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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125화 (125/408)
  • < 125화. 원영 응결식 (2) >

    동생에게 자신의 상태를 설명하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간략한 설명과 더불어 영력을 이용해 법기를 다루는 것을 보여주니 최나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오빠, 영근도 없는데 어떻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건 그렇고, 인사하거라.”

    말을 잇지 못하는 동생에게 한쪽에 서 있는 자들을 가리켰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사쿠라와 청명, 제이엘이 빠르게 날아왔다.

    “이쪽은 영국의 제이엘 수사라는 분이다. 내가 없는 동안 너를 안전하게 지켜주신 분이지.”

    아직도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최나연은 마치 렉이라도 걸린 것처럼 멈칫거리며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최나연의 어설픈 인사에 제이엘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축하해요. 좋은 오라비를 두었군요. 최 수사의 동생이 병을 치료하고 동시에 수도계에 들어선 오늘을 기념하지 않을 순 없죠. 자 이것 받아요.”

    어느새 제이엘의 손엔 초록빛이 반짝이는 목걸이가 들려있었는데,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영력만 보아도 보통 물건이 아닌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사람이 갑작스레 선물을 건네자, 최나연은 당황해 준혁을 돌아보았다.

    “받아도 괜찮다.”

    제이엘의 행동에 사쿠라 역시 공간대에서 단조롭지만 세련되게 생긴 기이한 문양이 조각된 은빛 반지를 꺼내 건넸다.

    “나도 축하해 동생.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거야. 그리고 이건 수도계에 입문한 기념으로 주는 거야. 수도자에게 가장 필요한 물건이니까 꼭 가지고 다녀.”

    이번에도 준혁의 눈치를 살핀 최나연은 감사 인사를 한 후 물건을 건네받았다.

    그러자 사쿠라 옆에 서 있던 청명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는 줄 게 없는데···. 아무튼 대인 어르신의 동생이시니깐 앞으로 아가씨라 부르겠습니다요. 잘 부탁드립니다요. 아가씨.”

    중년 아저씨의 모습을 한 청명이 냅다 허리를 숙이자, 최나연은 선물을 받을 때보다 더 당황해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모습에 준혁이 손을 젓자, 청명의 허리가 강제로 세워졌다.

    “청명. 그럴 필요 없다. 내 동생이라 하나, 수도계에 입문한 이상 수도계의 율(律)을 따라야지. 아직 연기기에도 들지 못했거늘, 어찌 네 녀석이 허리를 숙인단 말이냐.”

    “그, 그것이···.”

    “앞으로 너는 마선문을 이끄는 중추 역할을 할 것이다. 나를 제외하곤 그 누구에게도 허리를 숙이지 말아라. 그것이 설령 원영기 수사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준혁의 목소리는 사뭇 진지했고, 서슬 퍼런 기운이 섞여 있었다.

    청명은 그의 뜻을 파악하고는 자리에 덥석 꿇으며 머리를 땅에 박았다.

    “대인! 감사합니다요. 앞으로도 평생···. 아니. 죽기 전까진 충성을 다하겠습니다요!”

    원영기에게도 허리를 숙이지 말라는 말이 자꾸 청명의 귀에 맴돌았다. 다만 준혁이 자신에게 마선문의 중추 역할을 맡긴다고는 하나 그 기간이 오래가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았기에, 기쁨과 동시에 아쉬움이 다가올 뿐이었다.

    +++

    동생이 깨어난 후. 준혁은 제이엘을 배웅하며 조만간 있을 개파식과 원영응결식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녀는 말을 듣는 순간, 준혁의 의도를 파악했다.

    “다른 이들을 불러 모을 생각이시군요.”

    제이엘의 말에 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선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들은 마선문 이란 이름을 두고 불호를 논할 테지만. 준혁은 처음부터 의도를 가지고 문파명을 정했던 것.

    “그렇습니다. 마선과 계약한 자들이 우리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개파식과 동시에 인지경에 대한 소문도 널리 퍼트릴 생각입니다.”

    “흐음···. 그래서 그들을 마선문에 들이시려는 것인가요?”

    “상황에 따라 그리될 수 있겠지요.”

    ‘아니면 식검으로 잡아먹거나.’

    준혁의 진정한 의도를 알아차렸다면, 제이엘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을 것이다.

    물론 이유 불문하고 마선이라는 이름에 꼬여 나타나는 계약자들, 혹은 마선들을 잡아먹을 생각은 없었다.

    누가 되었든 우선은 대화를 통해 수하로 받아들일 계획.

    하지만 의도가 불순하거나, 해를 끼치려고 나타나는 거라면, 그땐 식검을 통해 흡수해버릴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흐음. 그런 것이라면 저도 연합의 힘으로 수소문을 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살펴 가시고 조만간 다시 뵙지요.”

    제이엘은 준혁의 인사에 화답하더니 번개가 치듯 번쩍하며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허공 한점이 반짝 빛나더니 빛 꼬리를 남기며 하늘을 갈라 멀리 사라졌다.

    그 모습에 최나연은 넋이 나간 듯 입을 헤~ 벌렸다.

    준혁은 그런 동생을 보고 피식 웃고는 사쿠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쿠라 수사. 개파식이 있기 전까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제 동생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준혁의 말에 사쿠라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떤 걸?”

    준혁은 공간대에서 옥간 하나를 꺼내 건네며 말을 이었다.

    “이 안엔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도와주는 청해심공이라는 것이 들어있습니다.”

    오래전 강만학에게 받았던, 혈단법의 탁기를 조율하는 역할을 했던 공법.

    “하지만 이건 보조용으로 사용할 수 있을 뿐, 주 공법이 되긴 어렵지요. 수사께서 이 아이의 체질에 맞는 공법을 구해 수련을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준혁의 물음에 사쿠라가 아닌 최나연이 끼어들었다.

    “오빠. 오빠는 뭐하고? 언니한테 부탁해?”

    사쿠라의 나이는 이미 수백 살이 넘었지만, 최나연이 보기엔 자신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일 뿐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언니라는 말을 사용했다.

    준혁은 청명 때처럼 수도계의 법규를 지키라며 훈계하려 했으나, 사쿠라가 언니라는 호칭이 맘에 든다며 준혁이 말릴 새도 없이 수락해 버렸다.

    “나는 해야 할 일이 있다. 앞으로 우리가 함께 지낼 시간은 네 생각보다 길 테니, 당분간은 사쿠라 수사에게서 지도를 받으며 수행을 쌓도록 하거라.”

    준혁이 표정 변화 없이 진지하게 설명하자, 최나연은 잠시 뾰로통한 표정으로 볼을 부풀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 대신 이 아기가 너와 함께하며 지켜줄 것이다.”

    어느새 준혁의 영수대에서 하얀 백호 한 마리가 풀쩍 뛰어나오더니, 준혁의 어깨에 올랐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최나연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갑자기 나타난 청호 때문에 최나연이 비명을 질렀다.

    “꺅! 너무 귀여워!!”

    오빠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행동에 삐져있던 최나연은 청호를 본 순간 모든 불만이 눈 녹듯 사라짐을 느꼈다.

    “제가 지켜드릴 거니까 걱정 마세요.”

    “어 멋! 오빠! 얘 말도 해? 이름이 뭐야?”

    동생이 영수에게 눈이 돌아가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준혁은 사쿠라와 청명에게 몇 가지 당부의 말을 전하고는 축객령을 내렸다.

    잠시 후, 사쿠라와 청명이 최나연을 데리고 떠나자 준혁은 손을 가볍게 저어 주변에 대방음진을 설치했다.

    그리고는 가심악에게 전음부를 날렸다.

    +++

    “섭섭하지 않아?”

    비행 법기에 최나연을 태우고 날아가던 사쿠라가 등 뒤의 그녀에게 물었다.

    “뭐가요?”

    “오라버니의 태도가.”

    사쿠라는 수백 년을 살아온 수도자였기에 준혁의 무덤덤한 태도가 이해되었다. 마음속으로는 격정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평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게 수도자의 삶의 태도였으니까.

    물론 그녀는 그걸 잘하지 못했기에 전부 때려 부수고 다닌 경험이 많았지만.

    “조금 섭섭하긴 해요···. 그런데 사실 저도 실감이 안 나서 괜찮아요.”

    “무슨 말일까?”

    “오빠를 70년 만에 보는 거라고 하지만···. 저한텐 어제 봤던 오빠를 오늘 본 것 같은 느낌인걸요.”

    “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 빙술로 갇혀있던 최나연에겐 모든 일이 단 한 순간에 불과했으니, 준혁의 태도가 크게 와닿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

    사쿠라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에겐 당연한 일인데. 이상하게 느껴지다니. 아! 아! 나도 어느새 편향적인 사고에 물들어 있었어.’

    수도계에 들어선 순간부터. 특히나 고위 수사가 되고 나서는 일반인들과는 만날 일 자체가 없었다.

    그랬기에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최나연과 얘길 나누다 보니 사쿠라는 많은 걸 깨닫고 있었다.

    사고하는 체계가 완전히 다르다 보니, 오래전 잊고 있었던 것들을 떠올려 보는 계기가 되었다.

    ‘최 수사에게 고맙다고 해야겠는걸. 이 아이를 가르치다 보면 나도 배우는 게 많겠어.’

    그때 그녀의 상념을 깨고 최나연이 입을 열었다.

    “다만···. 오빠 말투가···.”

    “말투가 왜? 너무 차가워?”

    “노인 같아서 적응이 안 돼요.”

    “......”

    준혁의 평소 말 습관을 떠올려 본 사쿠라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말투도 돌아보았다.

    그때 최나연이 궁금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언니는 몇 살이에요?”

    “으응···? 그게···. 조금.”

    “아 맞다. 미안해요. 여자의 나이는 묻는 게 아닌데. 헤”

    입술을 삐쭉 내밀며 어설프게 웃는 최나연을 보며 사쿠라도 마주 웃어 주었다.

    ‘최 수사랑은 성격이 많이 다르네.’

    +++

    준혁은 복귀하자마자 다시 성인봉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했다.

    무언가 큰 소란이 일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사람들의 지위나 자원 보급 같은 문제도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예전과 똑같이 돌아갔다.

    다만 두드러지는 변화가 있었는데, 청명은 예전보다 더욱더 바빠졌고, 사쿠라 에겐 처음 보는 연기기 제자가 생겼다는 것.

    그리고 독도의 영석 광맥을 관리하던 가심악은 축기기 수사들을 데리고, 준혁이 머무는 성인봉에 수사들이 수련할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특이하게 성인봉에 마련된 거처는 각 단계를 나눈 것처럼 층이 명확하게 구분되었는데, 정상에 머무는 준혁의 거처 바로 밑으로 동서남북의 네 방향의 거처가 뚫려있었고, 그 밑으로 여덟 방향의 거처가. 그 밑으로는 다시 열여섯 방향의 거처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성인봉의 둘레가 커지는 만큼 열여섯 밑으로는 서른둘, 그리고 가장 아랫부분엔 육십사 방향으로 거처가 마련되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준혁이 신임하거나 혹은 마선문 내 지위에 높을수록 위쪽에 거처를 배정받는 것이 아니냐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준혁이 가타부타 말이 없었으니, 진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영석 광맥에서 채집되는 엄청난 양의 영석이 전부 준혁이 머무는 거처 바로 옆으로 옮겨졌다는 것.

    영석이 수련에 도움이 된다고는 하나, 그토록 많은 양을 곁에 둘 필요는 없었기에, 준혁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재산 축적을 시작한 것 아니냐는 말도 아랫사람들 입에선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만 그 누구도 그것을 표면 위로 올려 거론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화령과 사쿠라의 두 제자는 일본을 계속해서 오가며 준혁의 거처로 영천수를 옮겼다.

    준혁이 성인봉 정상에 영천수로 이루어진 연못이라도 만드는 것 아니냐는 소문도 함께 돌았다.

    +++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 준혁이 울릉도에 복귀한 지도 2년이 다 돼가는 시점.

    울릉도 분지의 건물 앞.

    그곳엔 수많은 수사가 건물 앞 단상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장 중심엔 사쿠라를 중심으로 그녀의 제자들과 여수사 몇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고,

    그 옆엔 가심악이 많은 수의 축기기, 연기기 수사들을 대표하고 서 있었다.

    한쪽엔 나한과 나설헌도 통유대문의 문인들 전원과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복장은 예전과 다르게 다른 이들과 비슷한 차림이었다.

    그들을 제외하고도 처음 보는 무리들이 꽤 많이 보였다. 전부 마선문이 개파 하기 전, 준혁의 그늘로 들어선 자들이었다.

    단상 위엔 고귀함을 돋보여주듯 찬연한 연푸른 법복을 입은 준혁이 좌중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다들 개파식을 준비하느라 수고가 많았다.”

    준혁의 눈길이 닿을 때마다, 수사들은 움찔했다.

    “개파식에 앞서 그동안 수고한 너희들의 공로를 치하하려 한다.”

    좌중이 조용해지자, 준혁이 말을 이었다.

    “우선 가심악.”

    “예. 도주.”

    가심악이 부름에 앞으로 나서자, 준혁은 공간대를 스치더니 자기병 세 개를 날려 보냈다.

    자기병을 받아든 가심악이 의문을 드러낼 때쯤 준혁의 입이 열렸다.

    “수행이 오르지 못해 불만이 많았었지?”

    모두가 주목하는 자리에서 2년 전 일을 꺼내 들자, 가심악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땐 제가 마음이 격해져서 실수를!”

    “탓하려는 게 아니다. 누구나 대가 없는 노동을 강요당한다면 그리 될 수 있는 거지. 오히려 내가 맡긴 일들을 잘 해냈기에 상을 주려 하는 것이다.”

    “상이라 하심은···.”

    예전과 다르게 반 하대가 아닌, 완전한 하대를 하고 있음에도 가심악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준혁의 말에 귀 기울였다.

    모든 이의 귀가 준혁의 입으로 몰릴 때.

    “네 손에 든 것은 결단기 후기까지 원활하게 올려준 단약이다. 그 정도면 그동안의 노고에 충분하겠지.”

    결단기 후기라는 말에 가심악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준혁이 건넨 것은 2년간 두문불출하며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화목단. 그중에서 결단기 수행을 올리는데 적합한 4품 화목단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도주!!”

    가심악의 반응에 피식 웃은 준혁이 별것 아니란 듯 말을 꺼냈다.

    “후기 끝자락에 오르면 원영기를 넘겨줄 방법을 알려줄 테니, 열심히 수련하도록.”

    “펴, 평생 충성하겠나이다!!”

    고개를 돌린 준혁은 가심악 옆에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사쿠라를 쳐다본 후, 시선을 살짝 들어 그녀의 뒤, 그녀의 제자를 슬쩍 바라보다 다시 사쿠라에게 시선을 옮겼다.

    “사쿠라.”

    “네. 말씀하시어요.”

    어느새 준혁의 입가에 뜻 모를 미소가 번졌다.

    “그대의 노고에 특별한 선물을 주도록 하지.”

    사쿠라가 기대어린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오늘 밤, 뒤에 서 있는 제자와 내 처소로 들게.”

    사쿠라 뒤엔 그녀의 의자매이자 제자인 사유리가 서 있었다.

    예전과 다르게 자신에겐 항상 존대하던 준혁의 말투가 바뀌어있었지만,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할 만큼 사쿠라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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