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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124화 (124/408)
  • < 124화. 원영 응결식 (1) >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곳에서 갑작스레 목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청명이었다.

    “대인 어르신!!”

    모두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 사이, 청명은 한달음에 다가가더니 허리를 몇 번이나 접었다 폈다 하며 인사했다.

    “그동안 어딜 가신 것입니까요! 제가 얼마나!”

    마지막으로 허리를 땅에 닿을 만큼 수그린 청명이 허리를 펴지 못하고 울먹거렸다.

    “대인이면 대인이고, 어르신이면 어르신이지, 그 해괴한 명칭은 무엇이냐?”

    준혁의 농 때문이었을까?

    청명은 허리를 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기쁨 때문인지 원망 때문인지, 두 눈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신걸 환영합니다요.”

    애처럼 눈물을 흘리는 청명을 보며 준혁은 피식 웃어 보이고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사쿠라의 말대로 청명은 지금 수행으로 보자면 결단기에 오를 시기를 놓친 것이나 마찬가지, 남들이 알아주지도 못할 잡일만 하다 남은 생을 마감할지도 몰랐기에, 감정이 격해졌던 것이었다.

    준혁은 그런 청명이 안정을 취하게 어깨를 두드리며 기운을 살짝 불어넣어 준 후, 가장 상석에 자리한 사쿠라 옆으로 이동했다.

    “최 수사···. 오셨어요···.”

    조금 전까지 살쾡이처럼 욕설을 내뱉던 걸 준혁이 봤다고 생각하자 부끄러운 과거를 들킨 양 사쿠라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준혁은 그런 사쿠라에게 살짝 미소 지어준 후 상석에 가 앉았다.

    준혁이 바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유. 그건 바로 수십 년간 자리를 비운 사이 사람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속마음을 엿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귀의한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힘을 바탕으로 수그리고 들어오는 것.

    그런 그들이 힘의 지배에서 벗어나면 당연히 마음이 변할 것이었고, 준혁은 그런 그들 중에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자가 누군지 알고 싶었다.

    이미 설악산에서 도율이 사라진 후 변해버린 그의 제자들을 접했었기에 더욱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제이엘과 헤어진 후에도 곧장 나타나지 않고, 섬 곳곳을 돌며 일반인들 그리고 하위급 수사들과 말을 나누며 소문을 접했다.

    물론 동생의 치료가 끝나진 않았지만, 안전하게 봉인된 상태라는 걸 확인했기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다들 힘들었을 텐데 수고가 많았습니다.”

    준혁이 상석에 앉으며 무형의 기운을 발산하자, 그것이 해를 입히지 않을 것을 알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움츠러들었다.

    특히 불만을 직접적으로 내뱉었던 가심악은 준혁이 나타난 이후로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눈만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특히 가 호법.”

    준혁이 자신을 부르자 가심악이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평소 같았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지만, 앞에서 욕이나 다름없는 불만을 토로한 데다가 무형의 기운에 억눌려 있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나온 행동.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도주! 제가 너무···.”

    하지만 가심악이 변명을 꺼내기도 전. 준혁이 말을 끊었다.

    “아닙니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곳에 오기 전 가호법이 해온 일들을 충분히 둘러보았습니다. 제가 부탁한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해놓으셨더군요. 광산의 광부들도 칭찬이 자자하더이다.”

    “송구합니다···. 도주···.”

    사쿠라와 청명을 제외하곤 모두가 마음에 짐이 생긴 듯 무거운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자, 준혁은 피식 웃고는 나설헌 곁에 서 있는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통유대문의 나한 문주?”

    준혁의 부름에 근사하게 생긴 노인이 살짝 몸을 숙였다.

    “처음 뵙습니다. 부족하지만 통유대문을 이끌고 있는 나한이라 합니다.”

    나한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여준 준혁은 몇 마디 인사치레 말을 건네고는 나설헌과 화령, 그리고 청명을 따라왔던 축기기 수사들과 새롭게 편입한 이들까지 수고를 치하해 주었다.

    “화령, 결단기에 오른 걸 축하한다.”

    준혁의 말에 화령이 움찔하더니 허리를 깊게 숙였다.

    “감사합니다···. 도주.”

    그녀의 마음은 편하질 못했다. 준혁이 자리를 비운 후, 그가 내린 명을 10여 년 정도 수행하다가 결단기에 오를 단초를 잡고는 모든 일을 청명에게 떠넘기고 거처에 틀어박혔기 때문.

    물론 처음엔 빠르게 결단기에 오르고 난 뒤, 다시 복귀할 예정이었지만, 그녀가 결단기에 오른 건 채 3년이 넘지 않고 있었다.

    즉, 청명이 수행을 전혀 올리지 못한 것에 크게 기여한 셈.

    준혁은 한참이나 속죄하듯 허리를 숙이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다, 청명에게 살짝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는 흐뭇해하며 기꺼움을 느꼈다.

    청명은 그녀에게 아무런 악감정도 없는지, 그저 기쁜 얼굴로 준혁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수행은 멈췄어도, 내면은 성장했구나. 그래 그것이면 족한 거지.’

    예전 도적질을 일삼던 청명이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떠올려본 준혁은 어느새 살포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미소를 띠던 것도 아주 잠시.

    준혁의 표정이 무표정하게 바뀌었다.

    “청명.”

    “예! 대인!”

    “3년 뒤 원영 응결식을 치를 것이다. 그에 관한 모든 일은 너에게 일임할 테니, 섬에 발을 붙이고 있는자 중 그 누구라도 필요한 이가 있다면 데려가 쓰거라.”

    원영 응결식이란 말에 좌중에 놀란 표정이 나타났다.

    오래전 그들이 권유했을 때 거부했던 준혁이 응결식을 치른다는 말은 대외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겠다는 선포나 마찬가지.

    “그리고 사쿠라.”

    “네. 말씀하시어요.”

    “2년 뒤. 개파를 할 것이오. 아직은 문(門)이라 할만한 것들을 전부 갖추지는 못했으나, 필요한 이들은 외부에서 받아들일 것이니 그대가 맡아 진행해 주시오.”

    개파란 말에 좌중에 또 한 번 술렁임이 생겨났다.

    그동안 부도주 휘하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던 울릉도. 심지어 부도주인 사쿠라가 일선에 나서는 일은 없었기에 세력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상태였다.

    하지만 원영기에 오른 준혁이 개파를 한다면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문파가 되는 것은 기정사실.

    나아가 전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세력이 된다는 말과 진배없었다.

    그리고 그런 세력의 중추가 되는 건, 권력의 중심에 선다는 말이었고, 그것은 수행 상승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개파···. 라. 혹 생각하신 문파 명이 있으신가요? 다른 이들을 불러 모으려면 이름은 있어야 할 듯한데···.”

    사쿠라가 세상 조심스럽게 나근나근하게 물었고, 준혁은 고민 없이 대답했다.

    “마선문(魔仙門).”

    “마선···.”

    준혁이 말한 이름을 되뇌던 사쿠라는 살짝 인상을 구기다, 빠르게 신색을 되찾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魔)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이 별로라 생각했던 것.

    준혁은 그런 그녀의 변화를 눈치챘지만, 모른 척 시선을 옮기며 나한을 쳐다보았다.

    “나한 문주.”

    “예. 말씀하시지요.”

    “이곳에 오기 전 섬을 둘러보니, 이미 통유대문의 문인들이 섬에서 활동을 하고 있더군요. 저와 함께하고 싶으신 겁니까?”

    연단사(鍊丹士)나 연기사(鍊器士)처럼 수도자들이 원하는 물품을 제작하는 사람들은 그 능력만큼이나 스스로를 보호할 방법을 절실히 원했다.

    이미 손꼽히는 연단사이자 그것들을 유통해 어마어마한 재산을 축적한 나한은 그 정도가 더 심한 것.

    지금이야 여러 세력이 눈독 들이며 서로를 견제하는 형국이었지만, 언제 마수를 뻗을지는 알 수 없는 일.

    “물론입니다. 도주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울릉도로 문파를 이전하고 싶습니다.”

    나한의 말에 준혁이 가볍게 턱을 매만지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전부 이곳으로 옮기고 제 그늘에서 쉬도록 허락해 주겠습니다.”

    준혁의 말에 나한이 앞으로 성큼 나서며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도주!”

    하지만 준혁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단! 통유대문이란 이름을 버리고, 마선문의 연단각(鍊丹閣) 소속이 되겠다면!.”

    “그, 그건···.”

    “아니라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1주일의 시간을 줄 테니 문인들을 데리고 섬을 떠나십시오. 한 명도 빠짐없이.”

    나한이 뭐라 말을 덧붙이려 하자, 준혁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러자 나한의 몸이 무형의 기운에 밀려, 앞으로 나서기 전 처음의 자리로 이동돼 버렸다.

    그 모습에 가심악과 사쿠라를 비롯한 결단기 수사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고, 나한은 경악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눈동자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준혁을 원영기 초기라 여기고 있었기에 나온 반응.

    준혁은 그런 그들의 반응엔 관심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나머지는 그동안 해오던 대로 일을 맡아주면 될 테고, 사쿠라. 청명.”

    “넵!”

    “네. 듣고 있어요.”

    두 사람에게 눈짓으로 성인봉 방향 쪽을 가리키며 준혁은 건물을 빠져나가 버렸다.

    잠시 후 사쿠라와 청명이 그를 따라 사라지자, 여기저기서 한숨과 한탄이 터져 나왔다.

    그중 유독 심각한 표정을 한 나한을 향해, 손녀인 나설헌이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말을 건넸다.

    “어쩌실 거예요? 할아버지가 원하던 게 아니잖아요.”

    나한이 바라던 것? 그건 자신이 만들 고급 단약의 일부를 준혁에게 바치고, 문파의 안전을 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준혁은 이미 나한이 만들 수 있는 단약 수준은 아득히 넘는 연단술을 보유했다는 사실을 이들이 모르는 게 문제일 뿐.

    +++

    건물을 나선 준혁이 성인봉 정상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제이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준혁의 뒤를 따르던 사쿠라와 청명이 그녀에게 인사했다.

    “선배님을 뵙습니다.”

    같은 섬에 머물고 있었지만, 서로 왕래는 거의 없었던 탓에 어색함이 맴돌았다.

    제이엘은 사쿠라와 청명을 슬쩍 바라보다, 준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최 수사. 이제 하려는 건가요?”

    목적어가 없는 말임에도 준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제이엘이 공간대에서 하얀 자기병 하나를 꺼내 건넸다.

    그토록 오랫동안 바라던 순간이 다가오자, 준혁은 과거를 회상하는 듯 한참 동안 하얀 자기병을 바라만 보았다.

    잠시 후.

    생각에 빠져있던 준혁이 수결을 맺으며 영기파동을 퍼트리자, 성인봉 정상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구르릉-

    진동은 한동안 지속됐고, 진동이 끝나자 준혁 앞엔 살을 엘듯한 냉기를 품은 옥관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제이엘과 사쿠라 등은 이미 냉기를 피해 멀찌감치 물러난 상태.

    아련한 눈빛을 한 준혁이 옥관에 손을 가져가자, 뚜껑이 열리며 피골이 상접한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연아···.”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살짝 벌린 채로 완벽하게 냉동된 동생의 모습.

    준혁은 그런 동생의 이마에 손가락을 가져가 콕 찍은 후, 제이엘이 건넨 자기병에서 단약을 꺼내 그녀의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수결을 맺자.

    쩌저적-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최나연의 얼굴에 핏기가 돌기 시작하면서 주위 냉기들이 준혁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모든 냉기가 준혁에게 돌아가고, 반대로 준혁이 내뿜은 영력이 최나연에게 흡수되길 수십 분.

    스르륵-

    마침내 수십 년간 얼려있었던 최나연이 눈을 떴다.

    그리고는 감격해하는 준혁을 보며 처연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입술을 달싹였다.

    “오빠···.”

    +++

    얼음 봉인에서 풀려난 최나연은 눈앞에서 어색한 미소로 바라보는 준혁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어디야?”

    조금 떨어진 곳엔 강렬하게 생긴 노랑머리 여인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 옆엔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조금 더 떨어진 곳엔 처음 보는 중년 아저씨도 있었는데, 분명 얼음에 갇히기 전 보았던 빙제소의 진법가는 아닌 게 분명했다.

    준혁은 얼떨떨해하는 동생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삐쩍 말라 보기 흉할 정도로 안쓰러운 동생의 머리를.

    “그동안 고생했다. 앞으론 아플 일 따윈 없을 것이야.”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준혁의 모습에 최나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지 않아도 큰 두 눈이 마른 얼굴과 대비돼 왕눈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였다.

    “설마···. 성공한 거야? 오빠가 약초를 구했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어보는 동생을 향해 준혁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이제 다 끝났다.”

    “말도 안 돼···.”

    준혁이 수긍하자, 최나연이 바로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어리벙벙해라 했다.

    빙제소에 들어가기 전, 그녀라고 구색초를 구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몰랐을까?

    최나연은 치료될 수 있다는 희망이 아니라, 준혁이 조금이라도 편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빙제소로 갔던 것이었다.

    그리고 아주 짧은 꿈을 꾼 것 같았을 뿐인데, 다시 준혁을 만나게 되자, 모든 게 실패했다는 예상을 했었다.

    구색초를 구하기는커녕, 빙제소에 영석을 지불하지도 못한 상황이라 여겼다.

    더군다나 준혁의 모습은 빙제소로 들어가기 직전과 동일.

    한 살도 늙지 않은 것 같은 모습이 그녀의 예상에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랬기에 지금 준혁의 입에서 나온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원 녀석. 이곳이 빙제소가 아니라 놀랐느냐? 걱정말거라. 그곳보다 안전하고 좋은 곳이니. 아마 마음에 들 것이다.”

    따뜻함이 가득한 준혁의 말에 최나연은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얼마나 지난 거야? 시간이?”

    “대략 70여 년 조금 안 되게 지났구나···. 너무 늦었지? 미안하구나.”

    70년이란 말에 최나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을 더듬었다.

    “치, 칠십?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말을 멈춘 그녀는 침을 꼴깍 삼키더니 겨우 입술을 열었다.

    “어떻게 오빠 모습은 예전 그대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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