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가르침 (2) >
가슴에서 시작해 상반신이 얼어가던 안토니오가 목을 죄어오는 고통을 참으며 간신히 한마디를 뱉어냈다.
“사, 살려주시...ㅂ...시오.”
애원하는 안토니오를 보며 준혁이 반대 손을 들어 올렸다.
“준비를 더 철저히 하고 나타나지 그랬습니까?”
말을 하던 준혁이 반대 손을 가볍게 젓자, 그의 손끝에서 분광소가 나타나며 하늘로 솟구쳤다.
하늘로 솟구친 분광소는 이내 50여 자루로 증식하더니 경악을 감추지 못한 채 동요하는 응결식 참석자들에게 쏟아져 내려갔다.
“지금부터 움직이는 자!! 모두 참하겠다!”
분광소가 사람들에게 닿기 전, 준혁의 입에선 살기와 더불어 경고가 터져 나왔다.
응결식을 방해하는 자를 보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원영기 수사가 단숨에 당하는 모습도 처음.
사람들은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짐작도 못 하고,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거기에 더해 준혁이 모여있는 사람들을 향해 공격을 쏟아내며, 협박하듯 경고하자 어떤 반응을 내보여야 하는지 서로 눈치만 보게 되었다.
그러다 결국 수많은 단검들이 머리를 두 쪽 내버릴 듯 쏟아지는 걸 보면서도 누구 하나 움직일 생각을 못 하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파밧-
얼음이라도 된 것처럼 경직된 수많은 사람들 사이, 수십의 인원들이 땅을 박차며 분지를 벗어나기 위해 몸을 날렸다.
그 모습에 준혁이 냉소했다.
“흥! 가만히라도 있으면 살려주려 했더니.”
안토니오의 당당한 대결? 처음부터 그건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유럽연합이 제이엘에게 아무 얘기도 듣지 못했을 리는 없으니, 준혁이 50여 년 전 원영기에 올랐다는 소식을 모를 리가 없는 것.
먼저 원영기가 됐다고 무조건 더 강하다고 말하긴 힘들었지만, 상대적으로 수행이란 시간에 비례하는 것은 틀림없었다.
그렇기에 준혁은 안토니오의 도발에 숨은 비밀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대결이 성사되기 직전, 빽빽이 모여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기이한 영기 흐름이 느껴지는 걸 파악했다.
그것은 일종의 구속용 진법이 발동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기에, 판세가 어찌 돌아가는지 준혁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안토니오는 혼자서 원영응결식을 방해하러 온 것이 아니라, 수많은 결단기 수사들과 연합해 준혁을 죽이기 위해 찾아온 것.
그랬기에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위로 올라가자는 준혁의 제안을 단번에 거부했던 것이었다.
준혁처럼 규격 외의 실력을 갖춘 게 아니라면, 원영기 초기에 막 오른 수사 정도면, 결단기 후기 서너 명만 모여도 동수를 이룰 정도였으니 부족한 준비는 아니었을 터였다.
+++
쇄애액-
50여 자루로 증식된 분광소는 도주를 시도하는 수사들을 한치의 망설임 없이 꿰뚫어 버렸다.
아무리 넓게 퍼져있었고, 동시에 사방으로 퍼져 도망친다고는 하나, 겨우 결단기 수행의 속도로는 분광소를 따돌릴 수가 없었다.
쑥- 스걱-
몸을 꿰뚫은 분광소는 바로 몸을 빠져나오며 수사의 몸을 한 바퀴 선회한 후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도망치던 수사는 목이 잘리며 비행 능력을 잃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툭- 툭-
그런 모습이 분지 곳곳에서 연출되자, 사쿠라와 무위각주 도천이 가장 먼저 기운을 폭발시키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감히! 잡것들이!”
사쿠라의 얼굴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져 있었고,
“이 서양놈들! 이곳이 어디라고!!”
도천은 주군의 기위가 침훼 받았다는 모멸감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다음 행동을 취하기도 전.
“모두 가만히 있거라.”
허공에서 원영기 수사의 목을 쥐고 있는 준혁에게서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고는 방자하게 떠들던 안토니오의 전신이 얼음덩어리로 변한 순간, 준혁의 몸이 퍼엉 터지며 꽃잎처럼 흩날렸다.
그 모습에 사쿠라는 준혁의 생각을 알아차리고는 주변을 향해 코웃음 치고는 다시 바닥에 내려섰다.
바닥에 내려섬과 동시에 무언가 깨달은 사쿠라는 빠르게 최나연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는 잘게 떨고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그녀 곁으로 다가가 손을 잡아줌과 동시에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도천 역시 주군의 명이 떨어진 순간, 단 일 초의 고민도 없이 모든 기운을 갈무리하더니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가만히 있진 않았다.
땅에 내려선 후, 어딘가로 전음을 날려 보냈고, 잠시 후에 마선문의 인물들이 소리 없이 흩어지더니 분지를 감싸고 있는 산맥 위로 올라가며, 분지 전체를 감시하는 모양새를 갖췄다.
그리고 몇 명은 섬 곳곳으로 흩어지며 분광소에 참살당한 수사들의 시체를 수거해 준혁이 가르침을 내리던 단 앞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어느새 분지 전체엔 숨소리조차 죽은 듯 고요함이 찾아왔고, 이따금씩 들리는 시체 떨어지는 소리만이 사람들의 심장을 차갑게 만들었다.
툭- 떼구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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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가린 채 수많은 사람들 사이 숨어있던 죠제프.
형제 같던 다니엘의 죽음을 잊지 못한 그는 복수의 날만을 손꼽으며 기다렸다.
하지만 복수의 대상자가 어느 날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버렸기에 분노를 표출할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원통함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유럽연합의 실질적 주인인 제이엘에게 복수의 대상자가 원영기란 소리를 듣긴 했지만 죠제프에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원영기는 사람 아닌가?
다구리에 장사 없다고, 유럽연합의 결단기 중, 후기 수사들만 모은다 해도 복수는 가능하리라 판단했다.
원영기가 무서운 이유는 그들이 엄청난 기동력으로 혼자서 치고빠지면 당해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지, 발만 묶어둔다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 여겼다.
거기에 다니엘 만큼이나 가까웠던 안토니오가 원영기에 오르자, 복수는 당연한 선택이 되었다.
절대 실패할 리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한국에서 복수의 대상자가 원영응결식을 치른다는 말에 쾌재를 불렀다.
자신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처참히 죽어간다면, 그 얼마나 통쾌한 복수겠는가?
죠제프의 머릿속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란 계산이 들어찼다.
다만 한가지.
원영기인 안토니오가 단 한 수만에 제압당할 거라는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죠제프!! 이걸 어떻게 책임질 것이오!”
둔광을 일으키며 미친 듯이 날아가는 죠제프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는 독일에서 원영기에 오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알려진 결단기 후기인 리암 슈스터.
“당신의 말만 듣고 칼로스와 율리안이 제이엘님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기 까지 했소이다!! 이 사태를 어찌 책임질 거란 말이오!”
리암의 악에 받친 목소리에 죠제프가 해줄 말은 한가지 뿐이었다.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당장 살아나갈 생각이나 하십시오! 제이엘님의 화를 무마하는 건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습니다!”
이전에도 준혁을 향해 살기를 드러낼 때마다 제이엘에게 훈계를 들은 이들이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제이엘은 준혁을 절대 건들지 말라 경고까지 했던 것.
그랬기에 이들은 준혁의 원영응결식을 방해하기 위해 계획을 짜면서, 제이엘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은 상태였다.
그때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강렬한 기운이 뭉치기 시작했다.
“이런! 흩어져야 합니다!”
“빌어먹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좌우로 흩어졌고, 빛 꼬리를 남기며 쏜살같이 달아났다.
잠시 후, 허공에 모습을 드러낸 준혁은 코웃음을 치더니 리암이 도망친 방향으로 화살처럼 뭉친 꽃잎을 쏘아 보내고는 죠제프가 도망간 방향으로 쏘아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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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가 개미만 하게 보일 정도로 도망쳐온 죠제프는 바다 표면 위로 일렁이듯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참담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감상도 잠시, 강렬한 기운이 다가옴을 감지하고는 허공을 박차며 순식간에 자리를 벗어났다.
“젠장!”
하지만 거리를 두었다고 생각한 순간 몸이 무거워지며 마치 물에라도 빠진 것처럼 동작이 느려졌다.
“어떻게!”
어떻게 술법을 사용한 흔적도 느껴지지 않는데 몸에 이상 반응이 나타나는지 의문을 표할 새도 없이, 자신이 있던 자리에 나타난 준혁을 보며 절망감을 느껴야 했다.
“생각보다는 멀리 도망쳤군.”
준혁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몸이 차갑게 변한다고 느낀 죠제프는 도망치던 걸 멈추고는 재빠르게 붉은 단약을 하나 꺼내 먹었다.
동시에 두 손을 합장하듯 모은 후 붉은 기운이 맴도는 입김을 내뱉었다.
하지만 자신의 발버둥 따위가 아무 소용 없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어느새 양어깨에 서리가 끼며 전신이 얼어붙기 시작했고, 이내 몸속 영기가 자신의 의도대로 운용되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같은 원영기 초기인데 이렇게 다를 수가 있단 말인가···.”
자신의 친우인 안토니오가 원영기에 오른 후, 여러 차례 대결해본 죠제프는 준혁의 실력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결국 죠제프가 모든 걸 포기한 듯 멈춰서자, 준혁은 그의 앞으로 다가오며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역시. 그때 보았던 그자인가? 죠제프라 했나?”
“...... 죽여라.”
다른 이들은 단번에 죽여나가던 준혁이 말을 걸어오자, 죠제프는 핏발선 눈을 한 채 이를 악물었다.
“죽여줄 테니 걱정하지 말게. 다만 이 사실을 제이엘이 알고 있나?”
“...그분은 아무것도 모른다.”
보통 응결식엔 친분을 가진 원영기가 방문하는 게 예의였다. 그것이 새로운 원영기의 위상을 알리는 방법이기도 했고, 서로 간의 친분을 과시하며 외부에 단결력을 보이는 장치이기도 한 것,
준혁에게 외부의 시선 따윈 중요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입으로 참석을 약속한 제이엘이 나타나지 않아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왜 응결식에 참석하지 않은 거지? 무슨 일이라도 있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죠제프는 눈을 감아버렸다.
“너 따위에게 해줄 말은 없다.”
모든 걸 체념한 듯 눈을 감아버리는 죠제프를 보며 준혁은 싸늘한 비웃음을 날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어차피 한 놈 더 남았으니.”
쩌저정-
그 순간 천천히 한기에 침식되던 죠제프가 순식간에 얼어붙더니, 잠시 후 쪄적- 소리를 낸 후 잘게 갈라지며 바다에 빠져들었다.
풍덩-
호랑이가 죽으면 가죽을 남기듯, 죠제프는 공간대만을 남긴 채 그렇게 마지막을 고했다.
+++
“이 정도면 쫓지 못하겠지?”
바다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
리암은 주변으로 기감을 넓게 퍼트린 후,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풍덩-
순식간에 바닥까지 가라앉은 리암은 공간대에서 기다란 창을 꺼내 발동시키며 땅을 내리찍었다.
쿠앙-
순간 거대한 영기 기둥이 만들어졌고, 바닷물이 소용돌이치듯 맴돌며 바닥에 거대한 구멍을 만들어냈다.
구멍을 잠시 내려보던 리암은 깊이에 만족하지 못한 건지, 수차례나 창을 내질렀고, 구멍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뚫렸다.
“이 정도면 원영기라도 절대 찾지 못할 것이야!”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듯 자신 있는 표정으로 구멍 안으로 들어간 리암은, 공간대에서 한 평 남짓한 크기의 천을 꺼내 구멍 입구를 막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뚫어놓은 구멍 끝까지 내려간 후 옆으로 파고들며 일정 공간을 만들었다.
잠시 후 바다 땅속 깊은 곳에 일정 크기의 토굴을 만들어낸 리암은, 영력을 방출해 바닷물을 밀어내고는 진법으로 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모든 일을 끝낸 그는 토굴에 드러누우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누구를 떠올린 건지, 눈썹이 일그러지며 이가 갈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빌어먹을 죠제프! 내가 혼원단 따위에 혹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결단기를 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구색초로 만든 혼원단. 리암은 원영기를 잠시 진법으로 묶어두는 데 도움을 준다면 혼원단을 준다는 말에 혹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했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
이젠 최대한 오래 숨어지내다가, 제이엘을 찾아가 중재를 부탁하며 싹싹 비는 게 최선이었다.
만에 하나 제이엘이 자신을 포기한다면, 원영기에 오를 때까지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숨어 사는 수밖에 없었다.
“으으···. 바다 아래라 그런가···. 왜 이리 춥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