘못은 아니지. 알겠으니 물러가 보게.”
준혁의 축객령에 몸을 일으키던 여동현이 잠시 주저하다가 말을 꺼내 놓았다.
“도주께 염치없는 부탁이긴 하나, 혹 도주의 이름으로 움직여도 되겠습니까?”
여동현의 말에 준혁은 턱을 한번 쓰다듬다 말했다.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기 위함인가?”
“그렇습니다.”
“먹칠하지 않는다면.”
준혁에게서 절반쯤의 허락이 떨어지자, 여동현은 크게 절을 올린 후, 조용히 거처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여동현이 빠져나간 직후, 청명이 날아와 준혁 앞에 부복했다.
“어르신.”
“무슨 일이더냐?”
“한국 정부에서 찾아왔사옵니다요. 제 선에서 처리하려 했으나, 한사코 어르신을 봬야 한다길래···. 어찌해야 할까요?”
청명의 말에 준혁이 눈썹을 꿈틀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이쪽으로 보내거라.”
직전에 여동현에게서 소식을 받았거늘, 마치 짠 것처럼 나타난 정부에 속한 가문들을 향해 준혁은 짙은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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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에 들어서신 걸 경하드리옵니다. 도부문의 조명수라고 합니다.”
“도부문의 이태성이라 하옵니다.”
한국 정부의 요직을 차치한 가문 중 가장 큰 세력인 도부문(都部門)과 새누문(塞壘門).
그중 도부문의 실력자라 소문난 조명수가 사람들을 대동한 채 준혁의 처소를 방문했다.
“어서 오시게.”
“응결식이 너무 빨리 끝나 참관하지 못한 게 너무 아깝습니다. 여유를 두고 온다는 게 그만···. 며칠만 더 일찍 올 걸 그랬습니다.”
“맞습니다. 게다가 마선문의 문주라는 자가 어찌나 강경하게 막아서던지 원. 선배님을 한번 뵙는 게 정말 어렵습니다.”
조명수와 이태성은 원영기 수사를 앞에 둔 사람치고는 꽤나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마치 ‘너는 수행이 높지만, 나는 권력이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두 사람의 반응에 준혁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무슨 일로 방문한 거지?”
만약 이들이 좋은 의도로 찾아온 것이었다면, 수하도 아니고 가르침을 받기 위해 온 후배들도 아니었기에 반존대로 맞이했을 준혁이었다. 하지만 이미 여동현을 통해 이들의 목적에 대해 낱낱이 알게 되었기에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처음 보는 준혁의 하대가 기분 나쁜 건지, 조명수가 살짝 인상을 쓰다가 대답했다.
결단기에 오른 후 누군가에게 무시당하는 말투를 들어본 게 처음이기에 더욱더 기분이 상했다.
“큼 흠. 다름이 아니라, 정부를 구성하는 팔대가문에서 선배님께 요청 드릴 일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요청? 말해보라.”
조명수는 헛기침을 몇 번 더 한 후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백두 비경과 울릉도에 관한 일입니다. 선배님도 아시겠지만 40여 년 전 중국에서 새로운 원영기가 나타났습니다. 헌데 그자가 활동하는 지역이 하필이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백두 비경 근처입니다.”
“그래서?”
“큼 흠···. 그자가 몇 해 전부터 백두 비경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한국 수사들을 잡아 가두고 있습니다. 선배님도 아시겠지만, 백두 비경은 우리 한국의 가장 큰 비경이며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도 많은 곳 아닙니까?.”
조명수의 말에 준혁이 ‘어쩌라고?’라는 표정으로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하여 선배님께서 중국의 새로운 원영기인 남궁명을 백두 비경에서 몰아내 저희 국토를 되찾아 주셨으면 합니다.”
국가의 일에 발 벗고 나서라! 라며 두 눈에 힘을 주고 말하는 조명수를 향해, 준혁은 여전히 심드렁한 어투로 말했다.
“울릉도 얘기는 뭐지?”
준혁의 질문에 조명수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미소는 마치 ‘네가 거부할 수 없다’라고 쓰여 있는 것 같았다.
“국가의 일이라고는 하나, 선배님께서 친히 움직이셔야 하는 일. 그 일을 해주신다면, 앞으로 울릉도의 영토를 선배님의 고유 영토로 인정해 드리겠습니다. 당연히 섬 내의 일반인들의 세금도 전부 면제해 드릴 것입니다!”
마지막에 힘을 줘 말하는 걸 보면 스스로 엄청난 제안을 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준혁이 썩소를 지었다.
“재미있군.”
이미 여동현을 통해 전부 전해 받은 정보였지만, 눈앞에서 마치 은혜를 베푼다는 식으로 의기양양해 있는 조명수를 보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게 무엇인지 새삼 깨닫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재미...예? 재미라뇨? 재미라고 하기엔 남궁명의 소문이 가히 좋지는 않습니다. 중국의 다른 원영기인 왕웅과 달리 흉포하고 사람 죽이기를 전혀 꺼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신의 말에 오해를 한 듯한 조명수를 보며, 준혁이 싸늘하게 말을 내뱉었다.
“영토? 인정?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쩔 것이냐? 팔대가문이 힘을 모아 위력이라도 행사하겠다는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